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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팔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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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中大姓有八族(국중대성유팔족)
나라 안에 큰 성씨 여덟 가문이 있다.
수서》 〈동이전〉 백제
1. 개요2. 한계3. 종류
3.1. 진씨(眞氏)/진모씨(眞牟氏)3.2. 해씨(解氏)3.3. 목씨(木氏)/목리씨(木刕氏)3.4. 사씨(沙氏)/사택씨(沙宅氏)3.5. 연씨(燕氏)/연비씨(燕比氏)3.6. 백씨(苩氏)3.7. 국씨(國氏)
4. 기타 귀족 성씨
4.1. 방계 왕족?4.2. 외래 성씨
5. 백제 멸망 이후6. 관련 문서

1. 개요

사서 등장하는 성씨
<colbgcolor=#dcdcdc,#222> 《수서 사씨(沙氏) 연씨(燕氏) 해씨(解氏) 정씨(貞氏) 국씨(國氏) 목리씨(木刕氏) 백씨(苩氏)
신당서
통전 진씨(眞氏)
북사 묘씨(苗氏)[#]
《한원(翰苑)》 - 수씨(首氏)[#]

백제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7개[3]의 귀족 가문을 나타내는 용어로, 대성팔족이라는 단어고유명사가 아니라 《수서》에서 비롯된 말이다.

삼국사기》와의 교차 검증 결과 《통전》의 기록이 가장 신뢰받는다. 한국 사서에는 일곱 개의 귀족 성씨가 등장하는데, 국씨(國氏), 목씨(木氏), 백씨(苩氏), 사씨(沙氏), 연씨(燕氏), 진씨(眞氏), 해씨(解氏)다.

중국 사서에만 등장하는 성씨들 중 정씨(貞氏)는 진씨(眞氏)의 오기로[4], 묘씨(苗氏)와 수씨(首氏)는 백씨(苩氏)의 오기로 여겨진다. 한편 협씨(劦氏)는 한국과 일본의 기록에서 목협씨(木劦氏)라는 형태로 등장하긴 하나 단독으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성팔족을 비롯해 백제에서는 성씨가 공식적으로는 두 글자지만 1글자로 줄여 쓰는 관습이 흔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중국 기록에는 대성팔족이 모두 단성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한국과 일본 사서나 금석문에서는 진씨(眞氏)는 진모씨(眞牟氏), 사씨(沙氏)는 사택씨(沙宅氏), 목씨(木氏)는 목리씨(木刕氏) 등 복성으로 등장하기도 하므로, 일부 성씨가 축약 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백제 왕족인 부여씨도 복성이지만 중국 사서에서는 주로 단성인 여(餘)씨로 축약 표기되었다.[5] 중국이 멋대로 줄여쓴 게 아니라 백제가 중국에 보내는 문서에서부터 이미 축약 표기가 사용됨이 확인되는데, 중국 측과 교류할 때는 이처럼 축약 표기를 하는 것이 관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양상은 일본 측 기록에서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부여의 국성으로 추정되는 해씨(解氏)는 온조왕위례성에 십제를 세웠을 때부터 동행했을 만큼 상대적으로 오래된 귀족이며, 한강 유역 일대를 기반으로 성장한 세력이다. 진씨(眞氏) 또한 웅진성 천도 후의 신진 세력보다는 연원이 깊은 구 귀족 세력이며, 진씨(眞氏)와 해씨(解氏)를 '남래(南來) 귀족'으로 통칭하기도 한다. 한성백제 시절에는 이들의 권세가 압도적으로 막강했으나, 웅진백제 시기에 접어들며 다른 대성팔족 수준으로 권력이 약화되었다. 신라에서 박씨·석씨·김씨가 서라벌 6부 출신(훗날의 6두품)이나 진한 소국 출신(훗날의 5두품)[6]에 비해 상당한 대우를 받은 것과 유사하다.

반면 신진 호족들은 마한계 세력과 연관이 깊다. 목씨(木氏)는 목지국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4세기 중후반부터 활약하게 된다. 백제가 고이왕 때 목지국 일대를 평정했기에 마한 목지국과의 연관성을 추정해볼 수 있는 것이다. 사씨(沙氏), 연씨(燕氏), 백씨(苩氏)는 백제가 475년 웅진성으로 천도하면서 상대적으로 부흥했던 세력에 속한다.

특이한 점은 대성팔족 중 고고학적으로 3세기 중반 무렵 하남위례성에서 한성백제가 건국될 당시 고구려계와 함께 양대 지배 세력이 된 토돈분구묘[7] 출신으로 비정할 만한 성씨가 없다는 점이다. 고구려계인 부여씨는 말할 것도 없고, 해씨는 졸본부여계, 목리씨·사택씨·연비씨·백씨는 마한계로 비정되며 진모씨도 하북위례성 당시 합류한 것으로 여겨진다. 건국 과정에서 강력한 영향을 미쳐 백제 지배층 특유의 백제식 적석총을 이루는 데까지 영향을 미친 토돈분구묘계 세력의 자리가 없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근초고왕 이전까지 왕후에 대한 기록이 없다시피 한 점을 고려하면 한성백제 초기에는 토돈분구묘제 출신도 왕비를 꾸준히 배출한 세력으로서 입지가 있었지만, 근초고왕 일계로 왕위 계승이 일원화되는 과정에서 정계에서 밀려났고, 그로 인해 대성팔족에 대한 기록이 남은 백제 후기에는 명단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 건국 설화 중 온조 시조설에서 비류계 세력을 해안 지역과 엮으며 폄하하는 이유도 고이왕계가 초고왕계에 비해 토돈분구묘계 세력과 보다 밀착해 있었기에, 초고왕계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건국 설화에 토돈분구묘계에 관한 비하성 내러티브를 삽입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2. 한계

대성팔족은 백제 역사 내내 외척이 되거나 고위직을 차지함으로써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이들이 국왕과 끊임없이 대립한 것은 백제 정계를 불안정하게 한 주요 원인이었다. 한성백제 시절부터 사비백제 시절까지 왕을 시해하는 등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켜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으며, 7세기 중엽 의자왕의 왕권 강화에 대한 반발은 지배층의 분열을 촉발하여 쇠퇴를 가속화하기도 했다.

백제에서는 왕권을 확립시키고자 부여씨 중심의 친정 체제를 꾸리거나 호국불교 사상을 내세우는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했지만, 외적인 이유로 세 번이나 천도를 거치며 기반이 불안정했기 때문에 후기에도 혜왕~법왕 재위기와 같은 혼란상이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백제만 유달리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불안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구려의 경우 외부 혈족과의 혼인이 잦았음에도 귀족 세력에 의한 갈등이 두드러지는 일은 5부 체제가 운영되던 초기와 전성기가 지난 6세기 중반 이후에만 국한되었다. 그러나 고구려에는 아버지의 관직을 장남이 승습하는 좋지 못한 관습이 있었기에[8] 귀족 집단이 관료 체제 내부에서 독자적인 패권을 구축하기 쉬운 환경이었고, 그렇게 형성된 귀족 연립 집단에게 왕권 자체가 크게 위축된 나머지 끝내는 연씨 가문의 집권을 초래하고 말았다.

한편 신라에도 6부 및 비왕족 진골[9]과 같은 귀족 세력이 있었으며, 진흥왕이 진골을 왕궁 근위대 등용으로부터 배제하거나 무열왕이 집권 후 진골 상당수를 숙청한 사실로 드러나듯이 왕실로부터 견제를 받기도 했다. 신라는 정복 사업이 비교적 수월한 편이었고 하대 이전까지는 이들을 그럭저럭 제어하는 데 성공했기에 백제보다 문제가 적은 편이었으나, 지방 세력 및 하급 귀족에 대한 암묵적 압박이 백제에 비해 강했던 것은 사실이다.[10]

3. 종류

3.1. 진씨(眞氏)/진모씨(眞牟氏)

대성팔족 중에서도 해씨와 더불어 가장 유서 깊은 세력이었다. 서기 37년 우보에 임명되었다는 북부(北部)의 진회(眞會)와 213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말갈[11] 석문성(石門城)을 공격한 북부의 진과(眞果)가 등장하는 점에서 진씨가 백제 초기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북부'라고 명시되는데, 하남위례성을 기준으로 북부는 한강 이북이다. 즉 진씨의 본거지는 하남위례성의 기준에서 북쪽인 한강 이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한강 이북의 경기도 및 황해도 일대가 본거지였다고 비정할 수 있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2세기 후반~3세기 초반 압록강 이남 고구려계 세력이 임진강 유역으로 남하했다가 3세기 중반 한강 이남으로 다시 남하해서, 3세기 초반에 고조선인, 옥저인을 피지배층으로 아울렀던 토돈분구묘제 세력과 연합하여 한성백제를 건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진씨의 근거지가 한강 이북인 점과 2대 다루왕 때부터 진씨의 이름이 나타나는 점을 고려하면 임진강 하북위례성 당시에 합류한 한사군 예맥(고조선, 옥저, 동예 등)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12] 이와 관련하여 낙랑군 유적인 정백동 19호분에서 출토된 칠기에 '진씨뢰(眞氏牢)'라는 글귀가 적혀 있는 점이 참고할 만하다. #

8대 고이왕 대에는 진충(眞忠), 진물(眞勿) 등이 당시 우보나 좌장(左將)의 고위직에 오르면서 세력의 기반을 마련했다. 13대 근초고왕이 진씨를 왕비족으로 삼으면서 본격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지만, 17대 아신왕 대에 좌장 진무(眞武)를 비롯한 집권층이 광개토대왕에게 참패하면서 잠깐 꺾인다. 부여설례의 반란 이후 한성백제에서 모습을 감춘 것을 보면 이때 부여설례를 도왔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웅진백제 시기인 477년 병관좌평 해구(解仇)의 반란으로 문주왕이 시해되자 덕솔이었던 진로(眞老)가 군사 500명을 이끌고 대두성에 있던 해구를 참살해 진로는 병관좌평이 되었고, 진씨의 권세를 되찾게 되었다. 하지만 24대 동성왕은 금강의 사씨, 연씨, 백씨를 끌어들여 진씨를 견제했는데, 497년 진로의 후임 병관좌평으로 신진세력인 연씨 출신의 연돌을 임명한 사건은 진씨의 권세에 한계가 있었다는 반증이 된다.
백제가 전부(前部)의 덕솔(德率) 진모선문(眞慕宣文)과 나솔(奈率) 기마(奇麻) 등을 보내어 구원병을 청했다. 그리고 하부(下部)의 동성자언(東城子言)을 보내어 덕솔 문휴마나(汶休麻那)를 교대하게 했다.
일본서기긴메이 덴노 8년(547년) 4월
위 기록은 26대 성왕고구려를 공격하고자 왜국에 병력을 요청하는 장면이다. 여기에 나오는 진모선문은 6년 전인 541년 7월에 안라국에 사신으로 파견된 나솔 선문(宣文)과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 한편 《일본서기》 〈흠명기〉 4년조에는 전부 사람으로 나솔 관등의 진모귀문(眞牟貴文)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6세기 사비백제 시기에도 진씨 가문은 중앙 정계에서의 지위를 유지하며 대외 교섭에도 관여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1960년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에서 발굴되어 국보 제108호로 지정된 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계유년 4월 15일에 향도(香徒)가 아미타불과 여러 불보살상을 만들고 돌에 기록하니, 이는 국왕과 대신 및 칠세 부모, 법계의 중생을 위하여 삼가 만든 것이다. 향도의 이름은 미차(彌次) 내말, 진모씨(眞牟氏) 대사 (중략) 등 250명이다.
이 불상이 만들어진 계유년은 673년으로 비정되며, 불상이 발굴된 충청남도 연기 지방이 한때 백제부흥군의 활동 지역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옛 백제 귀족 진모씨가 망국의 한을 달래고자 사람들을 모아 만든 것으로 보인다.[13] 이 금석문과 상술한 일본서기의 기록은 진씨가 본래 진모씨의 축약 표기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백제 멸망 이후 통일신라에서 진씨 세력의 명맥이 어느 정도 이어졌다는 흔적은 위의 자료뿐 아니라 《삼국유사》에 실린 승려 진표(眞表, 718~?)의 일대기에도 남아 있다. 진표는 옛 백제 땅인 완산주 벽골군 도나산현(都那山縣) 대정리(大井里)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이라고 전해진다. 여기서 내말은 신라 관등 나마의 이표기이므로, 진표의 아버지는 백제 귀족 진씨의 후손으로서 신라에서 관직 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진표 본인의 속성은 정씨(井氏)라 기록되었는데, 나중에 고향의 이름에서 따와 개성(改性)한 것일 수 있다.[14]

한국의 서산 진씨(西山 眞氏)가 대성팔족 진씨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현재 등록된 진씨의 숫자는 1,600명 정도 되어 굉장히 희귀한 성씨이다. 진씨 외에도 능성 구씨 또한 백제계 진씨의 후예로서 남북국시대에 개성(改性)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향이 과거 백제 영토에 위치하고, 시조인 구존유(具存裕)[15] 이전에 존재한 사실이 확인되는 구진(具鎭)[16], 구도(具道)[17] 등 인물들이 옛 백제 지역에서 활동했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이다.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진씨(眞氏)와 구씨(具氏)의 획 간 유사성으로[18], 이는 왕씨(王氏)와 옥씨(玉氏), 대성팔족의 목씨(木氏)와 임씨(林氏), 대성팔족의 백씨(苩氏)와 백씨(白氏)가 서로 연원이 같거나 성씨가 서로 유사하다는 점과 같은 맥락이다.

이외에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외조카 진호(眞虎)를 진씨 가문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상술한 남북국시대 진씨의 흔적이 남은 지역(세종·김제)과 후손으로 비정되는 성씨들의 본관(서산·화순)을 고려하면, 웅진 천도 이후 진씨 세력의 거주지는 호서와 호남 일대에 널리 분포했던 것으로 보인다.[19]

경기도 하남시 감일동 고분군에 진씨 가문의 묘역이 위치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
  • 진회(眞會): 2대 다루왕 대의 인물이다. 진씨(眞氏) 가문의 인물 중 기록상 보이는 첫 번째 인물로, 북부 출신이며 37년 10월에 우보로 임명되었다.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2세기 후반~3세기 초반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 진과(眞果): 5대 초고왕 대의 인물로, 북부 출신이다. 214년 9월 초고왕의 명령을 받아 군사 1,000명을 이끌고 위말갈의 석문성을 습격해 빼앗았다.
  • 진충(眞忠): 8대 고이왕 대의 인물이다. 240년 4월 좌장에 임명되어 중앙 및 지방의 병마의 일을 맡았다. 244년 8월 조위관구검고구려를 침공한 틈을 타 고이왕의 명을 받고 낙랑군의 변경을 급습하여 사람들을 사로잡았으나, 이에 낙랑태수 유무가 격노했다는 소식을 들은 고이왕은 후환이 두려워 다시 돌려주었다고 한다. 247년 2월 우보로 승진했다.
  • 진물(眞勿): 고이왕 대의 인물이다. 247년 2월 진충의 뒤를 이어 좌장에 임명되었다.
  • 진가(眞可): 고이왕 대의 인물이다. 261년 2월 내두좌평에 임명되었다.
  • 진의(眞義): 11대 비류왕 대의 인물이다. 333년 7월에 내신좌평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한때 비류왕과 소원한 관계였던 진씨 가문이 다시 정계에 뛰어들었음을 의미한다.
  • 진정(眞淨): 13대 근초고왕 대의 인물이다. 외척 출신으로 347년 1월 조정좌평에 임명되었다. 성품이 어질지 못하고 사나우며 까다로워서 폭정을 일삼아 백성들에게 존경받지 못했다고 한다.
  • 진고도(眞高道): 14대 근구수왕의 장인이다. 376년 내신좌평에 임명되면서 왕으로부터 정사를 위임받았다.
  • 진아이(眞阿爾): 근구수왕의 왕비이자 침류왕진사왕의 모후로, 진고도의 딸이다.
  • 진가모(眞嘉謨): 16대 진사왕 대의 인물이다. 387년 1월 달솔에 임명되었고, 390년 9월 고구려를 공격하여, 도압성(都押城)을 함락시키고 200명을 포획한 공으로 병관좌평에 올랐다.
  • 진무(眞武): 17대 아신왕 대의 인물이다. 아신왕의 장인이자 심복으로, 성품이 침착하고 용기가 있으면서도 뛰어난 지략까지 갖춰 당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393년 1월 좌장에 임명되어 군사를 통솔했고, 동년 8월에는 군사 10,000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빼앗긴 관미성과 석현성(石峴城)을 탈환하려 했으나 방어를 뚫지 못한 채 군량 보급 문제로 퇴각했다. 395년 8월에도 패수 가에서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7,000명의 고구려군과 맞붙었지만 패배했다. 398년 2월 병관좌평으로 승진했다.
  • 진모진(眞毛津): 아신왕 대의 인물로, 옷의 바느질을 담당하는 여공이었다. 403년 2월 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왜국으로 건너가 쿠메(來目) 지역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바느질에 종사하는 기술자 집단인 의봉부(衣縫部; 키누누이베)를 관할하는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 진남(眞男): 23대 삼근왕 대의 인물로, 관등은 좌평이다. 478년 봄, 일찍이 문주왕을 시해했던 병관좌평 해구(解仇)와 은솔 연신(燕信) 등이 대두성(大豆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왕의 명령을 받들어 2,000명의 군사로 진압하려고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 진로(眞老): 삼근왕, 24대 동성왕 대의 인물이다. 관등이 덕솔이던 478년 봄, 정예병 500명을 거느리고 병관좌평 해구와 은솔 연신의 반란을 진압했다. 이내 해구를 사살했으며, 연신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웅진 저잣거리에서 연신의 처자식을 참수했다. 482년 1월에는 병관좌평이 되어 중앙과 지방의 군사 업무를 총괄했다. 이로 인해 진씨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497년 5월에 사망했다.
  • 진모선문(眞慕宣文): 26대 성왕 대의 인물이다. 541년 7월 신라로 간 가야 연맹의 집사를 소환하기 위해 나솔로서 안라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547년 4월에는 왜국에 파견되어 고구려를 공격할 병력 지원을 요청했으며 이듬해 1월 3일에 백제로 돌아갔다. 관등은 전부(前部) 덕솔이다.
  • 진모귀문(眞牟貴文): 성왕 대의 인물이다. 543년 9월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중국 남조와의 무역을 통해 얻은 부남의 보물과 노비 2명을 선물했다. 관등은 전부(前部) 나솔이다.
  • 진무(眞武): 아신왕 대의 진무와는 동명이인으로, 673년 4월 15일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을 발원한 백제 유민들 중 한 명이다. 통일신라에서의 관등은 대사이며, 《삼국사기》 〈직관지〉의 기록을 참고하면 본래 관등은 덕솔이었을 것이다.

3.2. 해씨(解氏)

우보 을음(乙音)이 사망하자 북부의 해루를 우보로 임명했다. 해루는 본래 부여인인데 그 도량이 넓고 식견이 깊었으며, 70세가 넘어서도 체력이 강하여 등용된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41년(서기 23년) 1월
한성백제 시절부터 진씨와 더불어 대성팔족 중에서 가장 먼저 세력을 떨친 백제의 대귀족 가문이었다. 백제 역사에서 해씨 중 가장 먼저 등장한 사람은 해루(解婁)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북부(北部) 출신이었으며 시조 온조왕 대에 우보(右輔)의 벼슬을 지냈다. 친족 세력인 족부(族父) 을음이 죽자 해루를 후임으로 내세워 재상 격의 관직인 우보를 맡긴 것은 해씨가 강성했음과 더불어 백제 건국의 주역인 온조왕과 깊은 연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목할 점은 해루가 '부여인'이라는 것인데, 해씨는 부여의 왕가였으며 70세가 넘었다는 것을 통해 백제 건국 세력 중에서도 오래된 세력이었음을 증명한다. 북부 출신이라는 기록을 고려하면 진씨와 마찬가지로 한강 이북을 근거지로 두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20] 다만 해씨의 출신은 흔히 알려진 부여보다는 고구려가 세워진 졸본부여였을 가능성이 높다. 초기 백제 지배층과 부여의 관계가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을뿐더러, 지리적으로 백제가 세워진 한강 일대는 동부여북부여 기준에서 남하하기에는 너무 서쪽이기 때문이다. 졸본부여왕 연타발의 딸인 소서노의 친정 가문 출신이라는 견해도 있다.

해씨가 집권하던 당시 백제는 고구려에 다소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해씨는 부여씨에 비해 고구려와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듯하다. 고구려 입장에서 해씨는 고구려 왕실로부터 분가된 시점이 부여씨보다 오래됐으며, 고구려 왕실과 갈등을 빚다 남하한 부여씨와 달리 앙숙 관계도 아니었으므로 비교적 편하게 친족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해루 이후 해씨 세력은 11대 비류왕 대에 해구가 병관좌평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으로 다시 등장한다. 비류왕의 이복동생 우복을 고이왕계로 추정하는 견해에 따르면 해씨가 고이왕계 세력과 보다 가까웠으나, 근초고왕 대에 들어서 초고왕계 세력이 왕위를 독점함에 따라 진씨에게 밀려 중앙 정계로부터 소외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후 17대 아신왕이 16대 진사왕으로부터 왕위를 되찾을 때 다시금 중앙 정계에 복귀한 것으로 보인다. 아신왕이 갑작스럽게 죽은 후, 왕제(王弟)들 간에 왕위 쟁탈전이 일어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왜국에 있었던 전지왕을 즉위시켜 왕비족(王妃族)으로서 권세를 떨쳤다. 웅진백제 시절 그 권세는 더더욱 커져 477년에는 병관좌평 해구(解仇)가 22대 문주왕을 시해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왕실이 진씨와 결탁하여 이를 진압하면서 그 세가 꺾였다.

그러나 24대 동성왕 대에는 장군 해예곤이 북위와의 전쟁에서 활약한 기록이 있으며, 25대 무령왕 대에는 한솔 해명이 백가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우는 등 여전히 중앙에서 활동했다. 이후 30대 무왕 때 좌평 해수(解讎)가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했다가 참패한 이후로 해씨는 더 이상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데, 이를 두고 무왕이 패전의 책임을 물으며 해씨 세력을 중앙 정계에서 축출함으로써 왕권을 넘보던 귀족 세력에게 본보기를 보였다는 추측이 있다.

한편 남북국시대 발해에서는 문왕 대인 759년 10월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된 해비응(解臂鷹), 대이진 대인 833년 1월 당나라로 유학한 해초경(解楚卿) 등 해씨 인물들이 활동한 사실이 확인된다. 삼국시대 후기부터는 부여나 고구려에서 더 이상 해씨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대성팔족 해씨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다. 백제 멸망 당시 당나라로 압송되었다가 소백제를 거쳐 발해로 귀부한 가문 출신으로 추정된다.
  • 해루(解婁): 1대 온조왕 대의 인물이다. 23년 1월 나이가 일흔이 넘었음에도 지식이 많고 기력을 잃지 않았다는 이유로 을음의 뒤를 이어 우보에 임명되었고, 34년 2월에 90세로 죽을 때까지 재직했다. 해씨(解氏) 출신으로 기록상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며, 본래 부여인이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고고학적으로 하북위례성 치세는 2세기 후반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2세기 후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 해구(解仇): 11대 비류왕 대의 인물이다. 312년 4월 병관좌평에 임명되었다.
  • 해충(解忠): 한성 사람으로, 405년 9월 왜국에 있었던 전지왕이 아버지 아신왕의 부고를 듣고 귀국할 때 한성에 들어가는 것을 잠시 지연시켜 피살을 막았다. 그 공로로 406년 9월 달솔이 되고 한성의 벼 1,000섬을 받았다.
  • 해구(解丘): 18대 전지왕의 외척으로, 407년 2월 병관좌평이 되어 해수와 함께 권력을 장악했다. 417년 7월에는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동부와 북부의 15세 이상 백성들을 동원한 사구성(沙口城) 건설을 감독했다.
  • 해수(解須): 18대 전지왕~20대 비유왕 대의 인물로 전지왕의 외척이다. 407년 2월 내법좌평에 임명되었으며, 429년 10월에는 죽은 부여신의 뒤를 이어 상좌평으로 승진했다.
  • 해구(解仇): 22대 문주왕~23대 삼근왕 대의 인물이다. 476년 8월 병관좌평으로 임명되었는데, 점차 권력을 남용하고 법도를 어지럽히며 왕을 무시했다고 한다. 결국 477년[21] 9월, 도적들을 시켜 사냥하러 나가 있던 문주왕을 시해했다. 이듬해인 478년 봄 대두성(大豆城)에서 은솔 연신(燕信)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삼근왕이 보낸 좌평 진남의 군대를 격파했으나, 덕솔 진로에게 사살되었다.
  • 해예곤(解禮昆): 24대 동성왕 대의 인물이다. 490년 목간나(木干那),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와 함께 북위군에 맞서 크게 이겨 495년 무위장군(武威將軍) 불중후(弗中侯)에 제수되었다.
  • 해명(解明): 25대 무령왕 대의 인물이다. 관등은 한솔로, 502년 1월 백가의 반란을 진압했다.
  • 해수(解讎): 30대 무왕 대의 인물로, 관등은 좌평이다. 602년 8월 보병과 기병 40,000명을 이끌고 신라의 소타(小陀), 외석(畏石), 천산(泉山), 옹잠(甕岑) 등 4개 성을 공격했는데,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아막성 전투에서 끝내 참패하여 단신으로 복귀했다.

3.3. 목씨(木氏)/목리씨(木刕氏)

문주가 곧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목협(木劦)과 조미(祖彌)는 모두 두 자 성인데, 《수서》에서는 목(木)과 협(劦)을 두 개의 성으로 보았으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를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475년) 9월
목라(木羅) 혹은 목협(木劦)이라고도 표기되었는데, 목협(木劦)은 목리(木刕)를 잘못 기재한 것이다. 목리(木刕)와 목라(木羅)가 《일본서기》에서 별도의 훈 없이 똑같이 '모쿠라'라고 읽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목라씨였다는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참고로 '刕'의 음은 네이버 한자사전으로 검색해보면 '가를 리' 하나만 나오지만 다음 한자사전에 의하면 '가를 리, 가를 례'의 2개가 나온다. # 목리씨가 목례라 표기된 경우는 후자를 따른 것이다. 刕는 현대 중국어나 일본어에서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그냥 '리'로 읽힌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인물로는 조미걸취와 함께 웅진성 천도에서 큰 공을 세운 목협만치(木劦滿致)가 전부이며, 《일본서기》의 목만치와 동일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22] 가야 관련 기록이 특히 많은 《일본서기》에 자주 등장하는 집단으로, 그 구성원 중 처음 이름이 거론된 근초고왕 대의 목라근자(木羅斤資)는 근초고왕의 남정을 주도했다. 이외에 목씨로 여겨지는 사람으로는 목리금돈, 목리마나, 목리문차 등이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목라근자는 369년 3월 근초고왕의 남정에서 가야 7개국[23]을 평정했고, 그의 아들 목만치는 아예 가야 태생으로 신라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금관국을 도우라고 파견되었던 왜국의 카츠라기노 소츠히코[24]가 오히려 금관국을 침공해 국왕인 기본한기(己本旱岐)와 왕자 백구지(百久至), 아수지(阿首至), 국사리(國沙利), 이라마주(伊羅麻酒), 이문지(爾汶至) 등이 백제로 도망치자 목라근자가 구원해주었다는 기록 역시 목씨가 근초고왕의 남정에 적극 참여하면서 가야 소국들과 깊은 연관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또한 근초고왕 대에는 같은 마한 내부에서 백제에 대항하던 유력한 세력인 소국연맹체 침미다례의 정벌에도 성공했는데, 기록에는 따로 목씨가 참여했다는 내용이 안 나오지만 정황상 역시 원정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전성기에는 20여 개국을 거느리고 중국 서진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낼 정도의 위상을 자랑했던 침미다례 연맹은 근초고왕의 정벌 이후 백제의 우위를 인정하여 100년 가까이 그 세력권 하에 놓이고 말았다.

420년, 18대 전지왕이 사망하고 19대 구이신왕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목라근자의 아들인 목만치가 구이신왕의 모후인 팔수부인과 손잡고 전횡을 부리다가 왜국으로 도망치는 일이 벌어졌다. 《일본서기》의 이 기사를 두고 본래 팔수부인이 자신의 친가와 목만치 등 신진 세력을 등용해 정국을 이끌어 나갔으나 8년 만에 비유왕의 쿠데타로 인해 실각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25]

이후 475년 고구려 대군의 침공으로 위례성이 함락되고, 21대 개로왕을 비롯한 부여씨 왕족들이 살해되어 웅진성으로 남천할 때 목협만치가 문주왕을 보좌했다. 목협만치를 제외하면 《삼국사기》에는 목씨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지만 《일본서기》에는 이후에도 꾸준히 등장한다. 목씨는 사비백제 시절까지 세력을 유지했다.

출신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진 않지만 목라씨의 출신이 마한 목지국(目支國) 출신이라는 유력한 추측이 있다. 목씨의 '木'과 '目'은 발음이 통하고 성읍을 뜻하는 '지(支)'는 벌, 평야, 성을 뜻하는 '라(羅)'와 의미가 통하므로[26], 목라씨는 목지국에서 비롯되었다는 논리이다. 고대사회에서는 국명이나 지명을 성씨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므로 아주 무시할 가설은 아니다. 또한 국명을 씨로 삼은 경우가 흔히 그렇듯이 목지국의 유력세력, 더 나아가 아예 왕족이었을 가능성도 꽤 있다.[27]

한편 일본의 고대 호족들 중 하나인 '키씨(紀氏)'가 목씨(木氏)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목(木)'을 일본어 훈독으로 읽으면 '키'가 되며, 키씨(紀氏)의 유명한 인물인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 生磐宿禰)의 행적이 목만치(木滿致)와 닮았기 때문이다. 혹은 역으로 키씨(紀氏)에서 목씨가 유래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키씨(紀氏)가 백제에 정착하며 성씨를 현지화하면서 의미에서 따온 한자인 목씨(木氏)를 자칭했을 수도 있다는 것인데[28] 키(紀)씨가 기록에서 목씨로 표기된 사례로는 키노 츠노노 스쿠네(木 角宿禰)의 경우가 있다.[29]

이와 별개로 일본의 고대 씨족을 정리한 서적인 《신찬성씨록》에서는 일본의 '하야시노무라지씨(林連氏)'[30]백제인 목귀(木貴) 공의 후손이라고 서술하고 있어 하야시씨(林氏)가 목씨에서 유래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다른 표기인 협씨(劦氏) 성을 가진 인물은 단 한 번도 기록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일본의 기록에서 목협씨(木劦氏)라는 형태로 협(劦)자가 등장하긴 하나 협씨가 단독으로 등장하는 것은 중국 기록 뿐이다. 그 때문에 목리씨(木刕氏)를 착각하여 탄생한 결과라는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김복순 교수는 백제 유민들 중 승려 경흥의 성씨라고 기록된 수(水)씨가 한자 모양이 비슷한 목(木)씨의 이표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로 수씨는 전후 문헌에서 전혀 등장한 적이 없는 데다가 전근대에는 한자 표기를 오독해서 잘못 옮기는 것도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31] 상당히 유력한 가설이다.

한편 《일본서기》에서는 백제 유민 목소귀자(木素貴子)와 목소정무(木素丁武)가 등장하는데, 이들이 속한 목소씨는 목씨의 분가였을 가능성이 커보인다. 근초고왕의 후손이라는 억례복류(憶禮福留)가 국성인 부여씨를 사용하지 않았고, 흑치상지로 유명한 흑치씨는 대놓고 백제 부여씨 왕가에서 분가했다고 나오므로 백제 사회에서는 촌수가 멀어질 때마다 분가가 활발했던 것 같다.

현재는 목씨가 남아 있지 않지만[32] 목씨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나주 임씨(羅州 林氏)가 있는데,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 참고. 673년 4월 15일 백제 유민들이 조성한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발원자 명단에 내말의 관등을 지낸 임허(林許)라는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에, 적어도 삼국통일 직후부터 목씨에서 임씨로 개성하는 사례가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 목라근자(木羅斤資): 13대 근초고왕 대의 인물이다. 369년 3월 백제-왜 연합군을 지휘하여 가야 7개국을 평정한 후, 침미다례를 정벌하고 마한 5읍[33]을 항복시킴으로써 백제의 영역을 한반도 중남부 방면으로 크게 넓혔다. 382년에는 가야를 침공한 왜인 카츠라기노 소츠히코[34]가 이끄는 군대를 기본한기의 누이인 기전지(旣殿至)의 간청에 따라 격파하고, 왕실을 복구해주기도 했다. 훗날 신라 여인과 혼인하여 아들 목만치를 낳았다.
  • 목만치(木滿致): 19대 구이신왕 대의 인물이다. 아버지 목라근자의 공적 덕에 가야에서 전횡하다가 420년 3월 백제에서 나이 어린 구이신왕이 즉위하자 백제의 국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목만치는 구이신왕의 모후 팔수부인과 정을 통하며 왕에게 무례하게 굴었으나, 결국 권력 다툼에서 패배했는지 왜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 목금(沐衿): 21대 개로왕 대의 인물이다. 458년 개로왕의 요청에 의해 남조 유송으로부터 용양장군(龍驤將軍)을 제수받았다. 목(木) 자가 아닌 목(沐) 자를 썼다.
  • 목협만치(木劦滿致): 개로왕, 22대 문주왕 대의 인물이다. 475년 9월 조미걸취(祖彌桀取)와 함께 문주왕을 호위해 웅진성으로 천도하는 것을 도왔다. 오탈자를 교정한 본래 이름은 '목리만치'였을 것이다. 이름이 완전히 일치하고 활동 시기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 윗 항목의 목만치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 목간나(木干那): 24대 동성왕 대의 인물이다. 490년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예곤(解禮昆)과 함께 북위군에 맞서 크게 이겼는데, 특히 북위군의 선박을 뺏은 공로를 세웠다. 495년 광위장군(廣威將軍) 면중후(面中侯)에 제수되었다.
  • 목리마나(木刕麻那): 25대 무령왕~26대 성왕 대의 인물로, 그 행적은 모두 《일본서기》에만 나온다. 504년 10월 마나군(麻那君; 마나 키시)이라는 이름으로 왜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부레쓰 덴노에 의해 억류되었는데, 이듬해인 505년 4월 그가 왕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아군(순타태자로 추정)과 교대했다.[35] 529년 3월에는 마나 갑배라는 이름으로 목윤귀, 마로(麻鹵)와 함께 안라회의에 참여했고, 543년 12월 중좌평으로서 가야 재건을 위한 내부 회의에 참석했다.
  • 목리불마(木刕不麻): 25대 무령왕 대의 인물이다. 《일본서기》에 '전부 목리불마 갑배(前部木刕不麻甲背)[36]'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516년 5월 왜국이 보낸 모노노베노 치치노 무라지(物部至至連)를 기문 땅에서 맞이하여 위로하고 백제 땅으로 인도했다.
  • 목윤귀(木尹貴): 25대 무령왕~26대 성왕 대의 장군으로, 그 행적은 모두 《일본서기》에만 나온다. 529년 3월 장군군(將軍君; 이쿠사노 키미)으로서 목리마나, 마로(麻鹵)와 함께 안라회의에 참여했는데, 이들은 고위 관직이 아니라는 이유로 고당(高堂) 위에 있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543년 12월 하좌평으로서 가야 재건을 위한 내부 회의에 참석했다.
  • 목리미순(木刕眯淳): 26대 성왕 대의 인물이다. 중부 나솔이었던 541년 7월, 신라로 간 가야 연맹의 집사를 소환하기 위해 안라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543년 12월에는 덕솔로서 가야 재건을 위한 내부 회의에 참석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오가며 가야의 복국을 위해 노력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 목리금돈(木刕今敦): 26대 성왕 대의 인물로, 《일본서기》에만 등장한다. 552년 5월 8일 중부 덕솔로서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해 백제와 가야를 쳐들어오려 한다고 알리며, 선제 공격 진행을 위한 원병을 요청했다. 이듬해 1월 15일에 왜국을 떠났는데, 특이하게도 출발할 때의 덕솔(德率)에서 한 단계 격하된 한솔(扞率)의 관등으로 바뀐 채 등장한다.
  • 목리문차(木刕文次): 26대 성왕 대의 인물이다. 가야 일대를 놓고 신라와 경쟁이 벌어진 554년 1월 9일 왜국에 파견되어 원병을 요청했으며, 이에 왜국의 우치노 오미(有至臣)가 원병을 이끌고 왔다. 동년 3월 1일에 백제로 돌아갔다. 관등은 중부 시덕이다.
  • 목소귀자(木素貴子): 31대 의자왕·백제부흥운동 대의 인물로 관등은 달솔이다. 백강 전투를 끝으로 부흥운동이 실패하자, 663년 9월 24일 부여자신, 곡나진수, 억례복류 등 다른 백제인들과 함께 저례성(弖禮城)에 모인 뒤 이튿날 출항하여 왜국으로 망명했다. 671년 1월에는 26관위 중 15위인 대산하(大山下)의 관직을 수여받았다. 《일본서기》에는 '병법에 밝았다'는 주석이 달려 있는데, 이 때문인지 당시 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던 사택소명과 함께 태정대신 오오토모 황자의 빈객이 되어 자문을 맡았다고 한다.
  • 목상(木相): 673년 4월 15일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을 발원한 백제 유민들 중 한 명이다. 통일신라에서의 관등은 대사이며, 《삼국사기》 〈직관지〉의 기록을 참고하면 본래 관등은 덕솔이었을 것이다.
  • 목소정무(木素丁武): 왜국에서 활동한 백제계 도래인으로, 주술을 통해 질병을 치료하는 주금박사(呪禁博士)라는 벼슬을 지냈으며, 691년 12월 2일 야마토 정권으로부터 은 20냥을 하사받았다.

3.4. 사씨(沙氏)/사택씨(沙宅氏)

일본서기》에는 사택기루가 등장하고, 국내에 소재한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에는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이, 〈부여 사택지적비〉에서는 사택지적(砂宅智積)이 등장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에는 대좌평 사타천복의 이름을 전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서기》의 사택천복과 같은 인물로 보인다. 또 《신당서》와 《구당서》에는 백제부흥운동에 참전한 사타상여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명칭을 보아 백제왜국에서는 주로 '사택(沙宅)'으로, 중국에서는 주로 '사타(沙咤)'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택(宅)'은 금석문에서는 '탁(乇)'으로 나온다.

남제서》에는 24대 동성왕 대에 북위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백제 장수로 사법명, 찬수류, 해예곤, 목간나를 전하고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목라근자와 함께 백제군을 지휘하여 남정을 주도한 사사노궤(沙沙奴跪)[37]와 사백(沙白)을 거론하고 있으며, 17대 아신왕 대에 사두(沙豆)를 좌장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 사씨는 이미 한성백제 시절부터 권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의 성씨가 여러모로 '사탁' 계열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다소 애매하다. '사(沙)'라는 글자가 딱히 성씨가 아닌 단순 음차로도 쉽게 쓰였기 때문이다.

웅진백제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484년 남제에 사신으로 파견된 내법좌평 사약사는 이런 배경으로 좌평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이때에 이르러 강성해진 사택씨는 사비백제 시절 왕비족으로서 최강의 전성기를 누렸으며, 《수서》 등 중국 사서들이 사택씨를 한결같이 먼저 언급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에 따르면 30대 무왕미륵사를 창건할 당시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었던 무왕의 왕비가 창건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 31대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로 사택씨가 갈려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백제멸망전에서 백제 대좌평은 사택천복(沙宅千福)이었기에 최후까지 최고 권력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38]

사비백제 시절에 최고 권력을 쥐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충남 부여군이 본거지로 추정된다. 〈사택지적비 명문〉에 따르면 사택지적이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로 숙청되어 자기 고향인 내기성(奈祇城)으로 돌아가 비를 세웠는데, 그곳이 현재의 부여읍 관북리에 해당한다는 점이 이 가설에 힘을 실어준다.

남송 대의 문헌 《통지》에는 발해 사람 사승찬(沙承贊)이 오대십국 정명 연간(915~921)에 후량빈공과에 급제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만일 대성팔족 사씨의 후손이라 가정할 경우 백제 멸망 당시 당나라로 압송되었다가 소백제를 거쳐 발해로 귀부한 가문 출신이었을 것이다. 또한 후삼국시대 태봉의 마군장군이자 고려삼한벽상공신복지겸(卜智謙)은 개명 전 이름이 사귀(沙貴) 또는 사괴(砂瑰)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본관인 당진시 면천면은 옛 백제의 혜군(槥郡)이 자리했던 곳으로, 복씨가 원래 성씨가 아니라 고려 건국 이후 한문식 이름과 함께 사여된 것이라면 복지겸도 대성팔족 사씨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

태평광기》에 인용된 당나라 소설 《류씨전(柳氏傳)》에서 사타리(沙吒利)라는 가공인물이 등장하는데, 백제 멸망 이후 당나라로 압송되거나 망명한 사택씨 유민들의 존재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무장으로 출세하여 이름을 날린 사타충의를 모티브로 삼았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다.

사(沙)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26명으로 조사되었다. 이 사씨와 백제 대성팔족의 사씨의 관계는 불명이다.
  • 사백(沙白): 13대 근초고왕 대의 인물이다. 369년 3월에 진행된 백제의 한반도 서남부 공격에 참여했다.
  • 사두(沙豆): 17대 아신왕 대의 인물이다. 398년 2월 진무의 뒤를 이어 좌장으로 임명되었다.
  • 사약사(沙若思): 24대 동성왕 대의 인물이다. 관등은 내법좌평으로, 484년 7월 남제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나 고구려군에 막혀서 도중에 돌아왔다.
  • 사법명(沙法名): 동성왕 대의 인물이다. 490년 목간나(木干那), 찬수류(贊首流), 해예곤(解禮昆)과 함께 북위군에 맞서 크게 이겨 495년 정로장군(征虜將軍) 매라왕(邁羅王)에 제수되었다.
  • 사오(沙烏): 25대 무령왕 대의 인물이다. 관등은 달솔로, 523년 2월 좌평 인우(因友)와 더불어 한강 이북 지역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쌍현성(雙峴城)을 쌓았다고 한다. 이 행적 때문에 무령왕 때 한강 일대를 일시적으로 수복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 사택기루(沙宅己婁): 26대 성왕 대의 인물이다. 543년 12월 상좌평으로서 가야 재건을 위한 내부 회의에 참석했다. 당시 기록에서 중좌평과 하좌평이 같이 언급되는 점을 고려하면, 사택기루가 역임한 상좌평은 한성백제 시기와 달리 상·중·하로 구성된 3좌평 체제의 일부였을 것이다.
  • 사걸(沙乞): 30대 무왕 대의 인물이다. 627년 7월 신라 서쪽 변경의 2개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남녀 30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 사택적덕(沙宅積德): 무왕의 장인이자 사택왕후의 아버지로, 관등은 좌평이다. 딸과 함께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에서 존재가 확인되었다.
  • 사택왕후(沙宅王后): 무왕의 왕후이자 사택적덕의 딸이다. 639년 1월 29일 미륵사를 창건하고 석탑에 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 사택지적(砂宅智積): 31대 의자왕 대의 인물로, 백제의 최고 관직인 대좌평을 역임했다. 642년 7월 22일, 아들[39] 및 은솔 군선(軍善)과 함께 왜국으로 파견되어 연회에 참석한 뒤 부여교기의 집에 방문하여 문안을 했다. 정계 은퇴 후에는 나기성(奈祇城)에서 여생을 보내며 불당과 탑을 조성했고, 그 기념으로 654년 1월 9일에 〈부여 사택지적비〉를 제작했다. 동년 11월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 사택천복(砂宅千福): 의자왕 대의 인물로, 사택지적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 대좌평의 직위를 승계받았다. 660년 7월 13일 백제멸망전 도중 사비성이 함락되자 태자 부여융과 함께 나당연합군에 항복하여 소정방에게 사로잡혔고, 9월 3일에 낙양으로 돌아가는 당군을 따라 포로로 끌려갔다. 이후 11월 1일 당나라 조정에 바쳐졌으나 당 고종이 특별히 풀어주었다고 한다.
  • 사택손등(沙宅孫登): 의자왕 대의 인물로 관등은 좌평이다. 백제 멸망 이후 당나라에 끌려갔다가 당나라가 옛 백제 영토에 설치한 웅진도독부의 관료로 활동하였다. 671년 11월 2일 1,400여 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 사타상여(沙咤相如): 의자왕·백제부흥운동 대의 인물이다. 흑치상지의 별부장(別部將)으로, 백제가 멸망하자 당나라에 항복했으나 이후 당군의 약탈 행각에 반발해 흑치상지, 귀실복신, 지수신 등과 함께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을 왕위에 세우고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663년 백강 전투에서 부흥군이 참패한 것을 계기로 당의 유인궤에게 다시 투항하여 지수신이 지키던 임존성을 함락시켰다.
  • 사택소명(沙宅紹明): 의자왕·백제부흥운동 대의 인물로 관등은 좌평이다. 사람됨이 총명하고 문장이 뛰어나 수재라 불렸다고 전해진다. 663년에 백제부흥운동이 좌절되자 왜국으로 망명했다. 법관대보(法官大輔)라는 관직에 임명되었으며, 668년경 일본 최초의 율령인 오미령(近江令)의 편찬 작업에 참여했다. 이듬해인 669년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죽자 그를 추모하는 비문을 작성했다. 이후 671년 1월 부여자신과 함께 26관위 중 9위인 대금하(大錦下)의 관등을 수여받았다. 673년 윤6월 6일에 사망했고, 덴무 덴노는 그에게 대좌평과 외소자(外小紫)의 관등을 추증하였다.
  • 사택만수(沙宅萬首): 왜국에서 활동한 백제계 도래인으로, 주술을 통해 질병을 치료하는 주금박사(呪禁博士)라는 벼슬을 지냈다. 691년 12월 2일 야마토 정권으로부터 은 20냥을 하사받았다.
  • 사타충의(沙咤忠義): 당나라에서 활약한 백제 유민이다. 무주 시기인 694년 3월 1일 설회의의 휘하에서 돌궐을 공격하러 출전했으나 돌궐군이 먼저 퇴각했다. 이후 우무위위장군을 지냈으며, 697년 5월 8일 청변중도전군총관에 임명되어 누사덕과 함께 이진충의 난 토벌에 참가했다. 698년 8월에는 하북도전군총관으로서 돌궐군의 침공을 격퇴하고자 나섰지만 진군하지 못했다. 중종 복위 후 영무군대총관을 지내던 706년 12월 돌궐과의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듬해 7월 이중준이 일으킨 경룡정변에 가담했으나, 양사욱의 회유에 넘어간 병사들이 그를 배신하면서 살해당했다. 작위는 성국공(郕國公).
  • 사택만복(沙宅萬福): 나라 시대 일본에서 활동한 도래인으로, 천황을 모시는 내시사(內侍司)에 소속된 여성 관인이다. 본래 관위가 없는 하급 궁녀였으나 768년 7월 11일 내시사의 장관급에 해당하는 종5위하의 관위로 승진하였다.

3.5. 연씨(燕氏)/연비씨(燕比氏)

연비씨(燕比氏)의 경우, 《일본서기》 〈흠명기〉 4년(543년) 12월조에서 백제 성왕가야의 재건을 위해 신하들을 모아 회의할 때 나솔 관등의 연비선나(燕比善那)가 등장한다. 해당 기록에서는 성과 이름의 구분이 확실하지 않지만, 다른 인명들과 비교해볼 때 성이 연비(燕比)이고 이름이 선나(善那)였을 가능성이 높다. '연(燕)'이 제비를 뜻하고 뒷 글자가 '비(比)'이기 때문에 훈독으로 '[ruby(燕, ruby=제)]비'라고 읽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연씨 중 가장 먼저 등장한 인물은 연신(燕信)으로, 478년 22대 문주왕을 시해한 병관좌평 해구가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킬 때 이를 지지했으나, 23대 삼근왕의 명령을 받든 좌평 진남과 덕솔 진로에 의해 반란군이 패배하자 고구려로 도망갔다. 연씨는 24대 동성왕 대에 사씨 및 백씨와 함께 등용되었는데 연돌(燕突)은 이 정세의 흐름을 타고 490년 제2관등인 달솔이 되었으며, 497년 진씨의 대표인 병관좌평 진로가 죽자 왕이 연돌을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이는 백제의 병권이 동성왕에게 돌아왔다는 뜻이었다.

세력 거점은 금강 중상류 일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남북국시대에는 제비 연(燕) 자가 들어가는 옛 백제 영역의 지명으로 연산군(燕山郡)과 그 속현인 연기현(燕岐縣)이 있었는데, 각각 현 충청남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세종특별자치시에 해당하기 때문이다.[40] 연신이 반란을 일으킨 대두성(大豆城) 역시 현 충청남도 아산시에 해당하는 탕정성(湯井城)과 인접한 곳으로 추정된다.

현대에는 전주 연씨가 내려오고 있지만 대성팔족 연씨와의 관계는 불명이다.
  • 연신(燕信): 23대 삼근왕 대의 인물이다. 관등은 은솔로, 478년 봄 병관좌평 해구(解仇)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해구(解仇)가 잡혀 죽임을 당하자 고구려로 도망갔고 그 처자식은 웅진 저잣거리에서 처형되었다. 연씨(燕氏) 중에 최초로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 연돌(燕突): 24대 동성왕 대의 인물이다. 490년 9월에 달솔로 임명된 후 497년 5월 진로의 뒤를 이어 병관좌평직을 제수받았다.
  • 연모(燕謨): 26대 성왕 대의 인물이다. 관등은 좌평이었으며 529년 10월, 안장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의해 북쪽의 혈성(穴城)이 함락당하자 성왕의 명령을 받고 30,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남하하는 고구려군을 막으려다가 2,000여 명의 병력을 잃고 퇴각했다(오곡원 전투).
  • 연회(燕會): 성왕 대의 인물이다. 540년 9월 고구려의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했으나 고구려군 정예부대 5,000명의 반격을 받고 퇴각했다.
  • 연비선나(燕比善那): 성왕 대의 인물이다. 543년 12월 나솔로서 가야 재건을 위한 내부 회의에 참석했다.
  • 연문진(燕文進): 30대 무왕 대의 인물로 관등은 한솔이다. 607년 3월 좌평 왕효린(王孝隣)과 함께 수나라에 사절로 파견되었다.
  • 연노리(燕怒利): 《신찬성씨록》에 등장하는 인물이며, 삼국통일 후 한반도에 잔류한 백제 유민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에서의 관등은 척간(尺干).[41]

3.6. 백씨(苩氏)

5대 초고왕 48년(213년) 7월에 등장한 회회(茴會)가 백씨(苩氏)라는 주장이 있다. 백제 관련 기록에서 '회(茴)'라는 글자는 오직 여기에서만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래에서 나오듯 백씨가 24대 동성왕 때부터 등용되어 시기상 맞지 않는데다가 회(茴)가 성씨인지 그냥 이름의 일부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불분명하다.

24대 동성왕 대에 사택씨(사씨), 연비씨(연씨)와 함께 등용되었다. 그 중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인물은 백가(苩加)였는데, 백가는 동성왕 8년(486년) 2월 위사좌평(衛士佐平)[42]이 되었다. 하지만 동성왕은 23년(501년) 8월 가림성(加林城)을 지키라는 명목으로 백가를 파견했고, 이로 인해 백가가 불만을 품게 되었다. 결국 501년 11월에 동성왕이 사냥을 하러 나왔다가 큰 눈을 만나 마포촌(馬浦村)에 유숙하게 되자, 백가는 그 틈을 노려 동성왕을 칼로 찔러 시해했다.

치명상을 입은 동성왕이 12월에 승하하고 무령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자, 백가는 502년 1월에 가림성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윽고 토벌군이 가림성 앞에 나타나자 성 밖으로 나와 항복했지만, 결국 참수당한 뒤 시신이 백강에 던져졌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말다왕(末多王)[43]이 포악하여 나라 사람들이 함께 제거했다"라고 했기 때문에 원래는 귀족들이 다 같이 손잡고 동성왕을 죽였으면서, 무령왕이 즉위하자 모두 백씨에게 뒤집어씌웠고, 백가는 이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이외에도 무령왕동성왕을 제외한 부여곤지의 세 아들들 중 한 명과 혼인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30대 무왕 대 신라의 아막산성을 공격한 달솔 관등의 백기(苩奇)라는 사람이 등장하고, 백씨가 대성팔족으로 거론된 걸 보면 백가의 반란 이후에도 어떻게든 중앙 정계에서 세력을 유지하기는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본거지였던 웅진성은 중국에서 건너온 예씨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이며, 결국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에 분노한 예식진초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거점은 현 충청남도 공주시에 해당하는 웅진성(熊津城) 일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가가 웅진성에서 떨어지라는 명령에 반발한 것이 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충남 공주 수촌리 고분군의 주인들이 백씨라는 추측이 있는데, 수촌리 고분군에서는 금동관과 장식이 달린 대도를 비롯한 각종 위세품이 발굴된 바 있다. 이게 백씨가 맞다면 백씨는 이미 한성백제 시절부터 토호로서 권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대에는 수가 가장 많은 수원 백씨를 위시한 여러 본관의 백씨들[44]이 있으나 대성팔족 백씨와의 관계는 아직 불명이다. 그러나 대종(大宗)이자 주류인 수원, 대흥, 남포 등의 백씨들의 관향이 전통적인 옛 백제 영토에 위치하고, 통일신라 시대에 이르러 신라에 잔류한 대성팔족들이 성씨를 바꾸거나 숨겼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면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진다.[45]
  • 백가(苩加): 24대 동성왕 대의 인물이다. 왕의 경호를 담당했던 위사좌평(衛士佐平)이었으나, 501년 11월 왕을 암살하고 이듬해 1월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다.
  • 백가(白加): 27대 위덕왕 대의 인물이다. 588년 왜국의 대신인 소가노 우마코의 요청으로 은솔 수신(首信) 등과 함께 왜국으로 파견되어 호코지(法興寺) 창건에 참여한 화공이다.
  • 백매순(白昧淳): 27대 위덕왕 대의 인물이다. 관등은 장덕(將德)이며, 588년 위 항목의 백가와 함께 기술자로서 왜국에 파견되어 호코지 창건에 참여했다. 당시 직책이 노반박사(鑪盤博士)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호코지의 불탑 상륜부를 제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백기(苩奇): 30대 무왕 대의 인물이다. 관등은 달솔이며 616년 10월 신라의 아막성을 공격했다.

3.7. 국씨(國氏)

일본서기》 〈흠명기〉에 나오는 덕솔 국수다, 30대 무왕 재위기에 수나라에 파견된 사신 국지모[46], 《일본서기》와 〈대당평백제국비명〉에 등장하는 좌평 국변성, 《속일본기》에 등장하는 덕솔 국골부가 전부다. 사비백제 시절에 두각을 드러낸 것 이외에는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다. 등장 시기가 늦은 것을 보면 대성팔족 중 가장 신진세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에는 훗날 후삼국시대 태봉에서 광평사를 지내다가 고려 건국 직후인 918년 6월 20일에 원외랑으로 임명된 국현(國鉉)이라는 인물이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 시대에도 1637년 무과에 급제하여 겸사복의 벼슬을 지낸 국승길(國承吉, 1608~?)과 그 아버지 국응담(國應談) 등 국씨 성을 지닌 인물이 등장한다. 그러나 기록이 워낙 소략한 탓에 이들의 출신이 대성팔족 국씨와 유관한지는 확실치 않다.

고이씨(古爾氏)가 국씨(國氏)와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근거가 빈약해 거의 폐기되었다.
  • 국수다(國雖多): 26대 성왕 대의 인물이다. 543년 12월 덕솔로서 가야 재건을 위한 내부 회의에 참석했다.
  • 국지모(國知牟): 30대 무왕 대의 인물이다. 611년 2월에 고구려 공격을 요청하러 수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 국변성(國辨成): 31대 의자왕·백제부흥운동 대의 인물이다. 660년 백제 멸망 이후 당나라에 끌려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 국골부(國骨富): 의자왕·백제부흥운동 대의 인물로 관등은 덕솔이다. 663년 백강 전투에서 부흥군이 참패하자 왜국으로 망명했다. 746년에 도다이지의 청동 비로자나불 주조를 담당한 쿠니나카노 키미마로(國中公麻呂, ?~774)의 조부이다.

4. 기타 귀족 성씨

  • 예씨(禰氏)
    대성팔족 외에 백제 후기의 유력한 귀족으로는 의자왕 대의 배신자인 예식진(禰寔進)으로 유명한 예씨가 있다. 예씨는 25대 무령왕 대의 반란으로 크게 타격을 입고 몰락하게 된 백씨(苩氏)를 대체해 요충지인 웅진성을 차지하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대대로 최고 관등인 좌평에 올랐고 백제의 지방 구분인 5방 중 북방을 관할하는 북방령을 역임하기도 했던 것으로 볼 때 '대성'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다만 타 성씨와 달리 예씨에게는 반란으로 조국을 아예 망하게 했다는 큰 오점이 있다.
예식진의 손자인 예인수의 묘지명에 의하면 예씨의 선조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독설가 예형(禰衡)이라고 하며, 예군과 예소사의 묘지명 또한 예씨 가문이 중국 출신임을 언급한다. 예씨를 친위 세력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이는 무령왕의 경우, 중국 양나라와의 외교에 공을 들인 점과 왕릉을 남조식 벽돌 무덤으로 축조한 점을 고려하면 중국계 관료를 대거 등용했을 가능성이 있다.[47] 이를 바탕으로 일각에서는 예씨가 정말로 중국계였거나 중국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리라 추측하기도 하나, 가문의 출자에 대해 묘지명들끼리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 많으며[48] 단순 윤색일 수 있어서[49] 확실한 것은 아니다.
한편 《일본서기》에서는 예색돈(禮塞敦)이라는 인물이 언급되는데, 만일 그의 성인 예씨(禮氏)가 예씨(禰氏)의 다른 표기라면 고구려 동명성왕의 아내 예씨부인과 연관지어 고구려 출신 가문으로 추정할 여지도 있다.
예씨 일족 대부분은 예색돈, 예식(예식진), 예군을 제외하면 2000년대 이후 발견된 예씨 일가 묘지명에서 새롭게 확인되었다.
  • 예숭(禰嵩): 예복의 증조부이자 예식진의 6대조다. 〈예소사 묘지명〉에 따르면 본래 중국 낭야(琅耶: 현 산둥성 중남부) 사람이었는데 5세기 초 남북조시대의 전란을 피해 요양을 거쳐 백제 웅진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물론 출신과 행적은 숭조 사업의 일환으로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예숭이 실존 인물이라면 적어도 5세기 전반에 활동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 예색돈(禮塞敦): 26대 성왕 대의 인물이다. 관등은 한솔로, 553년 1월 12일 왜국에 가서 고구려와 신라에 맞설 원병을 요청했고, 같은 해 윤11월 4일에 백제로 복귀했다.
  • 예복(禰福): 27대 위덕왕 대의 인물로 추정되며, 예예다의 아버지이자 예식진의 증조부이다. 〈예군 묘지명〉에 의하면 관등은 좌평이라고 한다.
  • 예예다(禰譽多): 위덕왕~30대 무왕 대의 인물로 추정된다. 예식진의 조부이자 예사선의 아버지로, 관등은 좌평이다. 〈예소사 묘지명〉에서는 예진(禰眞)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대방주자사(帶方州刺史)를 역임했다고 적혀 있지만, '대방주'라는 행정구역은 백제 멸망 직후 당나라가 설치한 웅진도독부에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후대의 윤색일 가능성이 높다. 공교롭게도 오진 덴노와 동명이인이다.[50]
  • 예사선(禰思善): 무왕 대의 인물로 추정된다. 예식진, 예군 형제의 아버지로, 관등은 좌평이다. 예소사와 예인수의 묘지명에 따르면 7세기 초 수나라에서 내주자사(萊州刺史)를 지낸 적이 있다고 하나, 그 진위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 예식진(禰寔進): 31대 의자왕 대의 인물로, 웅진성을 담당하는 백제 북방령(北方領) 겸 웅진성주였다. 660년 백제멸망전 당시 웅진에 머무르던 의자왕을 이미 함락당한 사비성으로 끌고 가 나당연합군에 항복했으며, 당나라에서 동명주자사, 귀덕장군, 좌위위대장군 등의 벼슬을 지냈다. 《구당서》와 《신당서》 〈소정방 열전〉에서는 예식(禰植)으로 등장한다.
  • 예군(禰軍): 예식진의 형. 관등은 좌평으로, 동생과 함께 당나라에 투항하여 산천부 절충도위를 거쳐 웅진도독부 사마가 되었다. 664년 4월[51]과 665년 7월 두 차례에 걸쳐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당나라와 왜국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670년 7월에는 신라가 웅진도독부를 축출하는 과정에서 간첩 혐의로 붙잡혀 억류당했는데, 2년 뒤인 672년 9월에 풀려나 귀국했다. 동년 11월 21일에 우위위장군을 제수받았다.
  • 예소사(禰素士): 예식진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명성을 바탕으로 15살의 어린 나이에 유격장군 장상이 되었고, 용천부 우과의, 용원부 좌과의, 임장부 절충, 좌표도위 좌낭장, 우응양위 우낭장, 좌감문 중랑 등의 관직을 차례로 제수받으며 무관으로 활동했다. 703년에는 청이군 부사, 705년에는 좌무위장군이 되었다. 708년 6월에는 당 중종의 명령으로 서주, 연주 등 49주를 순무하다가 서주에서 병을 얻어 동년 8월 29일에 사망했다.
  • 예인수(禰仁秀): 예소사의 아들로, 예식진의 손자다. 명위장군·우효위낭장에 임명되었으나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좌천당했다. 진주 삼도부와 여주 양천부의 과의도위, 괵주 금문부의 절충도위를 지낸 후 727년에 53세의 나이로 임조군 관저에서 죽었다. 동생으로 예인휘(禰仁徽), 예인걸(禰仁傑), 예인언(禰仁彦), 예인준(禰仁俊) 4명이 있었는데 그들의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 저씨(姐氏)/저미씨(姐彌氏)
    삼국사기》 기록에는 475년 위례성 함락 이후 22대 문주왕을 보필해 웅진 천도를 도운 사람으로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가 등장한다. 이때 《삼국사기》는 "목협과 조미는 모두 복성(復姓)이다."라고 명시했기에 조미걸취가 조미씨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조미씨는 《일본서기게이타이 덴노 7년(513년)에 나오는 장군 저미문귀(姐彌文貴)의 '저미'와 동일한 성씨로 유력시되고 있다. 《남제서》 〈백제전〉에 보이는 저근(姐瑾)의 '저'도 저미를 축약해 표기한 것으로 여겨진다.[52]
이들 성씨는 전부 자음이 ㅈㅁ이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것이 고대 한국어로 '참[眞]'에 해당하는 단어를 표기한 것이라 가정하여 대성팔족의 일원인 진씨(眞氏)와 동일한 실체로 보기도 한다.[53] 한편 《일본서기》가 기록한 '저미'의 독음은 '사미(さみ)'인데, 이는 당시 고대 일본어에서 [ts] 음가가 존재하지 않아서 [ts] 음을 さ행으로 표기했기 때문이다.
  • 미귀(麋貴): 21대 개로왕 대의 인물이다. 458년 개로왕의 요청에 의해 남조 유송으로부터 영삭장군(寧朔將軍)을 제수받았다. 백제 인명 가운데 '미(麋)'라는 글자는 여기서만 보이기 때문에 '추미(麁米)'로 파자해 저미씨의 이표기로 보는 주장이 있다.
  • 조미걸취(祖彌桀取): 21대 개로왕, 22대 문주왕 대의 인물이다. 475년 9월 목협만치와 함께 문주왕을 호위해 웅진성 천도를 도왔다.
  • 저근(姐瑾): 24대 동성왕 대의 인물이다. 본래 영삭장군 면중왕(面中王)이었다가, 490년 1월 관군장군(冠軍將軍) 도한왕(都漢王)의 관작을 제수받았다. 동성왕의 표문에는 그가 정치를 두루 잘 보좌했고, 무공 또한 뛰어났다는 평가가 적혀 있다.
  • 저미문귀(姐彌文貴): 25대 무령왕 대의 인물로, 직책은 장군이다. 513년 6월 장군 주리즉이(州利卽爾),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함께 게이타이 덴노 치하의 왜국에 파견되어 대가야로부터 섬진강 유역의 기문 지역을 탈환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요청했다. 덕분에 백제는 동년 11월 5일 기문과 대사를 대가야의 세력권으로부터 떼어내 되찾을 수 있었다. 이후 2년 동안 왜국에 머무르다가 515년 2월 4일 귀국길에 올랐는데, 사도도(沙都嶋)[54]에 정박해 있을 때 대가야가 반격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신라 방향으로 돌아서 갔다고 한다.[55]

  • 적씨(適氏)/작씨(灼氏)
  • 적막이해(適莫爾解): 24대 동성왕 대의 인물이다. 487년 고구려의 이림(爾林) 지역에서 왜인 키노 오이와노스쿠네가 이끄는 반란군에 의해 암살당했다. 정확한 벼슬은 알 수 없으나, 이후 오이와 군의 행보를 고려하면 가야와 인접한 백제 변경 지역의 유력자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 작막고(灼莫古): 25대 무령왕 대의 인물로, 직책은 장군이다. 516년 9월 14일 일본계 백제인 시나노노 아히타(斯那奴阿比多)와 함께 고구려 사신 안정(安定)의 일행에 합류하여 왜국에 도착한 뒤 우호 관계를 맺었다.
  • 적덕손(嫡德孫): 26대 성왕 대의 인물로, 하부 소속이다. 534년 5월 상부의 기주기루(己州己婁)와 함께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일본서기》에는 관등이 수덕(脩德)으로 적혀 있는데, 해당 기사를 제외한 다른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후대에 사라진 관등이거나 별도의 칭호였을 것이다. 기주기루의 관등으로 기록된 도덕(都德) 역시 다른 문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 작간나(灼干那): 성왕 대의 인물로, 관등은 하부 시덕이다. 550년 4월 16일 중부 나솔 피구근(皮久斤)과 함께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 10명을 선물했다.

  • 찬씨(贊氏)
    한국어 '참'과 발음이 유사하거나 이체자 賛이 真과 자형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대성팔족 진씨의 이표기가 아닌가 여겨지기도 하지만, 백제의 한자 표기가 일원화된 이후에도 기록에서 찬씨가 종종 등장하기 때문에 별개의 성씨였다는 견해가 더 유력하다.
  • 찬수류(贊首流): 24대 동성왕 대의 인물이다. 490년 목간나(木干那), 사법명(沙法名), 해예곤(解禮昆)과 함께 북위군에 맞서 크게 이겨 495년 안국장군(安國將軍) 벽중왕(辟中王)에 제수되었다.
  • 찬파라(贊波羅): 31대 의자왕·백제부흥운동 대의 인물로 관등은 달솔이다. 663년 백강 전투에서 부흥군이 참패하자 왜국으로 망명했다. 671년 1월 달솔 곡나진수, 목소귀자, 억례복류 등 다른 백제계 도래인들과 함께 26관위 중 15위인 대산하(大山下)의 관직을 수여받았다. 《일본서기》에는 '약에 밝았다'는 주석이 달려 있어 의약 분야에서 활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찬불(贊不): 673년 4월 15일 계유명삼존천불비상의 제작에 참여한 백제 유민들 중 한 명이다. 통일신라에서의 관등은 소사이며, 《삼국사기》 〈직관지〉의 기록을 참고하면 본래 관등은 한솔이었을 것이다.

  • 마씨(馬氏)
    백제 건국 설화에서 온조왕을 보좌한 신하 마려(馬黎)의 후손이라는 의견이 있으나, 마려의 '마'가 과연 성씨인지 이름의 일부인지는 불분명하다. 오경박사를 지낸 적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후술할 고씨와 왕씨처럼 중국계 씨족일 가능성도 있다.
  • 마무(馬武): 26대 성왕 대의 인물이다. 544년 2월 시덕으로서 가야에 보내져 가야 재건을 위한 회담 개최에 협조할 것을 독촉했다. 이후 나솔로 승진했고, 성왕으로부터 외교 능력을 인정받아 전폭적인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이를 눈여겨본 왜왕 긴메이 덴노는 550년 2월 10일 백제에 사신을 보내, 마무를 대사(大使)로 삼아 왜국으로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
  • 마차문(馬次文): 성왕 대의 인물로, 관등은 고덕이다. 장덕 구귀(久貴)와 함께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고구려와 내통한 왜인 연나사(延那斯)와 마도(麻都)를 문책하는 건에 대한 글을 전달했고, 549년 6월 7일 귀국을 청했다. 마진문(馬進文)이라고도 한다.
  • 마정안(馬丁安): 성왕 대의 인물로, 관등은 고덕이며 오경박사(五經博士)의 벼슬을 지냈다. 일찍이 왜국에 파견되어 머무르다가 554년 2월 오경박사 왕유귀와 교대한 뒤 백제로 돌아갔다.

  • 복부씨(福富氏)
    중국 사서 《신당서》와 《노사》에 등장하는 복부순은 그 출신이 분명하게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백제 관료 복부미신과 성씨가 일치할뿐더러, 그가 역임했다고 기록된 우이공의 '우이(嵎夷)'는 7세기 당시 백제를 지칭하는 비유적 표현으로 쓰이기도 했으므로[56] 본래 백제 사람임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 복부미신(福富味身): 27대 위덕왕 대의 인물이다. 관등은 나솔이며, 588년 소가노 우마코의 요청으로 은솔 수신(首信)을 따라 왜국에 파견되어 승려, 사공, 노반박사, 와박사, 화공 등 호코지(法興寺) 창건에 필요한 인력을 보내고 부처의 사리를 선물했다. 이후 본국으로 돌아갈 때 왜국의 비구니인 젠신니(善信尼, 574~?)를 데려가서 그녀로 하여금 백제의 불교 문화와 계율을 전수받도록 했다.
  • 복부순(福富順): 당나라에서 활약한 백제 유민으로, 무주 시기에 우이공(嵎夷公)을 지냈다. 698년 9월 돌궐카프간 카간이 정주(定州), 조주(趙州)를 비롯한 하북 지역을 침공해 오자 측천무후의 명령으로 기병총관(奇兵總管)에 임명되어 사타충의, 이다조 등과 함께 전투에 나섰다. 그러나 지나가는 곳마다 학살을 일삼던 돌궐군의 위세에 압도당해 끝내 진군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 난씨(難氏)
    남송 대의 문헌 《고금성씨서변증》[57]과 《성씨급취편》[58]에서 백제의 난씨가 언급되는데, 1960년 백제 유민인 난원경의 묘지명이 출토되면서 그 존재가 확인되었다. 묘지명에 따르면 난씨의 선조는 삼황오제 중 한 명인 황제의 후손이자[59] 부여씨와 가까운 족류였고, 대대로 백성을 다스리는 어려움을 잘 처리했기 때문에 어려울 난(難) 자를 성씨로 삼았다고 한다.
  • 난조(難珇): 27대 위덕왕 대의 인물로 추정된다. 난원경의 고조부로, 관등은 달솔이다. 당나라의 종정경(宗正卿)과 비슷한 벼슬을 지냈다는 기록을 통해 그가 백제 왕실의 구성원들을 기록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았으리라 유추할 수 있다.
  • 난한(難汗): 30대 무왕, 31대 의자왕 대의 인물로 추정된다. 난원경의 조부로, 아들 난무와 함께 입당하여 웅진도독부 장사(長史)를 맡았다. 난한의 입당 시점이 백제가 멸망한 660년 7월인지 백제부흥운동이 좌절된 663년인지에 대해 이설이 있다.
  • 난무(難武): 의자왕 대의 인물로 추정된다. 난원경의 아버지로, 중대부(中大夫)의 품계를 받고 웅진도독부에서 사지절(使持節)·지심주제군사(支潯州諸軍事)·수지심주자사(守支潯州刺史)를 역임했다가 이후 당나라 본토로 건너가 충무장군, 행우위 익부 중랑장 등 무관직을 지냈다.
  • 난원경(難元慶): 당나라에서 활약한 백제 유민이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일찍이 무관직에 진출했고, 문장에 능하여 중서성에서 근무하면서 황제를 보좌하기도 했다. 이후 변경 지역의 전투에서 세운 공으로 삭방군총관에 제수되었다. 716년 10월, 삭방군대총관 설눌, 병주자사 왕준 등과 함께 9성철륵의 반란을 진압하여 현종으로부터 자금어대와 비단 100필을 하사받았다. 이윽고 721년 7월에는 소그드인 강대빈(康待賓)이 일으킨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선위장군을 제수받고, 분주 청승부 절충도위에 올랐다. 여주 용흥현에서 살다가 723년 6월 28일에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덕씨(德氏)
    명확한 출신은 알 수 없으나 《속일본기》에 기록된 덕래(德來)라는 인물과 연관짓는 견해가 있다. 문헌에 따르면 덕래는 본래 고구려 호태왕의 후손으로서 백제로 귀화한 사람인데 유랴쿠 덴노 재위기(456~479)[60]에 의술을 전수하기 위해 왜국으로 건너갔으며, 그의 5대손 혜일(惠日)은 당나라에 파견되어 의술을 배워온 후 나니와노 쿠스시(難波藥師; 난파약사)[61]라는 성을 사여받았다고 한다. 아래의 덕씨 인물들 중 덕정상과 덕자진도 의약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그 조상이 백제에 잔류한 덕래의 일족이었을 가능성이 있다.[62]
  • 덕집득(德執得): 31대 의자왕·백제부흥운동 대의 인물로 관등은 달솔이며, 부여풍을 따르는 부흥군의 일원이었다. 663년 6월 귀실복신이 부여풍을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이 발각되자 부여풍은 측근들을 거느리고 귀실복신을 포박했으나 처형하기를 망설였는데, 부여풍이 "복신의 죄는 이미 이와 같으니 목을 베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라 물으니 덕집득은 "이런 악한 반역자를 풀어주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귀실복신은 덕집득에게 침을 뱉으며 "썩은 개와 같은 어리석은 놈"이라 헐뜯고는 얼마 후 참수당했다고 한다.
  • 덕정상(德頂上): 의자왕·백제부흥운동 대의 인물로 관등은 달솔이다. 663년 9월 백강 전투에서 부흥군이 참패하자 왜국으로 망명했다. 671년 1월 길대상(吉大尙), 허솔모(許率母), 각복모(角福牟) 등 다른 백제계 도래인들과 함께 26관위 중 16위인 소산상(小山上)의 관직을 수여받았다. 《일본서기》에는 그가 의약에 능했다는 기록이 있다.
  • 덕자진(德自珍): 왜국에서 활동한 백제계 도래인으로, 의박사(醫博士)·무대삼(務大參)의 벼슬을 지냈다. 691년 12월 2일 은 20냥을 하사받았다.

  • 곡나씨(谷那氏)
    곡나(谷那)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백제의 지명으로[63],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록된 백제 욕내군(欲乃郡)과 동일시하여 오늘날의 전라남도 곡성군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따라서 곡나씨 가문은 곡성 지역을 연고지로 하는 가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정 지명을 성씨로 삼은 백제 귀족 가문으로는 곡나씨 외에도 사비씨, 흑치씨, 지모말씨, 고난씨(高難氏)[64], 반비씨(半毘氏)[65] 등이 있다.
  • 곡나진수(谷那晋首): 31대 의자왕·백제부흥운동 대의 인물로 관등은 달솔이다. 백강 전투를 끝으로 부흥운동이 실패하자, 663년 9월 24일 부여자신, 목소귀자, 억례복류 등 다른 백제인들과 함께 저례성(弖禮城)에 모인 뒤 이튿날 출항하여 왜국으로 망명했다. 671년 1월에는 26관위 중 15위인 대산하(大山下)의 관직을 수여받았다. 《일본서기》에는 '병법에 밝았다'는 주석이 달려 있어 군사 분야에서 활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곡나경수(谷那庚受): 나라 시대 일본에서 활동한 백제계 도래인으로, 관위는 종6위하이며 724년 5월 13일 나니와노 무라지(難波連)라는 성을 사여받았다. 《등씨가전》에 따르면 음양오행설에 능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 사비씨(四比氏)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성(泗沘城)을 주요 세력 기반으로 하는 가문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으로 망명한 사비씨의 후손들은 대부분 시히노노 무라지(椎野連)씨로 개성했는데, '시히(椎; しひ)'의 순음퇴화 이전 형태인 '시비'가 '사비'의 당시 한자음과 발음이 같다는 점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
  • 사비복부(四比福夫): 31대 의자왕·백제부흥운동 대의 인물로 관등은 달솔이다. 663년 백강 전투에서 부흥군이 참패하자 왜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665년 8월 같은 백제 출신인 억례복류와 함께 쓰쿠시국에 가서 백제식 산성인 오노 성(大野城)과 키이 성(椽城)의 공사를 지휘했다.
  • 사비신사(四比信紗): 나라 시대 일본에서 활동한 백제계 도래인으로, 우지노 하타야스(氏果安)의 아내이다. 일찍이 효행으로 명망이 높았고, 남편과 사별한 후에도 시부모와 자식들의 뒷바라지에 헌신했다고 한다. 714년 11월 4일에 그 공로로 조세를 면제받았다.
  • 사비충용(四比忠勇): 나라 시대에 활동한 도래인으로, 관위는 정7위상이며 724년 5월 13일 시히노노 무라지(椎野連)라는 성을 사여받았다.
  • 시히노 모토히코(四比元孫): 나라 시대에 활동한 도래인으로, 735년 11월 20일에 작성된 공문서에 따르면 당시 헤이조쿄 서부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인 우경직(右京職)에서 대속(大屬)의 벼슬을 지내고 있었다.
  • 시히노 코오모리(四比河守): 나라 시대에 활동한 도래인으로, 관위는 정7위상이며 헤이조쿄 서부에 거주했다. 766년 3월 17일 시히노노 무라지(椎野連)라는 성을 사여받았다.

  • 답본씨(答㶱氏)
    신찬성씨록》에 고조선 준왕의 후손으로 기록된 가문이다.[66] 준왕은 위만의 정변 이후 오늘날의 익산 지역으로 망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삼국지》에 따르면 3세기 당시 준왕의 직계 후손은 이미 단절되었으나 제사를 받드는 봉사손은 남아있었다고 한다. 《신찬성씨록》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답본씨 가문은 이러한 봉사손의 분파였을 것이다. 건마국으로 대표되는 익산 일대의 고조선계 집단은 훗날 백제 무왕이 금마저군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인 혜택을 보았고, 그에 따라 답본씨처럼 준왕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씨족이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잔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답본춘초(答㶱春初): 31대 의자왕·백제부흥운동 대의 인물로 관등은 달솔이며, 대성팔족은 아니지만 백제 내에서의 대우가 매우 높았던 인물로 보인다. 663년 백강 전투에서 부흥군이 참패하자 왜국으로 망명했고, 665년 8월 나가토국(長門國)에 파견되어 축성 작업을 담당했다. 이후 671년 1월 26관위 중 15위인 대산하(大山下)의 관등을 수여받았다. 《일본서기》에는 그가 '병법에 밝았다'는 주석이 달려 있다. 사택소명, 목소귀자 등 다른 백제 유민들과 함께 태정대신 오오토모 황자의 빈객이 되어 자문을 맡기도 했다.
  • 답본양춘(答本陽春): 나라 시대 일본에서 활동한 백제계 도래인으로, 724년 5월 13일 아사다노 무라지(麻田連)라는 성을 사여받았다. 730년 이전 다자이후의 다이텐(大典)에 임명되었고, 745년 이후에는 이와미국(石見國)의 고쿠시(장관)를 지내다가 향년 56세에 사망했다. 그가 지은 문학 작품으로 와카 4수와 오언시 1수가 각각 《만엽집》과 《회풍조》에 실려 전해진다.
  • 답본충절(答本忠節): 나라 시대에 활동한 도래인으로, 의약 분야에 능했다. 751년 10월 28일에 관등이 정6위상에서 외종5위하로 승격되었다. 757년 6월, 타치바나노 나라마로 등이 권신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를 제거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우대신 후지와라노 토요나리에게 보고했는데, 나카마로를 죽이지 않도록 모반 가담자들을 잘 회유하라는 답변을 받았다. 답본충절은 마침 약을 처방받으러 찾아온 코세노 사카이마로에게 그 경위를 밝혔으나, 사카이마로는 이 사실을 나카마로에게 밀고해버렸다. 결국 7월 2일에 모반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후 구금당하고 말았다.

  • 길씨(吉氏)
    신찬성씨록》과 《속일본후기》에 기록된 가계 전승을 종합하면, 고쇼 덴노의 5대손 히코쿠니부쿠(彦國葺)의 손자인 시오다레츠히코(塩垂津彦)가 스진 덴노 대에 임나의 요청으로 한반도에 파견되어 신라와의 분쟁이 지속되던 기문 지역의 지배권을 위임받았고, 이후 기문에 정착하여 길씨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는 백제 멸망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후손들이 출신을 황족으로 둔갑시키고자 윤색한 것일 가능성이 높으며[67], 실제로는 백제 토착 귀족 출신으로 보인다. 길씨 가문은 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의약업에 종사했으며 문예에 통달하였다고 한다.
  • 길대상(吉大尙): 31대 의자왕·백제부흥운동 대의 인물로 관등은 달솔이다. 663년 백강 전투에서 부흥군이 참패하자 왜국으로 망명했다. 671년 1월 덕정상(德頂上), 허솔모(許率母), 각복모(角福牟) 등 다른 백제계 도래인들과 함께 26관위 중 16위인 소산상(小山上)의 관직을 수여받았다. 《일본서기》에는 그가 의약에 능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택소명 등 다른 백제 유민들과 함께 태정대신 오오토모 황자의 빈객이 되어 자문을 맡기도 했다.
  • 길소상(吉少尙): 의자왕·백제부흥운동 대의 인물로, 길대상의 동생이며 형을 따라 왜국으로 망명했다.
  • 길보랑(吉寶娘): 통일신라에 잔류한 백제 유민으로 추정된다. 백제계 관료 진내말(眞乃末)의 부인이자 승려 진표(眞表, 718~?)의 어머니이다.
  • 길의(吉宜): 나라 시대 일본에서 활동한 백제계 도래인으로, 본래 혜준(惠俊)이라는 법명을 쓰는 승려였으나 700년 8월 20일에 환속하여 무광사(務廣肆)의 관위에 제수되었다. 이후 721년 1월 27일에 뛰어난 의술을 인정받아 명주, 비단, 삼베와 가래를 포상받았고, 724년 5월 13일에는 길지수와 함께 기치타노 무라지(吉田連)라는 일본식 성을 사여받았다. 730년 3월 27일부터 3명의 제자를 두고 의술을 전수하게 되었으며, 도서두(圖書頭; 733년)와 전약두(典藥頭; 738년)를 차례로 역임했다. 향년 70세에 사망했다. 문학 작품으로는 와카 4수와 오언시 2수를 지은 바 있다.
  • 길지수(吉智首)[68]: 나라 시대에 활동한 도래인으로, 헤이조쿄 타무라노사토(田村里)에 거주했다. 719년 1월 13일 관등이 정6위상에서 종5위하로 승격되었으며, 724년 5월 13일에는 길의와 함께 기치타노 무라지(吉田連)라는 일본식 성을 사여받았다. 이후 이즈모국(出雲國)의 고쿠시를 지내다가 향년 68세에 사망했다. 그의 작품으로 〈칠석〉이라는 제목의 한시가 《회풍조》에 실려 있다.

  • 각씨(角氏)
    기록이 적은 탓에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지만, 현전하는 두 인물이 모두 음양오행설에 통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 각복모(角福牟): 31대 의자왕·백제부흥운동 대의 인물로 관등은 달솔이다. 663년 백강 전투에서 부흥군이 참패하자 왜국으로 망명했다. 671년 1월 덕정상(德頂上), 길대상(吉大尙), 허솔모(許率母) 등 다른 백제계 도래인들과 함께 26관위 중 16위인 소산상(小山上)의 관직을 수여받았다. 《일본서기》에는 그가 음양오행설에 능했다는 기록이 있다.
  • 츠누노 에마로(角兄麻呂)[69]: 나라 시대 일본에서 활동한 백제계 도래인으로, 본래 혜요(惠耀)라는 법명을 쓰는 승려였으나 701년 8월 2일 고구려계 도래인이었던 고금장(高金藏) 및 왕중문(王仲文)과 함께 환속했다. 음양오행설에 능하여 음양사에 임명되었고, 724년 5월 13일에는 하네바야시노 무라지(羽林連)라는 일본식 성을 사여받았으며, 탄고국(丹後國)의 고쿠시로 부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727년에 이르러 법률을 어겼다는 이유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헤이조쿄 출토 목간에 등장하는 '各兄麻呂'와 같은 사람으로 추정된다. #

  • 순무씨(淳武氏)
  • 순무지등(淳武止等): 《신찬성씨록》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정확한 생애는 알 수 없으나, 백제계 도래인 가문 후와노 스구리(不破勝)의 시조로 기록된 점을 고려하면 순무미자보다 항렬이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 순무미자(淳武微子): 31대 의자왕·백제부흥운동 대의 인물로, 백제가 멸망하자 왜국으로 망명해 미노국 후와군 일대에 정착했다. 672년 임신의 난이 벌어질 당시 오오아마 황자 측에 가담했고, 691년 5월 21일에는 그 공으로 직대삼(直大參)의 벼슬과 명주 솜, 삼베를 하사받았다.

  • 지모말씨(支母末氏)
    백제 시절 지모밀지(枳慕蜜地), 지마마지(只馬馬知), 지모현(支牟縣), 기모군(旣母郡)이라고도 불린 금마저군(金馬渚郡)[70]에서 성씨를 따온 가문으로 보인다. 즉 금마저군이 위치했던 오늘날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일대를 연고지로 하는 가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 지모말혜원(支母末惠遠): 《신찬성씨록》에 등장하는 인물로 관등은 달솔이다. 정확한 생애는 알 수 없으나, 백제 멸망 혹은 백제부흥운동 실패를 전후하여 왜국으로 망명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 키모마츠노 요시타리(支母末吉足): 나라 시대 일본에서 활동한 백제계 도래인으로, 관위는 대초위상이며 헤이조쿄 서부에 거주했다. 766년 3월 17일 지모말씨 일족 5명을 대표하여 키시노노 무라지(城篠連)라는 성을 사여받았다.

4.1. 방계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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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단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扶餘氏)로부터 갈라져 나왔다는 기록이나 정황이 존재하는 귀족 성씨들을 다룬다.

  • 고이씨(古爾氏)
    역사학자 노중국은 고이씨 가문이 왕위에서 밀려난 고이왕계 왕족과 유관하다고 추정한 바 있으나, 기록의 부재로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한편 상술했듯 나라 국(國)의 일본어 훈독인 '쿠니'가 고이(古爾)의 당시 발음인 '고니'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국씨의 일족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국씨를 일본어의 훈차 표기로 가정할 근거가 부족하므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 고이만년(古爾萬年): 21대 개로왕 대의 인물로 일찍이 죄를 짓고 고구려로 망명했다. 475년 9월 장수왕의 한성 함락 당시 대로 제우(齊于) 및 같은 백제 출신인 재증걸루와 함께 고구려군의 지휘를 맡았으며, 도주하는 개로왕을 사로잡아 아단성으로 압송했다.
  • 고이해(古爾解): 24대 동성왕 대의 인물이다. 487년 고구려와 내통해 가야를 점거한 왜인 키노 오이와노스쿠네의 세력을 토벌하러 내두좌평 막고해와 함께 파견됐고, 오이와 군이 축조한 대산성(帶山城)을 공격했다. 당시 관직은 영군(領軍)으로, 백제의 5방 중 어느 방위를 관할했는지 알 수 없다.

  • 동성씨(東城氏)/동성자씨(東城子氏)
    동성왕과 유관한 가문으로 보인다.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의 경우 '동성자' 부분을 성씨가 아니라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이해하기도 한다.
  • 동성도천(東城道天): 26대 성왕 대의 인물로, 관등은 덕솔이다. 543년 12월 가야 재건을 위한 내부 회의에 참석했다.
  • 동성자언(東城子言): 성왕 대의 인물로, 하부 나솔이다. 547년 4월 백제가 왜국에 지원군을 요청할 때 파견되어 당시 왜국에 주재하던 덕솔 문휴마나(汶休麻那)와 교대했다. 7년 동안 왜국에 머무르다가 554년 2월 동성자막고가 파견되자 귀국했다.
  • 동성자막고(東城子莫古): 성왕 대의 인물로, 554년 2월 여러 명의 학자, 승려, 기술자들과 함께 왜국에 파견되어 동성자언과 교대했다. 관등은 덕솔.

  • 문휴씨(汶休氏)/문사씨(汶斯氏)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두 성씨 모두 근초고왕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후대에 숭조 사업의 일환으로 윤색된 기록일 수 있으며, 발음의 유사성을 근거로 실제로는 목씨(木氏)의 이표기 혹은 분파였을 것이라 추측하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 삼국시대는 아직 고려나 조선처럼 한자 문화가 완전히 정착하기 이전이라 표기가 들쭉날쭉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 문휴해(汶休奚): 《신찬성씨록》에 근초고왕의 손자 또는 후손으로 기록된 인물이지만,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 문휴마나(汶休麻那): 26대 성왕 대의 인물로, 관등은 덕솔이다. 일찍이 왜국에 사신으로 가서 머무르다가, 547년 4월 백제가 왜국에 지원군을 요청할 때 파견된 동성자언과 교대한 뒤 본국으로 귀환했다.
  • 문휴대산(汶休帶山): 성왕 대의 인물로, 하부 고덕이다. 553년 8월 7일 왜국에 파견되어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해 안라국을 공격하려 한다"며 병력 및 군수 물자 지원을 요청하는 글을 전달했다.
  • 문사간노(汶斯干奴): 성왕 대의 인물로, 하부 한솔이다. 관산성 전투가 한창이던 554년 12월 왜국에 사신으로 가서 쓰쿠시섬 인근의 병력을 추가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고, 백제군 10,000명을 동원하여 가야 일대를 방비하기로 약속함과 함께 비단 2필, 모직 담요 1벌, 도끼 300자루 및 관산성에서 사로잡은 포로 7명을 선물했다.

  • 흑치씨(黑齒氏)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하다가 당나라로 망명한 흑치상지가 속한 성씨이다. 〈흑치상지 묘지명〉에 따르면 부여씨로부터 갈라져 나온 가문으로, 조상이 백제의 흑치(黑齒)[71] 지역에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이를 성씨로 삼았다고 한다. 대대로 제2품 관등인 달솔을 역임한 만큼, 대성팔족이나 예씨보다는 덜하더라도 그 위상이 상당히 높은 가문이었을 것이다.
  • 흑치문대(黑齒文大): 27대 위덕왕 대의 인물로 추정된다. 흑치상지의 증조부로, 관등은 달솔이다. 중국 병부상서와 유사한 관직을 지냈다고 기록된 점을 고려하면 백제의 외관 10부 중 사군부(司軍部)의 장관을 맡았을 가능성이 있다.
  • 흑치덕현(黑齒德顯): 위덕왕~30대 무왕 대의 인물로 추정된다. 흑치상지의 조부로, 관등은 달솔이며 군장(郡將)[72]의 벼슬을 지냈다. 〈흑치준 묘지명〉에서는 이름을 가해(加亥)라고 표기했는데, 여기서 더할 가(加) 자가 한자의 새김을 빌린 훈차자라면 덕현(德顯)의 이표기로 이해할 수 있다.
  • 흑치사차(黑齒沙次): 무왕 대의 인물로 추정된다. 흑치상지의 아버지로, 관등은 달솔이며 토목·재정 업무를 담당하는 사공부(司空部) 또는 직물 출납을 담당하는 주부(綢部)의 장관에 임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73] 〈흑치준 묘지명〉에서는 사자(沙子)라는 표기로 등장한다.
  • 흑치상지(黑齒常之): 31대 의자왕~백제부흥운동 대의 인물이며 서부 출신이다. 20세가 되기 전 달솔을 승계받고 풍달군장(風達郡將)의 벼슬을 지냈다. 660년 7월 백제가 멸망하자 당에 항복했으나, 당군의 약탈 행각에 반발해 임존성을 거점으로 부흥 운동을 주도했다. 663년 백강 전투에서 부흥군이 패한 것을 계기로 당의 유인궤에게 다시 투항했다. 이후 웅진도독부 사마를 역임했으며, 당나라 본토에서는 토번, 이경업, 돌궐을 차례로 격파하면서 좌무위대장군·연국공에 봉해졌다. 그러나 동료 찬보벽의 패전에 연루되어 심문받던 중 모함으로 인해 689년 10월 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 흑치준(黑齒俊): 흑치상지의 아들. 696년 무삼사를 따라 이진충의 난 토벌에 참전해 공을 세웠다. 698년 유격장군·난주 광무진장을 거쳐 우표도위 익부 중랑장에 임명되었고, 얼마 후 우금오위 익부 중랑장으로 승진했다. 억울하게 처형당한 아버지 흑치상지를 복권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699년 2월 17일 흑치상지의 무덤을 북망산으로 옮겼다. 이후 병에 걸려 706년 5월 23일 낙양현 종선방(從善坊)에서 31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 흑치씨: 흑치상지의 둘째 딸이자 흑치준의 여동생으로, 백제 유민인 우금오위장군 물부순과 혼인하였다.

  • 귀실씨(鬼室氏)
    백제부흥운동의 주도자 중 한 명이었던 귀실복신과 그 일가의 성씨로, 《신당서》와 《삼국사기》에는 귀실복신이 무왕의 조카라고 기록되어 있어 왕성인 부여씨에서 분파된 성으로 추정된다. 노중국 교수는 무왕이 본래 부여씨 직계가 아니었음을 들어 무왕도 본래는 귀실씨였으리라 주장했다. 백제부흥운동 내부의 분열로 인해 귀실복신이 살해당하자 남은 귀실씨들은 왜국으로 건너갔다.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실이라는 성씨는 귀신의 감화를 받았다는 뜻으로 지은 것이라 한다.
일본으로 망명한 귀실씨의 후손들은 대부분 쿠다라노키미(百濟公)씨로 개성하였다. 한편 8세기 일본에서 제작된 정창원 소장 경전 사본들의 필사자 명단에 키시츠노 코아즈마히토(鬼室小東人), 키시츠노 이와츠기(鬼室石次), 키시츠노 무시마로(鬼室虫麻呂) 등의 인명이 등장하므로, 개성하지 않고 귀실씨를 유지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
  • 귀실복신(鬼室福信): 30대 무왕~백제부흥운동 대의 인물로, 무왕의 조카이며 관등은 서부 은솔 또는 한솔이다. 627년 8월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당 태종의 조서를 백제에 전달했다. 660년 7월 백제멸망전에서 사비성이 함락되자 주류성과 임존성을 중심으로 거병한 뒤 부여풍, 도침 등과 함께 부흥 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부여풍과의 권력 다툼이 지속되었고, 결국 663년 6월 부여풍을 제거하려던 계획이 발각되어 역으로 처형당했다. 이름은 신복(信福)이라고도 한다.
  • 귀실집사(鬼室集斯): 왜국으로 망명한 백제 유민으로, 본래 관등은 달솔이다. 665년 2월, 아버지 또는 친척으로 추정되는 귀실복신의 공적으로 인해 26관위 중 12위인 소금하(小錦下)에 임명되었다. 669년에는 좌평으로 승진하여 부여자신 등 백제인 남녀 700여 명과 함께 오우미국 가모군(蒲生郡)으로 이주했다. 671년 1월에는 중앙 교육 기관에 해당하는 대학료(大學寮)의 장관인 학직두(學職頭)를 맡게 되었다. 후손들이 세운 묘비에 따르면 688년 11월 8일에 사망했다.
  • 귀실집신(鬼室集信): 왜국으로 망명한 백제 유민이다. 671년 1월 달솔 곡나진수, 목소귀자, 억례복류, 찬파라 등 다른 백제계 도래인들과 함께 26관위 중 15위인 대산하(大山下)의 관직을 수여받았다. 《일본서기》에는 '약에 밝았다'는 주석이 달려 있어 의약 분야에서 활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억례씨(憶禮氏)/억뢰씨(憶賴氏)
    문휴씨와 마찬가지로 《신찬성씨록》에 근초고왕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 억례복류(憶禮福留): 31대 의자왕·백제부흥운동 대의 인물로 관등은 달솔이다. 백강 전투를 끝으로 부흥운동이 실패하자, 663년 9월 24일 부여자신, 목소귀자, 곡나진수 등 다른 백제인들과 같이 저례성(弖禮城)에 모인 뒤 이튿날 출항하여 왜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665년 8월 같은 백제 출신인 달솔 사비복부(四比福夫)와 함께 쓰쿠시국에 가서 백제식 산성인 오노 성(大野城)과 키이 성(椽城)의 공사를 지휘했다. 671년 1월에는 26관위 중 15위인 대산하(大山下)의 관직을 수여받았다. 《일본서기》에는 '병법에 밝았다'는 주석이 달려 있다.
  • 억뢰자로(憶賴子老): 나라 시대 일본에서 활동한 백제계 도래인으로, 761년 3월 15일 억뢰씨 일족 41명을 대표하여 이시노노 무라지(石野連)라는 일본식 성을 사여받았다.

4.2. 외래 성씨

백제 인명 자료에 등장하는 중국계 성씨로는 고씨(高氏)[74], 왕씨(王氏), 장씨(張氏), 풍씨(馮氏)[75], 양씨(楊氏), 회씨(會氏)[76], 진씨(陳氏), 단씨(段氏)[77], 반씨(潘氏)[78] 등이 있다. 이들 중 고씨·왕씨·장씨·양씨는 모두 낙랑군 유적 출토 벽돌 명문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기 때문에[79], 본래 중국 한군현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한군현이 쇠락한 4세기를 전후하여 백제로 건너가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인명 자료에 등장하는 일본계 성씨로는 시나노씨(斯那奴/科野氏), 모노노베씨(物部氏), 키씨(紀氏)[80]와 코세씨(許勢氏)[81]가 있다.

  • 고씨(高氏)
    현전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중국계라는 특성을 활용해 한문 지식이 요구되는 사서 편찬 및 유학 연구를 담당하거나, 대중국 외교 활동에 관여하는 행보를 보였다. 고씨가 고구려의 왕성이기도 하다 보니 고구려계 인물도 일부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 고수(高壽): 8대 고이왕 대의 인물이다. 261년 2월 위사좌평에 임명되었다.
  • 고흥(高興): 13대 근초고왕 대의 인물로, 관직은 박사이다. 375년 11월 백제 최초의 역사서로 알려진 《서기》를 편찬했다.
  • 고달(高達): 21대 개로왕~24대 동성왕 대의 인물이다. 467년 또는 471년[82] 11월 양무(楊茂), 회매(會邁)와 함께 남조 유송에 사신으로 가서 토산물을 바쳤다. 이후 동성왕 대에 이르러 건위장군(建威將軍) 광양태수(廣陽太守) 겸 장사(長史)에 임명되었고, 490년 1월에는 남제에 파견되어 용양장군(龍驤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의 관작을 제수받았다. 《남제서》에 수록된 동성왕의 표문에는 그가 변경에서 세운 공적이 일찍부터 뚜렷했으며 공무에 부지런했다는 평가가 적혀 있다.
  • 고안무(高安茂): 25대 무령왕 대의 인물로, 유교 경전 중 오경에 능통하여 오경박사(五經博士)의 벼슬을 지냈다. 516년 9월 유학을 전수하기 위해 왜국에 파견되어 당시 왜국에 3년째 주재하던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교대했다. 《일본서기》에서는 독특하게도 고안무의 이름 앞에 한(漢) 자를 붙여 중국계 인사임을 명시하고 있다.
  • 고분옥(高分屋): 26대 성왕 대의 인물로, 관등은 시덕이다. 543년 12월 가야 재건을 위한 회담을 개최하고자 가야 각국의 군주들과 안라왜신관의 집사를 소환했다. 가야 연맹이 백제의 소환에 좀처럼 응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나서자, 544년 2월 다시 가야에 파견되어 회담에 참여할 것을 독촉하는 글을 전달했다.
  • 가우노 우시카이(高牛養): 나라 시대 일본에서 활동한 백제계 도래인으로, 761년 3월 15일 고씨 일족 8명을 대표하여 키요노노 미야츠코(淨野造)라는 일본식 성을 사여받았다.

  • 왕씨(王氏)
    일본에 논어천자문[83]을 전수해준 것으로 유명한 왕인 박사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왕인이 한문과 유학에 능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 낙랑군의 유력 가문이던 낙랑 왕씨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다. 백제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왕씨 도래인들의 분파로는 카와치노후미(西文), 코시(高志)[84], 후네(船), 츠(津), 시라이(白猪) 등이 있었는데, 대부분 후히토(史)라는 성을 사여받고 조정의 문필 업무를 담당했다고 한다.
한편 교기의 일대기를 담은 금석문 〈대승정사리병기〉에서는 왕인이 백제의 왕자라고 했으며, 훗날 왕진이의 후손들은 그의 조상이 백제 왕족 진손왕이라 주장했다. 이를 바탕으로 왕씨를 부여씨로부터 분가한 왕족 출신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지만, 진손왕이라는 인물의 실존 여부부터가 불분명한 만큼 후대의 윤색일 가능성이 높아 취신하기 어렵다.
  • 왕구(王狗): 왕인의 조부. 《속일본기》에 따르면 후한 장제의 현손인 제북왕 유난(劉鸞)의 후손이며 본래 중국에서 살다가 백제로 이주했다고 하는데, 정황상 후대에 덧붙여진 전승으로 보인다.
  • 왕인(王仁): 17대 아신왕 대의 인물이다. 404년 8월 6일 왜국으로 건너간 아직기는 왜왕 오진 덴노에게 왕인이 자신보다 더 뛰어난 박사라며 그를 초빙할 것을 추천했고, 오진 덴노는 아라타와케(荒田別)와 칸나기와케(巫別)를 파견해 왕인을 데려오도록 했다. 왕인은 이듬해인 405년 2월 왜국에 도착해 태자 우지노와키이라츠코(菟道稚郞子)의 스승으로 임명됐으며,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져와 군신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유명한 와카난파진가를 지은 사람으로도 전해진다.
  • 왕무(王茂): 24대 동성왕 대의 인물이다. 495년 남제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사실을 보고하고, 건무장군(建武將軍) 성양태수(城陽太守) 겸 사마(司馬)를 제수받았다.
  • 왕진이(王辰爾): 26대 성왕 대의 인물로, 일찍이 왜국에 귀화했다. 553년 7월 4일 대신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의 명에 따라 조운 물품을 기록·관리한 공로로 선장(船長)의 벼슬에 임명되고 후네노 후히토(船史)라는 성을 사여받았다. 이후 572년 5월 18일에는 다른 문인들이 사흘 동안이나 해독하지 못할 정도로 난해했던 고구려의 국서를 읽어냈는데[85], 이를 계기로 학식을 인정받아 비다츠 덴노를 시중드는 측근이 되었다. 왕인과 마찬가지로 왜국에서 유학을 보급하는 데 힘썼다고 한다.
  • 왕유귀(王柳貴): 성왕 대의 인물로, 오경박사(五經博士)의 벼슬을 지냈다. 554년 2월 왜국에 파견되어 당시 주재하던 마정안(馬丁安)과 교대했다.
  • 왕도량(王道良): 성왕 대의 인물로, 관등은 시덕이다. 역박사(易博士)의 벼슬을 지냈으며, 554년 2월 역학을 전수하기 위해 왜국에 파견됐다.
  • 왕보손(王保孫): 성왕 대의 인물로, 관등은 고덕이다. 위의 역박사와 한자가 다른 역박사(曆博士)의 벼슬을 지냈으며, 554년 2월 역법을 전수하기 위해 왜국에 파견되었다.
  • 왕유릉타(王有㥄陀): 성왕 대의 인물로, 관등은 나솔이다. 의박사(醫博士)의 벼슬을 지냈으며, 554년 2월 의술을 전수하기 위해 왜국에 파견되었다.
  • 왕변나(王辯那): 27대 위덕왕 대의 인물로, 대중국 외교 활동을 담당하는 장사(長史)의 벼슬을 지냈다. 598년 9월 수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토산물을 바치고, 당시 고구려와의 전쟁을 막 끝마친 수나라에게 추후 고구려를 친다면 길잡이가 되어줄 것을 제안했다. 이에 수 문제는 이미 고구려를 용서했다면서 거절하고는 왕변나 일행을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 왕효린(王孝隣): 30대 무왕 대의 인물로, 관등은 좌평이다. 607년 3월 한솔 연문진(燕文進)과 함께 수나라에 파견되어 고구려 정벌을 요청했다.
  • 왕평(王平): 아스카 시대 왜국에서 활동한 백제계 도래인이다. 608년 6월 15일 수나라 사신 배세청(裴世淸)이 오노노 이모코를 따라 나니와에 도착하자 그 일행을 접대하는 역할을 맡았다.
  • 왕후(王後): 왜국에서 활동한 백제계 도래인으로, 왕진이의 손자다. 비다츠 덴노 대에 태어나 스이코 덴노 대(593~628)부터 관직 생활을 했으며, 조메이 덴노 대에 12관위 중 3위인 대인(大仁)의 관직을 수여받았다. 641년 12월 3일에 사망했고, 이후 668년 12월에 부인 아리코노토지와 합장되었다. 그의 생애는 현전하는 일본의 가장 오래된 묘지명인 〈후네씨 왕후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다.

  • 장씨(張氏)
    중국과의 외교 활동에 참여한 인물이 대부분이다. 옛 대방군의 치소가 위치한 황해북도 봉산군 태봉리에서는 대방태수를 자칭한 유주 어양군 출신 장무이(張撫夷, ?~348)의 무덤이 발견됐는데, 장무가 대방태수라는 명예직에 임명된 점과 유관하다면 본래 대방군 일대가 장씨 가문의 연고지 또는 주요 세력 기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장위(張威): 19대 구이신왕 대의 인물로, 직책은 장사(長史)이다. 424년 유송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공물을 바쳤다.
  • 장무(張茂): 21대 개로왕 대의 인물로, 용양장군(龍驤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 사마(司馬)의 관작을 제수받았다. 472년 부마도위 부여례 등과 함께 북위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고구려를 협공해달라는 내용의 국서를 전달했다.
  • 장새(張塞): 24대 동성왕 대의 인물이다. 495년 모유(慕遺), 왕무(王茂), 진명(陳明)과 함께 남제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사실을 보고하고 진무장군(振武將軍) 조선태수(朝鮮太守)의 관작을 제수받았다.
  • 장안력(張安力): 《신찬성씨록》에 등장하는 인물로, 관등은 나솔이다. 조상이 후한 영제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후대의 윤색으로 추정된다.
  • 장복자(張福子): 나라 시대 일본에서 활동한 백제계 도래인이다. 다자이후에서 약사로 근무했으며, 730년 1월 다자이후 장관 오오토모노 타비토(大伴旅人)의 사저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했을 때 지은 와카 1수가 《만엽집》에 수록되어 있다.

  • 양씨(楊氏/陽氏)
    낙랑군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양씨 인물로는 서기 25년 양한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호족 왕조(王調)가 일으킨 반란에 가담했다가 5년 후 왕굉(王閎)과 함께 왕조를 살해한 군결조리(郡決曹吏) 양읍(楊邑)이 있다. 한편 위의 장씨와 마찬가지로 양무가 광릉태수라는 명예직에 임명된 사실이 양씨 가문의 출신지와 유관하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 양무(楊茂): 21대 개로왕~24대 동성왕 대의 인물이다. 467년 또는 471년 11월 고달(高達), 회매(會邁)와 함께 유송에 사신으로 가서 토산물을 바쳤다. 이후 동성왕 대에 이르러 건위장군(建威將軍) 조선태수(朝鮮太守) 겸 사마(司馬)에 임명되었고, 490년 1월에는 남제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건위장군 광릉태수(廣陵太守)를 제수받았다.
  • 양귀문(陽貴文): 27대 위덕왕 대의 인물이다. 588년 왜국의 대신인 소가노 우마코의 요청으로 은솔 수신(首信) 등과 함께 왜국에 파견되어 호코지(法興寺) 창건에 참여했다. 당시 직책은 와박사(瓦博士)로, 기와 제작을 담당했다.
  • 양아자(楊阿子): 《신찬성씨록》에 등장하는 인물로, 관등은 달솔이다. 수 양제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후대에 윤색된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도래계 씨족인 야고노 후히토(陽胡史/楊侯史)의 시조로 전해지는데, 《일본서기》 스이코 덴노 10년(602년) 10월 기사에서 야고노 타마후루(陽胡玉陳)[86]라는 학자가 왜국 사람으로 언급되는 점을 고려하면 양아자 또는 그의 후손은 무왕 재위기 이전에 왜국에 귀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진씨(陳氏)
    남제서》에 백제 사신으로 진명(陳明)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백제에도 진(陳)씨가 있었음이 확인됐는데, 2007년 중국 시안시에서 백제 유민 진법자(陳法子)의 묘지명이 발견됨에 따라 자세한 내력이 드러났다. 〈진법자 묘지명〉에 따르면 시조는 중국 서주 시기 진나라의 초대 군주 진호공(陳胡公)이며 중시조전국시대의 웅변가 진진(陳軫)이라 한다. 후한 말에 전란을 피해 마한으로 건너갔고, 이후 백제 웅진 지역에 정착하여 대대로 관직에 진출했다.
  • 진명(陳明): 24대 동성왕 대의 인물이다. 495년 모유(慕遺), 왕무(王茂), 장새(張塞)와 함께 남제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사실을 보고하고 양무장군(揚武將軍)의 관작을 제수받았다.
  • 진춘(陳春): 27대 위덕왕 대의 인물로 추정되며 진법자의 증조부이다. 관등은 은솔로, 국립 교육 기관의 행정 책임자인 태학정(太學正)을 맡았다.
  • 진덕지(陳德止): 위덕왕~30대 무왕 대의 인물로 추정되며 진법자의 조부이다. 관등은 달솔로, 마련대군장(麻連大郡將)에 임명되어 지방 행정 및 군사 업무를 총괄했다. 진덕지가 군장으로 부임한 마련(麻連)이라는 곳은 〈양직공도〉 제기에 따르면 무령왕 시절 백제에 복속한 남부의 여러 부용국들 중 하나였는데, 성왕 대 이후 완전히 영역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 위치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마로현(馬老縣)과 동일시하여 오늘날의 전라남도 광양시 일대로 비정하는 학설이 유력하다.
  • 진미지(陳微之): 무왕 대의 인물로 추정되며 진법자의 아버지이다. 관등은 덕솔로, 마도군참사군(馬徒郡參司軍)에 임명되어 군사 업무를 담당했다. 진미지가 부임한 마도군(馬徒郡)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마돌현(馬突縣)과 같은 곳으로 여겨지며, 오늘날의 전북 진안군 마령면 일대에 해당한다.
  • 진법자(陳法子): 무왕, 31대 의자왕 대의 인물로, 서부 출신이며 관등은 은솔이다. 일찍이 기모군좌관(旣母郡佐官)[87]에 취임하면서 벼슬살이를 시작했고, 이후 품달군장(禀達郡將)[88]을 거쳐 사군부의 장관으로서 무관들의 인사권을 쥔 사군(司軍)의 직위까지 승진했다. 660년 7월 백제가 멸망하자 당나라에 투항하여 낙양현 육재리(毓財里)로 이주했다. 이듬해인 661년 2월 16일 유격장군·정교부 우과의도위에 제수된 이래 대평부 우과의(667), 영원장군·용정부 절충도위(669), 정원장군(670), 명위장군(684)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말년에 은퇴한 후 690년 2월 13일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진용영(陳龍英): 진법자의 맏아들. 아버지를 따라 당나라로 건너가서 신산부(神山府) 과의도위를 지냈다.

  • 시나노씨(斯那奴/科野氏)
    본래 일본의 시나노국 지역(現 나가노현)을 다스리는 호족이었다.
  • 시나노노 아히타(斯那奴阿比多): 25대 무령왕 대의 인물이다. 516년 9월 14일 백제인 작막고(灼莫古)와 함께 고구려 사신 안정(安定)의 일행에 합류하여 왜국에 도착한 뒤 우호 관계를 맺었다. 550년 2월 10일 백제에 파견된 왜국 사신 아히타(阿比多)와 같은 인물로 보기도 하지만, 국적이 다르므로 단순히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높다.
  • 시나노노 시스(斯那奴次酒): 26대 성왕 대의 인물로, 상부 소속이다. 544년 2월 시덕으로서 가야에 보내져 가야 재건을 위한 회담 개최에 협조할 것을 독촉했고, 545년 5월에는 왜국에도 파견되었다. 이후 553년 1월 12일에는 덕솔로서 왜국에 다시 파견되어 고구려와 신라에 맞설 원병을 요청했으며, 같은 해 윤11월 4일에 백제로 복귀했다. 이름은 科野次酒라고도 표기되었다.
  • 시나노노 시라키(科野新羅): 성왕 대의 인물로, 관등은 상부 나솔이다. 553년 8월 7일 왜국에 파견되어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해 안라국을 공격하려 한다"며 병력 및 군수 물자 지원을 요청하는 글을 전달했다.

  • 모노노베씨(物部氏; 물부씨)
    본래 일본 야마토 왕조 시기의 유력한 대호족 중 하나이다. 6세기 중엽부터 기록에 백제식 관등을 지닌 모노노베씨 인물이 여럿 등장하기 때문에, 백제로 파견된 모노노베씨 일파가 아예 귀화해 눌러앉은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탓에 과거에는 실존 여부를 불신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중국 타이위안시 천룡산 석굴에서 출토된 〈대당물부장군공덕기〉에 등장하는 백제 유민 물부순의 성씨가 교차 검증을 통해 밝혀지면서 인정받게 되었다.
  • 모노노베노 요가타(物部用奇多): 26대 성왕 대의 인물로, 관등은 나솔이다. 544년 2월 백제가 가야 연맹에 보낸 문서에서 과거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된 인물로 등장한다. 이때의 일행으로 미마사(彌麻沙)와 기련(己連)이 같이 언급된 점을 고려하면, 정황상 542년 7월 미마사와 기련이 왜국에 파견되어 가야의 부흥을 알릴 때 동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545년 5월에도 왜국에 파견됐다.
  • 모노노베노 마가무노 무라지(物部莫哥武連): 성왕 대의 인물로, 이름은 마기모(麻奇牟)라고도 표기되었다. 543년 9월 시덕으로서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중국 남조와의 무역을 통해 얻은 부남의 보물과 노비 2명을 선물했다. 이후 달솔로 승진해 동방령(東方領)이 되었고, 관산성 전투가 한창이던 554년 12월 9일 자신이 관할하는 득안성(得安城)의 군사를 거느리고 관산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 모노노베노 가히(物部哥非): 성왕 대의 인물로, 관등은 나솔이다. 544년 3월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가야에 머무르던 왜인 이나사(移那斯)와 마도(麻都)의 본국 송환을 요청했다.
  • 모노노베노 카쿠(物部烏): 성왕 대의 인물로, 관등은 상부 나솔이다. 관산성 전투 직전인 554년 2월 군사 지원을 요청하러 왜국에 파견되었다.
  • 물부순(勿部珣): 31대 의자왕 대의 인물로, 나라가 망하자[89] 당나라로 귀화해 흑치상지의 딸 낙랑군부인과 결혼했으며 천병중군 부사·우금오위장군을 역임했다. 706년 3월, 아내와 함께 천룡산 석굴로 향하여 친척들과 죽은 선황을 받들기 위해 불상 및 여러 현인들의 조각상을 조성했다. 707년 8월에 공사를 마쳤고, 동년 10월 18일 곽겸광(郭謙光)에게 의뢰하여 석굴 조성을 기리는 공덕비를 건립했다. 이후 714년 2월, 당 현종돌궐 묵철가한북정 침공에 맞서 병부상서 요숭 등에게 북벌을 명할 때 전봉총관에 임명되었다.[90]
  • 물부흔(勿部昕), 물부간(勿部暕), 물부중용(勿部仲容): 각각 공덕비에 기록된 물부순의 첫째, 둘째, 넷째 아들이다. 셋째 아들의 이름은 마멸되어 알 수 없고, 딸도 한 명 있었는데 천병중군 총관 미의(彌義)와 결혼했다고 한다.

5. 백제 멸망 이후

660년 백제멸망전으로 백제가 멸망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일단 현재 대한민국 국민을 비롯한 한민족 중에는 족보에서 대성팔족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집안이 없다. 관산성 전투 이후 백제와의 사이가 매우 나빴던 신라 정권에게는 완전히 눈엣가시였을 테니 새로운 통일신라 사회에서 옛 백제의 중앙 귀족층이었다고 자칭해봤자 좋을 게 없었던 건 분명하다.

같은 시기의 예시로 고구려의 왕족인 안승은 실제로 김씨를 하사받고 진골에 편입되었다. 여기에는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적어도 국사책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중요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실은 신라가 백제 고위층들에게 처음에는 높은 신라식 관위를 주며 회유하려 했으나 상당한 조직적인 거부 및 백제부흥운동을 마주쳤던 일이 있었다.[91] 신라가 이 일을 겪은 뒤로 구 백제 지배층에게 상당히 신경질적이 되었음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으며, 그 사건 이후로는 대단히 특별한 경우는 6두품, 그 나머지는 5두품 이하로 고정되어 버린다.

최고위층이 이러한 상황이었으니 설령 대성팔족이 관위를 받았어도 기껏해야 4~5두품이 확실하며, 신라 계통의 성씨가 대체로 6두품부터 쓰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였으므로 백제 계통의 성씨 자체를 공개적으로 쓰기 대단히 어려워졌다고 어렵지 않게 추정해볼 수 있다. 비슷한 경우로 후대의 조선 왕조 초기에 개성 왕씨 멸족이 조직적으로 시행된 사례가 있다. 고려의 왕가였던 데다가 사성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던 왕씨가 자연적인 인구 감소라고 여길 수 없을 정도로 대폭 줄어들었기에 인위적인 멸성이 가해졌던 정황이 존재하며, 직접 멸성이 진행되었던 기록도 남아있다. 실제 죽은 사람은 직계 왕족 200여 명으로 추정되고 나머지 대다수는 그냥 변성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 멸망 직후인 673년 백제의 유민들에 의해 제작된 국보 제108호 '계유명삼존천불비상'에는 백제 진모씨(眞牟氏)가 계유년에 문무왕과 7세 부모를 위해 만들었다고 적혀 있으므로, 백제 멸망 이후에도 한반도에 대성팔족의 일부가 여전히 존재했음이 입증된다. 같은 해에 만들어진 또 다른 불상인 국보 제106호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에도 비슷한 내용의 글귀가 적혀 있는데, 여기에는 전씨(全氏)가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확히 같은 해에 비슷한 글귀가 적힌 불상들이 제작된 것으로 보아 이 불상들이 함께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진모씨(眞牟氏)는 현재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이 없지만, 전씨(全氏)는 수십만 명의 후손들이 백제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남아 있다. 두 집안의 운명이 갈린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92]

전씨 외에 현재까지 전해지는 백제계 성씨로는 한씨(韓氏), 마씨(馬氏) 등 몇 가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93] 한편 외래 성씨 문단에서 상술했듯이, 백제 유민 진법자(陳法子)의 묘지명 발굴로 진(眞)씨와는 다른 진(陳)씨 또한 백제에 있었음이 확인된다. 진법자는 현 충청남도 홍성군 일대로 추정되는 품달군(稟達郡)[94]의 군장(郡將)을 역임했다고 하며, 현재 한국 여양 진씨의 본관인 옛 여양현 또한 현재의 홍성군 지역을 가리킨다.

사서가 아닌 족보 상 기록이긴 하지만,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을 본관으로 하는 신평 이씨(新平 李氏)의 기록에서는 백제 멸망 이후 백제계 귀족 및 호족 가문들이 거쳐간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신평 이씨의 시조는 백제 사평현(沙平縣)의 호족이었던 이인수(李仁壽)로, 이인수의 아들인 이주(李珠) 역시 백제의 호족이었고 이주의 증손자 이석덕(李碩德)은 신라아찬 벼슬을 지냈다고 한다.

전라북도 전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전주 류씨(全州 柳氏) 또한 삼국시대부터 이미 백제의 호족이었다고 추정된다. 류방헌(柳邦憲)의 묘지명에 따르면 증조부 류기휴(柳基休)는 신라각간 벼슬을 지냈고, 조부 류법반(柳法攀)은 후백제의 우장군(右將軍)이었으며, 아버지인 류윤겸(柳潤謙) 때 고려에 귀의해 대감을 지냈다고 한다. 류방헌의 어머니인 승화군대부인(承化郡大夫人) 담양 이씨(潭陽 李氏)는 신검의 정변을 예견하고 몸을 숨긴 이염악(李廉岳)의 딸이라고 하는데, 전라남도 담양군이 본관인 담양 이씨는 신평 이씨에서 분관한 가문으로 역시 백제계 가문이었다.

즉 왕국이 두 개나 멸망하는 혼돈 속에서 고구려백제의 호족들은 각자 살길을 찾기 위해 머나먼 외국으로 이주하거나, 본거지에 그대로 남아 당나라, 발해, 또는 신라 정부에 충성하여 원래 영역의 지배권을 어느 정도 인정받으며 남북국시대를 지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후삼국시대에는 백제계 호족들이 후백제의 관직을 역임하거나 신검의 정변에서 몸을 피하는 모습이 보이듯이, 각자 지역에 따라 새로운 정권인 고려, 후백제, 또는 요나라에 충성하면서 처신에 몰두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사서에 일일이 다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게나마 기록된 모습만으로도 많은 연구자들의 예상처럼 삼국시대 토착민의 후예들이 변화하는 정세에 맞춰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했음이 드러난다.

대성팔족을 그대로 이은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이 몇몇 있긴 한데 안타깝게도 정황만 있을 뿐 물적 증거는 없다. 백제에 관한 기록들이 늘 그렇듯 국내에서는 소실된 것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같은 한자를 쓰는 해당 성씨들은 후대에 사성된 성씨거나, 집계 때 한자를 잘못 표기해서 그냥 그 이후로도 해당 성씨로 살았거나, 중국에서 귀화한 경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국씨(國氏)와 진씨(眞氏)는 통일신라고려시대의 금석문,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에서도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실제 대성팔족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

이외에도 사씨(沙氏)와 연씨(燕氏)의 경우, 워낙 드문 성씨인데다가 본관이 구 백제 지역과 관련이 있기에 대성팔족과 연관이 있을 정황은 크다. 보통의 경우 나라가 멸망한 판에 이들이 토벌 대상이 되지 않았을 이유가 없었으니 가문의 생존을 위해 변성(變姓)이 이루어졌다. 기존의 한자에 부수를 더해서 발음을 바꾸거나, 발음만 같은 전혀 다른 한자로 변성하고는 철저히 다른 가문 행세를 했던 것이다. 그 시대의 문맹률을 생각해보면 이는 꽤 유효한 수단이었다. 대표적으로 목(木)씨가 임(林)씨로 변성한 것으로 추정된다.[95]

다만 한국사에서는 김씨, 박씨 등을 비롯한 일부 신라계 중앙귀족 유래 성씨와 중국계 귀화민을 제외하면 중류층도 대부분 성씨를 사용하지 않다가, 고려 초기 사성정책광종과거시험 응시 자격으로 성씨 사용을 내걸게 된 연후에야 성씨가 제대로 정착하게 되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게다가 조선 이후로는 모화사상으로 인해 조상에 대한 윤색과 미화가 유행했기에 족보 기록 상의 출자는 확실하지 않은 경우가 많으며, 조상의 내력과 성씨의 한자를 몰라서 그냥 발음만 알고 내려오다가 나중에 잘 알려진 성씨를 따라 적은 경우도 흔하다. 때문에 원래 대성팔족의 성씨였으나 중국식 성씨로 형태가 변형되어 지금까지 내려온 경우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현대까지 대성팔족의 가문이 내려왔는지는 대다수의 기록이 실전된 만큼 확실히 알 수 없다. 삼국시대에도 번성했던만큼 그 후손들이 여기저기 섞이며 내려와 현대 한국인의 유전자 풀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라 추정될 뿐이다.

6. 관련 문서



[#] 백씨(苩氏)의 오기일 가능성이 높다.[#] [3] 목리씨의 오기(誤記)인 목협씨를 중국 측에서 착각하여 목씨와 협씨로 각기 나누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실제로는 일곱이다. 이후 서술된 《한원》에서는 목씨를 빼서 7개로 정정했다.[4] 眞의 이체자인 真과 자형이 비슷하다. 오자가 아니라 발음이 비슷한 통자였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백제 지명 중 진현현(真峴縣)이 정현현(貞峴縣)으로도 불렸다고 한다.[5] 성뿐만 아니라 이름 또한 한 글자로 축약되었다. 일례로 본명이 부여초고(扶餘肖古)였던 근초고왕과 본명이 부여아화(扶餘阿華)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아신왕은 《진서》에서 각각 여구(餘句)와 여휘(餘暉)로 등장한다.[6] 신라는 백제에 비해 대외 확장 과정에서 흡수한 옛 삼한 소국 세력들을 푸대접한 경향이 있다. 아무래도 신라는 원래부터 진한의 수장이었기에 휘하 소국들의 대우를 높이 해줄 필요가 없었던 반면, 백제는 본래 마한의 수장이던 목지국을 밀어내고 지배권을 차지한 입장이므로 권위가 다소 부족하여 옛 마한 소국 가문들을 달래줄 필요가 컸을 것이다. 일례로 신라는 중국에서 유입된 사치 위세품을 대부분 서라벌에서 소모했으나 백제는 지방 유력층에게도 나눠준 편이다. 한성백제박물관 발간 시리즈 참고.[7] 임영진 교수 및 몇몇 중국 고고학 학자들이 중국의 옛 오월 지역과 산둥 반도 동해안에 있는 분구묘제 및 일본 규슈 북부와 기나이(畿內) 일대에서 대두했던 일본 분구묘 묘제와의 연관성이 유력시되는 세력으로 예측했으나, 최근 연구에서 이 묘제 세력은 송국리 문화 유형과 점토대 토기 문화 유형의 여러 물질 문화가 골고루 분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예맥인과 송국리 문화 유형인이 융합되어 경기도 서해안 일대에서 출범했고, 이후 충청도·전라도로 꾸준히 남진하다가 일본 규슈로 전파된 후 기나이 일대까지 전진했다는 것이다. 출자가 어찌 되었든 전반적으로는 바다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해석된다.[8] 물론 이는 좌평을 세습한 예씨 가문, 달솔을 세습한 흑치씨 가문처럼 후기 백제에서도 종종 발견되는 현상이다.[9] 밀양 박씨, 김해 김씨, 고구려 왕족(안승), 탐라 왕족 등.[10] 신라 제도에는 경직된 족내혼, 골품제 고수 등의 단점이 있었고, 이러한 제도적 한계와 더불어 옛 고구려·백제 출신 귀족을 푸대접한 사실은 훗날 지방 세력의 대대적인 불복종으로 인해 후삼국시대가 개막되는 데 일조했다. 한국사에서는 드문 현상이었지만 세계사에서는 후우마이야 왕조, 고대 이집트의 중간기처럼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11] 여기서의 말갈은 흔히들 생각하는 퉁구스계 말갈이 아니라 기리영 전투 이후 한사군의 편에 붙기로 한 강원도 및 황해도 등지의 옛 마한동예계 세력일 것으로 추정된다. 육군본부 발간 《한국군사사》 제1권 참조.[12] 고고학적으로 임진강 유역에서 한강 이남으로 이동하는 데는 50년 이상 시간차가 난다. 따라서 2대인 다루왕 치세는 당연히 하북위례성 시대가 된다.[13] 함께 제작된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에는 아예 백제의 관등인 달솔(達率)이 적혀 있기도 하다.[14] 김남윤(1997), 〈진표의 전기 자료 검토〉, 《국사관논총》 제78집, p94 #[15]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重大匡) 검교상장군(檢校上將軍)을 지냈다고 하며, 고려 중·후기의 인물로 추정된다.[16] 본래 태봉시중이었다가 고려 건국 이후인 918년 9월 23일에 나주도대행대시중(羅州道大行臺侍中)으로 임명되어 나주 지방의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17] 후백제의 장군이다. 《고려사》 〈공직 열전〉에 따르면 나주에서 공직이라는 호족에게 포로로 잡힌 구도의 아들 구단서(具端舒)가 936년 후백제 멸망 이후 견훤에게 사로잡혀 있던 공직의 차남 금서(金舒)와 교환되어 부모에게 돌려보내졌다고 한다.[18] 眞은 약자인 真으로도 대체해서 많이 사용했다.[19] 목씨의 후예로 추정되는 임씨와 부여씨의 후예로 추정되는 서씨도 후삼국시대 때 호남과 호서 각지에 흩어진 사실이 확인된다.[20] 백제가 처음에는 임진강 유역에 자리잡았다가 한강 이남으로 내려간 걸 고려하면 임진강 일대일 수도 있다.[21] 《삼국사기》 〈백제본기〉 본문은 이 해를 문주왕 4년으로 기록하고 있어, 서기 478년에 대응한다. 그러나 연표에서 문주왕의 재위 기간은 3년까지라고 하고 있으므로, 본기에서 3년을 4년으로 잘못 적었다고 봄이 정설이다.[22] 자세한 논의는 목만치 문서 참고.[23] 비자발(창녕), 남가라(김해), 탁국(영산), 안라(함안), 다라(합천), 탁순(창원), 가라(고령).[24] 사지비궤(沙至比跪)라고도 한다.[25] 조경철(2009), 〈백제 왕비 팔수부인(八須夫人)의 출자와 그 생애〉, 《여성과 역사》, p105-132.[26] 다만 '라(羅)'가 평야나 성을 뜻하는 맥락으로 사용되었다는 근거는 확실치 않으므로 유의해야 한다.[27] 목지국 일대는 백제 때 대목악군(大木岳郡)이었고, 고려시대에는 목주(木州)라고 불렸으며, 조선시대부터 목천(木川)이 되어 현대에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이라는 지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목지국에서 유래한 것이 맞다면 현대까지도 끈질기게 목지국의 흔적이 살아남은 셈이다.[28] 6세기에 백제에서 나솔(奈率) 키노 오미 미마사(紀臣 彌麻沙)를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모노노베(物部)씨의 경우처럼 키(紀)씨도 일부가 백제에 정착하긴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경우는 키씨가 그대로 키씨로써 정착한 경우이지, 정착하며 목씨로 바꾼 것은 아니다.[29] 이 이름을 '목각씨(木角氏)'라고 오독하기도 하지만, '키(木)'가 우지(氏)이고, '츠노(角)'가 이름이며 '스쿠네(宿禰)'는 카바네(姓)이다. 현대 일본식 이름으로 치환하면 그냥 '키 츠노(木 角)'가 되며, 목각씨가 기록에 등장한 사례는 어디에도 없다.[30] '하야시(林)'는 우지(氏)이고, '무라지(連)'는 카바네(姓)다.[31] 당장 목리씨(木刕氏)의 경우 목협씨(木劦氏)로 잘못 읽혀져 중국 사서에 그대로 기재되기도 했다. 또한 한자는 모르고 발음만 알고 있거나 사용한 한자가 벽자라 필기가 힘들었을 때는 그냥 발음이 같은 다른 한자로 대체해서 적는 일도 흔했다.[32] 현재 존재하는 목씨는 木씨가 아니라 睦씨다.[33] 비리·벽중(김제), 포미, 지반, 고사(정읍).[34] 원래는 왜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한 신라를 공격하러 파견되었으나, 신라에서 미녀 2명을 항구로 보내 소츠히코를 맞이하게 하자 미인계에 넘어가 도리어 옆에 있었던 가야를 공격했다고 한다.[35] 왕족인 부여씨가 아니라 귀족인 목리씨를 사신으로 파견한 데 대해 왜국이 불만을 제기한 듯하다.[36] 《일본서기》에 적힌 훈을 그대로 한글로 전사하면 '젠호우 모쿠라후마 카후하이'가 된다.[37] 당시 일본식 독음으로는 '사사나코(sasanako)'에 가깝게 읽었다. 백제 사람이라고 명시된 목라근자와 다르게 출신 국가에 대한 설명이 없으며, '~나코'는 일본어족 인명에 주로 포함되었던 접미사이기 때문에 그가 정말 백제인인지는 다소 불명확하다. 자세한 사항은 문서 참고.[38] 반대로 사택씨가 두 부류로 갈라져 은고부인을 위시로 한 친위 쿠데타를 사택천복을 비롯한 사택씨 일부가 도왔다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집안 싸움에서 패배한 쪽이 사택지적이고, 승리한 쪽이 사택천복이 된다.[39] 관등은 달솔이며,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 《일본서기》의 동년 8월 13일 기사에서 등장하는 달솔 장복(長福)과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40] 안병섭(2017), 〈신라 지명 '연기(燕岐)'의 명명 연원에 관한 고찰〉, 《한국학연구》 제60집, p156 #[41] '척간'은 일척간(一尺干), 대아척간(大阿尺干), 아척간(阿尺干), 사척간(沙尺干), 급척간(及尺干) 등 신라 관등의 접미사로 사용됐기 때문에 본래 앞 글자가 있었으나 누락되었을 것이다.[42] 국왕의 경호를 담당하는 직위로, 내신좌평과 더불어 왕의 친위세력이나 측근이 차지했던 요직이었다.[43] 훈은 '마타'.[44] 상당 백씨, 남포 백씨 등[45] 수원 백씨는 중국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자처하고 있지만 여느 성씨와 마찬가지로 이는 모화 사상에 근거한 것으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46]수서》와 《삼국사기》에서 등장한다.[47] 무령왕은 동성왕 대 후기의 혼란을 틈타 정변을 통해 즉위한 뒤 왕권 강화에 몰두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렇다면 고려 제4대 광종이 그랬던 것처럼 기성 귀족들을 신뢰하기 힘들었을 것이다.[48] 〈예식진 묘지명〉에는 예씨가 중국계라는 내용 자체가 없다. 〈예군 묘지명〉은 예씨가 4세기 초 영가의 난의 혼란을 피해 백제로 건너갔다고 한 반면 〈예소사 묘지명〉은 남북조시대가 시작된 5세기 초에 건너갔다고 전하며, 예형을 예씨의 선조로 언급한 〈예인수 묘지명〉은 아예 수나라 말기인 7세기 초에야 건너갔다고 전한다. 자세한 사항은 파일:예씨묘지명비교.png 참고.[49] 전근대 한반도에서는 정당성과 역사성을 과시하기 위해 가문의 선조를 윤색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신라 왕실에서는 본래 흉노의 왕족이었다가 전한으로 귀순한 김일제를 자신들의 선조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당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윤색이었음이 확실시되고 있다. 고려 왕실에서도 자신들의 조상이 당 숙종이라고 주장했다.[50] 문헌상 확인되는 오진 덴노의 이름은 호무다(譽田)로, 예예다의 이름과 첫째 글자가 일치하며 둘째 글자의 독음도 같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 이름은 "상고 시절" 사람들이 활팔찌(활 보호대)를 일컫던 단어라고 하는데, 해당 기록 이외에는 '호무다'라는 단어의 사용례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본래 백제로부터 유입되었다가 일본 고유어인 '토모(とも)'에 밀려 사장된 한국계 차용어였을 가능성이 있다.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은 2012년 논문에서 호무다의 어원을 한국어로 분석하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51] 733년에 편찬된 《해외국기》에 따르면 이때는 당나라 황제가 아닌 유인원이 사사로이 보낸 사절단이라는 이유로 왜국 측으로부터 입국을 거부당했다고 한다.[52] 李弘稙, 1971, 《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53] 今西龍, 1934, 《百濟史硏究》, 近澤書店.[54] 경상남도 해안가의 섬으로 추정된다. 거제도의 옛 지명인 사등(沙等)과 연관지어 거제도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55] 이때 저미문귀 일행을 호송하던 왜인 모노노베노 치치노 무라지(物部至至連)는 500명의 수군을 이끌고 대가야를 선제 공격하러 대사강(帶沙江)으로 떠났다. 그러나 동년 4월, 대사강 하구에 주둔한 지 6일 만에 대가야군에게 격파당해 막사가 모두 불타는 피해를 입자 인근 섬인 문모라(汶慕羅)로 퇴각했다. 이듬해 5월에는 백제가 보낸 목리불마(木刕不麻)를 기문에서 만난 뒤 백제 본토로 불려와서 위로와 포상을 받았다.[56] 이를테면 백제멸망전이 시작된 660년 3월 당 고종이 신라 태종 무열왕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에 임명했고, 백제 멸망 후 당나라가 설치한 웅진도독부의 산하에 우이현(嵎夷縣)이 있었다. 부여 관북리 출토 목간에도 우이(嵎夷)라는 묵서가 적혀 있으며, 백제 유민 예군(禰軍)의 묘지명에서는 그가 웅진 우이(嵎夷) 출신이라고 했다.[57] 권신 진회와 대립했던 학자 등명세(鄧名世)가 집필한 책이다.[58] 왕응린(王應麟, 1223~1296)이 전한 대의 한자 교본 《급취편(急就篇)》을 바탕으로 저술한 성씨 사전이다. 《사고전서》와 《해동역사》에 인용되었다.[59] 당연히 사실일 리는 없고, 삼국통일 이후 신라 왕실소호 금천씨의 후예를 자처한 것과 마찬가지로 가문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한 윤색에 해당한다.[60] 백제 기준으로는 개로왕·문주왕·삼근왕의 재위기에 해당한다.[61] 나니와 지역에 거주하는 약사 집안이라는 뜻이다. 혜일의 후손들은 이후 9세기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의술을 가업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62] 엄밀히 따지면 덕래는 고구려 동천왕 대의 인물인 득래(得來)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본래 덕씨였다기보다는 '덕래' 자체가 고유어로 된 이름이었을 개연성이 높다. 그러나 혁거세의 이름 '밝은 누리(*porke-nore)'의 앞부분 '밝'을 박(朴)으로 음차하여 성씨로 삼은 밀양 박씨, 김수로의 이름이 '쇠'를 뜻하는 옛말임에 착안하여 쇠 금(金)을 성씨로 삼은 김해 김씨처럼 후손들이 조상의 이름에서 성씨를 따오는 경우가 종종 나타나므로 덕씨도 그러한 사례에 해당할 수 있다.[63] 진구 황후 52년(372년?) 9월 10일 기사에는 칠지도가 백제의 곡나철산(谷那鐵山)에서 얻은 철로 만들어졌다고 적혀 있으며, 오진 덴노 8년(397년?) 3월 기사에는 왜국이 빼앗은 백제의 영토로 침미다례, 지침 등과 함께 곡나(谷那)가 언급된다.[64]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근초고왕의 12대손인 은솔 고난연자(高難延子)의 후예라고 한다. 《일본서기오진 덴노 16년(405년?) 기사에서 고난성(高難城)이 등장하므로, 고난씨 가문은 고난성을 분봉받은 방계 왕족 출신이었을 것이다.[65] 반비(半毘)는 오늘날의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일대에 해당하는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과 대응되는데, 소부리(所夫里)-사비(泗沘), 고사부리(古沙夫里)-고사비(古沙比)와 같이 백제의 지명 접미사 '부리'를 '비'로 표기한 사례가 종종 등장하기 때문이다. 반비씨 가문이 백제 제7대 사반왕의 후손이라는 《신찬성씨록》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흑치씨·고난씨처럼 분봉받은 지역의 명칭을 성씨로 삼아 왕실로부터 분가한 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66] 고조선 왕족의 후손이라는 당대 사료가 남아있는 유일한 가문이다. 족보상으로 준왕의 후손을 자칭하는 성씨로는 청주 한씨, 태원 선우씨, 행주 기씨가 있지만 셋 모두 실제 후손일 가능성은 낮다. 각 성씨의 연원에 대한 내용은 개별 문서 참고.[67] 정황상 《일본서기》 스진 덴노·스이닌 덴노조에 수록된 임나 사신 소나갈질지에 대한 설화와 동서 게이타이 덴노 7년(513년)조에 수록된 기문 관련 기록이 모티브가 되었을 것이다. # 출자 기록이 개변되긴 했으나 역사적 사실을 반영했다고 가정하여, 길씨 가문이 가야 지역의 군사 활동에 관여하며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68] 이름을 한자가 다른 지수(知須)로 표기하기도 한다.[69] 로쿠노 에마로(觮兄麻呂)라고도 부른다.[70] 당시 발음은 /*kemo-meter/ 정도로 재구된다. 금마저의 물가 저(渚)는 미지(彌知), 미진(未珍), 미동(未冬) 등으로 표기된 지명 어휘 /*meter/을 훈차한 것인데, 수입(水入)이라는 지명과도 비교할 수 있으며 현대어 '물-들이'에 대응되는 고대 한국어 어휘로 추정된다(최남희 2003).[71] 정확한 위치는 불명이나 《여씨춘추》, 《산해경》, 《회남자》 등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전설 속의 나라 흑치국(黑齒國)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흑치국은 전설에 따르면 하나라 우왕의 자취가 미친 나라들 중 동쪽 끝자락에 위치했다고 한다. 중국 전설에서 해가 뜨는 곳으로 언급되는 '부상국(扶桑國)'이 일본의 별칭으로 쓰인 것처럼, '흑치' 역시 백제 내의 한 지역을 지칭하는 표현으로서 고전으로부터 차용되었을 것이다.[72] 〈흑치준 묘지명〉에서는 중국식으로 '자사(刺史)'라 하였는데, 《구당서》 〈흑치상지 열전〉에 백제의 군장이 중국의 자사와 같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흑치덕현의 실제 관직은 군장이었을 것이다.[73] 〈흑치준 묘지명〉에서는 중국식으로 '호부상서(戶部尙書)'라 하였다.[74] 평양시 락랑구역에서 출토된 금석문을 통해 확인 가능한 낙랑군 시기의 고씨 인물로는 전한 대에 부조현장(夫租縣長)을 지낸 고상현(高常賢)#, 신나라 때 낙랑군의 오관연(五官掾)을 지낸 고춘(高春)#, 후한 영평 14년(서기 71년)을 전후로 활동한 고효통(高孝通)# 등이 있다. 백제에서 활동한 인물들은 하단에 기재된 본문 참고.[75] 비유왕 대인 450년 유송에 파견되어 서하태수(西河太守)에 제수되고 《역림》, 식점(式占: 점술의 일종)과 휴대용 쇠뇌를 받아간 대사(臺使) 풍야부(馮野夫)가 대표적이다. 활동 시기를 고려하면 438년 고구려에서 숙청당한 뒤 백제로 망명한 북연 황실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76] 개로왕·동성왕 시기 고달(高達), 양무(楊茂)와 함께 중국 남조에 사신으로 파견된 선위장군(宣威將軍) 겸 참군(參軍) 회매(會邁)가 대표적이다. 황해도 한군현 유적 출토 벽돌에 "건흥 4년(316년) 회경(會景)이 만들었다"라는 명문이 적혀 있음을 감안하면 한군현에서 고구려를 거쳐 백제로 이주한 씨족인 것으로 보인다.[77] 513년 6월 왜국에 파견되었다가 516년 9월 고안무와 교대하여 귀국한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가 대표적이다. 평양시 락랑구역 정오동 3호분 출토 칠기 명문에서 한군현 시기 단씨의 존재가 확인된다. 단씨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단(성씨) 문서 참고.[78] 성왕 대인 554년 2월 채약사(採藥師)로서 왜국에 파견된 시덕 반양풍(潘量豊)이 대표적이다.[79]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링크[80] 나솔 키노 오미 미마사(紀臣彌麻沙).[81] 나솔 코세노 카마(許勢奇麻).[82] 고달이 송나라에 파견된 것은 태시(泰始, 465~471) 연간의 일이라 전해지는데, 《송서》에서 나타나는 467년 11월 8일에 파견된 사절단과 471년 11월 4일에 파견된 사절단 중 어느 쪽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83] 흔히 알려진 주흥사(周興嗣, 470~521)의 천자문은 이 시기에 아직 없었기 때문에, 후한 말~삼국시대의 인물인 종요가 지은 천자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혹은 왕인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해 후대에 덧붙여진 내용일 수도 있다.[84] 나라 시대 승려 교기의 아버지인 코시노 사이치(高志才智)가 속한 씨족이다.[85]일본서기》에 따르면 그 국서는 까마귀 깃털에 적혀 있었기에 글을 읽을 수 없었으나, 왕진이가 깃털을 밥솥의 김으로 찐 다음 비단에 박으니 글자가 모두 드러났다고 한다. 물론 이는 과장된 일화일 것이며, 왕진이의 한문 실력이 특출났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편이 합당하다.[86] 백제 승려 관륵으로부터 역법을 전수받았다.[87] 기모군(旣母郡)은 지모현(支牟縣), 지모밀지(枳慕蜜地) 또는 지마마지(只馬馬知)라고도 불린 백제의 금마저군(金馬渚郡)과 같은 지명으로 여겨지며, 오늘날의 전북 익산시 금마면 일대에 해당한다. 좌관(佐官)이라는 벼슬은 부여 쌍북리 출토 〈좌관대식기 목간(618)〉에도 나타나는데, 중앙에서 파견되어 군장을 보좌하는 상급 관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88] 품달군은 이후 흑치상지가 군장을 지냈다고 기록된 풍달군(風達郡)과 같은 지역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위치는 불명이나, 흑치상지의 세력 기반인 임존성이 있었던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일대라는 견해가 있다. 여양 진씨(驪陽 陳氏)의 본관인 충청남도 홍성군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89] 660년의 멸망인지, 663년 백제 부흥운동의 실패로 인한 멸망인지는 불명이다. 다만 흑치상지와 사돈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아 후자일 가능성이 있다.[90] 이 내용은 북송 시기에 편찬된 문집 《문원영화》 459권과 《당대조령집》 130권에 수록된 〈명요숭등북벌제(命姚崇等北伐制)〉에 의한 것으로, 본래 공덕비에서 판독되지 않던 '▨부순'의 첫째 글자를 밝혀내는 단서가 된 기록이다. # #[91] 충청남도문화연구원 백제사 시리즈 참조.[92] 신라의 개입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안 전씨와 함께 전씨의 양대 분파인 정선 전씨의 족보에 의하면 그 선조가 신라와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쩌면 그 덕분에 전씨 전체가 살아남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즉, 충청도 토착 백제계 전씨는 진모씨와 함께 절멸했지만, 모종의 이유로 신라 땅 강원도 정선으로 이주했던 전씨의 극히 일부분이 살아남아 현재 모든 전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정선 전씨 족보》는 7세기 이전의 기록이 소실되어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93] 전씨 족보에 의하면 전씨와 마씨, 한씨 모두 백제를 개국할 때 공을 세운 10명의 '십제공신(十濟功臣)'에 속한다. 물론 해당 족보에 등장하는 공신들의 이름 중 전섭(全聶), 한세기(韓世奇), 곽충(郭忠), 범창(笵昌), 조성(趙成) 5명은 다른 사료에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에 후대에 창작된 인물로 추정되지만, 전씨 자체는 백제에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또한 《속일본기》에서 백제계 도래인 한원지(韓遠智)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므로 한씨 역시 백제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94] 흑치상지가 군장을 역임한 풍달군(風達郡)과 동일한 지역으로 추정된다.[95] 이런 사례는 현대에도 흔하게 발견된다. 일례로 일본의 유명한 중화요리사 친 켄이치(陳 建一)는 본명이 아즈마 켄이치(東 建一)인데, 중화민국에서 일본으로 귀화한 아버지 천젠민(陳建民)의 옛 성을 그대로 예명으로 쓴 것이다. 자형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진(陳)에서 좌측 변을 빼면 그냥 동(東)이 된다. 중국사에서 유명한 사마(司馬)씨의 경우, 현대에는 별로 남아있지 않지만 풍(馮)씨 등으로 변성한 경우가 많았다. 역시 자형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사마를 축소한 형태이다. 아예 조상의 이름을 성씨로 쓰는 식으로 변성을 한 경우도 있었는데 서촉 명씨의 일부가 명승의 이름인 '승'에서 따와 승씨로 변성한 사례가 있다. 이런 경우가 아니면 아예 한반도를 떠나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를 해야만 했다. 이에 백제의 후예를 자처하는 가문은 오히려 일본에 많다. 그리고 그쪽은 진짜로 백제의 후예일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고대와 중세 역사에서 도래계 성씨의 지위(가문의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참칭을 할거면 후지와라씨 계통의 공경(귀족) 가문(가문의 격에 따라 승진 제한이 있었다.)의 방계 후손을 칭하든지, 무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세이와 겐지(미나모토씨)의 방계를 칭한다든지, 미나모토씨에 의해 겐페이 전쟁에서 몰락한 무가의 대성인 헤이케(타이라씨)의 후손을 칭하는 것이 더 그럴듯하지 멸망한 백제의 후손을 참칭한다고 해서 굳이 일본의 고대와 중세 사회에서 이득볼 것은 없었다. 또한 일본으로 이주한 경우도 역시 원래 성씨를 그대로 쓴 경우는 없고 모두 변성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