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3 22:05:45

사사노궤

沙沙奴跪
생몰연대 미상

1. 개요2. 기록3. 국적

1. 개요

백제의 장군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목라근자와 함께 왜군을 이끌고 신라를 침공하였다.

2. 기록

아라타와케(荒田別)와 카가와케(鹿我別)를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구저(久氐) 등과 함께 군사를 정돈하여 바다를 건너가 탁순국에 이르러 신라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때 누군가가 "군사의 수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다시 사백(沙白)과 개로(蓋盧)를 보내 군사를 증원해달라고 요청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곧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사사노궤(沙沙奴跪)[원주1]에게 명령하여 정병을 이끌고 사백개로와 함께 가도록 하였다.

그 후 모두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탁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서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만(南蠻) 침미다례(忱彌多禮)를 무찌르고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肖古)와 왕자 귀수(貴須) 또한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그때 비리(比利), 벽중(辟中), 포미(布彌), 지반(支半), 고사(古四)의 읍[2]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이에 백제왕 부자와 아라타와케, 카가와케 등은 함께 의류촌(意流村)에 모였다.[원주2] 서로 보며 기뻐하며 예를 두텁게 하여 보냈다. 다만 치쿠마노 나가히코(千熊長彦)와 백제왕은 백제국에 가서 벽지산(辟支山)[4]에 올라 맹약하였다. 그리고 다시 고사산(古沙山)[5]에 올라서 함께 반석(磐石) 위에 앉았다. 그때 백제왕이 "만일 풀을 깔아서 자리를 만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또한 나무로 자리를 만들면 물에 떠내려 갈 것 같아 두렵다. 따라서 반석에 앉아서 맹약하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써 지금부터는 천추만세에 끊임없이 항상 서번(西蕃)이라 칭하며 해마다 조공하겠다."라고 맹세하였다. 그리고는 치쿠마노 나가히코를 데리고 백제의 도읍에 이르러 더욱 두터이 예우하고 구저 등을 딸려서 보냈다.
일본서기》 9권 진구황후 섭정 49년[6] 3월

사사노궤가 등장하는 《일본서기》의 기사를 있는 그대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왜국은 아라타와케, 카가와케, 구저를 보내 신라를 공격하려고 했는데 군사가 부족하다고 여긴 나머지 목라근자와 사사노궤를 지원군으로 보냈다. 그들은 지금의 창원으로 비정되는 탁순국에 집결해 신라를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으며, 가야 7개국을 평정하였고 군사를 서쪽으로 옮겨 고해진에서 남만 침미다례[7]를 물리쳐 백제에게 주었다고 한다. 백제의 근초고왕과 아들 귀수도 이들과 합류하였고, 비리 등 5읍이 이때 스스로 항복하였다.

승전 기념으로 백제군과 왜군은 의류촌에 모였고, 치쿠마노 나가히코와 근초고왕은 따로 백제의 벽지산과 고사산 반석에서 모여 맹약을 가졌다. 이때 백제왕은 자신이 반석에서 맹약하는 이유를 풀과 나무의 약함과 반석의 강함에 비유해 굳건한 동맹을 맺기 위함이라고 말한 뒤, 앞으로 번국이라 칭하고 해마다 조공하겠다고 했다. 또, 백제왕은 치쿠마노 나가히코를 백제의 도읍으로 데려가 대접한 뒤 다시 구저와 함께 돌려보냈다.

단, 《일본서기》의 기록은 지극히 일본 중심으로 쓰여져 있으며 특히 진구황후 시절의 기록은 곡해된 부분이 많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한국 사학계에서는 이 기사가 백제 주도로 진행된 침미다례 정벌 및 가야에서의 외교 활동을 반영한 것이며, 본래 백제삼서 등에 기록되어 있던 내용을 과장시킨 뒤 동맹군에 불과했을 왜국을 정벌의 주체로 설정하여 《일본서기》로 옮겨온 것이라는 설이 우세하다.

3. 국적

사사노궤는 이때 한 번 등장하는 인물이다. 《일본서기》에는 국적이 명확히 기록되지 않았으나, 김현구, 이제석 등의 교수들은 대성팔족의 하나인 사(沙)씨에 해당된다는 점을 들어 목라근자와 사사노궤 모두 백제 장군이며, 이것은 백제의 가야 정벌과 신라 공격, 마한 병합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일단 백제가 침미다례 정벌을 주도했다는 가설 자체는 기사를 있는 그대로 해석했을 때 생기는 각종 의문점들을 명쾌히 해결할 수 있어 한국 사학계의 통설이 되었다.

그러나 사건의 주체와는 별개로 사사노궤 본인은 왜인 혹은 백제-왜 혼혈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름 끝의 '노궤'는 카츠나코(葛那古), 코마나코(己麻奴跪), 아레나코(阿禮奴跪) 등 고대 일본 인명에서 종종 등장하는 접미사 '-나코'를 음차한 것이기 때문이다. 궤(跪)라는 한자 자체도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 사서에서 일본어 (こ)를 표기하는 데 쓰였으며, 금석문 자료인 이나리야마 철검 명문에서도 같은 단어를 적기 위해 부수만 다른 궤(垝) 자를 사용한 바 있다.


[원주1] 이 두 사람의 성(姓)은 알 수 없다.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의 장군이다.[2]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의 4읍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나, 《삼국지》에서 마한 54국을 열거할 때 '벽비리국 - 불미국 - 지반국 - 구소국'의 순서를 따랐음을 고려한다면 읍이 5개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한편 일각에서는 고사읍(古四邑) 부분을 지명이 아닌 "옛 4개의 읍"으로 풀이하여 비리, 벽중, 포미, 지반의 4읍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삼국사기》에 고사주(古四州)라는 지명이 기록되었음을 고려하면 고사읍 역시 지명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원주2] 지금은 주류수기(州流須祇)라고 한다.[4] 앞서 소개된 벽중읍(辟中邑), 즉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에 위치한 산으로 추정된다.[5] 앞서 소개된 고사읍(古四邑), 즉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에 위치한 산으로 추정된다.[6] 《일본서기》 기년 상으로는 서기 249년이다. 물론 근초고왕과 왕자 귀수가 등장하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실제 연대는 이주갑인상을 적용한 서기 369년으로 추정된다.[7] 주로 지금의 강진, 해남 일대로 비정된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