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08 16:37:02

탁기탄

{{{+1 [[변한|{{{#fbe673 변한의 국가}}}]]}}}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삼국지 위서 동이전 기록
미리미동국 | 접도국 | 고자미동국 | 고순시국 | 반로국 | 낙노국 | 군미국 | 미오야마국 | 감로국 | 구야국 | 주조마국 | 안야국 | 독로국
기타 기록 (가야 제국 포함)
거칠산국 | 걸찬국 | 다라국 | 벽진국 | 비지국 | 사이기국 | 산반하국 | 임례국 | 자타국 | 탁기탄 | 탁순국
}}}
}}}}}}

가야의 구성국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삼국유사의 가야 연맹 구성국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비화가야 고령가야 성산가야
일본서기의 가야 연맹 구성국
가라국 안라국 남가라 고차국 다라국 초팔국 탁순국
탁기탄국 사이기국 자타국 산반하국 졸마국 임례국 걸손국
문헌(삼국유사)에는 기록이 있으나 고고학적 실체는 불분명한 6가야 국가
}}}}}}}}}



1. 개요2. 위치3. 역대 (한기)

1. 개요

啄己呑
일본서기 기록되어 있는 가야 소국 중 하나. 판본에 따라 녹기탄(㖨己呑)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일본서기에는 6세기 가야의 멸망과정 중에 가장 먼저 멸망한 가야소국으로 등장한다.

신라-반파국의 결혼동맹 파기 이후, 신라는 그 보복으로 금관국과 탁기탄국을 멸망시켰다고 나온다. 멸망 시기는 다른 기록들을 봐서 정황상 529년 전후 2~3년 사이 어느 시기로 추정된다. 탁기탄과 금관국의 멸망으로 탁순국에 대한 신라의 위험이 증대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 위치는 금관가야가 위치했던 김해와 탁순국이 위치한 창원 부근, 혹은 그보다 동쪽에 위치한 양산시 부근으로 생각된다.

탁국(啄國)과 같은 나라라고도 하고, 서로 다른 나라라는 주장도 있다. 같은 나라라면 탁국의 마지막 왕으로 나오는 함파한기(函跛旱岐)가 탁기탄의 마지막 왕이다.

2. 위치

其㖨己呑 居加羅與新羅境際 而被連年攻敗 任那無能救援 由是見亡
탁기탄은 가라[1]와 신라의 경계 사이에 있어 해마다 공격을 받아 패배하는데도, 임나는 구원할 능력이 없었고, 이로 말미암아 망하게 되었다.
일본서기긴메이 덴노 2년(541) 4월

가야멸망의 스타트를 끊은 나라임에도 그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탁기탄은 사서에서 몇 차례 언급되지만 위치가 어딘지를 그나마 짐작하게라도 하는 기록은 위 기사뿐으로, 확실히 알 수 있는 정보는 신라와 가야 경계선상에 있는 작은 소국이라는 정도다.

김태식창녕군 영산면과 남지읍 일대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이 일대의 고분군은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과 유물양상이 궤를 같이 하고 있으므로 양자는 동일한 정치체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따라서 창녕의 남부지역인 영산면 일대는 창녕 북쪽의 교동, 송현동 세력인 비자벌의 일파로 추정되므로 이러한 추정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탁순 멸망 기사의 내용과 신라의 진출 방향성, 그리고 고지형과 고분군 양상을 고려했을 때 탁기탄이 위치한 곳은 창원시 북쪽 창원시 의창구, 북면과 동읍, 김해 진영읍 일대로 생각된다. 근거로 이 세 지역의 중심지역이라 할 수 있는 창원시 의창구 동읍에는 다호리 고분군이 위치하고 있는데, 다호리 고분군은 기원전후부터[2] 6세기 중후엽 횡혈식석실분까지 지속적으로 축조되었다. 고총의 경우 직경 30m에 달하는 것들도 있어 가야소국의 중심고분군으로 보기에 손색이 없다. 이를 보면 탁기탄은 창원 북부 혹은 김해 진영읍이 가장 유력한 기반지로 추정된다.[3]

이 지역을 금관가야의 초기 중심지로 이해하거나, 금관가야의 배후지로 해석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기원전후에 다호리에 금관국의 중심지가 위치했다가, 2~3세기에는 예안리, 양동리, 3세기 부터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으로 옮겨갔다는 식이다. 그러나 해당 고분군 모두 기원전후부터 축조되었다고 여겨지므로, 각각의 세력이 시기에 따라 흥망성쇠가 있었다곤 해도 특정세력이 계속해서 이동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또, 5세기 이후 금관가야 중심지가 진영일대로 이동했다고 보기도 한다(박천수 2010). 그렇지만 당시 해수면이 높았던고로, 그것을 반영하여 고지형 복원할 경우 현 김해시내 지역과 진영면 일대는 대산만이라는 바다로 단절되어 있으며, 단절된 평야의 중심에 다호리 고분군이 위치하고 있으므로 양자가 같은 세력이라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다호리 고분군은 기원전후 목관묘 축조시기 부터 6세기 중엽에 걸쳐 축조된 별도의 정치체의 중심고분군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고고학적 자료의 양태와 지리적 위치를 고려할 때 창원시 북면, 동읍, 김해시 진영 일대는 탁기탄이라는 나라가 아주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금관가야와 탁기탄이 신라로 넘어가면서 탁순국이 안보적 위기를 느꼈다는 기사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현 창원시 기준으로, 북쪽은 탁기탄, 동쪽은 금관국이 위치했고, 이 곳이 모두 신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다호리 고분군은 4~6세기에 이르는 삼국시대 고분이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고, 지표조사와 현황조사만 일부 이루어졌다. 앞으로의 발굴 결과가 기대된다.

3. 역대 (한기)



[1] 일본서기에서 아무 설명 없이 그냥 "가라"라고 칭하면 반파국을 뜻한다.[2] 그 유명한 다호리 1호분이 여기에 위치한다[3] 탁순국의 중심 고분군으로 여겨지는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위치한 합성동 고분군과 맞먹는다[4] 탁기탄국은 500년 초중반 멸망되었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