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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헌(삼국유사)에는 기록이 있으나 고고학적 실체는 불분명한 6가야 국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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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령가야(古寧伽倻)삼국유사에 나오는 6가야 중 하나.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이안면, 공검면[1]과 예천군 일대에 존재했던 나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었다는 설도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후술되어 있다.
2. 상세
고령군(古寧郡)은 본래 고령가야국(古寧加耶國)으로 신라가 취하여 고동람군(古冬攬郡)[3]으로 삼았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쳐서 지금은 함녕군(咸寧郡)이다. 속해있는 현은 셋이다.
삼국사기 권34 잡지 3편 지리지
삼국사기 권34 잡지 3편 지리지
아라가야는 지금의 함안이요, 고령가야(古寧伽耶)는 지금의 함녕(咸寧)이고, 대가야는 지금의 고령(高靈)이며, 성산가야는 지금의 경산이니, 소가야는 지금의 고성이다.
또 본조의 사략에 이르기를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에 5가야의 이름을 고치니 1은 금관이요, 2는 고령(古寧)[4]이요, 3은 비화요, 나머지 둘은 아라와 성산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1 기이 1편 오가야
또 본조의 사략에 이르기를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에 5가야의 이름을 고치니 1은 금관이요, 2는 고령(古寧)[4]이요, 3은 비화요, 나머지 둘은 아라와 성산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1 기이 1편 오가야
본디 고령(古寧) 가야국(伽倻國)인데, 신라에서 취하여 고동람군(古冬攬郡)을 만들었고, 경덕왕이 고령군(古寧郡)으로 고쳤다. 고려 광종 15년 갑지에 함녕군(咸寧郡)으로 고쳤고, 현종 9년 무오에 상주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함창군(咸昌郡)으로 고쳤다.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상주목 함창현
고령가야는 삼국유사에 6가야 구성국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위치는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일대로 전해지고 있다. 최소한 고려 시대부터 이어져오던 전통적인 인식이었는데, 함창읍 일대에 이를 뒷받침한다고 추정되는 여러 유적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조는 근대의 역사학계에서도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다.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상주목 함창현
과거 일본의 역사학자인 나가 미치오(1851~1908)는 "고령가야는 휴인국과 소리가 비슷하다. 가야제국의 강역 밖에 있으며 가야산과 많이 멀다. 경상도 북서쪽에 치우쳐있어 신라와도 떨어져있다."라고 말하며 기존의 기록을 큰 문제없이 받아들이는 인식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역사학에 실증주의가 도입되면서 이런 전통적인 인식은 여러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함창은 일찍부터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대가 되었던 지역이였고, 기타 가야계 소국들과는 달리 지나치게 북쪽에 위치해있으며, 당장 함창 바로 남쪽에 진한계 국가인 사벌국이 존재했었다는 문제점이 제기된 것이다. 더불어 직접적으로 가야계통 문화와 연결되는 실증적인 유적과 유물이 전무하다는 점 역시 이러한 의혹을 뒷받침했다.[5]
때문에 엄밀히 따져보자면 고령가야가 위치했다는 함창은 가야계 소국이 아니라 진한계 소국이 자리잡고 있었다가 일찍이 신라에 병합당했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어 보였다. 따라서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고령가야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이병도 등의 역사학자는 고령가야의 '고령'이 진주시의 고지명인 '거열'과[6] 음이 비슷하다는 것과 가야제국 내 지리적 중요성 등의 이유를 들어 고령가야를 진주에 비정했다.[7] 즉, 다시 말하자면 함창 지역과는 별개로 '고령가야' 라는 가야 구성국이 진주에 존재했고 후대에 그 위치가 함창으로 잘못 비정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주시에는 엄연히 자타국과 그 이외의 가야계 국가들이 있었다는 점과[8] 비정의 근거가 미약하다는 점 등의 비판이 있기도 하다.[9] 다만 고령가야가 아예 가야계 소국인 자타국을 지칭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 경우 모순점은 사라지게 되나 역시 근거가 미약한건 마찬가지다.
최근 들어서 남익희, 김세기, 이영호 등의 현대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상주에 있었다는 고령가야가 가야 구성국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고 삼국유사의 기록은 후대의 변형된 인식이란 설이 주목받고 있다. 이 주장의 경우 가야계 소국인 고령가야라는 것은 나말여초에 처음 등장한 관념적인 가상의 국가에 불과하며,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가 된다.[10]
앞서 언급되었던 실증주의적 근거들에 더하여, 고령가야의 '고령'이 한참 후대인 경덕왕대에 붙여진 이름이란 것이 이런 견해를 뒷받침한다. 즉, 함창 지역에 독립적인 소국이 존재했던 것은 맞지만 가야계 국가는 아니었고 신라에 병합당한 이후에 인식의 변화에 따라 '고령가야'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일단 아직까지는 정설이 없는데다가 이런저런 견해가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인지 현행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고령가야의 위치표기 자체를 하고있지 않다.
3. 가야계 국가인가?
고령가야에 관한 기록이 워낙 짧고 간략하기 때문에 결국 고고학을 통해 살펴볼 수밖에 없다. 고령 가야의 고분군이 있는 상주시 함창읍에 있는 오봉산 고분군은 경상북도, 상주시의 지원으로 경북문화재단 문화재연구원에 의해 2021년부터 현재까지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일단 삼국사기, 삼국유사,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문헌적 기록과 구전으로 전해지는 고령가야왕릉과 왕비릉 그리고 오봉산 고분군을 비롯한 물적 증거들이 여럿 산재해 있으므로, 후대에 고령가야라고 불린 어떤 독립소국이 상주시 함창읍, 이안면, 공검면 일대와 문경시에 걸쳐 존재했을 가능성은 높아보인다. 다만 경상도 남부에 위치한 가야연맹과의 연관성은 발굴조사가 어느정도 끝난 다음에야 명확히 규명될 것이다.
앞서 언급되었던 주장으로 삼국사기 지리지나 삼국유사에 기록된 고령가야는 후대[11]의 인식에 기반하여 고려 시대 문헌에 기록으로 남게 된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고령가야 함창설이나 진주설보다 설득력은 있지만 이 역시 고고학적인 근거가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다.
최근에 진행된 오봉산 고분군의 발굴조사 성과 설명회가 열렸는데 6세기에 조성된 지역 최고 수장급 무덤이 발굴되는 성과가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고령가야와 연관된 유물들은 출토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고분군 전체 중 일부만을 발굴한 것이므로 고령가야와 연관된 유물이 다음 발굴조사에서 드러날 수도 있다. #
4. 왕사
대수 | 휘 | 재위기간 |
1대 | 고로왕 백진(古露王 白珍) | 42~156 (115년) |
2대 | 마종왕(摩宗王) | 156~220 (65년) |
3대 | 이현왕(利賢王) | 220~254 (35년) |
기본적으로 족보는 윤색과 과장, 조작 등의 왜곡이 심해 사료적 가치는 가장 낮게 여겨지지만 고령가야의 경우 워낙 기록이 적어 나름의 의미는 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함창 김씨는 현대에도 겨우 2~3만명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조선 후기에 족보를 사서 양반이 되었다든지 했다는 일은 적은 것으로 보이므로, 족보 그 자체는 믿을 만할 수 있다.
5. 관련 유적
- 전 고령가야 태조왕릉 : 상주시 함창읍 증촌리에 위치해 있으며 고령가야의 태조가 묻혀있다고 전해지는 무덤이다. 함창 김씨 족보에서 초대왕은 고로왕이기 때문에 '고로왕릉' 또는 왕비릉의 서편에 있어 '서릉' 이라고도 불린다. 선조 때인 1592년에 경상도관찰사 김수와 함창현감 이국필이 ‘고령국태조 가야왕릉’ 이라고 적힌 묘비를 발견하여 태조왕릉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 전 고령가야 태조왕비릉 : 상주시 함창읍 증촌리에 위치해 있으며 고령가야의 태조의 왕비가 묻혀있다고 전해지는 무덤이다. 태조왕릉의 동편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동릉' 이라고도 불린다. 일단 왕릉과 왕비릉 모두 삼국시대의 원형봉토분 양식이긴 하나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적은 없다.
- 오봉산 고분군 : 함창읍 신흥리에 위치해 있는 삼국시대의 무덤군이며, 약 700여기의 고분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도굴당해서 훼손이 심각하다고 한다.[13] 현재는 유적보존 겸 도굴방지 차원의 발굴조사에 들어간 상태이다.
- 왕도골 : 숭덕산의 밑인 이안리, 가장리의 경계에 위치하고 역곡리와 접해있는 지역으로 고령가야의 왕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근처에 이안천이 흐르며 '함창현지' 등의 문헌에선 '왕도동(王都洞)' 이라고도 부른다.
- 남산고성 : 오봉산 자락에 있는 삼국시대의 포곡식 산성으로 고령가야의 왕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 기타 구전으로 전해지는 지역들 #
다만 이러한 유적들은 어디까지나 추측이나 구전에 지나지 않아 제대로된 발굴조사와 후속연구가 있기 전까진 무엇 하나 확실하게 증명할 수는 없다. 현대 한국 역사학계에서 부정되는 기자 관련 유적이나 전승들도 평양 지역에 산재되어 있고 전구형왕릉의 사례나 발굴 결과 연대가 전혀 맞지않는 신라왕릉들을 봐도 알 수 있듯이 후대에 덧붙여진 전승일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다.
6. 여담
- 한자는 '古寧伽耶'인데, 경상북도 고령군(高靈)과는 한자가 다르다. 하필 그 경북 고령에는 대가야(반파국)가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가야 이름 외울 때 헷갈리는 이름 중 하나다.
- 후삼국시대의 상주에서도 일종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령가야가 아닌 사벌국의 부흥운동이었다. 후삼국시대에 상주에서 나타났다는 세력에 대해서는 후사벌국 문서 참조.
- 6가야의 위치를 표기하고 있는 역사 지도들을 찾아보면 고령가야는 보통 진주시나 상주시 둘 중 하나에 비정되어 있다. 위치에 대한 양측의 주장 중 하나를 선택하여 표기했기 때문인데 상주설을 따라가는 지도의 경우 가야의 영역이 북쪽으로 길게 뻗는 식으로 그려진다.
- 일부 유사역사학 단체와 지지자들은 고령의 대가야와 구분한답시고 '고녕가야'라고 마음대로 고쳐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정식명칭은 엄연히 '고령가야'다.
- 특이하게도 불교계 쪽에서 고령가야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이병도 식민사학자설,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같은 환빠들의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하거나 이덕일을 학술대회에 초청하는 등 사실상 환독에 오염되어 유사역사학의 길로 빠져버린 상태이다. # #
[1] 이상 구 함창현.[2] 하술하는 지역 중 중심지인 함창읍(함창읍사무소)에서 고령군(고령군청)까지는 직선거리로 대략 94km나 떨어져 있고, 중부내륙고속도로‐광주대구고속도로를 타고 1시간 이상 가야 한다.[3] 한편 고릉현(古陵縣)이라고도 이른다.[4] 가리현(加利縣)이 되었다.[5] 고령가야와 연관되었다고 여겨지는 유적이나 특정 지역은 구전과 추측에 기반한다.[6] 진주시의 옛 행정구역 명이 '거열성(居烈城)'이었다.[7] 한국고대사연구(1976), 이병도.[8] 엄밀히 따지자면 이것도 완전히 확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대개 자타국이 진주시의 옛 이름인 '거타(居陀)', '거열성(居烈城)' 때문에 진주시로 비정되는건 사실이지만 거창군 역시 옛날 이름이 '거타(居陀)', '거열(居烈)'이라 거창군이 자타국이라는 학설도 있기 때문이다. 즉, 진주시와 거창군은 고지명이 같다. 그런데 이러한 이유로 고령가야 진주설이 비판받기도 한다. 똑같은 논리를 적용하면 거창군 역시 고령가야의 후보지인데 이 가능성은 왜 배제하냐는 것.[9] 지나치게 지명에 의존한다는 점은 이병도의 생전부터 지적되던 문제점이기도 했다.[10] 가야연맹사(1993), 김태식.[11] 대략 통일신라 말 이후, 이미 수백 년 뒤다.[12] '태조 고로대왕'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13] 과거 오봉산 고분군에서 도굴된 유물들은 대부분 전국 각지로 유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