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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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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토론 합의, 토론주소1=NondescriptCapriciousThreateningTray, 합의사항1=한사군과 미소군정을 틀에 존치하는 대신 첨자로 추가설명, 토론주소2=AnUtopianAndLudicrousThrill, 합의사항2=대한민국의 역대 공화국들은 글자 크기를 줄여서 존치, 토론주소3=SelfishFaultyLongingTurkey, 합의사항3=부제에 강조 표현을 삽입하기, 토론주소4=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4='구한말(개화기)' 서술을 '개화기'로 서술, 토론주소5=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5='남북국시대' 서술은 존치, 토론주소6=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6='삼국시대' 시대구분 표 내 칸은 세로 3칸으로 분리하며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중 첫 번째 칸은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서술 -> 두 번째 칸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서술하며 -> 세 번째 칸은 '고구려'/ '백제'/ '신라'만을 서술, 토론주소7=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7= '주호'는 삭제하되 -> '탐라' / '우산' 서술은 존치, 토론주소8=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8=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서술은 존치하되 -> 남북한 / 임시정부 / 미군정 / 소련군정을 제외한 현대의 단체들의 이름 및 수식어는 모두 삭제한다., 토론주소9=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9=세로 열에 height를 모두 동일하게 지정하여 시각적으로 각 칸이 구별될 수 있도록 한다., 토론주소10=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10=본 틀 내 가야에 대한 첨자로 '가야는 신라의 복속 이후에도 사료에서 존재가 확인되어 7세기 중엽까지 반독립적 상태로 존속했다는 학설도 있음'을 서술한다., 토론주소11=RealChildlikeExclusiveJewel, 합의사항11=근대시점을 개화기\, 일제강점기로 구분하고 해당 정치체로서 개화기에는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조선\, 대한민국 임시정부만을 링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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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자조선은 현대 주류 학설에서는 인정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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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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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 伽倻
Gaya Confederacy (Kaya Confeder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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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가야의 영역
42년~562년[1]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변한 신라
국호 <colbgcolor=#fff,#1f2023>가야(伽倻)
구야(狗邪), 가라[2], 임나
위치 한반도 남부[3]
구성국 금관국(금관가야), 반파국(대가야)
안라국, 고자국, 벽진국, 고령가야, 비지국[4]
주요 사건 42년 건국[5]
77년 황산진구 전투
94년 마두성 전투
115, 116년 황산하 전투
209년 포상팔국의 난
529년 안라회의
541, 544년 사비회의
554년 관산성 전투
562년 대가야 멸망, 소멸(가야멸망전)[6]
종족 한(韓)[7]
언어 가야어
(고대 한국어)
정치 체제 군주제
종교 한반도 토착 종교, 불교, 도교, 유교
국가원수 (한기)[8]
현재 국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1. 개요2. 특징3. 명칭4. 영토와 체제5. 군사6. 건국 신화7. 연표8. 문화
8.1. 주거8.2. 언어8.3. 음식8.4. 종교
9. 가야의 구성국10. 유물·유적
10.1. 현존하는 유물 목록10.2. 가야고분군10.3. 도성 및 궁궐
11. 역사귀속과 계승인식12. 식민사학13. 여담14.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YTN 사이언스, 가야의 미스테리
육가야
<colcolor=#000> 국가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성산가야 고령가야
성립 기원전 2세기 1세기 중반 기원전 1세기 2세기 초반 1세기 중반
발전 2세기 초반 5세기 중반 3세기 후반 3세기 초반
전성기 285년 479년 529년
쇠퇴 400년 554년 548년 513년 369년 212년
멸망 532년 562년 561년 554년경 400년 254년
군주 수 10명 16명 ?명 9명 ?명 ?명
건국 군주 수로왕 이진아시 아로왕[A] 말로왕 벽로왕[A] 고로왕[A]
멸망 군주 구해왕 도설지왕 이형왕[A] 이현왕[A]
수도 김해 고령 함안 고성 성주 상주
가야는 삼국시대 초중반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한국의 여러 고대 국가의 총칭이다.[14] 가야의 위치는 현대의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경상남도의 상당부분과 부산광역시의 일부 그리고 경상북도, 전북특별자치도, 전라남도 3도 각각의 일부분이 가야에 속했다.

2. 특징

한국의 고대국 삼한의 하나였던 변한에서 기원했으며, 삼한 중 마한진한이 일찍부터 백제신라를 중심으로 고대국가로 발전한 것과 달리 6세기 중후반까지 여러 작은 나라의 형태로 있었다. 물론 수백 년이란 오랜 기간에 걸쳐 있는 만큼 그 여러 작은 나라도 그대로 쭉 간 것이 아니라 소국들 간에 흥망성쇠가 계속되었다. <삼국유사>에는 6개의 나라가, <일본서기>에는 10개의 나라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24개 나라가 거론된다.

가야 안에서 전기에는 김해시금관국이, 후기에는 고령군반파국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나[15] 이는 여럿 중 대표적인 세력 정도의 지위였다. 비교적 최신 연구에서는 함안군안라국이 앞에 말한 두 나라에 버금가는 세력으로 여겨지기도 하며,[16] 이외에도 독자적인 세력권을 갖춘 여러 성읍국가가 있어서, 차차 중앙 집권화된 광범위한 고대 영역국가로 발전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과 달리 멸망할 때까지 도시를 초월한 하나의 통일된 정치 단위를 이룬 적이 없었다. 학자에 따라서 대가야가 고대 국가 단계에 진입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17] 물론 대가야의 전성기에는 호남 동부까지 진출하며 백제에 맞먹는[18] 모습까지 보여주었지만, 결국 가야권을 완전히 통일하지 못하고, 고령군과 그 주변만을 직접 통치하는 단계에서 신라에 병합되고 말았다.

이렇게 가야는 멸망하는 순간까지 지역별로 작은 나라가 존재하는 단계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기에 이전 명칭인 변한 시절과 실질적으로 구분하기는 어렵고, 몇백 년은 기간동안 바뀌는 부분은 있지만 큰 틀에서는 '변한 = 가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한과 가야의 발음에서도 유사성이 있는데 의 상고음이 '*ɡˤar(가르)'로 재구되며 '야(耶)'는 상고음이 /*laː(라)/로 재구되기 때문이다.

변한과 가야가 연결되는 것인지 구별되는 것인지, 구분한다면 어느 시점으로 구분할지는 학계에서 의견이 통일되어 있지 않다. 학계 쪽 용어로는 가야사의 시작이 변한(=가야 전기)이고 5세기부터 가야 후기라는 전기론(前期論), 변한이 가야의 모태지만 둘은 구분해야 하며 3세기까진 변한, 4세기 이후는 가야라는 시각을 전사론(前史論)이라고 한다. 전기나 전사나 실질적으로 동일한 개념이라고 봐서 원사론(原史論)이라고 정의해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대체로는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쯤을 변한과 가야의 구분시점이라고 보는 편이다. 그 이전까지는 지역별로 특색있는 유물이 나타나지 않고, 변한과 진한이 제사 빼곤 비슷했다는 중국의 삼국지 기록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가야사의 특징은 다른 삼국에 비해 문헌 기록이 매우 빈약하다는 것이다. 일단 가야 측이 당시에 주체적으로 남긴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야가 당시에 문자기록을 남겼는데 유실됐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남기지 않았는지도 알 수 없고[19] 개황력본조사략, 가락국기와 같이 확인되는 가장 이른 시기의 가야 관련 기록도 결국 가야가 사라지고 오랜 세월이 지나 편찬된 것으로 보이고 그마저도 후손들이 조상을 높이기 위해 윤색한 흔적이 강하다. 그리고 그나마 신라 사회에서 출세한 김해 금관국 계통 외에 나머지 가야 계통의 기록은 더 부족하다. 신라 계통 사서에 기반한 삼국사기와 백제 계통 사서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일본서기에서는 가야가 꽤 자주 등장하지만 전부 신라나 백제를 중심으로 해서 타자로서 등장하는 부분적인 기록뿐이고, 삼국유사에서는 가야를 좀 챙겨주긴 했지만 삼국유사 특성상 설화적 내용으로 가득차 있고 분량도 충분하지 못하다. 가야는 중국식 한문 역사기록체계가 제대로 자리잡기 전에 멸망했고, 가야권을 아우르는 중앙정부가 없었으므로 가야 전체의 관찬사서를 편찬할 주체 같은 것이 없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일본서기 같이 선전으로 얼룩진 해외 기록이나, 땅 속에서 나온 유물의 형태나 분포로 정황을 추적하는 고고학 의존도가 다른 삼국보다 훨씬 높다. 다행히 가야계 무덤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에 비하면 도굴 피해가 심하긴 하지만 시신을 안치하는 주곽과 부곽이 나뉘어 있었던 특성상 무덤 주인공 석실은 털려도 부장곽이나[20] 순장자가 묻힌 순장곽은 무사한 경우가 많아 고구려나 백제 무덤[21]보다는 훨씬 도굴 피해가 덜하고 유물도 풍부한 편이라 고고학적으로 연구하기는 좋은 환경이다.

기록이 부족하므로 그 얼마 없는 기록에 대한 해석도 상당히 치열한 편이다. 특히 아래 여담 단락에서 설명된 경북대학교 주보돈 교수와 부산대학교 신경철 명예 교수로 대표되는 두 학파의 대립이 있다. 각자 많은 근거가 있지만 간단히 말하면 경북대는 현재 경북인 고령군에 자리했던 대가야를, 부산대가 현재 경남인 김해시에 자리잡았던 금관국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처럼 가야는 도시마다 국가가 따로 존재했으므로 각 지자체와 학교들이 자기 고장에 있었던 나라에 비중을 두고 연구하고 지원하는 향토사적 접근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특징도 있다. 예를 들어 옆동네 신라와 비교하면 신라는 지금의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고대 국가로 안착해 결국 경주 외 나머지 신라권 지자체들은 자기 지역의 고대사를 연구해도 결국 신라의 변방 역사일 뿐이지만, 가야권은 각 지자체가 주인공이 되는 연구를 할 수 있었으니 1990년대 지방자치제 이후 매력적인 컨텐츠로 유행했다. 가야사의 가장 주요한 특징이었던 정치적 분립성이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지방자치제 시행을 통해 되살아난 것이다.[22] 이런 지역주의적 연구는 재정적 지원을 하는 지역정치인,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성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간혹 무리한 해석을 시도하는 등 부작용도 있었기에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지역의 지원이라도 없으면 애초에 연구 자체가 미진했을 분야인데다 연구성과가 여태 쌓여온 것도 있다보니 이런 구도는 한동안은 계속될 듯하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진한(이후의 신라) 지역과는 언어, 법속, 의식주가 같고 제사 풍속만 다르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이 두 지역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부분은 그다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가야와 신라가 합쳐진 이후 신라는 신라 귀족과 같은 진골 골품을 줬고 삼국 통일 이후에도 9서당 10정이나 9주 5소경을 나눈 기준 등을 보면 고구려계, 백제계, '가야를 포함한 신라계' 크게 세 집단으로 통일신라인을 나눠 구분하고 있는데, 이를 봐선 낙동강 동안의 원신라인들도 옛 가야계와 토박이 신라계를 철저하게 구분하려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김해 금관국을 중심으로 2세기경에 발전하기 시작하여 3세기에 무역으로 많은 부를 누렸지만, 광개토대왕의 남정 때 타격을 받았다는 것이 통설이다.[23] 이후 5세기경에 반파국(대가야)을 중심으로 지금의 호남 동부 일부까지 진출하며 중흥하지만 5세기 후반 이후에는 백제신라를 계속 때려주던 고구려도 내분과 돌궐의 침입으로 쇠약해지고, 혼란기를 수습하고 정신을 차린 두 나라의 사이에 끼고 체급차에 밀려 결국은 하나하나 신라항복 또는 흡수되었다.[24] 6세기 들어 백제 성왕이 가야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노력했던 적도 있었지만 관산성 전투(554년)에서 백제가 신라에 대패하면서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고, 이를 회복하기 위해 562년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침공했으나, 오히려 이를 계기로 신라 진흥왕이 가야 전 지역을 완전 병합하게 되었다. 사실 가야 세력권의 서부 일부[25]는 백제가 차지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가야에서도 변방 일부라 크게 주목은 받지 못하는 편이다.[26]

진한의 소국들과 마찬가지로 가야의 소국들 역시 신라에 하나하나 병합될 때, 특히 큰 저항 없이 순순히 항복한 경우는 신라의 유화 정책에 의해 기존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일례로 김유신의 선조 집안인 금관 가야의 왕족들은 신라에 병합되고 나서도 구형왕에게 김해를 식읍으로 주고 왕족에 버금가는 지위(진골)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신라에 흡수된 뒤에도 금관국 왕족 가문, 우륵, 강수, 진경대사 등 여러 가야계 인물들이 신라에서 활약했다.

3. 명칭

현대에는 대표적인 명칭으로 가야(伽倻)혹은 가야국(伽倻國)로 알려져 있지만 가야가 존속했던 시대는 아직 한화(漢化)가 거의 되지 않은 시대라 한자 표기가 고정적으로 정착하지 않았고, 때문에 여러 기록에는 고대 한국어를 들리는 대로 음차한 수많은 명칭인 가야(伽耶), 가라(加羅), 구야(狗邪), 가락(駕洛) 등으로 등장한다.

가야의 어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다.

구야[27]의 '구(狗)'의 Schuessler의 후한대 한어 재구음은 "ko[28]"이며, 邪는 "ja[29]"이다. 따라서 삼국지 동이전이 기록되던 3세기경 당시 '가야'는 "고야"와 가까운 발음이다. 나라 한(韓)의 Baxter–Sagart 상고 한어 재구음은 "[ɡ]ˤar" > Shuessler ɣɑn로, 가야와 관계되는 단어일 가능성이 있다. 최남선겨레라는 말과의 연관성을 주장했다.[30] 또한 일본서기에서도 한자 族를 가라로 읽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겨레'는 중세국어에서 '결에'로도 나타나므로 기원적으로 *결게로 재구되기 때문에 가야의 어원이 될 수 없다. 또한 일본서기에서 族를 가라로 읽는 것도 숙자훈의 일종으로 그 기원은 마찬가지로 가라로 읽는 일본 고유어 柄 "자루"로부터 온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본인의 저서 강역고에서 '가나(駕那)'가 기원이고 이는 가야 사람들이 끝이 뾰족한 고깔을 쓰고 다닌 데서 유래한 말이고 이를 중국인들이 삼국지를 쓸 때 변한(弁韓) 또는 변진(弁辰)으로 쓴 것은 그 모습을 형용한 것이라고 했다. 이후 한치윤 등 많은 실학자들이 이 견해를 따랐고 일본의 아유가이도 가야가 갈[冠弁]에 기원을 둔다며 같은 견해를 보였다. 일제강점기의 학자 이마니시 류는 '간나라'를 어원으로 추정했는데 가야 지역에서 간은 '干', '旱', '韓'으로도 표시하는 말로서 '神', '上', '大'의 뜻을 가지므로 간나라는 신의 나라, 또는 큰 나라라는 뜻이라고 했다. 안재홍은 가야 국가들이 낙동강변에 있었으므로 '가람(江)'이라는 말이 기원이라 추정하기도 했다

또한 성읍설도 존재한다. 고대 한국어에서 '구루(溝婁)'가 성, 성읍을 의미하며 여기서 파생된 단어라는 설이 있다.[31]

주보돈의 해석은 임(任)은 맡길 임(任)이며 ‘ 나’는 땅에 대응하는 고대 한국어이며, 해석하자면 백제가 맡긴 땅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백제삼서 등 백제계 사료에 대거 사용되었고 일본서기가 차용하면서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애초에 일본서기에서도 성왕이 가야 지도층과 만난 사비회의에서 가야와 백제근초고왕 시절 이래로 형제의 의를 맺었다고 언급한 바가 있다.

가장 널리 쓰이는 '가야'는 현대에는 '伽倻' 한자표기가 가장 보편적인데, 국어사전에도 이 표기로 올라와있고 가야 명칭이 파생된 가야금, 가야산, 가야동 같은 지명들도 거의 저 한자 표기를 쓰지만 정작 이 한자 표기는 원사료로서의 가치가 없는 고려 후기~조선 시대 이후부터 쓰이기 시작한 표기다. 삼국사기는 주로 '加耶'로, 삼국유사는 '伽耶'로 표기했다.[32]

여러 명칭 중 임나(任那)라는 명칭은 한국 기록보다 일본 기록에서 그 등장 빈도가 많으며 특히 임나일본부설 때문에 현대 한국에서는 부정적인 인상의 명칭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임나'는 가야 지역을 이루는 여러 구성 세력 중 하나이다.[33] 이 임나는 일본에서는 "미마나"로 훈독하는데, 임나의 어원에 대한 설은 미오야마국의 이름이 와전된 것 등 몇 가지가 있지만 뚜렷한 기록이 없으므로 정설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34]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뒤를 급히 쫓아 임나가라(任那加羅)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렀다.
광개토대왕릉비

王驚喜恨相見之晩問其姓名對曰臣本任那加良人名牛頭王曰見卿頭骨可稱強首先生
이 놀라고 기뻐하며 그를 늦게 만난 것을 유감스러워 하였다. 그 성명을 물으니 “신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으로 이름은 우두(牛頭)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그대의 머리뼈를 보니 강수선생이라고 부를 만하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강수

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每苦隣兵投於我國
대사의 이름은 심희요, 속성은 김씨이니, 그 선조는 임나(任那)의 왕족이다. 풀에서 성스러운 가지를 뽑았으나 이웃 나라의 침략에 괴로워하다가 우리 나라에 투항하였다.[35]
「진경대사탑비문」
일본서기에 임나의 북쪽이 바다로 막혀있다는 기록도 있는데 지금의 경상도 서부 일대 위주였던 가야에 북쪽 바다로 볼 만한 지형은 전혀 없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임나가 대마도에 있으며, 고대 한국의 국가들이 대마도를 점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에 대한 반론으론 김해평야 일대는 고대에는 김해만이라는 바다였고 북쪽인 밀양도 바다였기 때문에 임나가 해당한다는 견해가 있다.
六十五年秋七月任那國遣蘇那曷叱知令朝貢也任那者去筑紫國二千餘里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
65년 가을 7월 임나국이 소나갈길지를 보내 조공하였다. 임나는 축자국에서 2,000여 리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 계림(신라)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일본서기』 숭신 천황 65년
현대에는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등으로 알려졌지만 이 중 그 당시에 그렇게 불렀던 나라는 대가야 하나 뿐이고 나머지는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으며, 고려 태조 왕건이 가야 지역 일대 호족들에게 XX가야라는 명칭을 부여하여 옛 가야 시대 이름인 양 와전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按駕洛記賛云垂一紫纓下六圎卵五歸各邑一在兹城則一爲首露王餘五各爲五伽耶之主金官不入五數當矣而本朝史畧並數金官而濫記昌寕誤
가락기』 찬을 살펴보면, "한 가닥 자줏빛 노끈이 드리워 / 여섯 개 둥근 알을 내리니 / 다섯은 각 고을로 돌아가고 / 한 개가 이 성 안에 남았다."라고 했다. 즉 하나는 수로왕이 되고 남은 다섯은 각각 다섯 가야의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것이니, 금관을 다섯 숫자에 꼽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본조(本朝)의 『사략(史略)』에서 금관도 함께 꼽아 창녕(昌寧)이라고 함부로 기록한 것은 잘못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오가야 제목의 주석
阿羅一作耶伽耶今咸安古寧伽耶今咸寕大伽耶今髙霊星山伽耶今亰山一云碧珎小伽耶今固城又本朝史畧云太祖天福五年庚子改五伽耶名一金官為金海府二古寧爲加利縣三非火今昌寕恐髙霊之訛餘二阿羅星山同前星山或作碧珍伽耶
(다섯 가야는) 아라가야, 고녕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이다. 또 본조(本朝)의 『사략(史略)』에 이르기를 "태조 천복 5년 경자(940년)에 다섯 가야의 이름을 고쳤다. 첫째는 금관, 둘째는 고녕, 셋째는 비화로, 나머지 둘은 아라와 성산으로 했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오가야 조

즉 당시에는 '금관가야'가 아닌 (예시)'가락', '금관국' 등의 명칭을 썼다는 것. 그 이름에 대해서는 아직 고정된 한자표기가 통용되지 않았던 시기라 삼국유사, 일본서기,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의 중국 역사서들에 각각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르게 등장한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임나가라'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에도 XX가야라는 명칭이 XX국이라는 명칭과 함께 통용되었을 수도 있다. 즉, 임나는 가야 연맹중에 금관을 특정하는 것이며 xx가야는 국가나 국의 훈독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가야 중에서 대가야는 예외로,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멸망하기 전부터 대가야국(大伽倻國)으로 불렸고,# 신라가 가야를 멸망시킨 후 대가야국을 '대가야군'으로 삼았고 경덕왕 때 오늘날 쓰는 고령군으로 고친 것이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작명이 아니라 이미 대가야 당시~통일신라에서도 '대가야'라는 이름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다른 'xx가야'들이 지명+가야 형태인 반면 대가야의 클 대 자는 수식어기 때문에 작명 원리가 다르다.[36][37]

4. 영토와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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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ece5b6> 국립중앙박물관의 지도. 연맹설에 근거하여 제작된 가야의 지도.[38]

위치상으로는 가야산 이남과 낙동강 서쪽으로 현재의 경상남도, 경상북도 남서부 일대가 이에 해당된다. 고고학적으로 연관성이 있는 최대 한계는 전라도 동부 일부(대략 소백산맥)까지이다. 7차 교육 과정의 일부 고교 국사 교과서에도 반영되어 낙동강 서부의 경상도 수준으로 나타난 지도보다 많이 확장되었다. 전북 남원시, 전라남도 여수시 등지에서도 고령 반파국 계열로 추정되는 유물이 나왔는데, 후대의 대가야가 백제의 개로왕 피살과 웅진 천도 등 혼란한 틈을 타 일시적으로 경략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의 체제에 대해서는 가야 제국(諸國)[39]설과 가야 연맹[40]설이 대립하고 있다.(이하 '연맹설'과 '제국설'로 약칭)

이 중에서 이수광정약용 등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처음 주장한 이후 이병도 교수가 근대적 학문 체계 속에서 정립한 '연맹 왕국설'이 오랜 기간동안 통설이었다. 이 설에 따르면 '가야 연맹'은 가야의 여러 작은 나라들이 외부에 공동 대응하는 연합체 정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점차 '가야 제국(諸國)설' 쪽으로 통설이 변경되고 있다. 이 학설에 따르면 가야는 여러 소국들이 연맹 형태로 연결된 정치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그냥 이 지역에 속하는 서로 남남인 소국들을 총칭하는 이름일 뿐이라는 것. 물론 이 나라들이 때로는 서로 힘을 합치기도 했지만, 장기간의 연맹 체계는 불가능하다는 점과 연맹 관계를 뒷받침할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이유로 등장한 학설이다. 당장 포상팔국 전쟁만 해도 사료가 부족하지만 서로 싸웠다는 사실은 확실하고, 다른 예로 후반기 가야의 강호인 안라국이 낙동강 서쪽에서 고령 대가야와 양립하는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때때로 대립적 관계까지 보인다. 단일 연맹이 존재했다면 어느 가야가 위기에 빠지거나 멸망할 때 큰형님 대가야가 군사 지원을 한다든가 하는 모습도 있어야 하는데 거의 찾아볼 수 없다.[41]

그러나 제국설이 마치 '통설'이 된 것은 아니다. 애초 '연맹설'과 '제국설'의 대립은 훨씬 그 연원이 오래되었다. 가야사에 관한 학위논문이 본격적으로 제출된 1980년대 중반 이후 오히려 가야연맹론 위주의 이해가 통설로서 명백한 주류를 이루어왔으며 이전과 같은 확고한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현재도 그 논지는 상당부분 유효하다. 박사학위논문 등에서 '제국설'을 적극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이나 이러한 몇몇 사례를 두고 연맹설이 일방적으로 '폐기'되었다고 성급하게 결론짓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러므로 이러한 학계 동향은 오히려 (연맹설과 제국설의 대립이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맹설이 확고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가 최근에야 비로소 '제국설'이 '연맹설'과 엇비슷한 연구사적 지위를 확보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한편 단일연맹체설과 분립국가설 둘 사이의 절충안으로, 가야권이 하나의 단일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옛날 설에서 바뀌어 대가야권(고령 및 합천 등 주변지역), 금관가야권(김해, 부산 등), 아라가야권(함안, 마산 등), 소가야권(고성, 진주 등) 등 지역별로 중간 규모 연맹체가 여럿 있었다는 지역연맹체론도 등장했는데, 부산대 백승충 교수의 설이다. 일단 이 권역 간에는 그래도 조금 더 가야 토기의 양식 등 고고학적 공통점이 보이긴 한다. 그러나 이 역시 근본적으로 연맹이란 실체 자체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이 약점이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에도 펠로폰네소스 동맹, 델로스 동맹, 아이톨리아 동맹 등의 폴리스들 간의 한시적 동맹이 있었고 또 스파르타, 아테네 등이 주도적으로 패권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고대 그리스를 연맹 왕국이라 부르지는 않는 것과 같다고 여기면 된다.

다만 김해 금관국이 잘나가는 앞 시기를 전기 가야, 고령 반파국이 잘나가는 시기를 후기 가야로 구분하는 호칭은 계속해서 남아 있다. 일단 가야 제국의 개별 나라들이 별개이긴 하지만 잘나가는 소위 맹주국이 주변 나라들에 자체 토기 등 영향력을 주변 지역에 끼치는 현상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통설은 AD 400년을 전후하여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금관국이 쇠퇴하였다고 보는데, 그 이전을 전기 가야, 이후를 후기 가야로 칭한다. 이 나뉘는 기준은 구체적으로는 학자마다 몇십년~백여년 이상 등 오차가 있지만 큰 기준에서 주도권이 김해에서 서쪽으로 옮겨가는 경향은 확실히 존재한다.

5.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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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고구려군백제군신라군가야군
남북국시대발해군신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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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조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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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일본 제국 육군 조선군·조선보병대 / 독립군
분단시대
(건군기)
미군
해방병단조선해안경비대
남조선국방경비대조선경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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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보안대해안경비대
현대대한민국 국군조선인민군}}}}}}}}}


초기에는 가야 지역의 풍부한 철생산량을 바탕으로 큰 철판들을 얽어 만든판갑을 주축으로 입었으며, 광개토태왕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후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찰갑으로 무장을 바꾸어 갔다가야 개마무사를 재현한 모습.

다만 높은 철 생산량과 그에 걸맞는 무장 수준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이렇다 할 두각을 드러내진 못 했는데, 근본적으로 주변 국가들에 비해 병력 동원력이 매우 떨어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몇 안 되는 기록인 포상팔국의 난때의 기록을 비추어볼 경우, 가야지역의 8개국이 연합을 했음에도 구원출정으로 온 신라가 쉽사리 이겼으며, 기록상 병력 동원도 가야 소국들을 다 합쳐봐야 만 명을 넘지 못하는 것으로 나온다. 구체적인 기록의 신뢰성, 소실된 기록들을 감안한다고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개별 소국들의 형태였기에 병력 동원능력은 동시대 다른 국가들인 고구려-백제-신라보다 매우 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독특하게도 아마존과 같은 여군의 존재가 눈에 띈다. 장정들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껴 젊은 여성들까지도 군대에 동원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실제 가야 여전사 무덤의 경우, 이 여군은 아이만 셋을 낳은 사람이라는게 확인될 정도이다. 이는 바꿔말하면 인구가 그만큼 부족했으며, 동원가능한 병력 또한 매우 적은 수치라고 봐야하는 핵심적 근거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즉, 당대에나 지금이나 총력전 및 전면전 상황, 극심한 혼란기가 아니라면 여성을 중무장을 하여 동원하는 경우는 매우 희귀했다. 심지어 모두가 말 타고 활을 쏘는 유목국가도 아닌 정주민 농업국가가 여성을 전투에 동원할 정도였다면, 그만큼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자원이 매우 한정적이거나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도 아직 국력이 잘 갖춰지기 전부터 최소 6천 명, 최대 1만 명 동원 기록이 있으며, 고구려는 2만 명까지[42] 백제도 초창기도 최대 1만 명을 충분히 동원했다. 이러한 기록들의 신뢰성이 모호하긴 하지만 동시대를 기준으로 보았을때 가야의 경우 분명히 동원 병력 자체가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별 국가들로는 만 명은 불가능했고, 수천도 정말 쥐어짜서 나오는 수치였으며, 가야(변한) 전체를 합쳐봐야 1만 명이 간신히 되거나 조금 넘는 수준으로 추측되는 상황이다.[43]

6. 건국 신화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서에는 크게 두 가지 버전의 건국 신화가 전하고 있는데 하나는 삼국유사에 수록된 구지가와 얽힌 6개의 알 신화로, 이 쪽이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략적인 그 내용은 서기 42년, 김해는 본래 9명의 간(干)[44]이 추장으로서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구지봉에서 사람들이 모여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자 하늘에서 알 6개가 내려왔고, 그 알 중 가장 먼저 깨어난 이가 수로왕이며 나머지 5개의 알에서 태어난 아이가 각자 나머지 5개 가야소국의 왕이 되었다라는 것이다. 구지가 문서 참조.

다른 출생 신화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최치원이 썼다는 《석이정전》을 인용한 기록에서 나오는데 여기서는 천신 이비가지가야산정견모주 사이에서 반파국의 초대 국왕인 이진아시(뇌질주일), 금관국의 수로왕(뇌질청예) 형제를 얻었다는 것이다.

전자가 철저히 김해 금관국 중심적인 서사로 김해 가야계 후손 측의 전승으로 보이며 기존 세력(9간)을 바탕으로 이주민 세력(수로왕)이 추대를 받았으며, 고고학적으로 논파된 6가야연맹설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보여 통일신라고려 시대에 원형을 일부 잃은 신화로 보인다. 후자는 가야산신 정견모주로 표현된 고령의 토착 재지 세력이 중시되고 있고, 옛 강국 김해의 역사성은 형제라는 설정으로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고령 반파국을 형으로 설정하는 등 반파국이 강국으로 오른 후기 가야의 판도를 반영한 계열 신화의 전승으로 추정된다. 그 외 다른 여러 개별 가야 국가들의 경우도 원래는 저마다 나름의 시조 건국 신화 전승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기록상으로 남은 것은 이 두 계통이다.

6.1. 역사와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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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연표

<colbgcolor=#3d428b><colcolor=#ece5b6> 42년 수로왕이 구야국(금관가야)을, 이진아시가 반파국(대가야)을 세움
43년 수로왕이 궁전을 지음
48년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건너와 수로왕과 혼인함
49년 허황옥이 태자 거등을 낳음
76년 수로왕이 신라 정벌을 위해 군사를 일으킴
77년 신라와 가야가 황산진구에서 싸워 가야군사 1천여명이 전사함
87년 신라가 가야의 공격을 대비해 가소와 마두 2성을 쌓음
94년 가야가 신라의 마두성을 함락시킴
96년 가야가 신라의 남경을 공격하여 신라군 5천여명을 사살함
97년 신라와 합의하에 전투가 중단됨
102년 수로왕이 실직곡국과 음즙벌국의 영토분쟁을 해결함
106년 신라가 약속을 어기고 다시 침략함
108년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이 신라에 병합됨
115년 신라왕이 1만 군사를 이끌고 가야를 공격하나 낙동강에서 가야가 8천여명을 사살하며 대승을 거둠
116년 신라왕이 분하여 다시 가야를 공격하나 장마가 내려 돌아감
189년 허황옥 사망
199년 수로왕 사망 2대 거등왕 즉위
201년 구야국과 사로국(신라)이 화친을 맺음
209년 소가야, 사물국, 보라국, 골포국, 칠포국 등 8개의 소국이 금관국을 치고, 신라가 이를 도와 제압함
212년 2차 포상팔국의 난이 일어나 안라국을 치나 신라의 도움으로 대부분을 제압
215년 고자국(소가야), 골포국, 칠포국 마지막으로 신라의 갈화성(울산)을 공격하나 실패함
253년 3대 마품왕 즉위
291년 4대 거질미왕 즉위
313년 낙랑군과 대방군이 한반도에서 사라져 외교 대상을 잃음
346년 5대 이품왕 즉위
367년 탁순국이 왜와 통교함
369년 근초고왕이 신라, 가라 7국, 침미다례를 평정하고 삼한을 귀속 후 임나를 세움
382년 대가야 5대 기본왕의 아내가 왜에 감
396년 신라와 백제가 싸워 백제를 도움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금관가야가 쇠퇴하고 전기가야 연맹이 끝남
402년 대가야 성장 시작, 후기가야가 형성됨
407년 6대 좌지왕 즉위
421년 7대 취희왕 즉위
425년 대가야가 섬진강 일대를 차지하고 다사진을 개척함
451년 8대 질지왕 즉위
458년 질지왕이 허황옥을 기리기 위해 왕후사를 창건함
475년 대가야가 영산강 일대를 획득함
479년 대가야 6대 하지왕이 남제에 감
492년 9대 겸지왕 즉위
494년 부여가 멸망하고 이 시기 후기가야연맹이 22개국에 달함, 대가야 9대 이뇌왕 즉위
512년 상다리, 하다리, 모루, 사타의 임나 4현이 백제에 복속됨
513년 상기문, 하기문, 대사국이 백제에 편입됨
514년 대가야가 섬진강 일대에 봉수와 저각을 비롯한 성을 쌓아 백제와 왜의 공격에 대비함.
521년 금관가야 10대 구해왕 즉위
522년 대가야 이뇌왕과 신라 공주가 결혼하여 동맹 함
525년 탁순국을 비롯한 여러 가야들이 친신라를 반대하고 연맹이 파탄 남
527년 신라가 분노하여 결혼동맹을 깨려하자 천황이 나서 신라를 진정시킴
529년 신라가 결국 탁기탄을 멸망시키자 아라가야가 고당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가야의 재발전을 기획함
531년 백제가 아라가야의 걸탁성을 빼앗고 속국으로 만듬
532년 금관가야의 구해왕이 신라에 항복하니 금관가야가 멸망함
536년 신라가 대가야를 공격하자 백제가 구원함
538년 탁순국의 마지막 왕 아리사등이 신라에 항복하여 멸망함
541년 백제 성왕이 사비회의를 열고 7개 가야 소국과 왜가 모이나 수포로 돌아감
544년 2차 사비회의가 열리나 백제와의 관계가 오히려 악화됨
548년 아라가야가 고구려와 연합해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나 실패하고 밀통이 발각되어 아라가야가 백제의 식민지로 전락함
551년 우륵이 낭성에서 진흥왕에게 가야금을 연주함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 대패해 대가야가 신라의 부용국으로 삼여지고 소가야와 사물국이 곧이어 멸망함
555년 신라가 창녕에 하주를 설치함
556~560년 임례, 자타, 걸손, 졸마, 사이기, 산반하, 거열 등 대부분의 가야 소국이 신라에 차례로 멸망함
561년 신라가 아라파사산을 공격해 마침내 아라가야를 멸하고 성산산성과 신라진흥왕척경비를 세움
562년 1월 다라국 멸망, 7~9월 신라 이사부와 사다함이 대가야를 토벌

8. 문화

8.1. 주거

수로왕이 가야를 건국한 이후 5세기까지 기와집이 없었다.[45] 실제 초기 가야의 대부분 거주지는 아래처럼 생긴 초가집이었다. 그런데 김해 봉황동 유적지에서 기와가 발견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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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 초가집에서 산 만큼 평민들의 주거 역시 그리 발달하지는 않았다. 땅을 파고 들어가 벽 없이 지붕만 덮고 사는 수혈 가옥[46]과 기둥으로 들어올려진 고상 가옥을 같이 만들고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아래가 떠 있는 고상가옥은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나, 같은 동물 피해를 막는 장점이 있었다.

<진서(晉書)>의 <동이전(東夷傳) 변진(弁辰)조>에 "여름에는 소거하고 겨울에는 혈처한다(夏則巢居冬則穴處)"라는 글이 있어 소거라는 말이 고상 주거함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짐작되며, 실제로 가야 지방에서는 고상식 창고 건물 모양의 집모양 토기(가형 토기)가 발굴되어 당시 가야 건축 형태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런 집모양 토기에는 대부분 큰 굴뚝이 부착돼 있어 조리와 난방을 위해 불 피우는 시설이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 형태는 대부분 오늘날과 비슷한 맞배지붕이다.
4세기 경의 가형 토기

다만 가야 후기가 되면 가야에도 기와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김해, 고령 등에서는 가야 후기의 기와들이 나왔고 특히 고령군에서 대가야의 대궁이 발견되면서 동시에 다량의 기와들이 출토되기도 했고, 일부 주초석과 기단돌도 조사되어 옆나라 백제나 신라에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까지 발전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8.2. 언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가야어 항목

가야 제국(諸國)이 위치했던 낙동강 하류는 본래 변한(弁韓) 12국이 있었던 곳으로, 그 언어에 관한 주된 자료로는 ‘伽倻·加耶’·‘加羅’·‘駕洛’ 등으로 표기된 국명을 비롯한 고유명사들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자료의 부족으로 연구를 하기 힘든게 현실이다.

8.3. 음식

가야의 식문화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 등 가야 무덤에서 음식이 가야토기에 담긴 채로 남아있는 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음식물들은 무덤이 닫히고 바깥 공기와 차단돼 완전히 썩어 없어지지 않고 천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보존이 됐다.

지산동 44호분에서는 22개의 토기에 음식물이 들어 있었는데 그 중 15개가 어류였고 뼈 1개, 조개 2개, 알 수 없는 것이 4개였다. 남쪽 석실에서는 기장(식물)이 나왔다. 가야 사람들이 어패류를 즐겼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5개 어류 중 어종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3개인데 오늘날에도 낙동강에 살고 있고 고령 재래시장에서도 팔리는 어종인 누치였다. 고령이 내륙지방임에도 조개는 바다 조개였다.

지산동 45호분에서는 닭과 바다생선이 들어있었는데 부식이 심해 어종을 알기 어렵지만 잔가시가 많은 것을 보아 청어 종류로 추정된다고 한다.

지산동 35호분에서는 두드럭 고둥, 소라, , 어류, , 뼈 등이 조사되었다. 그 외 음식물 존재는 찾지 못했지만 시루가 출토되어 도 있었다고 추정한다.

대체로 수산물이 많은데, 상하기 쉬운 해산물을 상하기 전에 해안지역에서 고령까지 실어오는 유통망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소 뼈나 돼지 뼈는 그다지 출토되지 않아서 소고기돼지고기는 별로 즐기지 않았고[47] 닭고기, 꿩고기 같은 가금류를 많이 먹었다.

8.4. 종교

종교는 초기에는 정견모주 등 고대 한반도의 고유 신앙을 믿었다. 무덤 주인을 저승에서 따를 사람을 같이 묻는 순장을 고구려, 백제, 신라보다 가야에서 더 많이 했기 때문에, 가야인들은 내세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관가야 건국 설화에서는 초대 수로왕 시절부터 허황옥불교를 들여온 것으로 묘사되는데 신화적 기록이고 초기 가야 유적에서 불상 같은 불교 관련 유물이 별로 보이지 않아, 초기부터 불교가 들어와 있었는지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하지만 적어도 후기에는 분명히 백제신라, 고구려, 위진남북조시대의 국가들과 교류하다 보니 불교를 도입해서 널리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령 고아리 벽화고분에서 불교의 상징인 연꽃 무늬를 천장에 그려넣은 것이 지금도 남아있고, 가야 멸망 후 멀지 않은[48] 시대 사람인 최치원이 지은 석순응전에서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 월광태자가 등장하고 그는 대가야가 멸망하자 불교에 귀의해 살았다고 전한다.

가야의 무덤에서 복숭아씨가 대량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이는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도교에서는 복숭아가 불로장생의 상징이기 때문에 가야 사람들은 사후세계에서도 불로장생 하라는 의미로 무덤에 복숭아를 넣은 것이다. 이 복숭아를 넣는 문화가 중국의 한나라에도 있었다. 이는 즉 가야가 한군현과 교류했다는 증거가 된다. https://youtu.be/DvW2layS8Jg

9. 가야의 구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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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유물·유적

파일:external/www.newstown.co.kr/c_20041031_15238_21684.jpg
파일:attachment/gaya_gold.jpg
가야토기[49] 가야의 금 장식

10.1. 현존하는 유물 목록

10.2. 가야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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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

창덕궁

수원화성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

조선왕릉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양동

남한산성

백제역사유적지구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한국의 서원

가야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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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한국의 갯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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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도성 및 궁궐

가야의 도성 및 궁궐
김해 봉황동 유적 연조리 추정 궁성 터 함안 가야리 유적 고성 만림산 토성

11. 역사귀속과 계승인식

가야는 기본적으로 신라로 계승된 것으로 보나, 백제, 마한과도 연관이 제법 컸기 때문에 이쪽 계통 연구도 이뤄지고 있다. 또한 가야가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남긴 발자취는 미약한 편이나, 대신 혈통적으로는 현재 한국의 최대 성씨 집단인 김해 김씨를 금관국의 후예로 두고 있기 때문에 김해 김씨 문중에서는 가야에 대한 인식이 일부 있는 편이다.[50]

고려 시대에는 만월대 내 별궁 중 하나를 금관궁(金冠宮)이라 명명했는데, 가야를 한반도 고대 국가 중 하나로 인식하고 계승 의식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에서는 고조선-고구려-발해-고려-북한으로 이어지는 북방 지역의 역사를 중시하여 상대적으로 남방의 가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조선전사, 조선단대사에서 가야사를 따로 두고 간략하게나마 서술한다. 분량은 남측 학계에 비해선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빈약한 편. 사실 이는 가야가 자체 기록이 부재한데다 백제[51]나 신라[52]와 달리 군사분계선 이북지역에 진출한 적이 없고 이 때문에 유적/유물이 부족하여 북한 입장에선 더 연구하기 어려운 점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대신 북측 학계에서는 가야 주민들의 일본 큐슈 방면 진출 관련해 연구도 하고 있다.[53]

12. 식민사학

12.1. 임나일본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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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가야 백제군사령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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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학극복이 가야사의 발전과정을 왜곡시켰다. 즉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하려던 노력이 일제 식민사학과 동일한 시각과 논리로 접근하여 가야사를 왜곡하였던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을 대체한 천관우의 ‘백제군사령부설’이 그것이다. 『일본서기』의 비판적 활용을 통하여 가야사의 복원을 시도하였다. 『일본서기』의 가야 관련기사에 대해 8세기 일본의 소중화주의적 편찬 때문에 백제가 주체였던 역사적 사실을 일본이 주체였던 것처럼 기술한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神功紀의 가라7국 평정의 주체를 왜가 아니라 백제였으며, 그 결과 성립하였다는 임나일본부는 임나백제부같은 것으로 백제군사령부라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末松保和의 『任那興亡史』가 가야의 흥망을 논한다면서 일본의 가야지배사로 일관한 것처럼, 천관우의 「복원가야사」는 백제의 가야지배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김현구도 백제가 임나에 직할령을 두고 통치하였지만 그곳에 일부 倭系百濟官僚와 大和政權의 傭兵을 배치시켰다고 하여 천관우의 학설을 이어받아 백제의 가야지배를 인정하고 있다. 김석형의 ‘分國論’은 한반도 내의 가야사를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4세기대에 백제가 가야지역에 군사령부를 설치하여 지배하고 있었다는 근거는 현재까지 찾을 수가 없다. 백제가 가야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은 『일본서기』의 기록처럼 6세기대로 볼 수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가야지역에 백제의 것으로 보이는 문화는 찾을 수가 없다. 임나일본부를 극복하는 과정이 오히려 가야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왜곡하였던 것이다.
남재우, 2011 「식민사관에 의한 가야사연구와 그 극복」 『한국고대사연구 61』, 한국고대사학회, p.186.

13. 여담

  •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창작물에서도 가야는 주로 조연 신세다. 2020년대 기준 장편 드라마 중에서 유일하게 가야를 주인공급 세력으로 다룬 드라마가 《김수로》인데, 지지부진한 진행으로 흥행에는 실패했다.
  • 가야대학교가 금관가야가 있었던 경상남도 김해시에 위치해있다. 과거엔 대가야가 있었던 경상북도 고령군에 있는 대학교였는데 김해로 옮겼다. 고령과 김해 둘 다 가야를 대표하는 양대 도시임을 감안하면 적절한 교명. 반면에 부산광역시가야동은 좀 애매한데 부산 지역 자체가 전기가야 시절 김해의 영향권에 속하긴 했지만, 가야동 지역과 직접적인 연결점이 있는 건 또 아니다. 여담으로 다른 삼국시대 국가명 타이틀의 대학들은 대부분 원위치(?)에 있지 않다. 고구려대학이라든지 신라대학교 모두 원 위치에서는 떨어져 있다. 그래도 신라대학교는 신라 권역이긴 하고, 고구려대는 나주에 있기 때문에 후고구려라고 우길 수는 있다.
  • 기존 국내 역사학계는 아무래도 한민족의 다수를 차지하는 북방민족의 기원설에 치중한 역사관을 바탕으로 역사 연구를 이어왔기 때문에, 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로 이어지는[54] 북방계 민족과 문화 유입을 중심으로 국가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면이 있었다. 그런데 유전학적, 고고학적으로는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분명 북방 계통과 다른 특징들도 나타나고 있는 바[55], 남방에서 유입된 인종과 문화에 대한 새로운 역사 해석 관점도 필요하다. 현재 한국의 영토가 아닌 만주 지역의 역사도 계통적으로 우리 역사로 편입하여 이해하고 연구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마찬가지로 남방 지역 역사도 계통적으로 한국 역사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가야의 세력 범위 역시 한반도 남부에 국한하지 않고 큐슈 일대까지로 확장해서 이해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진아의 지구 위 인류사-가야사편 시리즈). 기후 변화 자료를 통해 과거 한반도 남부가 해수면이 높아 많은 섬들로 이루어졌음을 고려할 때 가야는 해상국가들의 교역 연맹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며 그 세력권에 큐슈까지도 포함된다는 주장이다. 만주 일대에 대해서는 한국 역사로 쉽게 이해하면서 큐슈까지 관점을 확장하는데에는 머뭇거리게 되는 이유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사학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다. 큐슈 일대까지 일본의 중앙정권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시기와 능력을 고려하면 큐슈 일대를 가야 세력권의 범주로 이해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주장이거나 국뽕, 환빠적 해석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다. 가야의 정치 체제를 중앙 집권식이 아니라 일종의 낮은 수준의 연맹체라고 이해할 경우 그 연맹의 범위는 오히려 확장될 여지가 더 많은 것이다. 물론 이런 발상을 긍정하더라도, 가야 자체가 원체 자료가 부족해서 딱히 스토리 만들기가 쉽진 않다.
  • 가야사 관련해서 학계에서 흥미로운 대립 구도가 있다. 바로 경북대학교 주보돈 교수와 부산대학교 신경철 명예 교수로 대표되는 가야사 해석 대립이다. 특히 주보돈 교수가 2017년 8월 자신의 저서 가야사 새로 읽기를 통해 기존의 통설을 뒤엎는 학설을 주장했는데 여기에 따르면 가야사의 시작은 기존의 서기 42년에서 4세기 초 정도로 보고 있으며, 이전의 전기 가야 중심이었던 구야국(금관국) 체제 때는 대체적으로 변한 사회의 모습을 띄고 있으며, 이후 4세기 초부터 서서히 변한 사회가 변화하면서 가야 연맹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다. 즉, 가야 연맹이 시작된 중심은 대가야 아닐까로 보고 있는 것인데, 이에 대해 부산 대학교 신경철 명예 교수는 기고문을 통해 정면 반박하였다. [기고] 금관 가야는 변한 시대인가? 고령과 김해의 현재 행정구역이 각각 경북, 경남으로 갈리다보니 우연찮게 지역구도적으로도 나뉜다.
    금관국 문서를 가도 알겠지만 매우 자세한 이야기가 쓰여져 있는데 어느 쪽이 맞다 틀리다를 따지기는 어렵지만 여러모로 가야사 연구가 문헌 자료의 절대 부족으로 인해 순수 사학만으로는 해석이 쉽지 않다. 반면 고고학 자료가 어느 정도 확보된 상황이지만 고고자료들은 문헌과 달리 스스로 설명하지 않고 정황증거로만 드러날 뿐이기 때문에 가야권, 특히 김해 대성동을 위시한 해석이 대학별로 형성된 소위 학파에 따라 나뉘어져 있는 상태이다.
    특히 부산대 신경철 교수를 비롯한 금관국의 주도적 성장을 주안점에 두고 보는 입장에서는 주보돈 교수의 해석에 반론이 있을 수밖에 없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지산동 73, 75호와 같은 이른 시기 대가야의 고분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시기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 누적된 위계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맹주라는 표현에서 반론이 있을 수밖에 없다.
  • 2017년 6월 1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 보좌관 회의에서 고대 가야사 복원 사업을 국정과제로 포함시키라고 주문했다. 대통령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특정 국가의 역사를 강조한 것은 보기 드문 사례인데, 문재인 대통령 역시 "다소 뜬금없는 말로 들릴 수 있다는거 알지만, 고대사가 삼국사 중심으로 연구되다 보니, 삼국사 이전의 역대 고대사에 대한 연구가 안 된 측면이 있다. 가야사 복원이 영호남을 잇는 통합적 사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57]# 다만 이런 고대사 연구에 대한 정치권의 개입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의도했든 아니든 이런 정권의 입김이 들어간 역사 연구는 자칫 잘못하면 역사왜곡으로 빠질 수도 있기에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고대사학회도 우려를 나타냈다.# 이런 지적이 있어서인지 이후엔 문 대통령도 임기 중 관련 발언을 하지 않았다.

14. 같이보기


[1] 대가야 멸망[2]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된 가야의 이칭.[3] 과거에는 가야를 고대 영남지방으로 한정해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최근에는 호남지방의 가야계 세력들에 대한 연구도 진행 중이다. 천문학 자료와 기후 변화에 따른 해안 지형의 자료 및 유물 관련성을 바탕으로 큐슈 일대까지 가야 계통의 활동 지역으로 보기도 한다.[4] 가야 중기 기준 구성국의 수는 22개국. 과거에는 삼국유사의 6가야 기록에 따라 6개 구성국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중국 등 해외 기록이나 고고학 성과로 미루어보아 6개보단 더 많았고 수백년의 가야사에서 조금씩 구성은 변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5] 수로왕의 구야국과 이진아시의 반파국이 이때 건국했다.[6] 다만 여러 가야계 소국들의 기록이 하나하나 문헌에 남아있는 건 아니라서 대가야가 마지막으로 멸망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대장격이였던 대가야가 멸망하며 근처 가야계 소국들도 후에 대거 항복하여 대가야가 멸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7] 가야인은 신라인과 언어와 습속이 거의 비슷했다.[8] 한기(旱岐)라는 가야 소국의 왕호가 《일본서기》에 등장함.[A] 족보의 기록[A] [A] [A] [A] [14] 과거 그리스, 독일, 이탈리아가 특정한 국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군소국가들이 난립하는 지역명으로 사용되었던 것과 비슷하다. 이를테면 전기 가야의 중심국으로 불리는 금관국은 아테네, 후기 가야의 중심국으로 지목되는 대가야는 스파르타 정도의 지위였다고 볼 수 있다.[15] 기록에 따라서는 가야권 전체가 아니라 이 금관국이나 반파국만을 지칭할 때 가야(혹은 가라 등 여러 이칭)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았다. 애초에 가야라는 명칭 자체가 김해 금관국의 초창기 명칭이었는데 금관국이 대표 격 강국으로 군림하면서 의미가 확장됐다. 옛 기록에서는 대체로 가야라고 하면 2~4세기에는 김해를, 4~6세기에는 고령을 가야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중간에 낀 4세기쯤은 학파별로 논란이 있는 편이다.[16] 예를 들면 사비회의에서 대부분의 가야소국은 한기(旱岐, 최고 지배자)나 그의 아들을 대표로 보냈지만 안라, 가라(대가야)는 '차한기', '상수위' 등 관직명이 등장해 조직화된 관료 조직이 존재하고 가야 안에서도 사회적 발전 정도가 달랐음을 방증한다. 그리고 6세기 기록에서 안라와 가라가야(대가야)만이 최고 지배자를 '한기'가 아닌 ''으로 부르면서 차별화하고 있는 등이다. 사실 안라는 변한 안야국 시절부터 김해 구야국과 함께 변한의 대표적인 세력으로 인식되고 있었다.[17] 가야사 대부라고 할 수 있는 홍익대 김태식 교수나 계명대 김세기 교수 등의 주장이며, 그 근거로 주로 꼽히는 것은 고령 양식 가야토기의 확산, 대가야식 묘제 확장 양상, 부체제 실시, 현(행정구역)의 존재 같이 기록에서 중앙과 지방의 구분이 존재하는 것 등이 꼽힌다.[18] 맞먹는 수준을 넘어서 백제의 기문 대사의 땅을 빼앗기도 한다.[19] 가야 권역의 이른 시기 유적인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이 발견되는 등 한자로 기록하는 문화는 있었다.[20] 또는 부장칸, 부장구역의 유물이 털리지 않은 경우가 많다.[21] 고구려나 백제식 무덤은 당당하게 사람이 드나드는 입구를 만들고 문을 닫는 방식어어서 도굴이 쉬웠기 때문에 지금까지 도굴이 안 된 무덤은 아예 없는 수준이다. 기적적 예외 사례가 유명한 무령왕릉이다.[22] 주보돈, 가야사 이해의 기초, p92.[23] 학계에서는 '종발성'에서 순순히 항복받는 선에서 끝났기 때문에 남정으로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거나, 남정 이후에도 금관국의 위세가 좀 더 계속되었다거나, 애초에 금관국의 전성기는 4세기 시점에 저물었고 광개토대왕의 남정 당시 공략 대상은 김해 금관국이 아니라 고령 대가야였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24] 신라에게 항복한 금관국이나 흡수당한 대가야(반파국) 모두 당시 가야의 중심 세력이었다.[25] 전라도 동부 남원, 여수 등과 하동, 남해 등.[26] 현대에 영호남 지역주의를 타파하자는 상징적 문구로 이 가야 서부 영역을 언급하는 경우가 있다.[27] 최초로 등장하는 가야의 명칭이다.[28] "고"[29] "야"[30] 겨레설: ‘겨레(姓, 一族)’라는 말의 기원이고, 그 근원은 알타이 제어의 ‘사라(Xala, 姓, 一族)’에 있으며, 그것이 가라(Kala) > 가야(Kaya) > 캬레(Kya+re) > 겨레(Kyeore)로 음운 변천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31] 여기서 관심을 가져야할 부분이 고구려의 어원 중 하나에서도 이 구루가 등장한다. 만약 두 설을 근거로 한다면 고구려와 가야는 예맥과 변한의 방언 차이에 따른 음차로 달라진 것임을 상상해볼 수도 있다.[32] 伽耶는 인도 불교의 성지인 부다가야(बोधगया, 佛陀伽耶) 표기의 영향을 받아 고려시대 승려들이 주로 사용했던 표기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의 저자가 승려 일연이기 때문. 숭유억불정책을 추진하던 조선 시대에는 삼국유사를 인용할 때도 이 삼국유사의 불교 냄새 나는 伽耶 한자 표기를 다른 한자로 고쳐 쓰기도 했다. 예를 들면 고려사 지리지 5가야조.[33] 그러나 전라남도 일부 경상남도 전역에 걸친 여러 변한의 구성국을 통칭한다는 것은 지극히 일본서기의 용례일 뿐이다. 한국 측 사서와 일본서기보다 당대에 근접한 금석문에서는 임나는 변한 지역의 일개 구성국으로써 사용되는 임라가야의 용레만 있을 뿐이어서, 일본서기의 용례는 분명히 당대의 용례에서 변질, 와전된 것이 분명하다.[34] 삼국시대에 나(那)는 강과 땅을 뜻하고 일어(日語)에 미마(貴孫)는 귀인(貴人)의 손(孫)을 뜻한다. 일본서기의 내용에 미마나는 스진 덴노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고 한다. 그 내용을 제하고 본다면 스진덴노의 이름 미마키(御間城)의 미마와 가야의 미마의 뜻은 서로 같은 뜻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5] 원문에는 속성이 '신김씨(新金氏)'라고 나오는데 여기서 신김씨는 새로이 신라에 편입된 금관가야의 왕족 김해김씨를 말하는 것이고 그에 반대되는 구김씨는 신라의 왕족인 경주김씨를 뜻한다.[36] 소가야는 대가야에 대비해서 지은 이름이란 것이 정설이지만, 삼국사기 지리지를 봐도 대가야와 달리 여기는 당시에도 소가야라고 불렀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37] 중국의 기록 양직공도나, 백제삼서를 인용한 일본서기에서는 5~6세기 고령을 반파국으로 칭하고 있으며 이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반로국과 통하는 명칭이기 때문에, 대가야와 반파국 둘 다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둘 중 고유 국호는 변한 시절부터 사용한 반파 계통이고, 대가야는 후기 가야에서 반파국이 주도권을 가지고 자부심을 담아 자칭한 것이다. 반대로 전기 가야에서 그냥 가야 하면 김해 금관국을 가리켰지만 후기로 가면 김해는 '남가라' 같이 남쪽 가야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다.[38] 단, 이 지도에서는 당시 간척이 이뤄지지 않아 육지가 아니었던 창원 주변이 육지로 그려져 있는 자잘한 오류가 있다.[39] '황제'의 제국(帝國)이 아니라 '여러 나라'라는 의미의 제국(諸國)이다.[40] 연맹일 경우 현재의 아랍 연맹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듯하다.[41] 대표적으로 건국신화에서 형제로 표현 되는 나라가 금관가야와 대가야인데, 정작 금관가야가 멸망 위기에 놓였을 때 이를 도왔다는 기록이 없다. 대가야 신화에서 동생이 김수로 즉 금관가야의 시조임에도.[42] 최후반부 고구려가 총력전을 치를 때는 수십만 단위의 병력이 쏟아져 나온다.[43] 신라 병부령 이사부가 금관가야를 멸망시킬 때 동원한 정병이 3천 명이었다.[44]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45] MBC드라마 김수로의 화려한 궁궐백성들의 초가집은 고증이 잘못된 것이다.[46] 가야 지역 고유의 주거 형태로 보이는 평면 형태가 타원형을 띠는 집[47] 소가 아예 없진 않았다. 44호분에는 소와 말을 순장했다.[48] 300여년 뒤 사람이라 아주 가깝진 않지만, 삼국사기 등 고려시대 기록들에 비하면 보다 당대에 가깝다는 것이다.[49] 장인마다 만드는데 편차가 있었겠지만 사진속 형태의 토기는 대부분의 가야 문화권에서 발견되었고 가야를 통해 토기, 가마기술을 전파받은 일본의 스에키토기 또한 이와 흡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 또한 신라토기와도 유사하다.[50] 시조는 수로왕이고, 중시조는 김유신이다.[51] 미수복 경기도, 미수복 강원도 서남부, 황해도.[52] 통일 이전-미수복 강원도, 함경남도 중남부, 통일 이후-미수복 경기도, 미수복 강원도, 황해도, 평안남도 남부, 함경남도 남부.[53] 김석형, <초기 조일관계사> 참조.[54] 신라 역시 고조선에서 넘어온 세력이 기록되어 있고, 2010년대 이후부턴 고조선 왕가 직계라 할 수 있는 마한(건마국) 관련 연구도 제법 활기를 띄고 있다.[55] 고조선 후기부터 멸망 시기에 다수의 고조선 유민(예맥인)들이 한반도 남부로 이주하여 이미 최소 삼한 시기부터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예맥인들이 오기 전 있었던 부류가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다. 반도 일본어설 역시 그런 관점에서 나온 설 중 하나. 다만 명확한 부분이 없어 가설의 영역이다.[56] 고구려는 중국에 위치한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 북한에 있는 고구려 고분군이 있고, 백제는 백제역사유적지구, 신라는 경주역사유적지구석굴암불국사가 세계유산에 등재 되어 있다.[57] (백제, 고구려, 신라가 서로 번갈아가며 지배하던 한강 유역을 배제하면) 백제는 주로 호남과 호서에, 신라는 주로 영남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 가야는 그 사이에 있었다. 호남 동부 남원, 여수 등은 후기 가야의 전성기에 상당 기간 영향력에 들기도 했고 고령 계열 유물이 많이 출토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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