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05 11:48:23

독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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瀆盧國

1. 개요2. 상세3. 관련 문서

1. 개요

변한 12개국 중의 하나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등장한다. '독로국은 왜와 접한다.'라는 설명이 있어 그 지역을 거제 또는 부산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포상팔국의 난 이전까지 구야국과 함께 가야에서 어느 정도 힘을 가졌던 나라이기도 하다.

2. 상세

변진도 12개 국으로 되어 있다. 또 여러 작은 별읍(別邑)이 있어 제각기 거수(渠帥)가 있다. …… 이저국·불사국·변진미리미동국 …… 변진안야국·변진독로국·사로국·우유국이 있어서, 변한과 진한 합하여 24국이다. 대국은 4,000~5,000가(家), 소국은 600~700가로 총 4만~5만 호이다. …… 그중에서 독로국은 왜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弁辰亦十二國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 有已柢國·不斯國·弁辰彌離彌凍國 …… 弁辰安邪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國·弁辰韓合二十四國 大國四五千家 小國六七百家總四五萬戶 …… 其瀆盧國與倭接界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

2.1. 거제

첫째, 독로(瀆盧)란 지명은 '섬'을 뜻하는 고대 우리말 '두루'의 음차로서 섬인 거제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瀆盧는 과거에 두로 또는 두루로 읽었으며 현대에도 瀆는 '구멍 두'로도 읽으며 중국어로는 瀆盧를 '두루'로 읽는다. 또한 문무왕 때는 거제를 상군(裳郡)이라 불렀는데 상은 치마란 뜻이다. 치마와 섬이 무슨 연관일까 싶지만 치마의 옛 방언 중 하나가 두루기였다. 물이 땅을 둘러 섬이 되고 옷을 허리에 둘러 치마가 되는 '두루다'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이런 두루에서 파생된 단어는 지금도 쓰이는 두루마기와 두루마리가 있다.

정약용아방강역고를 저술하면서 이같은 '두루', '상군'의 음운해석으로 독로국을 거제로 보았다. 현대에는 조선시대 거제현의 관아였던 기성관을 복원하던 중 ‘독로의 옛 서울이었다[闕瀆盧故都]’와 ‘오랜 옛날 두로가 건국됐다[上古之豆盧建國]’라고 적힌 상량문까지 발견되어 조선시대에는 독로국이 거제 지역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 # # 그 밖에 이학규는 낙하생집에서 '거제부는 변진 때 소국이 있었는데 ‘독로’라 일컬었다가 후에 여기에 상군을 설치하였다'라고 기록하였고, 청나라 사람 정겸은 '독로는 경상도 남쪽 거제도로서 동서 거리가 멀지 않고 왜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둘째, 17세기 조선 이전까지 일본으로 가는 항로의 기점은 거제였기에 '왜와 접한다'는 설명에 부합한다.[1] 거제(巨濟)는 신라 경덕왕 때 붙여진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크게 건너다'는 뜻으로 고대부터 일본으로 건너가는 길목이었다. 이런 인식은 조선시대 여러 지도에서도 나타나는데 대마도는 부산보다 거제도에 훨씬 가깝게 그려져 있고, 거제도 동남쪽은 '일본계(日本界)'라고 기재돼 있어 거제가 일본으로 건너가는 접경지대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배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았고 항해술이 떨어졌던 고대에는 남해에서 동해로 흐르는 대한해협의 강한 해류 때문에 부산에서 출발하는 배는 대마도에 당도하지못하고 동해로 쓸려가버리는 위험이 컸다. 그래서 김해에서 출발한 배는 연안을 따라 최대한 남서쪽인 거제도 지세포나 구조라, 다대포[2] 등지에서 출발해 대마도 북단에 도착하는 항로를 택했다. 이는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과 고려와 조선의 대마도 원정, 통신사가 거제에서 출발했던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일본에서 한반도로 올 때는 대마도 남단에서 출발해 거제도 남단에 도착하는 항로가 주로 이용됐다. 이는 일본과 교류가 잦았던 변한‧가야 시대에 주 항로였고 거제 남안에 도착한 후 해안선을 따라 제포, 김해, 합포, 동래로 이동해 갔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의 시작을 알린 1350년 충정왕 2월의 침입 때도 거제도 남단을 지나 견내량을 통과했다. 그래서 고려 수군과 조선 수군의 상당수가 거제도에 진영을 두었다. 조선수군에서 경상우수영의 함대 규모가 가장 큰 것도 이런 이유였다. 다만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가는 항로에 비해 일본에서 한반도로 오는 항로는 대체로 자유로웠다. 해류로 인해 항로가 틀어져도 창원, 부산, 울산 등지에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구야국과 금관가야에서 생산된 철은 일본 외에 낙랑대방으로도 수출하는 교역품이었는데 이를 위해선 반드시 거제 내해와 견내량 항로를 지나야만 했다.

이렇게 변한이 한 군현 및 일본과 왕래하는 고대 항로가 거제였다는 점에서 '독로국은 왜와 접한다'는 설명은 거제에 부합하며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거칠산군이 동래에 있음에도 독로국이 존재하거나 이 둘을 같은 국가로 보기는 억지스럽다는 점을 든다. 또한 '동래'는 독로국보다 훨씬 후대인 신라 경덕왕 때 '동쪽의 봉래'라는 중국 지명에서 따온 지명이고, 향가 25수를 처음으로 해석한 국문학자 양주동 박사는 그의 저서 『증정 고가연구(增訂 古歌硏究, 梁往東, 一潮閣, 1965)』에서 瀆盧는 고대에 두루 또는 도로로 읽었다고 하였고 동래(東萊)의 지명을 ‘두로(瀆盧)’와 연결시킬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를 찾기 어렵다고 하였다. 또한 동래에서 출토된 유물의 연대가 3~7세기이고 주류 유물은 4~5세기인데 그 이전으로 추정되는 독로국과 시기가 맞지 않다는 점도 지적한다. 건국대학교 허재영 국어국문학과 교수 기고문

거제에서 발굴된 유물 중 머리에 고깔을 쓴 모습의 토우(거제 박물관 소장)가 발견됐는데, 변한 사람은 머리에 변(고깔)을 쓰고 있다는 일본서기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이는 거제에 변한국이 존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거제 남단에는 거제 내 최고봉인 가라산(585m)이 있는데 가라는 음차 표기된 가야의 다른 지명이다. 이 가라산은 일본에서 배로 건너 올 때 가라로 가는 이정표와 상징이 반영된 지명으로 보고 있어 전통적으로 왜와 교류했던 접경지대인 독로국이 거제인 것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또 일본에서는 옛부터 거제도를 가라시마(からしま)로 불렀다.

2019년 10월에 방하리 고분군에서 가야로 추정되는 유물이 나왔다는 것을 발표하였다.#

2.2. 부산

일본인 요시다 도고[吉田東伍]가 처음 주장하였고 그의 후학인 이병도가 따랐으나, 음운적 유사성이 부정되며 비주류가 되었다.

그 요인은 독로란 지명에서 '동래'가 나왔으며 발견된 고분과 유적이 동래가 더 많기에 국가가 생길 여력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동래로 볼때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거칠산국과 독로국을 같은 국가로 보기도 한다.

독로국의 독로(瀆盧)는 독(瀆)의 나라라는 말인데, 수영강의 지류가 합류하는 동래 주변에는 탁류(濁流)가 범람하여 ‘구독(溝瀆)’이 되었을 것이고, ‘독로’를 음독하면 ‘동내’ 또는 ‘동래’가 되어 그 미칭으로 ‘동래’가 쓰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독로가 김해와 함께 철 생산에 관련이 깊으며 한왜통교의 요충지로서 철을 매개로 한 해상 교역의 중심지였을 것이라는 것. 동래에는 삼한, 삼국시대에 걸쳐 동래 패총 부산 복천동 고분군, 연산동 고분군 등 발굴된 고분과 제철유구를 근거로 부산 학자들 위주로 독로국 부산설을 주장하고 있다.

단, 2020년 선석열 부산대학교 역사교육과 강사와 같은 경우[3] 상군(裳郡)이라는 지명과 동래군(東萊郡)이라는 지명 자체가 7세기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서 이로부터 '독로국'의 유사성을 찾는 것은 무리하다고 본다.[4] 또한 동래 일대는 사로국이 영토를 확장하며 이른 시기에 신라로 편입[5]되었기에, 동래가 독로국이었다면 3세기까지 국체를 지속하기 어려우며, 같은 이유로 정약용과 현대 다수 학자들은 독로국을 거제로 본다.

3. 관련 문서


[1] 고려 통신사+전기 조선통신사가 거제에서 출발했고 1607년부터는 부산에서 출발한다.[2] 거제 다대포[3]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는 거칠산군으로 편제되었고 해양제사처인 형변이 있었던 점에서 남해항로나 대왜교류의 중요한 해양거점으로서 역할을 다하였다는 점을 고려하여 독로국은 부산에 있었다고 본다.[4] 신라에서는 동래에 있던 거칠산국을 치고 해당 자리에 거칠산군(居柒山郡)을 구획했으며, 757년(경덕왕 16년)에야 동쪽의 봉래산(蓬萊山)이란 의미로서 현재까지 쓰이는 지명인 동래군(東萊郡)으로 개칭했다.[5] 신라가 영토를 확장한 첫 사례로서, 탈해 이사금 시기에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을 합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