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09-28 18:57:49

경주 월성해자 출토 목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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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신라인이 남긴 목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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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내용3. 관련 항목

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449번지 일대에 위치한 경주 월성해자에서 발견된 5세기 후반~6세기 경 신라목간 130여 점. 현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소장되었다.

2. 내용

사적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는 경주 월성해자에서 발견된 신라의 목간들로, 1984년부터 1989년까지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월성해자를 발굴조사하던 중 발견한 것들이다.

월성은 신라가 존속할 때까지 궁성으로 기능한 곳으로, 성의 외곽에는 외부 차단을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도랑시설인 해자가 존재하였다. 이 해자에는 수백 년 세월 동안 신라인들이 실수로 빠트리거나, 혹은 일부러 버린 여러 가지 물건들이 층층이 쌓였다. 발굴 당시 매몰된 해자의 내부에서는 신라토기를 필두로 목제 배, 방패 등 다양한 유물들이 확인되었는데, 그 속에는 문자기록이 남은 목간도 포함되어 있었다. 발굴에 앞서 시행된 1984년 시굴조사과정에서 '다480N20트렌치 지표하 190 ㎝'를 시작으로 목간 총 26점이 발굴되었고, 이후 발굴로 1986년 12월 20일까지 130여 점이 출토되었다. [1] 연구자들은 이곳이 신라의 궁성이었던 관계로 더 많은 목간이 땅 속에 있으리라 예상하지만 예산과 발굴 기술[2] 등 문제로 인해 80년대 마지막 발굴 이후 수십 년째 더 이상 발굴하지 않았다.

월성 해자 발굴 당시 구역을 총 4개로 구분하였는데, 목간은 조사구역 ‘다’에서만 확인되었고, 대부분 다480N20 그리드 내에서 수습되었다. 다 구역은 기준선 B-D를 연결시킨 선상에 위치하는데, 월성의 북편에 해당한다.

월성 해자에서 확인된 목간의 수종은 주목(27호, 77호), 버드나무(76호), 밤나무(28호), 상수리나무(51호), 감나무(13호), 물푸레나무(29호)를 제외하고 모두 소나무(경송)인데, 소나무를 애용한 이유는 재료 획득의 용이함도 있었겠지만, 묵서를 하기 위한 나무 자체의 특성도 고려한 것이다. 침엽수는 활엽수에 비해 비중이 작고, 목재의 결이 균일하기 때문에 묵서를 했을 경우 의 퍼짐 현상이 활엽수에 비해 현저히 적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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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월성해자 출토 목간의 제작기법, 이동주(성림문화재연구원)>

월성해자 목간은 그 외형에 따라 다면의 봉형과 양면의 홀형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전자는 원형 봉형목간과 4면체 봉형목간으로, 후자는 홀형과 횡재목간으로 세분할 수 있다.

또한 이 목간들을 만들 때 사용했던 5~6세기 신라시대의 도구들도 해자에서 함께 출토되었는데, 주로 쇠도끼(鐵斧), 쇠손칼(鐵刀子), 쇠못(鐵釘)과 기타 구리제품 183점이다. 특히 쇠도끼는 94점이 출토되는데, 다구역 뻘층 상부에서 76점, 목간이 확인된 흑색재층에서 15점이 수습되었다.

경주 월성해자 출토 목간의 주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6세기 신라의 목간 양식이 훗날 일본으로 건너가 큰 영향을 주었다. 7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일본 아스카 목간과 8세기 초에 제작된 일본 후지와라경 목간이 100여 년 전 신라 월성해자 목간의 양식을 그대로 전승받아 만들어진 사실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으며, 특히 7세기 후반 아스카 목간의 글씨가 6세기 월성 해자 목간 글씨보다 못한 수준이라 6세기 경 신라의 목간 제작 문화가 매우 발전된 수준임이 확인되었다.고대 동아시아 서예자료와 월성 해자 목간 또한 이 목간의 내용을 연구분석한 결과 당시 신라어가 일본에 수출되어 9세기 한자의 일본화에 기여하였다는 가설 또한 나왔다.서라벌신문 : “신라 이두 역사, 200년 앞당겼다” 신출토 월성해자 목간의 한자,‘ 爲在之’ (위재지)
2. 고대 한국어를 글로 표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자 체계인 이두는 기존 학설에 따르면 7세기 말엽~8세기 사이에 그 표기법이 최종단계로 발전했다고 보았으나, 월성해자 출토 목간에 이미 이두 문법이 자유롭게 쓰이고 있어 신라인들이 8세기가 아니라 그보다 200여 년 앞선 6세기 이전부터 ‘동사의 활용’을 자유자재로 쓸 정도로 신라어 표기법을 발달시켰음이 드러났다.월성 해자 목간의 이두 자료 예를 들어 월성해자 목간에서 발견된 백견(白遣)이라는 이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보고하는 경칭(敬稱) 동사로 ‘사뢰-’라고 훈독(訓讀)되는데 기존에는 원왕생가(삼국유사)와 불국사 석가탑 〈무구정광탑중수기〉(1024년), 〈서석탑중수형지기〉(1038년)에 가서야 나오던 글자이다. 또한 신라식으로 읽으면 ‘ (하)겨다’로 현대국어로 ‘하였다’라는 뜻인 위재지/교재지(敎在之)라는 글자도 가장 오랜 기록으로 발견되었다.#, ##

지금으로부터 1500여년 전, 신라 왕궁에서 사용되던 목간들로, 6세기 경 한국의 서예 문화와 당시 신라의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3. 관련 항목



[1] 묵흔이 아직 인정되지 않은 추정 목간류를 포함할 경우 300여 점 이상이다.[2] 월성 조사 결과 해자 포함 6만 5천여 평에 이르는 부지 지하 아래에 고신라시대 유물이 빼곡히 들어찼음이 레이더로 확인되었는데, 현재의 기술로는 이를 전부 온전히 발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