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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 유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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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총 관련 둘러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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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신라왕릉 금관총 金冠塚 | |
조성형태 | 돌무지덧널무덤 |
피장자 | 이사지왕 |
조성시기 | 신라 6세기 초 |
금관총 구조
디지털로 복원한 금관총 피장자인 이사지왕의 모습
{{{#!wiki style="margin: -15px -10px -15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315288> 대한민국 사적 제512호 | |
<colbgcolor=#315288> 경주 대릉원 일원 慶州 大陵園 一圓 |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노동동 261 등 | |
분류 | 유적건조물/무덤/고분군 | |
면적 | 602,314㎡ | |
지정연도 | 2011년 7월 28일 | |
건축시기 | 신라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colbgcolor=#000> 경주역사유적지구 Gyeongju Historic Areas Zones historiques de Gyeongju | ||
<colcolor=#fff> 국가·위치 |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경상북도 경주시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지정번호 | 976 | |
등재연도 | 2000년 | |
등재기준 | (ii)[1], (iii)[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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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金冠塚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국보 제87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
경주시 대릉원에 위치한 노서동 고분군에 있는 대형 고분. 신라 왕 또는 왕족 및 귀족으로 추정되는 이사지왕의 무덤이다. 신라시대 유물의 대표 격으로 알려진 금관이 최초로 발견되어 '금관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대릉원 고분, 아니, 지금까지 발굴된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들 중 유일하게 피장자의 이름이 확인된 무덤이다. 연구성과들을 기초로 500년 전후에 축조했다고 본다.
금관총에서는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발견된 금관인 국보 제87호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 국보 제88호 금관총 금제 허리띠 등 유물 4만여 점이 출토되었다. 금관과 금제허리띠 외에도 금제관모, 금제관식, 금제팔찌, 금제반지, 금제귀걸이, 금동신발, 유리잔, 청동제초두 등의 부장품이 함께 발견되었다. 장식에 사용된 곡옥(曲玉) 등 구슬류는 3만 점이 넘고 사용된 금의 총량은 7.5kg에 달한다. 위 유물들은 모두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였다.
1921년 9월 일제가 실시된 최초 발굴 이후 2015년 3월부터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이 재발굴조사를 실시하였고, 조사 이후 천마총처럼 무덤 내부를 관람할 수 있게 보존전시공간을 건립하였다.[3] 무덤 북쪽 공터에는 신라고분정보센터가 위치하였다. #
2. 발굴 경위
일제강점기였던 1921년, 위 사진에서 보다시피 경주에는 많은 옛 왕릉들 바로 옆까지 민가가 가득 들어차 있었는데, 당시에는 대부분 단순한 언덕 정도로 치부했다고 한다. 석침총 등 몇 군데 발굴조사를 하긴 했지만 예산 문제로 큰 관심은 없었다. 그러던 중 한 주막이 증축공사를 했는데, 공사의 여파로 구슬이 나와 밖에서 굴러다녔다. 아이들이 구슬로 가지고 노는 광경을 지나가던 순사가 발견해 자세히 살펴보다가, 금관총이 단순한 언덕이 아니라 금은보화가 들어찬 고대의 무덤임을 알았다.
이후 일본인들이 긴급히 유물을 수습하고 조사를 시행했더니 금관과 수많은 금 장신구, 그릇, 투구를 비롯한 유물 4만여 점이 나왔다. 그러나 갑자기, 우연히 발견된 터라 고고학자 손으로 정식으로 발굴하지 못해서 출토된 유물의 발굴정보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유물이 어디에서 어떻게 있었는지 또한 학자들에게는 연구의 중요한 정보가 되므로, 고고학자 아닌 이들이 대충 발굴했음은 현대의 학자들에게는 속이 쓰린 일이다. 금관총보다 나중에 발굴된 다른 무덤들은 그나마 낫지만 금관총은 나흘 만에 해치웠다고 한다.[4]
금관총이 발견되어 경주에 산재한 신라 왕릉들의 가치를 모두가 알게 되었다. 당시 세계 고고학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자 일본인들은 서양 중심의 고고학 판도에서 자신들이 한 자리 차지할 수 있다고 여기고 관심이 커져 1921년 조선총독부에 고적조사과를 신설하였고, 서봉총, 금령총 등 다른 근처 대형 고분들도 잇따라 발굴하는 유행이 일었다.
일제도 미리 준비계획하고 시작한 발굴이 아니었던데다 시대가 시대라 지금 기준으로 보면 졸속 발굴되었기 때문에, 2015년 국립중앙박물관은 금관총을 재발굴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의 졸속한 발굴의 한계 및 오류를 바로잡고, 돌무지덧널무덤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함이었는데 여기서 아래에 나올 무덤의 주인에 대한 단서인 이사지왕 명문, 돌무지덧널무덤의 축조 과정에서 목조가구를 세우고 강돌을 채웠다는 사실 등 새로운 발견이 있었다.
3. 무덤의 주인
국립경주박물관의 금관총 설명. |
2013년 발견된 검에서 이사지왕이라는 글이 확인되었고, 2015년 금관총 재발굴에서 '이사지왕도' 라고 새겨진 칼집부속구가 추가로 확인되고, 금관총에서 출토된 이사지왕 관련 명문 환두대도 3점의 실존이 모두 확인됨에 따라 금관총=이사지왕의 무덤으로 거의 확실시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사지왕이 신라의 '국왕'인지 귀족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등을 두고 논란이 많다. 이사지왕 문서 참조.
4. 나무위키에 문서가 생성된 주요 출토 유물
- 금관총 관모
-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
- 금관총 금귀걸이
- 금관총 금동신발
- 금관총 금반지
- 금관총 금제수식
- 금관총 금제 허리띠 미스터리한 금관총 금제허리띠 도난사건(영상)
- 금관총 금팔찌
- 금관총 유리잔
- 금관총 이모가이 말띠꾸미개
- 금관총 청동 자루솥
- 금관총 환두대도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2022년 8월 16일에 시범 전시회가 열렸고 2023년 3월에 완전 개방하였다.##[4] 비슷하게 우연히 발견되어 졸속으로 하루 만에 조사를 완료해버린 무령왕릉도 있다. 초기 한국의 열악한 고고학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