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11 13:23:29

이사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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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상의 인물
이사지왕 | 尒斯智王
파일:이사지왕.png
디지털로 복원한 이사지왕의 모습.
출생 연대 미상
신라 (?)
사망 500년 전후 추정[1]
신라 (?)
능묘 금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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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본관 불명
불명
신체 109㎝ 전후(허리 둘레)[2], 발 342mm 전후[3]
왕호 이사지왕(尒斯智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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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지왕의 검.

1. 개요2. 신라 56왕 중의 한 명인가?3. 기타4.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태조 성한왕처럼 한국의 사서에선 등장하지 않고 금관총(이사지왕릉)의 유물 중 금관총 환두대도에서 이름이 발견된 신라.[4]

유물 자체는 1921년 9월 일제강점기 발굴 때 출토됐으나 시대가 시대인데다가 당시 일제도 철저히 준비하고 발굴한 게 아니라 우연히 시작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졸속으로 진행되었다. 결국 현대에 재발굴이 진행되었고, 이 재발굴에서 92년 만인 2013년에야 이전엔 찾아볼 수 없었던 '이사지왕(尒斯智王)'이라는 인명을 발견했다. 이 인명의 발견으로 결국 이사지왕이 금관총의 주인으로 밝혀졌다. 금관총 유물이 500년 전후로 비정되므로 500년 전후에 활동한 왕족 또는 귀족인 듯하다.

2. 신라 56왕 중의 한 명인가?

파일:국립경주박물관 금관총 이사지왕.png
국립경주박물관의 금관총 이사지왕 부분 설명.

결론부터 말하자면 알 수 없다. 무덤의 양식을 볼 때 이사지왕이란 인물이 활동했던 무렵의 왕이면 자비 마립간, 소지 마립간, 지증왕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금관총 조성 시기를 5세기 후반으로 본다면 자비 마립간-소지 마립간 시기에 활동했을 것이다. 이사지왕이라는 인물이 신라의 국왕이라면 이 왕들 중 한 명의 다른 이름이 이사지왕이라는 말인데, 자비 마립간이나 소지 마립간이라고 하기에는 음의 연관성도 미약하다. 묘지문이 나오지 않는 이상 금관총이 이사지왕의 무덤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2015년 금관총 재발굴에서 '이사지왕도'라고 새겨진 칼집 부속구가 추가로 확인되고, 금관총에서 출토된 이사지왕 관련 명문 환두대도 3점이 나왔으므로 일단 금관총은 이사지왕이라는 사람의 무덤으로 거의 확실시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마립간들 중 하나라고 추정할 수만도 없다. '이사지왕' 명문 출토 이전까지는 출토 유물들을 근거로 금관총의 피장자는 여자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가령 출토된 귀걸이의 종류나 발굴 조사팀의 회고 등에서 나온 검의 발굴 위치 등으로 볼 때 남성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의견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이사지왕의 부인의 무덤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금관총이 졸속으로 발굴되었기 때문에 유물들의 정확한 배치를 기록한 글이나 사진 등이 없다. 발굴 3년 후 교토대학에서 낸 회고록 수준의 발굴보고서밖에 없어서 여러 의혹을 제대로 풀 수가 없다. 심지어 발굴 유물의 도면이 여러 사람의 기억에 따라 총 6개나 나왔는데, 도면들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가령 도면 5점에서는 출토된 칼 세 자루가 모두 피장자 주위에 둘러싼 형태로 발굴되었다고 묘사한 반면, 1점에서는 피장자가 칼 한 자루를 착장했다고 묘사했다. 칼의 위치는 피장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판단하는 한 가지 근거로 사용되므로, 후대의 우리는 피장자의 성별을 파악할 수 있는 근거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다. 다만 '이사지왕'이라는 명문이 여러 점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피장자의 이름을 표시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

일각에서는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노사화현(奴斯火縣)과 자인현(慈仁縣)[5]이 대응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자비롭다"는 뜻의 고대 한국어 어휘를 *nese로 재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당대 한자음이 *nese-ti에 가까웠던 이사지왕이 자비 마립간의 이표기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 # 이 견해에 따르면 울주 천전리 각석 계사년(453년) 명문에 등장하는 이소지(尒小知) 대형가(大兄加)와도 같은 인물이라고 한다. #[6]

금관총이 소지왕릉이며 이사지왕은 소지 마립간과 동일인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 하지만 해당 기사에서 이사지왕을 '이(지시관형사)+사지왕'으로 분석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삼국시대 당시 이사지왕의 이(尒)는 한자음이 ㄴ으로 시작한 반면, 한국어의 지시관형사 '이'는 지금과 같은 어형이었기 때문이다.[7] 소지왕이 비처(毗處)라고도 불린 사실을 바탕으로 소지의 소(炤)를 음차가 아닌 훈차로 추정하는 설이 유력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오류와 별개로 이사지왕이 소지 마립간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위의 자비왕설, 소지왕설과 같이 금관총의 피장자를 국왕으로 비정하는 견해들은 금관총 봉분의 규모가 대형분 30여 개 중 중간 정도 크기에 해당되기 때문에 고고학계에서 1996년(이종성) 이후 왕릉으로 보는 견해가 전무한 것과 상충된다는 점을 유의하여야 한다. 근래 대다수의 고고학자들은 자비 마립간의 무덤을 봉황대(125호)로, 소지 마립간의 무덤을 서봉황대로 비정하고 있다.[8][9]

비록 이사지왕이 "왕"이라는 호칭을 쓰지만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에서 '차칠왕(此七王)'이라는 표기가 쓰이거나 그 외 여러 갈문왕에서 왕의 용례가 사용된 것을 보면, 왕호 자체는 일찍 받아들였으나 확정된 것이 지증왕 무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런 관점으로 보면 고위 귀족인 이사지왕이 '왕'이란 호칭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신라 국왕 56명 중 누군가라고 비정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최고 지배자인 마립간의 친족이거나 신라 육부(六部)의 수장일 수도 있다.

이에 따라 혹자는 현대 한자음이 비슷한 이사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냐고 추정하기도 한다. ## 하지만 이사부의 이름과 이사지를 연관짓는 견해는 소지왕설과 마찬가지로 언어학적 고찰이 결여된 가설이다. 당시 한자음 기준 이사지왕의 이(尒)는 ㄴ으로 시작했으나, 이사부의 이(伊)는 현재와 같은 발음이었기 때문에 동일한 인명으로 보기 어렵다.[10]

이사부가 자비 마립간의 아들일 가능성[11]을 근거로 자비왕릉이라는 견해가 다수설인 봉황대 인근에 위치한 금관총이 이사부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12] 그러나 이사부의 사망 시점인 6세기 후반은 '왕'이 군주 또는 갈문왕의 칭호로만 쓰였으며[13][14], 5세기 후반~6세기 초로 비정되는 금관총의 조성 시기와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 이사부설의 결점이다.[15]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금관총이 묘주 생전에 조성된 수릉(壽陵)이라고 가정하기도 한다.[16]

한편 이사지왕의 정체와 별개로 이사지왕의 이사(尒斯)가 이사금(尼師今)의 이사(尼師)와 같은 단어일 가능성은 높은 편이다.[17] 자비왕설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이사금 역시 "자비로운 임금"을 의미했을 것이라 추정하고[18], 이사부설에서는 이사지와 이사부가 언어학적으로 불일치한다는 비판을 받아들여 이사금이 후대에 왕호뿐 아니라 6부의 대표자를 가리키는 명칭으로도 쓰였다고 가정하기도 한다.[19][20]

이사지왕과 관련된 연구가 거듭될수록 노태돈이 주장했던 '고대국가 초기부터 일정 시기까지 신라의 왕들은 6부의 대표자였지 통치자가 아니었다.'는 가설이 점점 더 힘을 얻었다.

3. 기타

2024년 10월, 금령총의 피장자가 이사지왕의 어린 아들일 것이라는 가설이 제기되었다.#

4. 외부 링크

신라 금관총 출토 큰 칼 3점 한자리에(연합뉴스): '이사지왕'을 새긴 금관총 큰칼(1921년 발굴품, 2015년 재발굴품)
[1] 금관총의 축조 연도가 500년 전후로 추정되니까 이사지왕은 500년 전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2] 이사지왕이 매고 있었던 금관총 금제 허리띠의 길이가 109cm였다는데 금관총 금제 허리띠 길이를 볼 때 이사지왕의 허리 둘레는 109cm 전후로 추측된다.[3] 이사지왕이 신고 다녔던 금관총 금동신발의 길이가 342mm였다는데 금관총 금동신발 길이를 볼 때 이사지왕의 발 사이즈는 342mm 전후로 추측된다.[4] 단, 신라에서는 일부 귀족층에게도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예가 있으니 정말 '임금'이었다기보다는 왕족과 귀족까지 포함하는 최상위 지배계층으로 볼 수도 있다.[5] 지금의 경산시 동남부에 존재했던 옛 현이다. 경산시 자인면, 남산면, 용성면, 진량읍 남부, 압량읍 동부에 해당.[6] 그러나 국사편찬위원회 공식 입장은 '小'부분은 판독 불가이다. 또한 大兄加는 고구려 관등이기 때문에 금관총의 주인으로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7] 한국어에서 ㄴ 두음 법칙이 발생한 것은 17세기 이후로, 삼국시대와는 천 년이 넘는 간극이 있다.[8] 김용성, 박광렬, 박천수, 심현철, 김재홍[9] 다만 금관총의 피장자가 여성이라는 학설을 취한다면 이사지왕은 금관총의 주총인 봉황대의 묘주, 즉 자비 마립간이며, 금관총에는 자비 마립간과 깊은 관련이 있는 여성이 묻혔다는 식의 설명이 가능하다.#[10] 尒의 본자인 의 후기 상고한어(1~3세기) 및 전기 중고한어(4~7세기) 독음은 각각 /neᴮ/와 /nyeX/인 반면, 의 후기 상고한어 및 전기 중고한어 독음은 각각 /ʔi/와 /'jij/이다. 후기 상고한어 재구음은 Schuessler(2007), 전기 중고한어 재구음은 Baxter(1992)의 표기를 기준으로 했다.[11] 자세한 사항은 이사부 문서의 탄생 문단 참고.[12] 이러한 견해는 이사지를 인명으로 볼 경우 발생하는 언어학적 결함을 해결하고자 하술한 것처럼 이사금을 6부 대표자의 칭호로 재해석하기도 한다.[13] 통상적으로 마립간 시대에는 왕의 형제에게 갈문왕의 지위를 부여했다고 보기때문에 만약 이사부가 자비의 아들이자 소지의 형제라면 왕이라는 칭호가 설명 가능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사부가 갈문왕에 봉해졌다는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참고로 자비마립관과 연관된 갈문왕은 장인이자 눌지마립간의 형제인 복호(卜好)가 유일하다. 그러나 부계 혈족 단위 무덤군이 조성되었다는것이 통설이기 때문에 복호의 무덤은 아버지인 내물마립간릉(119호, 황남대총 추정)의 배총일 가능성이 유력하다.[14] 혹은 명문이 새겨져 있는 환두대도가 사후 제작이 아닌 '왕'이 고위 관료의 칭호로 사용되었던 5세기후~6세기초에 제작된 부장품일 가능성 또한 고려해 볼 수 있다. 세자루 칼 중 2자루에서만(M366, K618) 王자가 보이기 때문에 나머지 한자루는(경주352) 후대에 제작되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尒'자가 단독으로 새겨진 칼집 끝 부분을 보면 2글자 정도 여유 공간이 있기 때문에 공간 부족으로 1글자만 새겼을 가능성은 없으며 오히려 본래 '尒斯智'라고 새겼으나 후에 2글자가 마모된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듬. 관련 사진 링크[15] 단, 돌무지덧널무덤은 5세기, 돌방무덤은 6세기라는 기존 정설과 달리 2024년 6월 법흥왕의 봉분으로 비정되는 서악동 4호분 북분이 무너지면서 돌무지덧널무덤의 흔적이 확인되었기에 추후 고고학계의 연대 비정이 바뀔 가능성은 있다. # 그러나 금관총이 5세기 후반~6세기 초에 조성됐다는 것이 여전히 정설이며, 이는 출토된 금관의 제작 방식에 따른 연대 비정으로도 뒷받침된다.[16] 금관총이 수릉이라면 6세기 초에 조성됐다 하더라도 480년대생으로 추정되는 이사부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는 논지이다. 한국 고대사에 수릉이 있었다는 근거로는 고구려 장군총이 수릉이라는 중국 학계의 견해#와 무안 고절리 고분#, 백제 익산 대왕릉#, 경주 황복사지 인근 미완성 고분# 등의 사례가 제시된다. 그러나 이 봉분들은 적석총, 분구묘 또는 굴식 돌방무덤에 해당되는데, 분구묘를 제외하고는 돌무지덧널무덤인 금관총과 제작 방식이 상이하여 그대로 대입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17] 尼의 후기 상고한어 및 전기 중고한어 독음은 각각 /neiᶜ/, /nejX/로 재구되어 尒(/neᴮ/, /nyeX/)와 매우 유사하다.[18] 이사금, 이사지의 '이사(*nese)'는 상술했듯이 자비롭다는 뜻이고, 뒤의 '금(今)'은 '매금'과 '임금(< 님+금)'에서처럼 군주를 가리키는 어휘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금'이 군주의 칭호라는 것은 언어학계의 정설에 가까우며, 군주를 뜻하는 고대 일본어 '키미'와 동원어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19] 이사부는 오늘날의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병부령을 지냈기 때문에 금석문에서 이사부의 출신지로 확인되는 훼부(양부, 급량부)의 대표자였을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사부와 동시대 인물이자 상대등을 역임한 거칠부는 일본서기에 '구지포례(久遲布禮)' 또는 '구례(久禮) 이사지간(爾師知干) 나사마리(奈師磨里)'로 기록되어 있는데, '구례'를 '구지포례'의 축약으로 보면 '이사지간'은 당시 유력한 관료에게 주어진 칭호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사지간'의 과 달리 '이사지왕' 같은 왕호는 지증왕 이후 문헌에서나 금석문에서나 갈문왕을 제외하면 국왕의 전유물로 쓰였으므로 둘을 동일시하기에는 애매한 점이 있다. 그렇다고 이사부가 갈문왕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다.[20] 신라가 아닌 가야의 사례이긴 하지만 탈지이질금(脫知爾叱今),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이질' 역시 이사금·이사지의 '이사'와 같은 어휘로 추정된다. 구형왕의 형제인 탈지는 구형왕의 장인인 분질수에는 없는 '今(통치자, 즉 왕을 가리킨 낱말로 추측)'자가 있는점이 특이한데 신라 역시 이사지간, 이사지왕 등 이사+O 호칭이 있었던 점을 보면 '이사'라는 호칭에도 급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