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16 06:53:42

토성(건축)


1. 개요2. 특징3. 역사
3.1. 동아시아3.2. 유럽3.3. 아프리카3.4. 현대
4. 예시

1. 개요

土城

흙을 쌓아올려 인공적인 언덕을 형성해 방어에 용이하도록 만든 이다.

2. 특징

석성(石城)보다 원시적이라는 오해를 부르기 쉽지만, 장단점이 다를 뿐 무엇이 더 원시적이거나 열등한 건 아니다. 일본의 경우만 해도 센고쿠 시대에 동일본은 토성이 주로 쓰였고, 동시대의 조선 역시도 토성과 석성이 공존했다. 무엇보다도 재래식 요새의 최종 진화형인 성형 요새는 엄연히 토성이다. 왜냐하면 석성보다 토성이 포탄에 잘 견디기 때문.

토성의 확실한 장점은 다른 성에 비해 건설이 빠르고 비용이 적게 들며 기술적으로 쉽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기술이나 행정능력이 부족한 시대에는 기본적으로 토성을 쌓았고, 석성 건축 기술이 발달한 뒤에도 임시 주둔지로서 토성을 건축하는 경우가 있었고, 이런 진채는 임시 주둔지였어도 상당한 방어력을 발휘했다.

단점은 높게, 각도가 가파르게 쌓기 어렵다는 점과, 비바람에 쓸려 닳기 쉽다는 점이다. 기술과 행정력이 발달한 국가들이 석성으로 갈아탄 이유다. 물론 45도 정도의 각도까지는 토성으로도 어렵지 않게 쌓을 수 있지만, 공성 측도 바보가 아니라 사다리 같은 걸 써서 기어오르니 45도는 간단했다. 보병을 막는 것이 목표인 성에 방어력이 약하다는 점은 확실히 단점이었다. 물론 공학적으로 아예 불가능은 없어서 판축 공법 등을 동원하면 높고 가파르게 쌓을 수 있지만, 판축 공법은 어마어마한 노동력이 필요하다. 숙련된 석공 기술자들이 빠르게 쌓을 수 있는 석성에 비해서도 문제가 컸다.

16세기 이후에는 화기의 발달로 새로운 장점이 드러나는데, 토성은 두껍고 낮게 쌓으면 투사체의 충격을 흡수해 튕겨낼 수 있었던 것. 화기의 발달로 높고 가파르게 쌓을 수 있다는 석성의 장점은 큰 의미가 없어졌고, 서양은 적극적인 화력 투사로 적을 막는다는 성형 요새의 개념을 만들어 방어력이 약하다는 토성의 단점을 가릴 수 있게 된다.

3. 역사

3.1.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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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만리장성타클라마칸 사막 쪽 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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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하남위례성몽촌토성

오늘날 남은 토성 중 가장 오래된 형태인 중국 상나라 중기의 도읍지였던 정(鄭, 허난성 정저우시)의 도성유적을 보면 황하의 흔한 황토를 판축법을 이용해 우선 나무로 틀을 만들고, 그 안에 황토를 채워 넣고 무거운 추로 다진 다음, 그 위에 다시 나무틀을 얹어 황토벽을 높이는 형태로 쌓은 성도 있다. 참고로 정의 성벽은 오늘날까지도 높이 10m, 가장 높은 곳은 16m에 이를 정도로 높으며 상당히 잘 보존되었다. 1950-1951년에 발견되었으며, 전체 성벽길이가 6960미터, 총 11개의 문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순수 인력으로 수천 수만명을 동원해도 평지에 흙을 일정 폭으로 높이 쌓는 것은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구릉이나 나지막한 야산을 이용하여 그 위에 덧쌓거나 반대로 흙을 깎아내는 삭토법을 쓰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여기에 더해 언덕만 달랑 쌓아놓고 끝이 아니라 나무로 만든 성벽을 추가로 세워 높이를 보강하고 방어군의 안전을 도모했으므로 토성은 곧 목조성이기도 했다. 사실 제대로 된 목조성치고 토성이 아닌 경우가 드물었는데, 평지의 경우 통나무벽만 세워서는 공격군을 저지할만한 충분한 높이를 확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는 언제 태워먹을지 모르는 나무벽보다는 언덕의 높이를 중시해 나무벽에 정성을 들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흙은 그 자체로만 높이 쌓아서는 내구력이 약하기 때문에 토성은 말이 토성이지, 여러재료로 쌓았다. 나뭇잎, 목재, 서로 다른 종류의 흙 등을 깔아서 먼저 다지고 층 사이에 겹쳐 쌓아서 내구력을 도모했다. 이런 건설공법은 동아시아의 경우 고대 중국에서 한반도, 일본에까지 전해졌으며, 삼국 모두에 같은 방식으로 쌓은 토성유적이 발견된다. 이외에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토벽에 불을 질러서 테라코타로 만드는 작업을 하기도 했으며, 낮은 석축을 쌓고 토성을 쌓거나 아예 돌을 섞어 쌓거나(토석혼축성)[1], 목책도니성이라 하여 나무로 골조를 짠 뒤 진흙과 흙을 바르고 쌓는 토성과 목책의 중간형도 존재했다.

3.2.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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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초기 유럽의 모트 앤 베일리의 구조

서구권에도 토성은 있었다. 유럽의 토성은 모트 앤 베일리(Moat and bailey)라고 하여, 방어용 해자(moat)와 그 가운데에 영주들의 [2]이 입주한 원추형 언덕(bailey)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런 성의 외벽은 주변을 파서 해자를 만든 후에, 거기서 나온 흙으로 벽을 쌓아서 그 위에 목책을 둘러친 전형적인 토성이었다.

5~11세기에는 야만족의 침입이 일상적이고 인구도 부족하고 중앙에서 갖춘 방비 체제도 빈약해서 각 지역에서 각기 알아서 침략을 막아야 했던 특성상 이런 기술력과 노동이 상대적으로 덜 들어가는 토성이 발달한 것.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16세기 경에도 토성이 대거 애용된데 반해, 유럽에서는 중세 초중반에만 토성이 발달하고 금방 석성으로 갈아탔는데, 이는 십자군 원정을 통해 중동에서 전래된 석조 기술이 급속도로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야만족의 침입이 잦아들어 상대적으로 평화로워지고, 인구가 늘고 법이 발전해 행정 역량이 증대되어 더 크고 정교한 건축이 가능해졌다. 대신에 영주들 간의 내전이 상시화되어 공성 위주의 전투가 늘어 석성이 늘어난 것.
러시아에서만 유일하게 13세기까지 토성이 살아남았으나, 하필이면 남송이나 고려, 금나라같은 축성술의 끝판왕들과 질리도록 싸워대면서 공성전에 이골이 난 몽골 제국의 침공을 받은 바람에 죄다 개발살이 나버렸고 결국 이를 계기로 서유럽의 축성기술을 벤치마킹해서 전부 석성으로 갈아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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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성벽도시인 나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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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또다른 성형 요새인 바우르탕어 요새

서구권에서 진정한 의미의 토성이 부활한 것은 16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게 바로 성형 요새로, 이탈리아 전쟁 당시에 대포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기존 유럽 석성의 두께가 상대적으로 얇고 높은 구조는 약점을 드러냈고, 기존의 성과는 달리 요새들마다 대포에 대응하기 좋은 구조로 바뀌게 되었는데, 그래서 중세 중기의 석성들과는 다르게 성벽의 높이를 낮추는 대신에 벽 자체에 60도 정도의 경사를 만들어서 포탄을 튕겨낼 수 있도록 건설했다.

냉병기 시대의 보병을 막기 위해 높게 쌓은 석성은 충격을 받으면 모르타르나 구조에 균열이 생겨 무너질 수 있지만, 흙은 높게 쌓기는 어렵지만 어차피 성형요새는 낮게 쌓는데다가, 적극적인 화력 투사로 방어하는 구조이며, 흙을 다져 쌓은 구조는 충격을 받아도 잘 흡수한다는 소재상의 장점이 확인된 것. 다만 성형요새가 전부 토성은 아니며, 임시로 지어진 진채라면 흙으로 쌓는 경우가 많았으나 오래 사용되는 요새는 흙이 비바람에 쓸리는 것을 막기 위해 겉면을 석재나 벽돌로 포장한 경우가 많다.

본 문단에서는 성형 요새의 토성으로서 특징만 간략히 설명하고, 성형 요새에 대한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토성을 짓는 방식은 제2차 세계 대전까지도 야전에서 임시 진지를 세우는 용도로 꽤 쓰였다. 특히 대포를 방열하는 포대를 주변을 파서 만든 참호에서 나온 흙을 이용해서 급조하거나, 참호 자체를 이용해서 방어선을 구축할 때 흙을 자루에 담아서 만든 모래주머니로 펜스를 둘러치는 식이었다. 전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치세까지 쓰였고, 후자는 20세기 초중반에 쓰인 방식이다[3]. 하지만 이건 영구적으로 기능하는 방어시설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전선 구축을 위한 임시 시설에 불과해서 이미 (castle)이나 요새(stronghold)라고 하긴 어렵다[4]. 게다가 이걸 돌파하기 위해 탱크공군이 등장하면서, 이런 현대식의 급조 토성은 금방 쓸모가 없어졌다.

3.3. 아프리카

아프리카 서북부이집트는 사막이 많다 보니 서아시아처럼 모래로 쌓은 성들이 발달했는데, 대표적으로 크사르가 있다.

3.4.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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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말리 전선에 축성된 프랑스군의 파이어 베이스

하지만 토성은 의외로 21세기에 다시 등장하게 되는데 미군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 저강도 분쟁을 겪으면서 넓은 지역에 군대를 산발적으로 배치해야되는 상황이 되자 HESCO사의 모래주머니 격벽을 활용하여 거점을 빠르게 요새화시킨 후 게릴라 부대에 대응하는 전술을 사용하였다.

접어놓은 격벽을 펼쳐서 로더로 모래를 쏟아넣는 방식이었고 블록 처럼 쌓아서 방벽이나 초소를 만드는 것도 가능 했다. 원래 홍수에 대비해 빠르게 벽을 쌓기위한 제품이었으나 이렇게 만들어진 진지는 폭발물이나 외부의 기습격인 공격에도 높은 방호력을 보였고 토성이 지닌 장점이 21세기에도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현대식 토성은 상술한대로 참호를 파면서 겸사겸사 같이 만드는 경우와, 급조 형식으로나마 옛날의 성형 요새를 재현하는 방식이 주로 쓰인다. 그리고 흙을 직접 쌓아올리기보다는, 건설할 때의 안정성을 위해 모래주머니를 만들어서 쌓아올리는 식으로 건설된다. 과거와의 다른 점이라면, 더 이상 이런 토성이 상설 기능하는 시설로 쓰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공병을 동원해서 일시적으로만 토성을 짓고는, 작전이 끝나면 바로 해체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임시 거처로 쓰인다. 이런 개념에 따라 과거의 토성은 현대에 와서 중대전술기지로 발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저개발국가에서 군사작전을 할 때 흙으로 기지를 구축하는데, 이런 나라의 경우는 잘해야 소총 정도로 무장한 게 고작이라서, 이 이상의 방어력을 가진 요새를 굳이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4. 예시

한국에는 처인성, 몽촌토성, 풍납토성 등이 토성에 해당하며, 고대에 쌓은 성들은 웬만하면 다 토성이었다. 한국 이외의 토성으로 유명한 것은 네덜란드나르당 요새나, 일본고료가쿠, 중국만리장성[5] 등이 있다. 문서가 있는 토성에 대한 것은 달성, 몽촌토성, 풍납토성 등을 참고.
[1] 이 경우 석성이랑 헷갈리기도 한다. 전술했듯 한국의 석성은 안에 흙을 채우는 경우가 많기 때문[2] 오늘날 노이슈반슈타인 성처럼 사람들이 생각하는 동화 속의 같은 것이나, 십자군 원정기의 난공불락의 요새인 크라크 데 슈발리에같은 그럴싸한 성채를 생각하면 곤란하다. 중세 초중기의 서유럽에서 발달한 성은 (keep)이라고 하는데, 별거 아니고 그냥 돌로 어마무시하게 쌓아올린 탑에 불과하다. 영국런던 탑이 대표적인 케이스다.[3] 사실 지금도 필요하다면, 제1차 세계 대전 때마냥 참호를 파고 그 주변을 모래주머니로 둘러치는 전술은 어느 정도 유용하게 쓰인다.[4] 이 시기의 진짜배기 요새는 콘크리트 요새라고 따로 있었다.[5] 정확히는 진나라한나라 시대에 조성된 부분 한정이다. 명나라 때 조성된 대부분의 만리장성 구간들은 토성이 아니라 벽돌로 쌓은 전축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