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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의사(왼쪽), 윤봉길 의사(오른쪽) |
1. 개요
한인애국단은 1920년대 중반 이후 계속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또 한편으로는 만보산사건과 만주사변 등으로 침체된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임시정부의 국무회의를 거쳐 의결되고 결성된 ‘임시정부의 특무대’ 이었다.
한인애국단은 결성 직후부터 단장인 김구의 주도하에 많은 활동을 했다. 그 결과 만보산사건 이후 악화된 한·중 양민족 간의 감정이 완화되었고, 또한 중국 정부의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과 협조가 이루어지는 등 임시정부 활동에 커다란 전기가 마련되었다.
독립기념관 공식 소개문
한인애국단은 결성 직후부터 단장인 김구의 주도하에 많은 활동을 했다. 그 결과 만보산사건 이후 악화된 한·중 양민족 간의 감정이 완화되었고, 또한 중국 정부의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과 협조가 이루어지는 등 임시정부 활동에 커다란 전기가 마련되었다.
독립기념관 공식 소개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은 1931년 김구의 주도 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결성한 항일무장투쟁 단체이다. 바로 위에 있는 사진 속의 인물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의 의거(義擧)로 특히 유명하다.
2. 탄생
1920년대 임시정부는 일본의 견제 및 그로 인한 자금 사정 악화와 더불어 위임통치 청원 사건 및 횡령논란으로 말미암은 대통령 이승만의 탄핵, 무장투쟁론과 외교독립론을 둘러싼 내부 노선의 대립으로 인하여 침체기에 빠져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반전이 찾아온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군부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움에 따라 중국 내에서 반일감정이 커졌던 것.임시정부는 이런 상황이 침체에 빠진 독립운동을 다시 활성화시키고 한중간의 우호관계를 증진[1]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였고 이에 따라 요인 암살, 주요 시설 파괴와 같은 비밀공작(테러)를 수행할 단체를 만들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단체 수립에 관련되어 임시정부는 김구에게 전권을 위임했고 1931년 10월 김구가 상하이에 체류중이던 민족주의 성향의 청년 80여명을 모아 비밀결사대를 조직하니, 이것이 바로 한인애국단이다. 애국단의 단장으로는 백범 김구가 취임한다.
3. 활동
'한 사람을 죽여서 만 사람을 살리는 방법이 혁명수단의 근본'임을 기치로 내건 한인애국단은 소수의 고위층 인사를 암살함으로써 독립을 성취하고자 했다. 첫 타겟은 일본의 천황. 1931년 12월에 천황을 제거하는 명령을 부여받은 이봉창이 도쿄로 파견되었고 이듬해인 1932년 1월 8일 쇼와 덴노에게 수류탄을 투척한다. 이 사건에서 암살 대상이었던 히로히토는 무사했지만 일본인들에게 '살아있는 신'이자 '국체 그 자체'였던 천황을 향한 암살시도가 있었다는 것은 일본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때 중국국민당의 기관지였던 민국일보가 '불행히도 실패했다(不幸不中)'라는 기사를 실으면서 이 문제는 중일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됐고, 상하이 사변까지 야기한다.여기에 같은 해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 공원(현재의 루쉰 공원)에서 열린 히로히토 덴노 생일 기념 열병식에서 폭탄을 투척하여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대장, 우에다 겐키치 육군대장,[2] 노무라 기치사부로 해군중장, 시게미쓰 마모루[3] 주중 공사 등 7명을 살상하자 중국 측에서는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4억 중국인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 사람의 조선 청년이 해냈다'는 중국 총통 장제스의 유명한 극찬은 덤. 덧붙여서 1920년대 내내 중국 정부로부터 무시에 가까운 푸대접을 받았던 임시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독립군 재건 착수와 같은 사안을 놓고 중국 측의 대대적인 협조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4]
그외에도 한인애국단은 조선총독 암살을 위해 이덕주와 유진만을 파견하였고 일본군 관동군 사령관과 남만철도 총재를 비롯한 국제연명 리튼조사단을 암살하기위해 유상근과 최흥식을 파견하는등 일제 요인 암살을 계획했지만, 한인애국단의 연이은 활동에 일본이 잔뜩 경계수위를 높여서 수포로 돌아간다. 한편 윤봉길 재판 과정에서 김구가 스스로 배후임을 밝힘에 따라 일본 측은 김구와 임정 관련 인물들을 체포하는 데 혈안이 되었고[5] 그에 따라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로 옮겨야만 했다. 1933년 김구는 한인애국단 단원 전부를 돌려보내고 한인 애국단 건물을 폐쇄하며 한인애국단을 사실상 해산한다, 이 무렵부터는 김구 역시 요인 암살 등의 단발적인 투쟁보다도 군대 양성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구 애국단 단원 일부를 난징에 자리잡은 중국국민당 군사간부학교에 파견하는 등 광복군 건설에 매진한다. 그리고 이 결실이 1940년 창설된 한국광복군.
4. 평가
무장투쟁론과 외교독립론 간 갈등이 심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한인애국단 같은 의열투쟁 단체가 생겼다는 것은 여러가지를 시사한다.[6] 현실적으로 1930년대 당시 무장투쟁 또는 외교를 통한 독립은 요원한 일이었고, 일본 제국의 침략 야욕은 조선을 넘어 중국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 각국에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한민족의 반대와 저항, 독립 의지, 그리고 이를 대표하는 세력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리는 방법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항일 의거가 그나마 실질적이었다.이런 희생 덕분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으로 김구 취임과 함께 중국국민당 정부의 지원으로 한국광복군이 창설될 수 있었다. 그리고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조선 독립을 보장받는 것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7] 또 내부적으로도 독립운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합하고, 그 역량을 키웠다고 볼 수 있다.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이 그 당시 실질적 무력을 보유한 독립군인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광복군에 합류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8]
5. 단원
6. 기타
- 그동안 한인애국단의 근거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여 추정만 하고 있었으나 2018년 새로 입수된 자료를 분석한 결과 본부와 합숙소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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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보산 사건 이후로 한국과 중국간의 관계가 매우 나빴던 것도 감안해야 한다. 게다가 조선 말기 청나라의 내정간섭, 조선에 진주중이었던 청나라 군대가 민중들에게 부렸던 행패 때문에 1920~30년대 한국인들이 지니고 있던 반중감정도 상상 외로 컸다.[2] 할힌골 전투 당시 관동군 사령관이었으며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다리 한 쪽을 잃었다.[3] 나중에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의 외무대신이 되어 미주리 호에서 일제 전권위원으로 2차 대전 항복문서에 서명한 인물이다.[4] 물론 1920년대와 비교해서 대대적이었던 거지, 미국의 무기대여법 같은 거랑 비교할 수준은 못되었다. 게다가 광복군 수립 과정에서도 중국이 사사건건 간섭하는 바람에 갈등이 꽤 격했다.[5] 이 시기 김구 목에 걸린 현상금은 오늘날의 오사마 빈 라덴 수준(...)[6] 그 전의 의열투쟁은 김원봉이 만든 의열단이 주로 했다.[7] 어느정도인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8] 단, 광복군 합류 시 의용군 내의 김원봉의 영향력은 축소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