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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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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문일민.jpg
이명 문일민(文逸民), 문희석(文熙錫), 문현철(文賢哲), 왕량(王良), 황하준(黃河俊)
무강(武剛·武岡)
출생 1894년 12월 10일 (음력)
조선국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함종리 646
사망 1968년 10월 17일 (향년 73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 2가 9의 1
배우자 안혜순 (安惠淳, 1903~2006 / 1968년 사별)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66호[1]
서훈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1. 개요2. 해방 전 활동3. 해방 후 활동4. 기타5.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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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해방 전 활동

1894년(고종 31년) 음력 12월 10일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함종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평양의 애국청년단(愛國靑年團)에 가입, 그해 7월 서간도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학해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후 한족회(韓族會) 중앙본부의 명령으로 평양에 잠입하여 애국청년회(愛國靑年會)의 연락과 조직 강화 등의 사명을 완수한 뒤 귀환했다. 12월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에 가입한 뒤 별동대원으로 활약했으며 1920년 3월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에 가입했다. 1920년 7월 미국 의원단 방한 당시 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總營) 평양 폭탄대(爆彈隊) 대장으로 장덕진(張德震), 박태열(朴泰烈), 우덕선(禹德善), 안경신(安敬信) 등과 함께 평양에 침투, 8월 3일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져 건물 일부를 파괴하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평남도청 폭탄 투탄 의거)

이후 상하이로 탈출한 문일민은 1921년 초 상하이 삼육대학(三育大學)에 입학 후 프랑스·멕시코 등을 시찰하고 돌아와 1923년 운남육군강무학교(雲南陸軍講武學校)에 입학해 군사교육을 이수하고 졸업했다. 1925년 2월 상하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그해 3월 13일 곽헌, 최석순, 강창제, 나창헌, 임득산 등과 함께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제출해 통과시켰다. 1926년 만주 정의부(正義府)로 건너가 군사참모주임으로서 독립군을 양성했으며 1928년 정의부 특파원으로 광둥에 파견, 황포군관학교 교섭으로도 활동했다. 1928년 2월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특별회원으로 가입했다. 이후 중국군에서 복무하던 문일민은 1929년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 상교고급참모(上校高級參謀)로 임명됐다.

1930년 5월 13일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興士團)에 입단하면서 흥사단우들과 함께 충무공 이순신의 묘소 및 위토 보존을 위한 모금운동에 동참하는 등 흥사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무렵 고려물산공사(高麗物産公司) 사장을 역임하며 고려인삼 판매에 종사하기도 했다. 1931년 9월 김철, 박창세 등과 함께 한국군인회(韓國軍人會)를 조직하는 등 독립전쟁을 추진하기도 했으며 1933년 1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감사, 4월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 정무위원으로 선임됐다. 이 무렵 임시정부의 치안조직인 의경대(義警隊) 명예대원으로도 활약했다.

1934년 1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동시에 휴회 중 임시의정원 업무 수행을 위한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 운영에 참여했으며 1935년 7월 중국 관내 정당통일운동의 결과 탄생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창당에도 참여해 민혁당 광동지부장에 임명됐다. 민혁당 창당 2개월 만인 그해 9월 조소앙·박창세 등과 함께 탈당해서 한국독립당 재건을 선언했으나 1936년 6~7월 무렵 다시 민혁당에 복귀, 1939년 3월 탈당할 때까지 민혁당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는 가운데 1943년 4월 임시정부 교통부(交通部) 총무과장, 1944년 10월 참모부(參謀部) 참모 등을 역임하는 등 행정부에서도 직책을 맡아 활약했다. 1945년 2월 8일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 창당 당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임시의정원의 혁신운동에 나서는 등 여당인 한국독립당을 상대로 강력한 대여투쟁을 전개하다 8.15 해방을 맞았다.

3. 해방 후 활동

해방을 맞아 문일민 역시 남한으로 환국했다. 그런데 당시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남쪽에는 미군, 북쪽에는 소련군이 주둔하며 허리가 끊어진 상태였다. 미군정 아래에서 친일파들은 애국자 행세를 하고, 정작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모욕을 당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이 펼쳐졌다. 임시정부는 임시정부가 주체가 되는 자주독립정부를 세우고자 했으나 미군정은 이를 쿠데타로 규정하며 탄압했다. 이러한 와중에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러한 상황을 보다 못한 문일민은 1947년 10월 25일 오전 11시 45분, 미군정 청사인 중앙청을 찾아 미리 쓴 유서들을 던지며 13cm나 되는 면도칼로 스스로의 배를 갈랐다. 중앙청 직원들에 의해 즉시 적십자병원으로 이송된 문일민은 응급수술 끝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거사 당시 문일민은 자신의 목숨을 확실하게 끊기 위해 가성소다, 즉 수산화나트륨 3개를 종이에 싸서 삼킨 뒤에 배를 갈랐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할복 당시 가른 배 사이로 위장의 내용물이 도로 쏟아져나오면서 문일민은 극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서울 중앙청 할복 의거)

그의 병실을 찾은 김구는 “문일민씨를 이렇게 한 것은 우리들의 책임이요, 자주독립을 이루지 못하면 우리들도 죽어 마땅하오!”라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고, 엄항섭은 문일민의 의거를 "을사늑약 당시 자결한 민영환의 행동"에 빗대면서 문일민을 의사(義士)라고 칭송했다. 그의 병실에는 문일민을 살리기 위한 시민들의 자발적 수혈 행렬이 줄을 이었다. 수술 후 의식을 회복한 그는 “한국 독립을 위해 활약할 젊은 청년들의 피를 받을 수 없으니 내 피를 도로 빼어 청년들에게 돌려주라”며 더 이상의 수혈을 거부해 담당 의사조차도 눈물을 흘리며 감격할 정도였다.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문일민은 이후로도 이승만 자유당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등 불의에 맞서 싸웠다. 또 한편 독립운동 시절부터 참여하던 흥사단 활동에 매진하면서 애국동지원호회(愛國同志援護會)·광복동지회(光復同志會)·독립동지회(獨立同志會) 등 독립운동 관련 단체의 간부로도 활동했다. 그가 애국동지원호회장을 역임할 당시였던 1956년 그의 이름을 발행인으로 하여 출간된 <한국독립운동사>는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을 정리해둔 책으로 이후 정부에서 독립운동가들을 서훈할 때 주요 참고문헌으로 활용됐다. 또 동지들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인우보증(隣友保證)에 나서는 등 동지들의 선양을 위해 힘쓰다 1968년 10월 17일, 향년 75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의 묘소는 현재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자리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1962년 3월,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여 문일민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4. 기타

5. 참고자료

무강(武剛) 문일민(文一民)의 생애와 민족운동(한국외대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 부인 안혜순 지사와 함께 국립서울현충원 묘역에 똑같은 독립운동가 신분으로서 합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