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 김준길(金俊吉) |
본관 | 경주 김씨 |
출생 | 1911년 |
함경북도 온성군 변포면 백세촌[1]# (현 함경북도 온성군 세선리) | |
사망 | 1943년 |
중화민국 산서성 타이항산 |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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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1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11년 함경북도 온성군 변포면 백세촌(현 온성군 세선리)에서 태어났다.일찍이 중국으로 건너가 1934년 2월 낙양군관학교에 입학, 수학하다가 김구의 추천으로 같은 해 7월 남경(南京)의 중앙대학에 입학하여 수학하는 한편, 김구가 주도하던 특무대에서 활동하면서 일본 특무를 처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5년 8월 말 정성언(鄭成彦) 등과 공산주의 비밀결사 혁명동지회(革命同志會, 10월회)를 조직하였다. 1936년 5월에는 민족혁명당에 입당하여 김병화, 김순곤 등과 함께 상해의 일본 가무기좌(歌舞技座) 폭파를 계획하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인 1937년 12월 중국 육군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반(陸軍中央軍官學校特別訓練班)에 들어가 1938년 5월 졸업하였다. 5월에 개최된 조선민족혁명당 제3차 임시전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6월 조선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그후 1938년 9월 조선청년전위동맹을 조직하여 중앙위원 등 간부로 활동하였다. 1938년 10월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조선청년전위동맹원들을 이끌고 조선의용대 창설에 가담하고, 조선의용대 부대장과 정치조 지도위원으로 추대되었다.
그 뒤 우한이 일본군에게 함락당하자 조선의용대 제2구대원들을 이끌고 호북성(湖北省)의 중국군 제5전구(第五戰區)에서 항일선전활동을 전개했으며, 1939년 말에는 조선의용대 부지대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조선의용대를 화북으로 이동시키자고 주장했으며, 1941년 여름 부대원들을 이끌고 화북에 있는 팔로군의 근거지로 이동하였다. 1941년 7월부터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정치지도원, 1942년 7월부터 화북조선독립동맹 중앙집행위원 겸 선전부 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의용군에 참여하였다. 조선독립동맹은 중국공산당의 지휘 하에 중화민국 북방 지역에서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모여 결성하였다. 1942년 11월부터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 교무주임으로 활동하였다. 1940년대 전반기 연안과 중경을 오가며 김구와 김두봉의 서신 전달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43년 팔로군 작전지구 태항산(太行山)에서 일본군과 교전중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200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