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3:31:26

다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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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 중화민국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 국장
다이리
戴笠 | Dai Li
파일:daili2.jpg
사망 2개월 전인 1946년(민국 35년) 1월 1일에 촬영된 사진.
<colcolor=#fff> 본명 다이춘펑(戴春風, 대춘풍)
한문 戴笠
한국식 독음 대립
영문 Dai Li
우농(雨農)
출생 1897년 5월 28일
청나라 절강성 장산현
사망 1946년 3월 17일 (향년 48세)
중화민국 난징시
국적 파일:청나라 국기.svg청나라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중화민국
학력 황푸군관학교 중퇴
직업 군인, 정치인, 첩보전문가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남의사의 수장이 되다2.3. 중일전쟁2.4. 제2차 국공내전과 죽음
3. 평가4. 매체에서5.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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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1940년도의 장제스와 다이리1.jpg
1940년도의 장제스와 다이리
그는 장제스의 면전에서 총기를 소지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호리호리하고, 잘생기고, 작은 손을 가진 다이리는 허리를 곧게 편 채 성큼성큼 걸었다. 캐슈너트 맛에 빠진 그는 날카로운 눈의 소유자였으며, 홍콩에서 하룻밤 동안 구금당한 일로 영국인을 매우 불신했다. 다이리는 늘 미국 해군 군관에게 선물받은 작은 권총을 지녔고 개인 통신 요원들과 통화할 때면 알아듣기 어려운 고향 사투리로 말했는데, 누군가 그들의 이야기를 도청할지라도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431페이지.

중화민국 국민정부군인, 정치인, 정보국 총책.

중국국민당의 숙적인 중국공산당일본 제국에 맞선 공작 활동을 펼쳤고, 초공작전중일전쟁의 승리에 큰 기여를 했으나 1946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코드명은 '금수'(金水: 진수이)였다.

'중국에서 제일 위험한 남자', '중국의 히틀러', '장제스힘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청나라저장성 장산현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 이름은 다이춘펑(戴春風)이었다. 아버지를 4살때 일찍 여의고 어렸을 때는 한학을 수학하다가, 신식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16세 때 고등학교에서 도박(...)을 하다가 징계를 받아 제적되었고 학교를 나와 방황했다. 이때 상하이에 와서 암흑가에서 구르다가 도박에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되어 전문 도박사로 큰 돈을 벌게 되었다. 이때 청방의 두목이었던 두웨성(두월생)과 알게 되었고, 두웨성은 그를 장제스에게 소개해서 장제스와도 친분을 트게 되었으며 다이지타오, 천궈푸 등 국민당의 주요 인물들과 두루 인연을 맺었다. 이후 1920년대에 상하이에서 개인기밀조사요원으로 일했다.

다이리는 어느날 도박에서 판돈을 모조리 잃어버리면서 도박에서 손을 씻고, 같은 절강성 출신인 다이지타오의 후원과 두웨성의 추천서를 받아 초등 시절부터의 친구였던 마오런펑[1]과 함께 1926년 29세의 나이로 황포군관학교 6기에 편입했다. 이후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진 못했으나 훗날 명예 학위를 받았으며, 중국국민당에도 입당했다. 이름도 너무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춘펑'(춘풍, 봄바람)에서 삿갓을 뜻하는 '리'(笠, 립)로 바꿨는데, 나중에 정보 기관의 총수가 되는 그의 미래를 감안한다면 참으로 적절한 이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철저한 장제스 교장의 추종자였던 다이리는 공산당원이자 학교 정치 주임이었던 저우언라이의 영향권 아래 있는 좌익 학생들의 동향을 은밀히 상부에 보고했고, 이렇게 모은 정보는 장제스가 후에 중산함 사건을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어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자, 다이리는 정보전과 공작에 재능을 보여 여러 요원들을 풀어서 군벌군들의 정보를 수집했고 심지어는 자객을 보내 군벌이나 그 유력 지휘관들을 암살 혹은 포섭하는 공작을 맡았다. 이런 활동은 국민당군이 파죽지세로 북벌을 하고 결국 베이징까지 함락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북벌 후에도 이런 첩보 활동은 장제스가 여러 반장파들의 공격을 분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2. 남의사의 수장이 되다

1931년 탕산 사건의 여파로 서산회의파, 개조파, 계계군벌이 연합하여 광저우 국민정부가 수립되고, 이로써 1차 양광사변이 벌어졌는데 당시 제3차 초공작전만주사변이 동시에 겹치면서 장제스는 광저우와 난징의 통합을 위해 1931년 12월 하야했다. 이때 다이리는 정개민을 비롯한 황포군관학교 동창들의 도움으로 기밀조사부를 설립하여 신문기사와 비평을 비롯한 장제스의 정적들의 정보를 수집했다. 1932년 장제스가 군사위원장에 취임하여 공직에 복귀하자 다이리는 즉시 정적들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장제스에게 제출하여 장제스의 신임을 얻었다. 장제스는 다이리를 군사위원회에 영입하여 기밀조사부를 구성하도록 허락했으며 1932년 9월에는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 제2과장에 임명했다.

한편 천리푸, 천궈푸 형제가 1927년 6월에 조직한 CC단은 반일감정을 자극하고, 반일단체들을 규합하고자 했으나 반일감정의 고조는 걷잡을 수 없는 수준이라 곧 통제불능이 되었다. 1931년에 하야했던 장제스는 자신의 하야에 CC단의 책임이 있다고 여긴 후, 새로운 비밀결사인 남의사를 지원하게 되었다.

1931년에 일어난 만주사변 직후 텅지에를 비롯한 황포군관학교 출신 민족주의자들은 삼민주의 역행사를 조직했다. 삼민주의 역행사는 장제스조차도 모르게 결성된 것이었는데 하야 상태였던 장제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이 터지고 나서야 이들은 장제스가 자신들을 반장세력으로 오해할까봐 장제스의 비서 등문의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게 되었다. 장제스는 처음에는 삼민주의 역행사의 존재를 반가워하지 않았으나 이들로 하여금 국가 통합에 활용할 수 있다고 여긴 후 송호정전협정 체결 직전, 역행사의 지도자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만남의 결과로 1932년 3월 무렵 이름도 유명한 남의사가 결성되었는데 남의사의 초대 수장이었던 계영청(桂永淸)이 해군 사령관이고, 고급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비밀결사인 남의사에서 중요한 활동을 할 수 없어서 다이리가 정보부장이 되어 남의사를 지휘하게 되었다.

다이리 휘하의 조직은 정보 수집뿐만 아니라 정적을 마약 중독자로 만들어 굴복시키는가 하면 테러나 암살을 통해서 공산당, 친일파, 민주당파, 장제스에 반대하는 군벌이나 언론인들을 암살하거나 무력화시켰다. 또한 수많은 첩자나 밀정들을 이들 조직에 잠입시켜 정보를 빼내고 역정보를 뿌렸으며, 이런 역정보에 낚인 군벌들은 분열해서 쉽게 장제스에게 각개격파로 제압당했고, 공산당은 무고한 동지를 스파이로 몰아 숙청하는 팀킬을 벌이기도 했다.[2] 다이리는 1932년부터 휘하의 비밀경찰들을 이용하여 공공보안국에 남의사의 요원들을 잠입시켰고, 소위 철혈대라 불리는 비밀 암살단을 조직하여 장제스의 정적들에 대한 테러와 공작을 지휘했다.

1933년 5월 14일 상하이에서 유명작가였던 딩링의 친구 잉슈른을 살해하고, 상하이 예술대학 교수와 판즈니안 및 딩링을 납치하여 공공보안국 수용소에 3년 동안 감금한 것을 시작으로[3] 남의사는 다양한 지하활동을 전개했다. 1933년 6월 18일에는 남의사를 비난하던 중국 시민단체 비서 양친을 살해했다. 성공적인 암살작전을 수행한 이후 다이리와 남의사는 국민정부 최고위층의 후원을 받게 되었고, 한간으로 전락한 전 호남독군 장징야오 암살을 성공시킨 후에는 최악의 배신자로 유명했던 군벌 스여우싼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1934년 경에는 다이리의 측근들이 특무처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1934년 11월 13일 다이리는 《신보》 편집국장 스량차이를 살해했으며, 1935년 5월에는 텐진의 일본인 조계에서 화북 독립을 주장하는 2명의 중국인을 암살했다.[4][5] 1936년 2차 양광사변이 발발했을 때, 월계군벌의 수장이었던 천지탕 휘하의 위한머우, 리한훈 등 고급장령들을 포섭하여 월계군벌을 순식간에 붕괴시킨 것도 다이리의 소행이었다. 이쯤되자 중국에서는 무슨 암살 사건만 일어나면 그 배후에 다이리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으며[6] 다이리는
중국에서 제일 무서운(또는 위험한) 남자
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다이리는 장제스에게 유교 사상에서 비롯된 맹목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언제나 법률적인 제약을 지나치게 받지 않는 눈과 귀가 필요하다고 장제스에게 역설했으며 1936년에는 장쉐량양후청이 공산당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체포할 것을 건의했지만 장제스는 이를 듣지 않았다. 12월 12일 중국 대륙의 역사를 바꾼 시안 사건이 발생하자 다이리는 장제스가 감금당한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크게 자책하며, 12월 22일 장제스의 아내였던 쑹메이링을 수행하여 시안으로 가게 되었는데 가기 전에 사령관들을 불러모아 다음과 같은 포부를 밝혔다.
"만약 장제스를 안전하게 데려오는 임무에 실패한다면 나는 기필코 자결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 모두가 혁명에 헌신하기를 바란다."

다이리는 시안에 도착하자마자 장쉐량의 관저 지하에 구금되었으나 그곳에서 편지를 써 장제스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장제스는 이로 인해 다이리를 매우 신임하게 되었다. 1936년 12월 25일 다이리는 장제스와 함께 석방되었다.

2.3. 중일전쟁

1937년 7월에는 장제스가 천씨 형제와 다이리를 불러모아 CC단과 남의사 사이의 화해를 주선했다. 이때 장제스는 각 조직의 고유 활동 영역을 제한하여, 상호간의 충돌을 피하자고 제안하면서 교통정리를 시도했다. 직후 루거우차오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다이리는 이런 특무 조직들을 이용하여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빼내고,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 주력군을 대거 잃은 후 내륙으로 후퇴하는 국민당군의 철수를 도왔다. 또한 다이리는 일제 치하의 상하이로 파견되어 교외 게릴라와 도심 테러조직을 규합하여 전직 경찰관들과 정보요원들을 기용, 항일운동을 지휘했다. 시안 사건 와중에 자신에게 대단한 충성심을 보여준 다이리였기 때문에 장제스는 남의사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감행했는데 다이리의 기밀조사국만은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며 개혁에서 제외하고, 다이리를 더욱 중용했다. 장제스는 다이리에게 일본군 점령지 내부의 한간과 접촉하는 일을 허용했고, 소금 전매 특권을 부여하여 경비로 삼게 했다. 다이리는
곡선구국
(曲線救國)
이라는 호칭을 내걸고 활발한 공작을 펼쳤다.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남의사는 보안국으로 개칭되었고, 다이리는 신설된 보안국의 수장으로써 수만 명의 밀정 및 간첩을 양성하여 왕징웨이 정권, 중국공산당, 만주국, 심지어는 일본 본토까지 잠입시켜 정보를 빼냈다. 다이리는 매달 50만원의 자금을 받아 1937년 8월부터 4년 동안 중화민국 유신정부에 참가하려 한 전 국무총리 탕사오이, 일본에 투항한 청방의 두목 장샤오린에 대한 암살을 비롯하여 왕징웨이 정권의 고위 간부들을 상대로 150건 이상의 암살을 자행했으며 1940년 1월에는 왕징웨이 정권에 참여했던 가오쭝우와 타오시성을 포섭하여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시키기도 했다. 왕징웨이 정권의 행정원 부원장 저우포하이가 일본에 환멸을 느끼자 그를 포섭한 것도 다이리였다.

미국은 1943년부터 중미합착소를 세워 OSS를 통해 국민정부의 정보기관인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일명 '군통')을 지원했고, 군통은 미국의 선진적인 정보 기법을 익혀 더욱 중요한 정보를 빼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첩보 활동뿐만 아니라 각종 암살 작전도 실행했는데, 그중 한 예가 왕징웨이 정권의 특무기관이었던 76호의 악명높은 수장으로, 전 국민정부 정보계통 고위관료였던 딩모춘에게 미인계를 적용, 정핑루를 보내 암살하려던 사건이었으며, 이것은 훗날 각색되어 <색, 계>라는 영화로 나오게 되었다. 군통은 친일 괴뢰정부의 최고 수장이었던 왕징웨이도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한편 반정부 조직에 대한 감시 및 탄압도 지속하여 임시수도 충칭에서 비밀경찰 사령부를 조직하고, 충칭 외곽에 정치범수용소를 건설하여 운용한 것도 다이리였다. 또한 청방 두목 두웨성과 함께 영국령 홍콩과 포르투갈령 마카오를 통해 군사자금을 조달하기도 했다.

1938년 6월 16일 삼민주의청년단이 발족된다는 발표가 있고, 7월 9일에 발족되면서 남의사는 해체되었다. 장제스는 전쟁 시기 수십만 명 규모로 확장된 남의사를 삼민주의청년단으로 재조직하고 천청을 명목상 자신의 대리인으로 삼았으나 실질적인 권력자는 주자화와 부의장 다이리 등이었다. 하지만 남의사의 해외지부는 실질적으로 해체되지 않아서 계속 남의사의 명의로 활동했다. 1943년 장제스가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과 협의하는 카이로 회담에 참여하기 위해 중국을 떠난 사이, 젊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다이리, 천리푸, 천궈푸, 허잉친, 쿵샹시를 제거하려는 친위 쿠데타가 모의되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장제스는 이들을 모두 체포하고 그 중 16명을 총살형에 처했다.
파일:1940년도의 장제스와 다이리2.jpg
1940년도의 장제스와 다이리

이후 미국의 OSS가 다이리 제거에 관심을 보였다는 점에서 다이리와 미국과의 관계가 상당히 악화되었다. OSS는 다이리 휘하의 요원들을 무능하고, 미국 군관들을 정탐하며 공격하고, 원조 물자를 남용하는 부패 세력으로 간주해 비난했으며, 심지어 다이리를 전후 합작을 위해 일본에 정보를 넘겨주고 있는 적대적인 인물로까지 보았다. 이 때문에 다이리는 임시수도 충칭에 주재한 미국인들의 불온 발언을 장제스에게 보고하곤 했다. 이후 패트릭 헐리가 특사로 부임해오자 국-공 사이의 조정에 힘쓰던 그에게, OSS에서 5,000명의 공수부대를 옌안에 파견하고 미군 1개 사단을 지원해 홍군과 함께 합동작전을 펼칠려는 계획을 수립한 것을 폭로하여 데이비드 베럿과 윌리엄 버드를 비롯한 OSS의 경쟁자들을 제대로 엿먹였다. 이후 미 해군과 함께 중미합동공작을 주도했다.

2.4. 제2차 국공내전과 죽음

파일:1940년도의 다이리.jpg
1940년도의 다이리

8년에 걸친 격렬한 중일전쟁이 끝난 후, 남의사의 잔여 세력과 CC단은 모두 통합되어 기밀조사국이 되었으며, 1946년 7월 1일 국방부 비밀정보국으로 개편되었다. 1945년부터 대대적인 '숙간활동'을 벌여 수천 명의 한간을 체포해 법정에 세웠으나 전쟁 이전부터 내통하고 있었던 2중 간첩들이 있었기 때문에 저우포하이, 딩모춘 등 쓸만한 인물들은 살려두어 보호하고 있었다.

이 시기 제2차 국공내전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지만,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단은 화평교섭을 벌이고 있었는데, 다이리는 국민당 내에서도 가장 강경한 반공주의자로, 중국 각지를 돌아 다니면서 공산당 토벌을 위한 정보수집에 앞장섰다. 하지만 칭다오에서 난징으로 돌아오는 도중 악천후 때문에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하고 말았다. 다이리는 사망 후 중장 계급을 추증받았다. 장제스는 다이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당황하여 후임 통계국장에 정개민을 임명했지만 결국 제2차 국공내전에서 참패해 몰락하고 말았다. 당시 다이리의 죽음에 대해 일본의 소행이다, 미국의 소행이다, 공산당의 소행이다 등의 갖가지 음모론이 나돌았다.

미국은 다이리를 싫어했기 때문에 장제스에게 다이리의 조직을 해체하라고 압력을 넣는 한편, 다이리의 장례식에 그와 합작하던 미국 정보요원 밀톤 마일스의 참가를 허락하지 않았지만 마일스는 이를 무시하고 다이리의 장례식에 참가했다.

3. 평가

다이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중국에서 가장 두려운 자가 된 이래 미소 속에 숨은 잔인함이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이리는 국민당의 다른 많은 수뇌부들이 갖추지 못한 개인적인 지도력을 갖춘 영리한 정객이었다. 무엇보다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장제스를 보호하기 위한 준비를 늘 갖추고 있었다.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291페이지.

다이리는 그 능력으로 인해 적과 아군 모두에게 높이 평가받았다. 다이리가 사고사하자 장제스는 수도 난징의 한 거리를 그의 자를 따서 '우농로'라고 개칭했으나, 3년도 안되어 난징은 공산당의 홍군에게 함락되었고, 장제스는 새로운 수도로 삼은 타이베이의 한 거리를 우농로(위눙루)라고 이름붙였다. 이 우농로는 아직도 남아 있다.

또한 장제스는 대만으로 패퇴하면서
"다이리가 살아 있었으면 대륙을 잃지 않았을 텐데."
(若雨農不死,不至失大陸)
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
"다이리의 죽음으로 중국 공산당의 혁명은 10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戴笠之死,中国共产党的革命,可以提前十年成功)
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이리와 장제스 모두와 가까웠던 청방 두목 두웨성도
"다이리가 있었으면 공산군은 절대로 장강을 건너지 못했다."
고 한탄했다.

대만에서는 기념관까지 세워질 만큼 높이 평가받았으나, 중국 공산당은 다이리의 공작에 의해 수많은 당원이 학살당했기 때문에 이를 갈았다. 그리하여 제2차 국공내전 때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다이리의 외아들 다이산우(戴善武)를 체포해 1951년 처형함으로써 분풀이를 했다.[7] 그러자 대만에 있었던 친구 마오런펑이 공작원을 보내 다이리의 손자를 비롯한 유가족들을 대만으로 도피시켰다. 하지만 공산당도 시간이 지나면서 다이리가 항일전쟁에서 공헌한 바는 높이 평가하고 있다.

다이리가 뿌린 여러 역정보들은 훗날 문화대혁명 때, 마오쩌둥과 4인방의 하수인이었던 홍위병에게 다시 활용되어 수많은 공산당 고관들이 홍위병에게 박해당하거나 자살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죽은 다이리가 산 공산당 간부들을 숙청하다

암흑가의 도박사에서 정보 총수로 변신하는 삶의 이력이 워낙 파란만장하고, 능력이나 활약이 대단했기 때문에, 중국 본토와 대만에서는 그의 행적을 다룬 책이 여러 권 출판되었다.

장제스의 힘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힘러와는 달리 매우 조용하고 공개석상에 나오기를 꺼리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중국에서 가장 신비로운 인물이라는 별명이 뭍기도 했다. 사진찍는 것도 매우 싫어했다고. 그러나, 다이리가 벌인 여러 공작이나 암살은 결과적으로 장제스 정권의 이미지를 1인 독재정권으로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상 장제스 정부가 벌인 여러 무리수들은 대개 다이리의 책임이었다.

이렇기 때문에, 사생활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체로 당시 중국 고위직이나 암흑가 출신들은 호색이 일반적이었지만, 다이리의 경우는 확인이 잘 안된다. 1939년 아내였던 마오슈충(毛秀丛)과 사별했는데, 1938년 국통 소속 여간첩 리리(李麗)가 낳은 아이가 다이리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이후 리리는 일본군 장성을 유혹해서 정보를 빼냈고, 이 정보로 국민당군은 큰 전과를 올렸다.

워낙 다이리의 사망이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여러 음모론이 돌았다. 먼저 제2차 국공내전에 앞서 최대의 숙적을 제거하려는 공산당 공작기관 총책 캉성리커눙(李克農)[8]의 소행이라는 설이 있고, 또는 국공내전이 다시 발발하는 것을 두려워한 미국 OSS [9]가 지나친 강경파인 다이리를 제거했다는 설, 또는 다이리와 사이가 나빴던 국민당내 분파들(쑹메이링 또는 CC단 계열)이나, 또는 다이리의 자리를 노린 부하들의 소행이라는 설이 있다.[10] 심지어는 장제스가 자신을 더 이상 신임하지 않는다 여겨 자살해버린 것이라는 설도 있다.

4. 매체에서

  • 제2차 세계 대전 게임인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 1.5패치와 WTT DLC의 출시 이후 중화민국 장관진으로 추가되었다. 공포의 왕자 타이틀을 달고 다른 나라처럼 비핵심인구 패널티 감소, 쿠데타 및 저항군 효율 감소 버프를 준다. 안정도 10%를 추가로 부여하는 조사통계국 설치 이후에 기용할 수 있다.
    • 위 게임의 모드인 <Eight Years' War of Resistance>에서는 초기부터 기용이 가능하며 남의사 강화를 통한 중화민국의 반일 파시즘 루트를 위해 필수적인 인물이다. 일본 제국에게 패망해서 일본의 속국이 되거나 친일 루트를 타서 중일동맹이 체결되면 천리푸와 마찬가지로 기용이 불가능해진다.
    • 위 게임의 대체역사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에서도 등장한다. 개명 이전의 이름인 다이춘펑으로 등장. 국민당 내의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및특별행동국, 줄여서 중특국을 창설하고 암살된 장제스 대신 왕징웨이를 따르고 있다. 국민혁명 실패 후 국민당의 대외활동은 전면 금지되었지만 다이춘펑의 능력으로 지하조직은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다. 게임 시작 이후 쑨촨팡이 암살되고 국민당이 강남의 5성을 장악하면 당대회가 열리는데 플레이어가 당대회에서 의결된 사항과 반대로 행동하면 게임 내에서는 이것이 다이춘펑의 공작으로 벌어진 것으로 해석해 중특국의 지지율이 상승한다. 이것이 반복되다보면 최종적으로는 국민당을 완전히 장악하고 전체주의 성향의 다이춘펑이 국가의 지도자로 등극할 수도 있다.
    • 마찬가지로 위 게임의 대체역사 모드인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도 등장하나, 1957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작중 시간대로는 이미 고인이다.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 이후 그가 살아있으며 여전히 국민당 잔당들을 이끌고 항일운동을 펼친다는 음모론이 퍼지고 이로인해 중국과 일본 전역이 혼란에 빠지며 선택에 따라 쿠데타로 정부가 뒤집힐 수도 있다.
    • 위 게임의 모드 <The Road to 56>에서는 중화민국이 파시즘 루트(신생활운동 재개)에서 남의사 강화로 진행하면 지도자로 만들 수 있다.
  • 리첼렌의 대체역사 근현대 폭발 3부작이라 할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를 빼고는 두 작품에서 등장하는데, 1910년에서 본편이 완결되는 폭군과 다르게 일제시기에 해당되는 부분 시기를 설정으로 연재되기에 중국의 정보 책임자로서 등장한다.
  • 2번째 작품인 폭통으로 약칭되는 《대통령 각하 만세》는 대중 침투를 하는 한국의 조직을 와해하는 것에서 한국 첩보조직 책임자로 등장하는 이범석이 혀를 내두렀다는 서술로 표현되었다. 삼민주의를 위해서 열심히 싸우지만 중화민국 정부가 점점 친일괴뢰국이 되어가자 자신이 반란 혐의로 체포했던 장제스[11]를 풀어주고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
  • 3번째이자 본격적으로 나오는 폭구로 역칭되는 《한국 독립 전쟁》은 과거로 되돌아온 김구가 생전 장제스가 알려준 정보로 자기 말이 신뢰성이 높다는 것을 알려주지만, 반대로 장제스나 다이리 둘 다 김구를 어떻게 정보를 빼갔는가와 경계하는 이중성이 나타났다.
  •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중일전쟁 중 독일에 파견되어 히틀러에게 지원 약속을 받아내거나, 군벌들이 장제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기 전 미리 각 군벌의 중심부에 남의사 요원들을 심어둔 뒤, 반란이 일어나자마자 이들을 시켜 군벌들을 암살하는 등의 활약을 한다.

5.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제스와 국민당 엘리티스트》, 정두음, 도서출판선인.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서안사변》, 나가노 히로무, 일월서각.

[1] 毛人鳳(1898~1956). 역시 국민당군 정보 계통의 장성을 지냈으며 상장까지 올랐다.[2] 결국 공산당도 워낙 털린게 많았던지라, 1939년 옌안시절에 중앙사회부라는 첩보-방첩기관을 만들기도 했다. 이 기관이 건국 이후 국가안전부가 되었다. 이런 편집적인 피해의식 때문에, 무고한 공산당원 상당수를 일제나 국민당 밀정으로 몰아 처형하기도 했다.[3] 딩링은 수감 기간 중에 면회와 좋은 대우를 받을 수는 있었다. 그는 3년 후에 석방되었는데 이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4] 이 사건은 추정일 뿐이다.[5] 일본의 자작극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으며, 일본은 이를 핑계로 허잉친을 위협하여 하매 협정을 체결했다.[6] 하도 암살을 많이 해대서 1935년의 왕징웨이 저격 사건의 경우 실제론 천밍수, 리지천을 비롯한 광동파의 소행이었으나 당시엔 배후에 남의사가 있다는 추측이 강했다.[7] 난징을 함락시키고 조사통계국의 자료를 접수한 공산당은 철저히 보복을 했는데, 이때 조사통계국 요원이나 빨대들 수십만 명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한다. 물론 당시 대륙에는 국민당 잔당들이 상당수 많아 있었던 데다가, 서부에서는 국민당군의 유격대나 잔여 군벌의 저항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 등, 공산 정권이 확립된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잠재적인 불안 요소를 제거하려는 의도도 있었다.[8] 캉성은 방첩, 리커눙은 공작이 전공이었다. 리커눙의 가장 큰 업적은 장제스에게 서운하거나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장쉐량양후청을 포섭해서 서안 사건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외에도 온갖 공작으로 국민당에 첩자를 심고, 군벌들을 회유하여 공산당의 집권에 큰 역할을 했다. 중국에서는 다이리의 라이벌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그 업적으로 리커눙은 한번도 부대를 지휘한 적이 없지만 인민해방군 상장까지 올랐다. 제네바에서 열린 한국 전쟁 휴전협상에서 중국측 대표로 참가하는 등 외교 커리어도 있었다.[9] 당시 미국은 지나치게 냉전이 심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장제스가 공산당을 토벌하려는 것을 말리려는 입장이었다.[10] 근데 당시만 하더라도 비행기가 그다지 안전한 이동수단이라고 볼 수는 없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공산당 측에서도 비슷한 시기인 1946년 4월 고위 지도자인 예팅, 덩파, 보구가 충칭에서 옌안으로 돌아오던 도중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그 때문인지 마오쩌둥도 장제스와 회담하기 위해 충칭행 비행기를 탄 것 이외에는 비행기를 기피했다. 집권 이후 유일한 외유로서 스탈린을 만나러 모스크바에 갈 때도 기차를 이용했다. 반면 장제스는 전용기('메이링'이라고 이름 붙은 C-47 수송기)를 가지고 있었고, 내전의 와중에서도 계속 비행기로 중국 전토를 누비며 독전했다. 심지어는 한국까지 와서 이승만과 회담하기도 했다.[11] 사실 장제스는 자신이 반란을 꾸며도 다이리가 자신의 조직을 와해시킬걸 알고 있어서 자신을 조사하러온 다이리와 독대를 하려고 일부러 체포된 것이다. 여기서 장제스는 화려한 말발과 체포된 다른 군벌과 달리 탄탄한 논리로 다이리를 포섭하는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