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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쑤젠궈(蘇建國) |
출생 | 1918년 10월 1일 |
중화민국 직예성 진해도 임유현 북대해 (현 중국 허베이성 친황다오시 베이다이허구) | |
사망 | 2020년 2월 9일 (향년 101세) |
중국 상하이시 | |
학력 | 난징 국립중앙대학 (학사)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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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해외독립유공자 가운데 가장 마지막까지 생존한 인물이다.2. 생애
1918년 10월 1일 중화민국 직예성(直隸省) 진해도(津海道) 임유현(臨楡縣) 북대해(北戴河)[1]에서 태어났다.난징 국립중앙대학(國立中央大學) 재학 중이던 1944년 같은 학교에서 유학하던 조일문(趙一文)과 만났고, '일제에 대항하여 나라를 되찾자'며 의기투합했다. 이후 쑤징허는 난징시에서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일본제국 육군의 동향을 수집하는 한편, 한국광복군에 입대할 조선인 청년들을 모집하고 그 청년들을 호송하는 등의 지하 공작 임무를 수행했다.
그 뒤 그는 본격적으로 조선인 청년들을 산시성 시안시로 이동시키는 임무에 나섰다. 이후 그는 세 차례에 걸쳐 일본군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대학 후배 신영묵과 이정선(李正善)·박익득(朴益得)을 비롯한 조선인 청년 100여 명을 안전하게 탈출시켜 시안시에 주둔하던 한국광복군 제2지대까지 호송하는 임무를 완수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한국광복군 특파원증과 공작지령문을 몸속에 숨겨 운반했다. 이때 난징시에서 시안시 한국광복군 제2지대까지는 왕복 100여 일이나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에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었다고 한다. 이에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으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1946년 5월 1일 '한국광복군 총사령 포상장(褒賞狀)'을 수여받기도 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후인 1950년 중국공산당 간부 선발 시험[2]에 합격해 화둥지역 물자공급처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시기에, 당시 적대 관계에 있던 대한민국을 도운 전력이 있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정치적 박해를 받았고, 그 결과 온 가족이 안후이성 시골 농장으로 하방(下放)당하는 고난을 겪었다.
그 뒤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가 성사된 직후 생사를 함께하던 옛 한국인 동지들과의 재회로 조일문 지사 등을 만나게 되었고, 이들의 적극적인 추천에 힘입어 199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으면서 명예가 회복되어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았다.
이후 중국 상하이시 푸둥신구(浦東新區)의 한 아파트에서 아들 부부와 함께 거주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2020년 2월 9일 노환으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