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9:49:41

박노순


성명 박노순(朴魯順)
생몰 1896년 7월 14일 ~ 1971년 6월 14일
출생지 강원도 덕원부
사망지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매장지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셰붸르니 공동묘지
추서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8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노순이 남긴 회상기에 따르면, 그는 1896년 음력 7월 14일 강원도 원산의 농민가정에서 태어나 원산, 성진에서 막노동판을 전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16년 일본인이 경영하는 광산에서 다른 조선인 5명과 함께 임금인상 파업을 주도했다가 해고되었고, 1917년 초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부두노역자로 일했다고 한다. 이후 1918년 봄 몇몇 동료들과 함께 일자리를 찾아 하바로프스크로 이주했으며, 8월경 미, 영, 일본군이 연해주를 침략하여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일본군과 일본의 지원을 받는 백군을 괴멸시키면 조선이 독립한다는 생각에 박안드레이, 최인욱, 박영식, 박기수[1], 김응룡과 함께 전투에 참가하기로 결심하고 적군에 가담했다고 한다.

1919년 가을, 박노순은 하바로프스크 근처의 한인촌 다반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이미 빨치산 활동을 하던 최니콜라이, 김예수 등을 만나 항일 빨치산투쟁에 참가했다. 박노순의 회상기에 따르면, 조선 사람들은 이 부대를 다반군대 또는 근처에 '청룡기차역'이 있었기에 청룡군대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그는 이 다반 빨치산 부대에 가담한 뒤 1922년 말 일본군이 연해주에서 철군할 때까지 이 부대를 이끌며 일본군 및 백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였다. 192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0월 혁명 10주년 원동준비위원회가 한글로 출판한 소책자 <십월혁명 십주년과 쏘베트고려민족>은 다반군대에서 활동했던 주요 인물로 이두일, 김안드레이, 최니콜라이, 조영인, 이금돌, 백수동, 이표돌, 이성천, 그리고 박노순 등이 있었다고 기술했다.

독립운동가 김규면(1881~1969)이 연해주에서의 항일빨치산 투쟁 활동을 기록한 글인 '비망록'에 따르면, 다반군대가 1918년 한인사회당 창립시키에 조직된 빨치산 부대에미녀 그 영솔자는 최니콜라이, 김역활, 이두일, 백수동, 이금돌, 이성청, 김안드레이, 이표돌, 그리고 박노순 등이라고 한다. 이로 볼때 박노순은 다빈군대를 지도하여 강화하고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연해주 정부문서보관소 자료를 조사한 러시아연방 연해주정부가 1990년 4월 11일에 발행한 '박노순의 빨치산 투쟁 참가에 관하여'에 따르면, 박노순이 일본군에 맞서 싸운 정황이 담긴 기록문서가 2개 남아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과거 빨치산 대원인 윤이반 외 1명이 1930년 10월 25일에 서명한 문서로, 박노순이 빨치산 대원으로서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연해주의 네벨스크, 하바로프스크, 인스크, 볼로차예프스크의 전투에 참가했으며, 이후에는 한인 특수철도대원으로 일하다가 면직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문서는 빨치산 사할린 특수대대 전권위원장이었던 박모(朴某)와 사할린 특수대대 제1대대장이었던 임호가 1932년 8월 25일에 서명한 것으로, 이 문서에는 박노순이 1919년에서 1922년까지 일반 빨치산 대원으로서 우수리스크와 인스크 전선에서 백군과 일본군에 대항하는 전투에 참여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후 1930년대 말 이오시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으며, 1971년 6월 14일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서 사망했고 셰붸르니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박노순의 독립운동 사실은 그의 후손인 박필립이 2006년 9월 21일 진실화해위원회에 박노순의 연해주에서의 항일운동에 대한 진실규명을 신청하면서 알려지게 되었으며, 진실화해위원회는 2008년 2월 26일 박노순이 다빈 군대에서 항일운동을 벌인 것이 입증했음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박노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박기수와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