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이명 | 여정순(呂正淳) |
출생 | 1921년6월 17일 |
평안북도 의주군 | |
사망 | 1969년 11월 20일 |
본관 | 미상 |
학력 | 베이핑(北平)중학교, 난징 남방대학(南方大學), 난징 국립중앙대학 |
군경력 | 한족동맹(韓族同盟) 난징 지하공작원, 한국광복군 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 국내진공작전 전라도반 제 2조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 - 777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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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건국대학교 교수.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추서.2. 생애
1921년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핑(北平)중학교를 졸업하고 남방대학(南方大學)에서 난징국립중앙대학에 전학하여 재학 중 송지영, 신영묵, 조일문과 함께 한족동맹(韓族同盟)이라는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여 지하공작 활동을 전개하였다.3. 독립운동
1943년 6월, 충칭(重慶) 임시정부에서 밀파된 한국독립당 소속 김병호[1]가 송지영의 거처로 찾아와 한국독립당 상하이ㆍ난징 지구 공작 임무를 맡아 줄 것을 제의했고 이에 송지영은 쾌히 승낙한다. 당시 김병호는 국내에 갔다가 돌아온 후 난징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베이징으로 떠났다.
김병호(金柄豪)가 상하이(上海)의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송지영도 임시정부의 비밀 공작원이라는 사실이 탄로나고 말았다. 송지영도 상하이에서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난징(南京)에 있던 일본 헌병대와 영사관 경찰에서는 이같은 사태를 중대시하고 난징중앙대학에 재학중이던 모든 한국인 학생의 숙소를 수색하고 이들의 신변을 압축하였다
송지영 사건 이후, 난징중앙대학교 내 모든 한국 학생은 송지영(宋志英)의 뒤를 이어 구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한국 유학생들은 일제의 쇠사슬보다 죽음을 무릅쓴 탈출과 항일투쟁에의 길을 선택하였다.
이정선도 일본경찰에 체포되자 조사받고 한 달만에 곧 풀려났고, 다시 난징중앙대학으로 편입했지만[2] 계속 학업에 열중할 수 없다고 판단해 충칭으로 탈출해 시안 광복군 제 2지대 제 3구대에 입대하였다. 1945년 OSS 무전반 훈련을 받았고, 국내진공작전 전라도반 제 2조(이정선, 장두성, 백준기)에 배속되어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4. 해방 이후
광복 후 조일문과 건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1963년 한국광복군 활동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1965년 7월 조시원, 윤광빈과 한중문화협회 재건에 나섰고, 상임감사에 임명되었다. 1969년 11월 20일 오전 1시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5. 참고문헌
독립유공자 공훈록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47·321면
자료한국독립운동(추헌수) 3권 229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856·867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408·443·495·502·614면
[1] 본명 김병호(金柄豪), 훗날 1955년 특무부대장 김창룡에 의해 꾸며진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혐의로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하게 된다. 중국에서 이름은 김중민(金仲民), 정정화의 장강일기에서는 고중민(高仲民)으로 나온다.[2] 1944년 10월, 이명 여정순(呂正淳)이란 이름으로 난징중앙대학에 편입했다. 國立中央大學, 三十三年度 第一學期借讀生名冊 , 中大傍聽生借讀生改正式生名冊及四年級學生名單(1944), 南京大學檔案館 館藏檔案: 1-3214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이정선 ; 독립운동사 제 6권(下), 4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