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9:10:14

천치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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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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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중화민국 공상총장
천치메이
陳其美 | 천치메이
파일:external/history.people.com.cn/MAIN201501231842000402543940408.jpg
영사(英士, 잉스)
출생 1878년 1월 17일
중국 저장성 우싱현
(現 후저우시 우싱구)
사망 1916년 5월 18일 (향년 38세)
중화민국 장쑤성 상하이
국적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직업 경찰관, 정치인, 혁명가
가족 남동생 천치차이
학력 경감학교 (졸업)
정당 중화혁명당
서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3. 한국 독립운동 지원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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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dangshi.people.com.cn/F201205160909501362610558.jpg

청나라경찰관이자 중화민국혁명가이며, 장제스를 발굴하고 심복으로 쓰면서 장제스가 혁명 세력이 되도록 하는 길[1]을 터준 사람이기도 하다. 동생은 혁명가인 천치차이이며, 조카로는 천궈푸, 천리푸가 있다.

2. 생애

중국 저장성(浙江省) 우싱현(吳興縣)[2]에서 태어났다.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버지의 사망 후 가세가 기울어 가난해졌다. 이후 1906년, 일본 도쿄의 경감학교(警監學校)로 유학을 가 졸업했으며, 동년 겨울에는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에 가입했다. 또한 이 중국혁명동맹회를 장제스(蔣介石)에게 소개시켜주기도 했다. 천치메이와 장제스는 모두 저장성 출신이었다. 천치메이와 장제스를 중심으로 한 저장성 인맥은 후에 국민당에서 큰 세력을 이루며, 장제스 집권 이후 천치메이의 일족들은 중화민국에서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다.

천치메이는 귀국 후 청나라의 경찰로 일하면서도 비밀리에 상하이의 조폭인 청방에 가입했으며, 청방조직을 이용하여 혁명운동 조직을 확대했다. 또한 각종 언론사를 설립하여 반청운동을 부르짖었다.

1911년 11월 3일에는 신해혁명의 시발점이 된 우창 봉기가 발발하자 천치메이는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을 이끌고 상하이에서 봉기, 시를 점령했다. 천치메이는 상하이 주변의 장쑤성과 저장성의 혁명세력과 연합하여 혁명세력의 지배지역을 넓혔다. 천치메이는 난징을 점령하고 쑨원을 불러와서 임시 대총통에 취임시켜 중화민국의 창립에 큰 공을 세웠다. 열렬한 쑨원의 추종자였으나, 그 시대 인물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음모나 술수를 쓰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특히 혁명 세력 안에서 쑨원과 그 라이벌이었던 타오청장(陶成章)이 갈등을 빚자[3], 천치메이는 쑨원을 위해 장제스에 타오의 암살을 명령하기도 했다. 이어 자신의 세력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혁명 세력안의 여러 인물을 암살하기도 했다.

이렇게 장강 이남에서는 혁명군이 대세가 되었으나, 청나라 수도 부근에 주둔하던 청나라 북양군은 아직 건재했고, 위안스카이는 북양군을 이끌고 혁명군을 진압하러 남진하려 했다. 쑨원의 난징 정부는 내전을 피하기 위해 위안스카이와 교섭했고, 결국 공화국을 세우고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을 맡는 것으로 타협하여 선통제를 퇴위시켰다. 이것으로 청나라는 멸망했으며, 이것을 신해혁명이라고 한다.

상하이 주변을 장악한 천치메이는 혁명군측의 으뜸가는 군벌이었으며, 그 세력은 위안스카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위안스카이 대총통 아래의 탕사오이 내각에서 공상총장(工商總長)에 지명되었으나 취임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은밀히 칭제를 준비하고 있었고,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으로 독재를 강화했다. 천치메이는 상하이 반원군 사령관에 취임, 1913년 7월, 계축전쟁에 참가했고 상하이 점령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위안스카이에게 쫓겨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위안스카이가 1914년 중화민국 국회 해산을 단행하고 1915년 홍헌제제를 통해 황제에 즉위하자 1916년, 다시 귀국하여 호국전쟁에 참여, 위안스카이 반대 투쟁을 전개했다.

하지만 5월 18일, 위안스카이가 보낸 암살자 장쭝창의 총에 맞아 암살당했는데 위안스카이가 급사하기 불과 19일전이었다. 천치메이는 자객을 써서 여러 정적들을 암살했는데, 이번에는 자신이 당한 셈이었다. 그의 장례식은 그의 부하인 장제스의 도움으로 치러졌으며 후일 장제스가 국민당의 실권을 장악한 이후에 저장 천씨(한국어로 절강 진씨) 가문은 국민당의 핵심으로 성장했다. 천궈푸 형제, 천청, 천이, 천량 등등이 모두 그 일가...이긴 한데 천리푸, 천궈푸를 제외한다면 딱히 가문빨로 성장했다고 보기는 힘든 감이 있다. 천청이나 천이는 모두 천치메이와 무관하게 자신의 능력과 업적으로 그자리에 이른 사람이다.

3. 한국 독립운동 지원

그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펼치고 지원해 주었으며,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친하기도 했다. 특히 쑨원(孫文)이 이끄는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의 일원으로 활동했었던 신규식(申圭植)과 친했으며, 신규식과 함께 신아동제사를 조직해 한·중 혁명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었다. 이에 1968년,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다.

4. 기타

기타 잇키와 사이가 안 좋았는데 이 때문에 기타 잇키는 쑹자오런도 천치메이와 쑨원이 죽인 것이라는 음모론을 유포하고 다녔다.[4]

장제스의 정치적 스승으로서[5], 장제스의 여러 독재행각이나 테러, 암살, 그리고 암흑가(청방)와의 커넥션과 같은 무리수는 천치메이에서 나왔다. 장제스와는 달리 중국 공산당과 이렇다할 악연이 없었지만(중공 창당 전에 사망), 이렇게 중국국민당의 어두운 면을 상징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중공 정권이 수립된 이후에도 국부로 추앙을 받는 쑨원과는 달리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평가가 매우 박하다. 사실 천치메이의 조카들이 만든 CC단남의사와 함께 국민당의 대표적인 극우 폭력 조직이었다. 이들의 테러에 수많은 동지를 잃은 공산당은 이를 갈 수밖에 없다.

중공정권 수립후 장제스가 대륙 시절 세운 천치메이의 공덕비는 대부분 제거되었고, 그의 호를 따서 세워진 대학인 영사대학은 폐교되고 중공정권 수립후 캠퍼스는 위치에 따라 푸단대학저장대학으로 흡수되었다.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은 없었다.

[1] 이 때부터 성장한 장제스는 쑨원의 주요 부하로도 들어가게 된다.[2] 현 후저우시 우싱구[3] 이 갈등은 타오청장이 혁명자금의 사용처를 두고 천치메이와 쑨원을 비난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4] 쑹자오런위안스카이의 사주로 암살되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천치메이가 워낙 정적제거용으로 암살을 즐겨 사용했기 때문에 이런 음모론이 나올 수 있었다.[5] 장제스는 쑨원을 정치적 스승으로 내세웠지만, 실제 정치적 행태는 천치메이와 비슷했고, 실제로 천치메이의 직계 부하로 더 오랫동안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