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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이(1883)

파일:진의(1883).jpg
중화민국 대만 행정장관
푸젠성 정부주석
정체 陳儀
간체 陈仪
한국식 독음 진의
영문 Chen Yi
퇴소(退素)
공협(公俠)
출생 1883년 5월 3일
청나라 절강성 산음현
(現 저장성 사오싱시)
사망 1950년 6월 18일 (향년 67세)
중화민국 타이베이현 신뎬진
(現 신베이시 신뎬구)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일본 육군대학교 졸업
직업 군인, 정치가

1. 개요2. 생애
2.1. 청나라/북양정부 시절2.2. 국민정부 시절2.3. 중일전쟁2.4. 대만 행정장관2.5. 최후
3. 기타4. 매체에서5. 주요경력6. 참고문헌

1. 개요

중화민국의 군인, 정치가. 복건성 정부주석, 대만 행정장관 등을 역임했으나 국공내전에서 패한 장제스를 배신하려다가 들켜 총살당했다.

2. 생애

2.1. 청나라/북양정부 시절

1883년 청나라 절강성 소흥에서 태어났다. 절강구시서원(浙江求是書院, 현 저장대학)에서 공부하다가, 1902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해 1907년 포병과로 졸업했다. 이후 일본에서 광복회 활동을 하다가 무창봉기가 일어나자 신해혁명에 참여했고, 1914년 베이징에서 정사당통솔판사처 참의를 지냈다. 1915년 위안스카이홍헌제제를 선포하자 이에 항의하여 사직했으며 1917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육군대학교에 진학해 3년간 공부했다. 육군대학 졸업 후 1920년에 중국으로 귀국해 상하이에 거주했다.

한동안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친구와 사업을 하여 기업을 경영하다가 1924년 치셰위안루융샹 사이에 강절전쟁이 발발하자 치셰위안을 지지하여 절강군에 입대하였다. 이후 직예군벌 쑨촨팡의 부하가 되어 절강군 제1사단장에 임명되었고 국민혁명이 시작되자 쑨촨팡에게 장제스와의 합작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1926년, 천이는 참모장을 파견하여 장제스에게 합작 의사를 타진했고 장제스는 천이를 19로군 군장으로 임명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천이는 중국국민당에 투항, 19로군 군장에 임명되었으나 부하들의 반발 때문에 사임하였다. 1927년 7월, 난징 국민정부의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2. 국민정부 시절

1928년 3월, 국민정부로부터 유럽 각국의 군수공업을 알아보라는 명을 받고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를 시찰하였다. 이때 독일 유학생 진동생, 진과위 등과 교류하여 이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귀국 후 1929년 4월, 군정부 병공서 서장에 임명되었으며 5월에 군정부 상무차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군정부 정무차장, 복건성 보안사령관, 육군대학 교장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933년, 복건성 정부주석 장광나이, 19로군 군장 차이팅카이, 전 행정원 부원장 천밍수, 전 광동성 정부주석 리지선 등이 복건사변을 일으켰는데 제5차 초공작전 중이던 장제스는 이를 매우 간단히 진압해버리고 관련자들을 전부 국민당에서 영구 제명해버렸다. 1934년, 천이는 공석이 된 복건성 정부주석에 임명된다.

1935년, 대만총독부가 일제의 대만 통치 40주년을 기념하여 '시정 40주년 기념 대만박람회'를 개최하였고 천이는 이 박람회를 다녀온 후 대만의 근대화 상황에 대해 경악에 가까운 감정을 표출하면서 일제의 대만 통치를 복건성 통치의 모범으로 삼으며 측근들을 대만에 파견하여 일제의 대만 통치를 연구하였다. 이는 1933년 시점까지 복건성이 중국에서 가장 배일운동이 심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었다.[1] 이 때문에 중국 최고의 대만통으로 알려졌다.

2.3. 중일전쟁

일본을 대단히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대만 주둔 일본군이 복건성을 침탈하기 위해 일본인 교사를 죽여 자작극을 벌인 사건에 쉽사리 넘어가지 않았으며 중일전쟁이 터진 이후에는 국민혁명군 25집단군(二十五集團軍) 사령을 맡아 푸젠성을 방어했다. 1941년에는 복건성 주석 자리를 유건서에게 내주고 임시수도 충칭으로 가 당정공작위원회 고핵위원회 비서장 겸 중앙훈련단 교육장으로 재임하였다.

1943년 카이로 선언을 통해 중화민국은 승전하면 1895년에 일본 식민지가 된 타이완 섬을 반환받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국민정부는 이에 따라 1944년 4월, 행정원에 대만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천이와 함께 정학계의 일원이었던 중앙설계국 국장 슝스후이의 추천에 따라 당시 최고의 대만통이며 중화민국 육군대학(현 중화민국 국방대학) 교장이었던 천이를 주임위원으로 임명하였다. 천이는 <중앙설계국 대만조사위원회 조직규정(中央設計局臺灣調査委員會組織規程)>에 의거하여 대만 자료 수집, 대만 실제 상황 조사, 대만 자료 편집, 대만문제에 대한 의견 및 방안 강구, 인재 훈련, 대만 행정체계와 기구 접수 방안 등을 연구하였다.

천이는 대만이 50년이나 일본의 지배하에 있으며 대만인들 대다수가 중국어를 잊고 일본어를 구사하는 등 사실상 대만인들이 일본의 노예로 전락했다고 판단했다. 또한 대만의 고급인력들이 대부분 일본인이니 대만 수복 후 고급인력이 많이 필요할 것이라 여겨 1944년 12월 25일, 대만성행정간부 훈련반을 만들고 친임반 주임에 앉아 민정, 재정, 금융, 공상, 교통, 농림, 수산, 축산, 교육, 사법 등의 분야를 교육하여 120명의 간부를 양성했는데 이중 오로지 6명만 대만인이었다. 이후 <대만접관계획강요(臺灣接管計劃綱要)>를 편찬하여 대만 접수를 위한 청사진을 내놓았다.

2.4. 대만 행정장관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국민정부는 8월 28일, 천이를 대만성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이는 성정부 주석이 있는 다른 성들과 달리 대만은 일본의 장기적인 통치의 영향을 받아서 특수한 행정체제가 필요하다는 천이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천이는 8월 30일, 대만을 접수하기 위해 심복들을 파견하는 한편 9월 1일, 충칭에서 업무를 시작하였다. 10월 24일, 천이는 대만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타이베이에 도착하였고 대만 총독 안도 리키치의 항복을 받아냈다. 천이는 10월 25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대만과 펑후 열도가 국민정부의 주권 하에 있다고 선포하였다.
파일:안도리키치와진의.jpg
대만 총독 겸 10방면군 사령관 안도 리키치의 항복을 받는 천이

천이는 <대만성행정장관공서 조직조례>에 따라 대만 안에서는 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천이는 성공적으로 대만성 행정장관 공서의 행정조직을 개편하는 한편 9개 위원회, 4개 실험소, 박물관, 경제원, 성은행 등의 시설을 설립하여 1만 9천명에 달하는 직원을 채용하는 등 일사불란한 행정력을 발휘하였다. 이때 천이를 따라서 부임한 인물 중 하나가 훗날 행정원장, 부총통을 지내는 옌자간이었다. 하지만 천이의 통치는 천이가 데리고 온 70군의 기율 문제와 맞물려 삐걱대기 시작했다.
“신임장관(천이)은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그 섬에 도착하였는데 수행원들은 교묘하게 타이완을 착취하기에 바빴다……. 군대는 정복자처럼 행동하였다. 비밀경찰은 노골적으로 민중을 협박하며 본토에서 온 중앙정부의 관리가 착취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다.” — 미 국무부, 중국백서

당시 국민정부중일전쟁의 후유증과 국공내전으로 인해 대륙에서조차 인플레이션과 인력, 물자 부족 문제로 곤란을 겪고 있었던데다가, 저렇게 조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대륙의 역사와는 상당히 이질적이었던 타이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다. 심지어 일부 국민당원은 대만인(본성인, 1945년 이전부터 대만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들을 일제의 중국 침략에 협조한 잠재적인 조력자로 간주하고 있을 정도였다.

천이 본인은 깨끗한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불행히도 대만으로 데려간 그의 부하들은 전혀 깨끗하지 않았고 그들은 대만에서 민중을 착취해대기 바빴다. 또한 대만 통치에 대해서는 천이 본인도 문제가 심했는데, 본인이 일본 육사까지 나올 정도로 일본어를 잘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만인들과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을 거부했고 오로지 관화(표준 중국어가 속한 방언)만 썼다. 그러나 당시 대만에서 관화를 쓸 줄 아는 인물은 없다시피 했고, 차라리 일본어가 더 잘 통할 정도였다. 그는 관화를 할 수 없는 대만인들에게 아무런 정치적 권력도 주지 않으려 했다.

타이완 섬 정부의 요직은 말도 안 통하는 외성인(1945년 이후 중국 대륙에서 대만으로 와 정착한 사람들)[2]들이 차지하였고, 그나마 차지한 소수 본성인들의 임용도 본토에서 활동한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더불어 일제가 대만에서 물러가면서 많은 공장 및 기업들을 남기고 갔는데 이를 국민정부가 접수하면서 죄다 자신들과 연줄이 있는 외성인들에게만 불하했기 때문에 본성인들은 다시 2등 국민으로 전락하며 차별과 착취를 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본성인들은 국민정부의 대만 통치에 배신감을 느꼈고, 실망감 역시 매우 커지면서 결국 1947년에 2.28 사건이 터졌다.

2.5. 최후

2.28 사건으로 인해 천이는 타이완성 행정장관 및 경비총사령에서 해임되었고, 1948년에는 고향인 저장성 주석이 되었다.

1949년에는 중국국민당이 대책없이 중국 인민해방군에 밀려 대륙을 잃어가자 국민당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중국공산당에 투항하고자 했다. 그는 이 계획을 탕언보에게 알리고 그와 함께 투항하려 했으나, 탕언보는 듣지 않고 이를 장제스에게 일러바쳤다.

탕언보는 일러바친다기보다는 장제스도 천이와 친구 사이니 그냥 타일러서 못가게 할 것으로 생각한 듯 하다. 그러나 장제스는 탕언보의 밀고에 대노하여 천이를 1950년에 반역혐의로 체포했고, 결국 천이는 본인이 사고를 쳤던 타이베이에서 처형당했다. 천이는 과거에 장제스와 군통 분야에서 악연이 있었는데, 그것이 처형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

설마 장제스가 처형을 하리라고는 생각 못했던 탕언보는 은인을 고발해서 죽였다는 심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게 되었다. 또 탕언보의 두번째 아내인 왕징바이(王竟白)는 천이의 양녀여서 이 일로 인해 탕언보와 절연하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중국공산당1980년에 천이에 대해 "자신의 삶을 희생해 중국 인민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인물"로 평했으며, 현재 그의 생가는 중국에서 특별기념시설로 지정되어 관리되고있다. 이 때문에 2.28 사건 당시 시위대가 당시에는 용공성향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이후 시점으로 피해 유가족들이 중공을 국민당 못지않게 혐오하고 대만 독립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3. 기타

  • 아내가 일본인이었다. 그러나 둘 사이의 자식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901년생인 공산당 측 천이(陈毅. 1901~1972)와는 동명이인이며 이름 한자가 다르다.

4. 매체에서

호이4에서 Waking the Tiger DLC가 나오면서 중화민국 정치고문으로 추가되었다.

5. 주요경력

복건성 정부주석
파일:푸젠성(대만) 휘장.svg
2대 3대 4대
장광나이 천이(1883)
(1932년 12월 7일 ~ 1941년 8월 28일)
유건서(劉建緒)
타이완 행정장관
파일:타이완성 휘장.svg
타이완 반환 초대 초대 대만성 정부주석
천이(1883)
(1945년 8월 28일 ~ 1947년 4월 22일)
웨이다오밍

6. 참고문헌

  • 전후 초기 대만 혼란의 원인: 권력주체 사이의 갈등, 정형아, 탐라문화 47호,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 두번째 중국화 - 전후초기 진의의 대만 '심리건설', 정형아, 정창원, 역사와실학 64호, 역사실학회.


[1] 전 주석 장광나이와 19로군 군장 차이팅카이는 복건성의 항일운동을 조직적으로 지원했다.[2] 대만인(본성인)들이 주로 썼던 대만어는 지금도 표준 중국어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물론 이때는 국공내전을 계기로 외성인들이 대만으로 본격적으로 이주하기 전이었으므로, 이때 들어와 있던 외성인은 대개 본토에서 파견된 행정관료나, 군인 등의 치안인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