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시기 중국국민당의 주요 파벌 | |||||
황포파 장제스 | 광서파 리쭝런, 바이충시 | 광동파 천밍수, 천지탕 | CC파 천리푸, 천궈푸 | 서산회의파 린썬, 셰츠, 쩌우루 | 개조파 왕징웨이 |
1. 개요
"(전략) 정치를 유지하기 위한 반혁명전 도구였다. 부흥사(남의사와 그 후신 조직을 의미)의 중요한 골간은 하충한,[1] 다이리 등이었고, CC단의 수령은 천궈푸, 천리푸였다. 그러나 이 두 개 조직의 많은 소자산 계급분자들은 강박당했거나, 기만당하여 가입한 자들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부흥사 내의 일부 사람이란 주로 당시 국민당 군대 내의 일부 중급 및 하급 군관을 가리키며, CC단 내의 일부 사람들이란 주로 당시 권력을 잡지 못한 일부분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김승일 역 <모택동 선집 2> 中.
김승일 역 <모택동 선집 2> 中.
CC단, 또는 CC계, CC파는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정치파벌이자 장제스의 반공, 반일 특무기관이다. 다이리의 남의사와 더불어 각종 살인과 테러, 음모를 꾸며온 비밀결사 조직이며, 장제스의 부하인 천궈푸, 천리푸 형제가 이끌었다. CC파라는 이름은 두 형제의 성인 '천(Chen)'에서 따왔다는 설과, 중앙구락부(Central Club Clique)의 약자라는 설이 있다.
2. 역사
CC단은 1927년 9월 상하이에서 설립되었다는 유력한 설이 있으며, 1932년 청천백일단이 창설되며 계파는 더욱 상세화된다. 천리푸가 1927년 창설한 국민당 중앙조직부 산하의 당무감찰기구이자 최초의 정보기관인 당무조사과를 장악했으며 주요 인물은 천리푸, 천궈푸, 여정당, 장려생, 엽수봉, 쉬언쩡(서은증),[2] 장도번의 7명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천리푸의 친구와 미국 유학시절 동료들이었는데, 그 이유는 하루아침에 장제스의 명령을 받고 미국의 법무부 수사국, 소련의 합동국가정치국 같은 정보기관을 차려야 했던 천리푸가 주변의 믿을 만한 이들을 닥닥 긁어모아 만들었기 때문이다. 설립 당시인 1927년 당무조사과 과장은 천리푸였으나, 1929년 쉬언쩡이 과장으로 올라오고, 천리푸는 1931년 중앙조직부 부장으로 승진한다.1932년 당무조사과는 남의사의 특무처와 합병하여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을 이룬다. 국장은 천리푸가 임명되었고, 조사통계국 산하의 당무를 맡은 제1처와 정보수집을 맡은 제2처, 총무/통신/암호를 맡은 제3처 중 CC계는 제1처를 구성했으며 쉬언쩡이 계속 처장을 맡았다.
그러다 중일전쟁 중인 1938년 3월 29일부터 열린 중국국민당 임시전국대표대회에서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은 3개의 조직으로 분할 개편된다. 개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제1처를 기초로 중앙당부 비서처 산하에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조사통계국으로 개편한다. 국장은 국민당 중앙비서장인 주가화가 겸임하고 쉬언쩡을 부국장으로 임명해 실제 업무를 책임지게 한다.
1. 제2처는 군사위원회 판공청 산하에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으로 확대하고 초대 국장은 천리푸가 겸임하며, 부국장으로 다이리를 임명한다.
1. 군사위원회 판공청 산하에 제3처로 특검처를 신설하여 우편과 통신을 검열한다.
1. 제2처는 군사위원회 판공청 산하에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으로 확대하고 초대 국장은 천리푸가 겸임하며, 부국장으로 다이리를 임명한다.
1. 군사위원회 판공청 산하에 제3처로 특검처를 신설하여 우편과 통신을 검열한다.
이에 따라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 제1처는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조사통계국(中國國民黨中央執行委員會調查統計局), 약칭 중통으로 변경되고 각급 국민당 당부를 중심으로 정보수집, 정탐, 감시 공산당 색출 등의 특무활동을 진행한다. 중통은 각 성과 시 당부에 조사통계실을 설치하고 문화단체와 대학, 주요 고등학교까지 당원조사망을 연결하였다. 이러한 조사망을 기반으로 한 세력은 공산당 검거에서 빛을 발하여 한 중통 요원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중통은 1933년 9월부터 1934년 말까지 공산당 간부 485명의 정체를 밝혀냈고, 이 중 183명을 이중간첩으로 중국공산당에 다시 심어두었다고 한다. 중통 부국장이던 쉬언쩡 역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34년 4~8월 간의 성적은 매우 좋았다. 우리는 홍대[3] 조직을 완전히 파악했다. 그들은 총 35명이었고 이 중 우리 위장 요원이 7인이었다. 조계 당국의 협조를 얻어 홍대 체포에 나섰고 각기 다른 6개의 장소에서 불과 하루 만에 28명의 홍대 요원을 전원 체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천궈푸, 천리푸 형제가 이끄는 중통은 다이리가 이끄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군통), 즉 개편 전 조사통계국 제2처와는 미묘한 경쟁관계에 있었다. 1937년~1940년 이전에는 전국의 당부를 거점으로 세력을 연결한 중통의 세력이 더 강대했으나, 제2차 국공합작으로 중통의 특기였던 국내 공산당 소탕 작업이 중단되어 공산당 담당은 1개과 56명으로 축소되었고, 중일전쟁이 심화되며 일본군에 의해 지방당부가 위치한 지역들이 속속 함락당하자 중통의 영향력은 줄어든 반면 그 자리를 군통이 대신하며 반대로 군통의 세력이 강해지게 된다.[4]
중일전쟁이 끝난 후 1947년 중앙집행위원회 조사통계국은 중앙집행위원화 당원통신국(당통국)으로 변경되었고, 1949년 2월 정부 소속의 행정원 내정부 조사국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CC계가 주축이 된 인적 구성은 바뀌지 않아 이들은 여전히 국민당 중앙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일부 사람들은 계속 중통 혹은 CC계라 불렀다. 국부천대 후인 1954년에는 사법행정부 조사국으로 변경되었고, 다시 법무부 조사국으로 개칭되어 정치사무와 함께 뇌물, 마약, 경제범죄 해결 업무를 주로 맡게 된다.
3. 남의사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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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4. 기타
- 인원 수는 1932년에는 200여 명, 1939년에는 700여 명, 1942년 13,270여 명(중통 본부 소속 488명 포함), 1945년에는 13,000여 명이었다.
- 천리푸의 형이었던 천궈푸가 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김구의 백범일지에 나오는 진과부가 바로 이 CC단 총수 천궈푸이다. 천궈푸는 독립운동 지원 공로로 사후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았다.
- 남의사가 설립될 당시, CC계 요원들은 다이리가 우리 당무조사과와 같은 일을 한다고 불평했는데, 이에 천리푸는 "우리는 당의 눈과 귀이다. 눈과 귀는 2개씩 쌍으로 있다. 군 정보기관(남의사)과 함께 협력하는 것이 당과 국가에 유익하다"며 이들을 진정시키곤 했다.
- 일제강점기 기사에 CC단에 대해 검색해보면 무서움이 넘쳐흐른다. 중화민국 내부의 파시즘 운동을 주도해왔다는 혐의를 깊게 받는 단체이다.
-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남의사와 CC단의 지원으로 많이 활동했다. 그래서 남의사 총수 다이리과 더불어 CC단의 총수 천씨 형제는 독립유공자로 등록되어있다. 참고로 장제스와 쑹메이링도 등록되어 있다.
- 왕징웨이 정권의 특무기관인 76호의 수장인 딩모춘과 리스췬이 한때 중통 소속이었다.[5] 이들은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으로 전향하여 76호를 구성하고, 중통과 경쟁관계였던 다이리의 군통과 상하이에서 한바탕 싸워 결국 이기고 만다.
전 직장의 복수
5. 참고 문헌
- 중국공산당의 스파이 전쟁, 홍윤표, 렛츠북, 2020.
- 중국 친일 매국노 한간(漢奸), 이강범, 피엔에이월드, 2023.
[1] 贺衷寒(1900~1972), 황포군관학교 출신으로 군사위원회 제1청장, 정치부 비서장 등을 역임했다.[2] 미국 카네기공과대학 석사 출신, 1928년 중국 최초의 라디오방송국을 개국시켰으며 천리푸의 추천으로 국민당에 입당한다.[3] 중국공산당 중앙특과 3과(행동대). 타구대, 홍색공포대, 홍대 등으로 불렸다. 국민당 인사와 본래 공산당이었다 국민당으로 변절한 요원들을 암살하는 임무를 하였다.[4] 또한 CC단보다는 자신에게 절대 충성하는 다이리를 신임한 장제스의 의중도 작용했다.[5] 특히 딩모춘은 상술한 1938년 3월 임시전국대표대회의 개편안에서 결정된 제3처의 처장이었던 이력이 있다. 그러나 이를 질투한 다이리는 장제스에게 딩모춘이 부패 혐의가 있다고 모함했고, 오래가지 않아 제3처가 해산되자 너무나 삐뚤어진 나머지 왕징웨이 정권에 합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