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17:29:43

제남 사건

濟南事件
Jinan incident
산동으로 출병하는 구마모토의 일본제국 육군 6사단.

1. 개요2. 배경
2.1. 국민당의 1차 북벌과 일본의 1차 산동파병2.2. 2차 북벌과 2차 산동출병
3. 전개
3.1. 무력충돌의 발생3.2. 산동교섭서 습격 사건3.3. 교섭의 진행과 혁명군 주력의 철수3.4. 일본군의 최후통첩과 최후의 교섭3.5. 지난의 함락
4. 결과5. 여담6. 참고 문헌7. 관련 문서

1. 개요

국민당의 2차 북벌 도중에 산동성 지난을 점령한 국민당과 지난에 주둔한 일본군이 충돌한 사건. 상당한 숫자의 중국 군민이 일본군의 기습에 살해되었다. 간체자로는 济南事件으로 표기하며 제남참안(濟南慘案), 5.3 참안이라고도 한다.

2. 배경

2.1. 국민당의 1차 북벌과 일본의 1차 산동파병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중국국민당은 우한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로 분열되었다. 두 국민정부 모두 서로의 토벌보다는 북벌을 우선적 과제로 설정함에 따라 양 정부는 모두 장쭤린과의 싸움에 나섰다. 북양군벌들은 하남과 산동에서 잇달아 패해 5월 말에 이르러 우한과 펑위샹 측에 하남을, 난징 측에 쉬저우를 내주었다.

난징의 북벌군이 산동에 이르자 1927년 4월 21일 출범한 다나카 기이치 내각일본 제국제1차 세계 대전으로 세력권에 넣은 칭다오로 북벌의 여파가 미치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고 산동 지역의 일본 거류민들의 보호를 구실로 관동군의 일부를 산동에 파견하였는데 이를 산동출병이라고 한다. 5월 30일 다롄에서 2000명의 병력이 출발해 6월 1일 칭다오에 상륙하여 제남으로 출동할 준비를 갖추었다. 북벌군은 6월 중순 산동 남부에 진출하였고 산동의 철로 근간도 전화에 휩쓸리자 일본군은 7월 7일 제남으로 진군을 시작했고 만주에서 2200명의 병력이 증파되었다. 이러한 일본군의 움직임은 당연히 중국에서의 일본의 이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북벌에 간섭하려는 것이었다.

일본군의 산동출병에 장쭤린의 베이징 정부, 왕징웨이의 우한 정부, 장제스의 난징 정부가 모두 강력히 항의했다. 이 중에서 왕징웨이의 우한 정부가 가장 강경하였는데 우한 정부는 일본군의 출병을 영국군의 상하이 파병보다 비합법적이고 악랄한 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하며 이를 일본이 중국에 21개조 조항을 다시 강요하려는 술책이라고 주장했다. 민간 차원의 반일 감정도 강화되어 곳곳에서 반일 조직과 일본 상품 불매 운동, 일본 기선 입항 거부 등이 벌어졌다. 하지만 7월 15일, 우한 정부마저도 국공합작의 폐기를 선언하면서 국공결렬이 일어났고 난창 폭동을 비롯하여 공산당의 발악적인 봉기, 영한합작, 장제스의 하야라는 굵직한 중국 내부의 정치적 문제가 이어지면서 북벌은 주춤해졌고 이에 일본군도 8월 말에 산동에서 철수함으로 소동은 일단 가라앉았다. 하지만 일본군은 산동의 일본 이익이 침해당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이를 '적절한 자위 조치'라고 불렀다.

2.2. 2차 북벌과 2차 산동출병

파일:제남일본군.jpg
산둥반도에 도착한 일본군.

1927년 9월 영한합작으로 우한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가 통합되었고 1928년 1월 장제스가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복직하여 4월 7일 2차 북벌을 개시하자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장제스가 지휘하는 4개 집단군 100만 대군이 북상을 시작했다. 일본 제국은 이미 1927년 12월 20일 제남의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제남에 다시 병력을 파병할 수 있다고 결정한 바가 있으며 상하이 총영사 야다 시치타로가 장제스에게 "제남 부근에서 전투가 일어날 경우에는 출병한다. 북벌군은 제남을 피해서 지나가기 바란다. 그러나 출병해도 교전군의 작전에 관여하거나, 한쪽을 원조하는 일은 없다."고 통보한 바가 있었다. 이에 장제스는 "일본인 거류민의 보호에는 맹세코 책임을 진다. (...) 일본의 출병은 다나카 기이치와 도쿄 회담 때의 이야기와 다르다. 실로 유감이다."라며 거부했다. 결국 산동에 다시 전화가 번지자 칭다오 총영사 후지타, 제남 총영사 대리 니시다 고이치, 육군무관 사카이 소좌 등이 1928년 4월 16일 일본군의 파병을 요구하였고 4월 17일의 각의에서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대신이 출병을 제안하고 나머지 각료들도 찬성하면서 내각은 4월 19일 산둥 파병을 결정해 2차 산동출병이 이루어졌다.

4월 20일 밤 톈진에 주둔한 3개 중대 460명과 구마모토의 6사단 소속 8개 대대, 총 11개 대대 5천명의 병력이 산동에 도착하여 칭다오와 지난에 배치되었다. 이 와중에 5월 1일 오전 9시 국민혁명군 제1집단군 10군 3여단을 필두로 국민당 군대가 지난에 입성하였다. 장제스는 각 부대원에게 규율 엄수를 명하는 한편 과중한 잡세를 폐지하겠다고 선전했다. 이에 지난 시민들은 성문에 국민혁명 성공 만세라는 현수막을 걸고 집집마다 청천백일만지홍기를 게양하면서 장제스의 군대를 크게 환영하였고 국민혁명군은 어떤 저항도 받지 않고 순조롭게 입성했다. 5월 2일 오전 9시 산동 독판 공서에 국민혁명군은 총사령부를 설치했다.

하지만 지난엔 일본인 1800명과 일본군 2300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북벌군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이미 사단 사령부를 지난으로 옮기기로 결정했고 5월 2일 오전 11시에 일본군 6사단군 주력과 사단장 후쿠다 히코스케가 지난 성 서쪽의 상업지역에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국민혁명군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북벌 시작 초기인 4월 10일 외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책임지고 보호하겠다는 선언을 내렸으며 잘 무장된 일본군과의 충돌을 우려하여 각 부대들에게 성외의 촌락에서 일단 정지하고 장쭝창 군대와 시가전을 벌일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천천히 진격하게 하는 한편 일본군의 도발에 대해 가능한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4월 21일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를 통해 일본과 충돌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장제스는 5월 2일 지난에 직접 와서 일본영사관 무관에게 혁명군이 지난의 치안을 책임지고 유지하겠으니 일본군의 증파는 불필요하며 현재 지난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도 철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은 일본군 6사단장 후쿠다 히코스케에게 전달되었고 5월 1일에는 국민혁명군 1집단군 소속 5군단장이 일본 총영사대리 니시다에게 일본 거류민들에 대한 보호를 보장하였다.

3. 전개

3.1. 무력충돌의 발생

국민혁명군의 지난 입성에 이어 장제스도 지난에 도착하여 성 안팎을 시찰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장갑차로 무력시위를 감행하고 일본인 거주지역을 요새화하는 한편 '양해 없이 일본군 수비지역에 접근한 자는 단호히 단속한다', '일본군 지역을 침범하면 중대한 외교적 불상사가 될 것이다.'라고 적힌 벽보 등을 내걸며 국민혁명군을 위협했다. 이미 세 사람의 중국인이 일본군에 살해되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지난과 같은 중요도시에 일본군이 횡포를 부리는 것을 보며 국민혁명군은 격분했다. 일부 장령들은 일본군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일본군과의 마찰을 피한다는 방침을 굳히고 있었고 장령들에게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
"무릎을 굽히지 않으면 뻗어지지 않고 주지 않으면 얻을 수 없고 침범당한 원한을 보복하지 않는다. 이것이 성현이 존중하는 바이다.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대모를 어지럽힌다. 이것이 성현이 훈계하는 바이다."

하지만 마냥 손을 놓고만 있을 수도 없었던 노릇인지라 장제스는 5월 2일 니시다 고이치 총영사대리를 만나 일본군의 철수와 상업지역의 명도를 요구했으나 니시다 총영사대리는 "우리는 정부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귀하의 생각으로 행동을 좌우당할 일이 아니다."라며 거절했다. 다만 국민혁명군을 자극하는 철조망 등은 요청을 받아들여 철거하겠다고 하였다. 장제스는 자신이 계속 북벌을 추진할 것임을 밝혔다. 문제의 철조망은 5월 3일 새벽에 철거되었다.

다음날인 5월 3일에도 장제스와 니시다 사이의 회담이 벌어졌다. 니시다는 출병의 불가피함을 통보했고 지난에 배치된 일본군의 경비상황을 설명하면서 장제스와 후쿠다 사단장 간의 회견이 이루어지길 희망한다고만 하였다. 장제스를 찾은 니시다는 "지난에 진주한 국민혁명군은 군기나 풍기나 대단히 좋고 더구나 질서가 엄중하게 지켜지고 있다. 그래서 일본의 지난 파견군은 오늘 철수하기로 했다. 혁명군은 정말 뛰어난 군대이며 이에 비하면 군벌 장쭝창 군은 적수가 안된다."는 말을 했고 니시다와 동행한 헌병사령도 작별인사차 방문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들은 30분간 장제스를 추켜세우며 일본이 얼마나 혁명을 원조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탕발림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들이 돌아간 지 15분도 되지 않아 지난의 개항장에서 국민혁명군과 일본군이 충돌하였다.

니시다가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난데없는 기관총 소리가 들리자 장제스는 처음에는 장쭝창을 의심했으나 장쭝창의 군대는 이미 100킬로미터 이상 패주한 상태라서 반격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장제스는 즉각 직속 부관에게 조사를 지시했고 얼마 안 있어 "우리 혁명군과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동포 2명이 일본 병사에게 척살당해 노상에서 뒹굴고 있었습니다."란 보고를 받았다. 제남 사건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그날 아침 국민혁명군 40군 소속 병사 한명이 병이 나서 중화민국 외교 산동 교섭서 맞은편 기독교 병원에 실려갔는데 이를 일본군이 저지했다. 말이 통하지 않은 상태에서 언쟁이 벌어졌는데 일본군은 그 언쟁을 구실로 발포하여 국민혁명군 병사와 인부를 살해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병원으로 피신했으나 일본군은 병원을 포위하고 기관총을 발사했다. 하지만 일본 육군성은 5월 13일에 다음과 같은 공식 보고를 내놓았다.
3일 오전 9시 반경, 인상문 밖의 만주일보 중개점 요시후사 집에 중국병 2,30명이 침입하여 약탈을 시작했다. 일본의 영사관 순경 오카다가 달려갔으나 도리어 중국병에게 폭행을 당했다. 이 때문에 톈진으로부터 파견되어 있었던 부대의 일부를 현장에 급파했더니 중국병은 부근의 병사로 달아났다. 병사의 보초가 먼저 일본병에게 발포하므로 일본 측도 부득이 응사했다. 이것을 계기로 각처에서 중국병에 의한 약탈적 공격이 일제히 시작되었다.

장제스는 즉각 전군을 각 부대마다 집결시키고 부대를 떠나지 말 것을 엄명했으며 연락장교를 후쿠다에게 보내 충돌의 확대를 방지하기 위해 일본군도 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점령지 전 지역을 요새화하고 도로를 모두 차단하여 연락장교는 일본군과 접촉할 수 없었다. 이에 전화를 통한 접촉이 시도되었고 장제스는 성밖의 병력을 모두 철수할 것을 지시하여 오후 5시까지 철수를 완료했다. 장제스는 이러한 사실을 후쿠다에게 통고하고 더 이상 무턱대고 발포하여 중국 인민을 손상시키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에 후쿠다는 다시 편지를 보내 쌍방 합동회의를 열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대표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계속되는 총성에 장제스는 일본군이 먼저 자신의 총사령부에 대표를 파견하라며 이를 거부했다. 5월 4일 0시에 이르러 후쿠다가 자신의 사령부에서 교섭하자고 다시 제안했으나 장제스는 "일본군 사령부에 대표를 보내라는 따위의 주장은 일본군에 성의가 없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이날의 충돌을 우연한 일로 보지 않으며, 일본군이 우리를 덮어놓고 적으로 간주하려 하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쪽에서 사람을 파견할 수는 없다."고 다시 거부했다.

결국 중간지점인 포진철로 판공처에서 교섭이 이뤄져 국민혁명군 대표 슝스후이와 일본군 참모장 구로다 슈이치가 회담했다. 슝스후이는 일본 육군대학 출신이라 일본어가 유창했고 일본군 참모 대부분과 동창관계였으나 회담 분위기는 살벌했다. 일본은 슝스후이에게 제남 성 밖 상부의 도로에 중국군의 통과를 금지하며, 중국 측이 교제철로와 진포철로를 이용하여 병력을 수송하지 말 것이며, 중국군을 제남성 20리 밖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슝스후이가 장제스의 의향을 듣지 않고는 서명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라고 하자 쿠로다는 "당신은 장제스의 대표로 온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서명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서명을 강요했다. 이 와중에도 일본군의 도발은 계속되어 회담 중에도 2분에 한번 포격을 가해 통신국과 교통기관이 모두 파괴되었다. 결국 슝스후이는 서명을 거부하고 일본군의 요구사항을 들고 5시에 돌아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상황으로 보아 일본군은 우리와 전쟁을 하자는 심산입니다. 우리에게는 두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회담을 결렬시켜 응전하느냐, 아니면 한때의 굴욕을 참고 충돌로 인한 희생을 피해 장래를 기약하느냐 입니다. 일본군은 고압적인 태도로 몇번이나 위협했습니다. 분개를 참을 수 없습니다."

장제스는 슝스후이를 위로하는 한편 스스로도 일본인이 모두 이런식이면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전체에 재앙이 올 것이라고 치를 떨었다.

3.2. 산동교섭서 습격 사건

이후 국민당은 일본총영사대리 니시다와 협상하여 정전에 합의하였으나 전투는 오후 6시까지 계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혁명군과 중국인이 살해되었다. 가장 악명높은 것이 중화민국 외교부 산동 교섭서 습격사건이었는데 이 사건은 제남 사건의 시작과 거의 동시에 벌어졌다. 당시 산동 교섭서에는 군벌 장쭝창과 일본의 사이의 밀약문 등의 주요 기밀문서들이 있었는데 일본군은 이러한 기밀문서가 장제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충돌 시작과 함께 교섭서를 포위하고 문서를 요구했다. 중화민국 외교부장이었던 황부가 일본군 소대장에게 이러한 모욕은 참을 수 없다고 꾸짖자 일본군 소대장은 잠시 퇴거했다가 후쿠다 사령관이 그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황부 외교부장이 사건 해결을 위해 일본군 사령부로 가자 일본군은 그를 억류하고 전혀 상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의 중국 혁명군과 일본군의 충돌은 혁명군이 일본인의 재산을 약탈하고 폭행을 가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적힌 문서를 내밀면서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황부는 전화 한 통을 빌려 장제스에게 차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한시간 동안 서명을 거부했다. 장제스가 보낸 차가 도착했음에도 일본군은 황부를 방면하지 않고 끝까지 서명을 강요했다. 급기야 일본군 하사관이 책상 앞에 권총을 놓고 죽기 싫으면 서명하라고 위협하였다. 황부가 호통치며 맞서자 하사관은 외교부장이고 나발이고 인정할 수 없다며 그럴거면 서명은 왜 하라한건지 계속 위협했다. 이에 황부와 안면이 있던 일본인이 보다못해 하사관의 무례를 꾸짖자 하사관은 중국인 편을 드는 너도 일본인이냐고 더욱 난동을 부렸다. 황부는 죽일 테면 죽이라고 끝까지 버텨 결국 일본군도 계속 강요하진 못했으나 황부 자신이 파견했던 일본인 조사원이 일본군 사령부에 나타나 일본 병사를 중국 병사들이 죽이는 것을 보았다고 의기양양하게 소리쳤고 같이 파견되었던 중국 조사원도 일본군의 위세에 눌려 같이 보았다고 하였다. 일본군은 새벽이 되어 그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황부에게 보여주면서 서명할 것을 다시 강요했고 황부는 잠시 생각하다가 서명 대신에 문서를 보았다는 의미로 열(閱)이란 글자만 적었다. 황부가 겨우 풀려난 것은 감금으로부터 18시간이 지난 4일 오후 5시였다. 결국 중화민국은 나중에 일본과 직접 외교적으로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일본에 인맥이 많았던 황부 대신에 영미에 인맥이 많은 왕정팅을 외교부장으로 교체하기에 이른다.

한편 일본군은 황부를 연금한 후 교섭서 앞에서 일본군 2명이 유탄에 맞아 사망하자 교섭서에서 총알이 날아왔다고 주장하면서 3일 심야에 20여명의 병력을 동원해 교섭서를 습격했다. 일본군은 문을 부수고 난입해 전화선을 절단하고 내부를 수색했다. 외교 특파원 채공시가 외교관들에겐 무기 같은 것이 없으니 수색할 필요 없다고 항의하였으나 일본군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16명의 외교관들을 묶어 한방에 모았다. 일본군 지휘관이 채공시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하자 채공시는 "설령 죽음을 당할지라도 나는 일본군벌 침략자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이에 일본군은 외교관 한 사람을 끌어내어 쏘아 죽이고 채공시더러 다시 무릎 꿇으라고 하였다. 채공시가 또 거부하자 그들은 또 한 사람의 외교관을 죽였는데 끝내 15명을 죽였고 채공시 혼자만 남자 채공시의 발을 총대로 후려쳐 부러뜨려 쓰러뜨렸다. 채공시가 쓰러진 상태에서 일본군을 욕하자 일본군은 채공시의 혀를 도려낸 다음 권총을 쏘아 죽였다. 이것이 교섭서 습격 사건의 전말이었다.

3.3. 교섭의 진행과 혁명군 주력의 철수

5월 3일부터 시작된 시가전은 계속 이어져 5월 5일에야 겨우 그칠 수 있었다. 일본군은 국민혁명군이 300명의 일본인을 눈알을 도려내고 돌을 채워 죽였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론 13명이 죽고 28명이 실종된 수준이었다. 장제스는 장제스대로 일본인이 1천명의 중국인을 죽였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론 100명 수준으로 보인다. 장제스는 일본인들은 필설로 다할 수 없이 사악하고 압제적이라고 저주하며 괴롭힘과 능욕을 일삼는 자들에게 굴복할 수 없다고 이를 갈았지만 힘의 부족과 일본이 무력을 사용할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인정해야 했고 영국과 미국 영사들이 중재에 나서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5월 4일 새벽 일본군은 장쭝창의 군대가 지난에서 북북동 방양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진 덕주에 있단 정보를 입수하고 전보를 보내 장쭝창에게 지난으로 돌아올 것을 요청했으나 장쭝창은 장제스에게 너무 큰 타격을 입은 상황이라 1, 2개 연대 정도의 여유도 없어서 그 요청을 따를 수 없었다. 이에 일본군은 전투기를 띄워 장제스의 혁명군 총사령부를 공격했고 호위병 몇명이 사망하고 장교 수명이 부상당했다. 장제스는 사태가 화북 전역으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계속 교섭단을 파견했고 4일 오후에 일본군은 갑자기 태도가 누그러져서 "어제 부하병사가 일으킨 충돌은 오해로 인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후 절대로 사건을 확대할 생각이 없고 어떻게 해서든 조정하고 싶으니 장총사령도 오해가 없도록 해주기 바란다. 후쿠다 사령관은 혁명군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으며 중국혁명군을 원조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고 고위참모를 보내 전해 왔다. 이에 장제스는 "쌍방의 부하들이 일으킨 충돌사건을 시끄럽게 만들지 않는 편이 좋다. 따라서 사건을 확대시키지 않겠다는 생각에 찬성한다. 오늘은 단지 당신들 일본군 병사가 이후에 발포를 계속하는지 않는지를 지켜보겠다. 나는 그것으로써 일본군의 성의유무를 판단하고자 한다."고 화답했다. 이에 일본군 대표는 발포 정지를 약속하고 물러섰으나 일본군은 서문, 북문 일대에서 공격을 총격, 포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에 장제스는 일본군의 태도 완화는 그저 병력을 모으기 위한 책략으로 여기게 되었고 실제로 일본 육군 참모본부는 후쿠다에게 "내지로부터 충분히 증병될 터이므로 단호한 조치로 나가라"고 지령하는 한편 개 사단, 1개 철도대를 본토에서, 만주에서 1개 혼성여단을, 조선에서 1개 비행중대를 급파할 것을 결정했으나 의회 내부의 반대로 다나카 기이치 수상은 이를 쉽사리 승인하지 못하고 정식 결정을 8일로 미룬 상태였다.

5월 4일 밤 장제스는 일본군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지난 성 바깥의 혁명군에데 황하를 도하해 북방으로 진군할 것을 명령했다. 다만 이때까지 장제스 자신은 일본군이 북상하는 혁명군의 후방을 공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난에 머물며 교섭을 계속했다. 5월 5일 오후 2시 장제스는 새로운 교섭단을 파견하여 니시다 총영사대리 및 쿠로다 참모장과 협상했는데 장제스는 후쿠다 사단장에게 평화를 위해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부대를 철수하겠으며 일부 부대를 지난에 남겨두고 자신과 국민혁명군 총사령부는 하남을 건너 북진할테니 일본군의 군사행동을 중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쿠로다는 외성에 거주하는 일본인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한 일본 헌병이 일본인 거주지에 들어가게 할 것과 개항장의 치안유지를 일본군에게 맡길 것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장제스의 위임장을 가진 공식적 대표와만 협상하겠다고 함으로 교섭이 이루어지진 못했다. 오후에 중국군 주력부대가 이미 황하를 도하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일본군은 항공기와 대포를 동원해 습격을 감행했고 이에 혁명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5일 밤 장제스는 4개 대대만 남기고 모든 병력을 도하하게 했다. 일본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북관과 서관에 병력을 배치하고 포위망을 형성했으나 6일 새벽에 모든 병력이 철수하는데 성공했다.

병력이 모두 철수했다는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일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연년이 지휘하는 1개 보병단과 소종철이 지휘하는 일부 병력을 합쳐 3천명 정도만 남기고 자기 자신도 지난을 떠나기로 하였다. 이때 장제스는 이연년에게 "적어도 이틀 이상은 버텨주기 바란다. 일본군은 반드시 정면으로 공격을 감행해 올테니까 그때에는 소종철의 부대와 함께 태안 방면으로 철수해도 좋다. 자네들을 위해 여기에 무전기 1대를 두고 갈 테니까 수시로 나와 직접 연락하고 명령을 들어주기 바란다."고 지시했다. 장제스는 지난에서 17킬로미터 덜어진 당가장으로 옮기기로 결정, 동시에 후쿠다에게 편지를 보내 어젯밤에 이미 혁명군이 도하를 끝냈으니 일본군이 더 이상 공격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며 공격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하고 6일 오전 8시에 남문을 통해 지난을 빠져나왔다. 오전 10시, 장제스가 지난을 빠져나간 것을 안 일본군은 크게 당황했고 후쿠다는 "이제부터가 성가시게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젠 손을 쓸 방법이 없지 않은가!"라고 실망을 드러냈다. 한편 장제스는 지난을 떠난 6일 펑위샹과 북벌에 대해 협의했다. 이 협의에서 장제스는 북벌에 전념하고 펑위샹이 일본 문제를 해결하기로 합의를 본 것으로 보인다. 이에 펑위샹은 교섭단을 보내 일본과 교섭을 했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한편 국민혁명군이 지난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단 소식이 중국 각지에 퍼지면서 상하이, 광저우, 우한 등지에선 반일 시위가 이어졌고 국민혁명군 사령관인 장제스는 항일 영웅으로 곳곳에서 칭송되고 있었다.

일본군은 장제스가 빠져나갔다는 것을 알자 6일밤부터 총공격에 들어갔다. 장제스는 일본군이 총공격에 돌입했다는 것을 알자 이연년에게 철수해도 좋다고 했으나 이미 일본군에게 포위된 상태라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연년은 9일까지 무려 4일을 저항하며 일본군을 저지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3.4. 일본군의 최후통첩과 최후의 교섭

5월 7일 오후 4시, 후쿠다 사단장은 중화민국 임시 외교대표 조세선에게 5개 조항의 요구를 전달하고 12시간 내에 화답할 것을 요구했다. 요구는 다음과 같다.
1. 소요 및 폭행행위에 관계한 고급 지휘관에 대한 준엄한 처벌
2. 일본군의 입회 아래 일본군에 대항한 군대의 무장해제
3. 국민혁명군이 지배하는 지역에서의 모든 반일 행위, 선전의 엄금
4. 지난과 철로 주변 20리 내외의 모든 국민혁명군 철수
5. 이상의 조처에 대한 감시를 위해 병영을 일본군에 개방할 것.

이러한 일본군의 단호한 태도는 적어도 5월 4일과 5일 양일에 걸쳐 열린 회의에서 결정된 것이었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참모본부도 강력한 대응을 주문하고 있었다. 다만 원래 계획에선 장제스와 국민혁명군 총사령부를 지난에 묶어두고 교섭하려 했으나 장제스가 5월 6일 지난을 떠나버림으로 최후통첩으로 대응이 더욱 강경해진 것이었다. 중국 측은 장제스가 이를 받아들일 것이라면서 장제스의 허가를 받기 위해 회답 시간을 연기해줄 것을 청했으나 일본군은 막무가내였다. 장제스는 5월 7일 저녁 후쿠다의 요구를 접하고 6개 항에 걸친 회답을 작성하여 슝스후이로 하여금 5월 8일 오전 후쿠다와 면담하게 했다. 장제스의 6개조 회답은 다음과 같다.
1. 본 총사령의 명령에 불복하여 중일 쌍방의 오해를 피하지 못한 본군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조사하여 법률에 따라 처분하겠지만 당시 일본군에서도 마찬가지로 행동한 자에 대해서 처분해야 한다.
2. 중일양국의 우의를 보호하기 위하여 본 혁명군이 지배하는 지역 내에서는 반일 선전을 금지하는 명령을 조속히 내리고 분명하게 단속할 것이다.
3. 철로 주변 20리 이내의 각군에게 북벌에 출발하라고 이미 명령하였고 지난 등지에는 치안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상당한 군대를 주둔케 한다.
4. 철로의 역은 교통의 요충이므로 군대를 파견하여 지킨다.
5. 병영의 부대는 이미 전방 작전에 가도록하고 주둔하지 못하도록 이미 명령하였다.
6. 일본군에 의하여 억류된 관병과 무기를 속히 돌려달라.

일부 조건이 있긴 하지만 결국 전체적인 모양새론 일본군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이라 중국 입장에선 상당히 굴욕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장제스는 9일 오전 지난 성내의 일부 부대만 제외하고 이연년, 소종철 부대를 전부 철수시켰고 9일 오후까지 완전히 철수되었다. 하지만 후쿠다는 장제스의 6개조 회답을 묵살하고 최후통첩에 대한 무조건적인 승인을 요구하며 8일 오전 4시까지 정식회답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사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부득불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통보를 보내왔다.

3.5. 지난의 함락

내가 아주 조금이라도 인간의 감정을 느끼는 한, 어찌 이 치욕을 잊을 수 있겠는가? 이걸 잊어버릴까? 아니면 응징할까? 어떻게 응징할 수 있을까? 우리가 강해져야 할 뿐이다! 이런 치욕을 극복할 야심은 가졌으나 당분간 그걸 인내할 수 없다면, 평범한 인간의 용기라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이 치욕을 씻어버리겠다는 목적을 이룰 수 없다. 당분간 나는 다른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는 것을 견뎌 낼 것이다.
1928년 5월 9일, 장제스의 일기

앞서 말한 일본군의 추가 파병이 마침내 확정되면서 일본 본국은 8일 3사단을 추가 파병하였다. 일본군은 8일 오전부터 지난에 대한 포격과 폭격을 감행하여 많은 지난 시민을 살상했으며 9일 후쿠다가 퇴각하는 혁명군의 안전을 보장했음에도 이를 어기고 철수하는 국민혁명군을 상대로도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상당수를 죽였다. 철수하는 혁명군이 성문으로부터 불과 2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도달했을때 일본군의 기관총이 매복해 있다가 사격을 실시했고 겨우 500명의 병사만이 살아남고 나머진 모두 죽고 말았다. 또한 일본군은 제남의원의 혁명군 26군 부상병 200여명을 학살하고 여러 민간인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9일 밤부터 11일 아침까지 일본군은 격렬한 공격 끝내 지난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뉴욕 타임스의 핼리 어벤드의 보도에 따르면 6천명의 중국인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제남 사건 대표단은 6월 7일 난징에서 2100명의 남성 사망자, 66명의 여성 사망자, 1088명의 실종자, 145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장제스는 이 사건을 국치라고 부르면서 분노했으나 일본과 충돌할 힘이 없었으므로 5월 11일 전권대표로 총참의 하성준을 보내 일본군과 재협상하려 했다. 장제스는 40군장 하요조의 면직과 철로 연변 20리 내의 중국군 주둔 금지, 반일 선전 금지를 제시했으나 후쿠다 사단장은 장제스의 정식 위임장이 없단 이유로 중국의 교섭안을 씹었고 2, 3, 4군단의 해산과 중국군 군단장 세 사람을 엄벌할 것을 난폭하게 요구했다. 결국 장제스는 정부주석 탄옌카이에게 추후의 협상을 정부가 맡아줄 것을 요청하고 북벌에 나섰다.

5월 8일 난징에 돌아온 외교부장 황부에게서 제남 사건을 보고받은 국민정부는 8월 10일 국민당 주앙집행위원회 연석회의의 결정에 따라 일본에 항의를 제출했고 국민정부 주석 명의로 국제연맹에 일본을 제지해 줄 것을 호소했지만 훗날에 그랬듯이 국제연맹은 무능의 극치를 보이며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고 열강은 허약한 빈국인 중국에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았다. 5월 15일 미국 하원에 중일 양국 조정에 국무장관이 나서도록 요구하도록 요구하는 결의안이 제출되었고 8월 12일 미국 대통령 캘빈 쿨리지에게 호소가 보내졌으며 13일 영국, 프랑스, 미국에 국민정부 대표를 파견하여 지지를 얻으려 했지만 소득은 없었다. 오히려 열강은 어줍잖은 양비론을 내밀었으며 일본의 주장이 더 믿을 만하다고 주장했는지 일본을 두둔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장제스는 다음과 같은 선언을 발표했다.
"복수심에 불타는 우리의 적개심을 노출해서는 안된다. 아니면 적과 싸울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복수심을 숨기고 보여주지 말자. 우리의 정신을 가다듬고 와신상담하자. 나라의 치욕을 되갚아 주기 위해 다 함께 똘똘 뭉치자. 자유와 독립이란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중국을 이끌어 가자!"

군사교섭이 결렬된 후 중국은 일본과 비공식적으로 접촉하였으나 후쿠다 사단장을 비롯한 일본 군부의 강경한 태도로 소득이 없었다. 그나마 5월 14일 이후 일본의 태도가 외교적 해결 쪽으로 굳어지면서 참모본부 작전부장 마쓰이 이와네 중장이 제남에 와서 인루겅, 장췬 및 왕정팅과 교섭을 벌였으나 일본이 장제스의 사과를 요구하고, 중국이 일본의 배상을 요구하는 등 입장 차이만을 보였다.

4. 결과

국민혁명군이 베이징에 입성함으로 미국이 국민정부 승인을 고려하는 등 국민정부의 위상이 향상되었다. 6월 15일 국민정부는 불평등조약의 속박을 없애고 평등 호혜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새로운 조약 체결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 7월 7일 불평등조약을 폐기하고 신약을 체결하며 만기가 되지 않은 불평등조약은 신약 체결 전까지 임시판법을 적용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국민정부의 외교적 위상이 강화됨에 따라 일본도 태도를 바꾸지 않을 수 없어 7월 17일부터 신임 외교부장 왕정팅을 내세운 본격적 외교교섭이 시작되었으나 중국은 일본군의 철수를, 일본은 중국의 사죄와 배상, 장래의 보장을 서로 주장하면서 조건이 평행성을 달렸기 때문에 제대로 된 교섭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여기에 장제스가 불평등한 중일통상조약의 폐기와 신약 체결을 요구하자 일본은 폐기가 없던 이상 자동 10년 연장 조항을 들먹이며 매우 불쾌해했다. 이렇게 교섭은 쌍방의 강경한 입장과 통상조약 개정 협상이 얽히면서 진전이 없었다.

장제스의 북벌이 완성됨으로써 난징 정부의 위상이 더욱 올라가자 일본은 1929년 1월에 주중국일본공사 요시자와 켄키치(芳澤謙吉)[1]를 난징으로 보내 중국과 협상하였고 3월 28일, 조인일로부터 2개월 이내에 일본군의 산동 철수, 쌍방이 각 대표를 보내 지난을 접수할 것, 지난의 불행한 사건은 허물을 캐지 않고 서로 군사 행동의 책임을 묻지 않으며, 공동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쌍방의 손실을 다시 조사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상당히 굴욕적인 결과에 장제스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기도 했으나 허약한 중화민국의 입장에서는 그 이상 받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2]

5. 여담

파일:제남사건.gif

대한민국에서 흔히 731 부대의 생체 실험 사진이라고 돌아다니는 이 사진은 제남 사건에서 희생된 일본인의 시신을 부검하는 사진이다. 이를 가지고 일본의 혐한 성향 우익들은[3] 조선인들의 '반일 세뇌'와 '왜곡'의 증거라고 선전했는데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오류가 밝혀진 사진을 731 부대의 증거라고 들이밀어서는 안 될 것이다.

1945~46년 일본에서 연쇄 강간살인을 저지른 코다이라 요시오가 이 때 중국으로 파병되어 여러 차례 강간, 살인을 경험했다고 스스로 밝혔다.

6. 참고 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北伐時期 蔣介石과 反帝問題 : 濟南事件(1928.5)의 解決交涉 過程과 反日運動에의 對應을 중심으로, 배경한, 역사와경계 25-26호, 경남사학회.

7. 관련 문서

7.1. 국민혁명



[1] 이후 이누카이 내각의 외무대신 직에 오른다.[2] 여기서 그래도 일본군이 완전히 철군하는 것으로 끝났는데 왜 이게 중국 측에 굴욕적인 협상 결과라는 건지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이는 이미 제남 사건이 벌어지기 수년 전인 1922년 워싱턴 회의의 결과를 통해 일본 측이 중국에 산둥 반도를 반환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즉, 1927년 시점의 산둥 반도는 엄연히 중화민국의 고유 영토였다. 제남 사건은 일본 제국이 이미 수년 전에 중국 측에 산둥 반도를 반환하고도 이렇듯 군사적 폭력 사태를 벌여가며 갖은 뒤끝을 부린 사건이다. "일본군 측의 책임을 더 이상 묻지 않는다"는 내용이 협의된 것만으로도 중국 측에게 확실히 불리한 협상 결과였던 것.[3] 예컨대 2013년 이글루스 일본인 블로거 난입사건의 주인공인 일본인 이마무라라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