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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의 전개 순서 | ||||
3월 흑풍 | → | 7.20 사건 | → |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 |
전면내전 | → | 정권회수 운동 발생 | → | 5.16 조직 숙청 |
七·二〇事件
1. 개요
문화대혁명 초기인 1967년 7월 20일, 조반파 홍위병과 싸우고 있던 우한시의 보수파 홍위병 조직 <백만웅사>가 중앙에서 내려온 왕리와 셰푸즈를 습격하고 억류한 사건을 말한다. 우한 사태(武汉事件, 武汉“七二〇”事件), 7.20 사태(七二〇事件)라고도 한다. 이 사건으로 우한 군구 사령관 천짜이다오 등이 숙청되고 쉬샹첸 등 군원로들에게까지 피해가 끼쳤다.2. 배경
상하이 1월 폭풍 사건 이후, 중국 전역에서는 탈권 현상이 벌어져 홍위병들이 코뮌을 수립하고 당과 군의 간부들을 닥치는대로 납치, 비판하고 파괴 행위를 저지르고 있었다. 이들의 도를 넘는 행위에 불만을 품은 쉬샹첸, 예젠잉 등 군부는 린뱌오의 동의를 구해 마오쩌둥에게 군이 이 무질서를 진압하게 해달라는 <8항 명령>을 제출하여 비준을 받았다. 이에 1967년 2월에서 3월에 걸쳐 3월 흑풍이라 불리는 잔혹한 진압이 이어졌다. 중국 각지의 군부는 홍위병들의 박해를 받는 당의 관계자들과 밀접한 개인적 교분을 갖고 있었을 뿐더러 군구 사령관급 고급 장교들까지 마구 조리돌리고 모욕하는 홍위병들의 행위를 전혀 참아줄 수도 없었으니만큼 조반파 홍위병들을 응징하고 질서를 회복하는데 찬성하였다.하지만 1967년 2월 역류로 인하여 원수들이 비판을 받고 실각하자 홍위병들은 인민해방군의 진압행위를 반대할 명분을 얻게 되었다. 4월 2일, 인민일보는 <혁명적인 젊은이들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또한 중앙위원회와 중앙군사위원회가 지시를 내려 군이 대중조직을 반혁명조직으로 선포하거나 군을 비판하는 조직을 탄압하거나 대규모 체포를 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함에 따라 군의 진압능력을 대폭 약화시켰다. 이에 기가 살아난 조반파 홍위병들은 군수품 운반 차량과 선박을 공격해 자체적으로 무장을 갖추는 등 더욱 날뛰어대기 시작했다. 홍위병들의 난동으로 인하여 중국 전체의 경제 자체가 붕괴되어가고 있었고 이에 분노한 노동자와 농민들이 홍위병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3. 전개
3.1. 우한의 혼란
7.20 사건이 벌어진 후베이성 우한시는 중국의 3대 용광로라 불리는 공업도시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부터 중요한 대도시였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우한에서도 홍위병들이 보수파와 조반파로 갈라져 시가전을 벌여댔다. 이때 우한군구 겸 호북군구 사령관 천짜이다오는 보수파 홍위병들을 지지하면서 조반파 세력에 대한 탄압을 가했다. 천짜이다오는 조반파의 <노동자 총사령부>와의 관계 단절을 선언했으며 이어 3월 21일, 노동자 총사령부에 해산명령을 내리고 그들이 잡아간 간부들을 석방할 것을 통고했다. 이에 조반파들은 4월 6일, 천짜이다오의 명령은 <3월 역류>라고 주장하며 반발하고 천짜이다오를 우한의 탄전린으로 규정했다.5월 말, 조반파에 반대하는 53개 보수파 조직이 연합하여 <백만웅사>라는 보수파 조직을 결성하였다. 이 백만웅사는 도시 사무직원, 기술자, 당행동대원, 민병대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구성원의 85%가 공산당원이었고 상당수가 우한의 홍색무장노동자 민병대에 참가하고 있어 전투력도 높았다. 천짜이다오는 백만웅사를 물질적, 정신적으로 지원했고 곧 조반파가 열세에 몰렸다. 6월 들어서 백만웅사가 대량의 트럭을 징발하여 우한 철강회사에 위치한 조반파 본거지를 공격하여 수십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천짜이다오는 4월에 하달된 린뱌오의 명령을 무시하고 조반파를 박살내고자 했다. 이로 인하여 100여명이 사망하고 2000여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우한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3.2. 마오쩌둥의 우한행
한편 전국 각지에서 조반파들이 무기를 탈취해서 폭동을 일으킨다는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은 7월 13일 오후, 인민대회당에서 린뱌오, 저우언라이, 문혁소조 간담회, 군사위원회 총정비 주임 샤오화, 총참모장 대리 양청우를 호출하여 "문화대혁명의 군중 발동 단계는 지나갔다. 1년은 시작하면서 넓혔고, 2년은 희망을 보면서 기초를 다졌다. 내년에 끝낸다. 이것이 바로 문화대혁명이다."라고 발언하며 3년차인 1968년에 문화대혁명을 끝내겠다고 발언했다. 이는 마오쩌둥이 주자파를 숙청하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했고 중국의 혼란상이 도무지 감당불가능한 상황으로 폭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오쩌둥은 이날 자신이 무력투쟁이 격화되고 있는 호북과 호남을 현장시찰하겠다고 밝혔다. 참가자들은 우한의 무력충돌이 너무 심각하여 마오쩌둥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마오쩌둥은 "혼란을 겁내지 않는다. 나는 간다. 양청우는 나와 함께 간다."고 말하고 왕둥싱에게 전용열차를 준비하게 했다. 베이징군구 부사령관 정웨이산이 수행했다.이에 7월 14일, 저우언라이가 먼저 비행기를 타고 우한으로 날아갔다. 마오쩌둥은 오전 3시, 전용열차를 탑승하여 베이징을 출발, 밤 9시에 우한에 도착하여 우한 교외 둥후의 공군 초대소 동호빈관 매령 1호에 숙소를 잡았다.또한 쓰촨성 청두에서 공작을 끝내고 마오쩌둥에게 보고를 하러 온 셰푸즈는 백화 1호에, 중앙문혁소조원 왕리는 백화 2호에 숙소를 배정받았다. 천짜이다오와 우한군구 정치위원 중한화는 마오를 경비하기 위해 동호빈관 별관에 머물렀다. 이때 동호빈관 복무원들과 공작원들까지 보수파와 조반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는 터라 동호빈관의 관리 자체가 중지된 상황이었고 미리 비행기를 타고 온 저우언라이가 가까스로 마오쩌둥이 도착하기 전에 마오쩌둥이 머무를 방을 청소하게 했다. 마오쩌둥은 이를 보고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했다. 당장 마오쩌둥이 도착한 다음날에도 전투가 계속되어 10명이 사망하고 45명이 부상당했다. 이를 본 저우언라이는 동호빈관의 경계병을 늘렸으나 접대원들끼리도 서로 싸우고 있으니 안심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저우언라이는 셰푸즈와 왕리를 데리고 천짜이다오를 비롯한 우한 군구의 최고위층과 교섭에 들어갔다. 저우언라이는 조반파를 옹호하며 천짜이다오가 조반파를 탄압한 것을 비판했으나 장령들은 소리를 지르며 저우언라이의 주장에 맞섰고 1차 교섭은 소득이 없었다.
3.3. 마오쩌둥의 중재
7월 18일 밤, 마오쩌둥은 천짜이다오, 중한화, 저우언라이, 셰푸즈, 해군 제1정치위원 이작붕, 왕리, 양청우, 왕둥싱, 정웨이산, 위리진 등을 불러모아 비공개 회의를 주재했다. 마오쩌둥은 천짜이다오를 함부로 대했다간 과단성있는 그가 분노하여 자신을 체포할지도 모른다고 여겨 매우 부드럽게 그를 달랬다. 우선 마오쩌둥은 셰푸즈, 왕리, 위리진에게 "당신들은 더 많은 공작을 해야 한다. 군구를 옹호하도록 조직해야 한다. 타도해서는 안된다. 성명을 내기 전에 쌍방 모두 회의를 열어 발표해 단결하도록 해야 한다. 모두 노동자다. 이쪽 파가 우고 저쪽 파가 좌냐? 우리 이 초대소도 두 파로 갈라져 있다. 앞으로는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 그리고 천짜이다오와 중한화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현재 중요한 것은 군대와 백만웅사에 대한 공작이다. 빨리 바꿔야지 그렇지 않으면 피동적이 된다. 하나, 중앙이 책임이 있다. 둘, 당신들도 책임이 있다. 군대가 백만웅사를 지지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것은 군대의 군중 문제다. 백만웅사를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다수는 좋은 사람들이다. 개별적으로 나쁜 사람들도 있다."
마오쩌둥이 부드럽게 나왔기 때문에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고 마오쩌둥은 막바지에 약간 위험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왜 노동자와 학생들을 무장시킬 수 없는가? 우리는 그들을 무장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초대소 접객원들인 홍위병들에게 물었다.
"어때, 자네 사령관을 한번 전복시켜 보겠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이 없네만."
대화 막바지에 마오쩌둥은 천짜이다오에게 가볍게 자아비판할 것을 권고했다. 천짜이다오와 중한화가 돌아갈 때가 되자 마오쩌둥은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복도로 나왔다. 바깥에 있던 초대소 복무원들이 서성거리자 마오쩌둥은 이들을 불러 천짜이다오, 중한화와 악수하게 하며 "다시는 당신들의 사령관들을 타도해서는 안된다. 나도 그를 타도하지 않는다."라고 말했고 천짜이다오에게는 "그들이 자네를 타도하려 하면 내가 자네를 타도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라고 했다.
사태가 잘 풀렸다고 판단한 저우언라이는 7월 19일 아침, 베이징으로 돌아갔고 천짜이다오는 우한 군구 사령부에서 마오쩌둥의 권고대로 자아비판을 했다. 하지만 일이 모두 꼬이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3.4. 백만웅사의 봉기
7월 19일 오전, 셰푸즈와 왕리가 노동자 총사령부의 거점인 우한 수리전력 학원을 찾아가 부상당한 조반파 홍위병들을 위문하였다. 이어 왕리는 조반파 홍위병들을 '강철대오의 무산계급 혁명파'라고 칭송하며 "당신들은 억압을 받고 있다. 타격을 받은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현상을 바꿔야 한다. (...) 군구가 내건 좌파 지지의 큰 방향이 틀렸다. 노동차 총사령부에 대한 억울한 조처를 바로 잡아야 한다. 조반파는 혁명좌파다. 백만웅사는 보수조직이다."라고 선동했다. 이에 조반파들은 왕리의 연설을 녹음하여 확성기를 탑재한 차를 타고 시내 곳곳에서 틀어댔다. 때마침 천짜이다오가 자아비판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만웅사의 조직원들은 격노하여 왕리를 성토하는 대자보를 거리 곳곳에 붙히고 타도대회를 열었다.7월 19일 밤, 백만웅사는 셰푸즈와 왕리를 사로잡기 위해 모여들었다. 7월 20일로 넘어가는 새벽, 백만웅사 대표 200여명이 왕리가 투숙하고 있는 동호빈관 백화 2호로 몰려가 답변할 것을 요구했다. 천짜이다오와 셰푸즈가 나와 이들에게 다음날 오후에 만나주겠다고 설득했지만 이들이 돌아가려는 순간 다른 백만웅사 조직원들이 몰려왔다. 이들은 흥분하여 사령관 천짜이다오마저 구타하고 방안으로 난입하여 방안에 숨어있던 왕리를 끌어내 백만웅사의 사령부로 끌고 간 다음에 다리가 부러질때까지 폭행했다. 당시 마오쩌둥도 동호빈관에 있었으나 마오쩌둥의 우한 방문은 극비리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백만웅사는 자신들이 마오쩌둥이 있는 곳에서 난동을 부렸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사태를 보고받은 마오쩌둥은 즉각 천짜이다오에게 왕리를 데려오도록 지시했고 천짜이다오가 왕리를 구출하여 동호빈관에 데려왔다. 이 소식을 들은 베이징의 장칭과 린뱌오는 이 사건이 2월 역류를 통해 반기를 들었던 군 원로들에게 결정타를 날릴 수 있는 기회라 여겼다. 이들은 호들갑을 떨며 연명으로 "우한의 형세가 좋지 않다. 마오 주석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 빨리 이동해야 한다."고 독촉했고 린뱌오의 심복인 중앙군사위원회 총병참부 부장 구회작이 우한에 내려가 마오쩌둥에게 린뱌오와 장칭의 편지를 전달했다. 저우언라이 역시 다시 우한으로 내려갔다. 마오쩌둥은 린뱌오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위험을 과장했다는 것을 알고 화를 내긴 했으나 천짜이다오가 자신에 반대하는 정변을 꾸미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에 천짜이다오에게 왕리를 우한에서 베이징으로 돌려보낼 것을 지시한 후 저우언라이와 의논한 후 공군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며 상하이로 피신했다.
마오쩌둥이 떠난 후 우한은 다리가 폐쇄되고 통신이 차단됐으며 전략적 요충지와 공항이 군에 의해 점령되어 무법천지가 되었다. 백만웅사는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닥치는대로 조반파를 사냥했다.
3.5. 우한 점령
상하이에 도착한 마오쩌둥은 상하이에서 가장 좋은 호텔인 훙차오빈관에 투숙하며 간부들과 대책을 논의했다. 마오쩌둥은 천짜이다오가 반역을 꾀한 건지에 대해 크게 우려했으나 양청우는 그럴리가 없다고 했고 마오쩌둥도 만약에 천짜이다오나 중한화가 자신을 해치려 했다면 우한을 떠나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라며 수긍했다. 7월 22일 마오쩌둥은 백만웅사와 우한 주둔군을 해산할 것을 지시한 후에야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저우언라이를 통해 천짜이다오와 중한화를 베이징으로 소환할 것을 지시했다.천짜이다오와 중한화는 마오쩌둥에 반기를 들 생각이 없었으므로 즉각 왕리를 석방하고 베이징으로 출두했다. 하지만 베이징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즉각 무장한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경서빈관에 수감되었다. 이들은 공군사령관 오법헌의 주도 하에 여섯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고 오법헌은 천짜이다오의 뺨을 후려치며 그를 마구 몰아세웠다. 7월 25일, 군대 내부 주자파를 반대한다는 군중 집회가 장칭의 주도 하에 베이징에서 열렸고 천짜이다오와 중한화는 저우언라이가 소집한 정치국 상무위원회 확대회의에 끌려가 비판을 받았다. 7월 27일, 천짜이다오와 중한화는 모든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7월 27일, 린뱌오가 파견한 해군과 공수부대가 우한 군구를 무장해제시켜 장병들을 체포하여 노동 개조 수용소로 보내고 백만웅사를 해체했다. 조반파 홍위병들은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우한이 국공내전 이후 두번째로 해방되었다고 자축했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왕리, 셰푸즈는 영웅대접을 받았다.
4. 결과
린뱌오와 장칭은 천짜이다오를 반혁명 괴수로 몰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마오쩌둥은 천짜이다오를 동지로 표현하며 관대한 처분을 내릴 것을 지시하였다. 이 덕분에 천짜이다오는 군구 사령관에서 해임된 것 이외에는 특별한 처벌을 받지 않았으며 9.13 사건으로 린뱌오가 사망한 이후 1973년에 복권되어 다시 직무를 보았다.이 사건으로 중앙문혁소조의 급진파들은 전국의 보수파와 수정주의자들을 공격해기 시작했다. 장칭은 쉬샹첸, 쉬하이둥 등 원로들을 7.20 사건의 배후로 몰아 비판했다. 7월 22일, 장칭은 하남성의 홍위병들을 상대로 "문장으로 공격하고 무력으로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무장투쟁을 호소했고 조반파는 외교부, 국무원 등 국가기관까지 무력으로 장악하려 하면서 더욱 급진화되었다. 특히 관펑과 왕리 등이 주도한 외교부 장악 시도는 혁명외교의 과격화를 낳아 1967년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을 야기하게 된다.
5. 참고문헌
- 로더릭 맥파커 외, 중국 현대정치사 : 건국에서 세계화의 수용까지 1949~2009(서울: 푸른길, 2012)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서울: 이산, 2004)
-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저우언라이 평전(서울: 베리타스북스, 2007)
- 알렉산더 판초프, 스티븐 레빈, 마오쩌둥 평전(서울: 민음사, 2017)
-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 공산당 역사 2권 하(서울: 서교출판사, 2014)
- 프랑크 디쾨터, 문화 대혁명 : 중국 인민의 역사 1962~1976(파주: 열린책들, 2017)
- 현이섭, 중국지 : 마오쩌둥과 중국 혁명 평석 下, 대란대치편(서울: 인물과사상사,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