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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과 대만에서 나타난 미술 작품에 관한 문서이다.2. 선사시대
3. 전국시대
4. 진, 한
5. 5호 16국 시대
6. 수, 당
7. 오대
7.1. 회화
오대와 송의 회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회화가 독립적인 장르로 부상하게 되는 것이다. 한나라부터 당나라 말기까지 회화는 주로 인물화의 영역에 집중되어 있었고 산수화는 인물화에 부가적으로 들어가는 배경일 뿐이었다. 하지만 당 말부터 등장한 산수화는 이 시기 들어서 독립적인 주제로 분류되어 미술사의 전면에 들어서게 된다. 장르에 있어서 이 시기 나타난 또 다른 변화는 수묵화가 중국 미술의 한 축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오대 이전까지 미술은 채색화 위주의 회화가 많았다. 이러한 경향은 오대와 송대에 가서도 유지되지만 여기에 수묵화가 중국 미술의 한 축을 형성해 이후 중국 미술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이 둘은 중국 미술이 서구의 영향을 받기 이전까지 나란히 병존하는 전통이었으나 일반적으로 송대 이후의 미술사에서는 수묵화가 많이 주목 받는 편이다.
하지만 이 시기만 하더라도 아직까지 둘 사이의 균형이 깨지는 시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전체적인 예술 작품들의 경향성을 보았을 때 이 시기의 예술은 채색을 주로 하면서 수묵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시기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명징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산수화의 영역에서인데 오대 시기 활동하였던 조간의 <강행초설도>가 그러한 움직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강행초설도>는 표현에 있어서 당대의 양식을 답습하는 등의 매너리즘적인 방식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수묵과 채색의 과도기적인 형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이렇듯 과도기적인 양상을 보였던 산수화는 10세기에 들어서 크게 두 가지의 경향으로 나뉘는데 화북산수와 강남산수가 바로 그것이다.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두 경향은 그 화풍이 탄생한 지역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형식에 있어서는 양식이 발생한 지역의 환경에 따라 큰 차이가 났다.
화북산수는 흔히 거비산수라고도 불리는데 거대한 봉우리와 폭포, 우점준과 침엽수 묘사로 특징된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형호와 관동이 있는데 이들의 화풍은 후일 북송의 궁정화원에 그대로 계승된다. 강남산수는 동원과 거연으로 대표되는 강남 지역의 경관을 묘사했던 산수화다. 중국미술의 대표적인 준법(자연물 표면의 질감을 표현하는 기법) 중 하나인 피마준(가는 선을 여러 번 그어 바위나 산의 질감을 표현하는 기법)이 여기에서 탄생하며 점묘법을 이용해 나지막한 산야와 안개를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강남산수는 이후에 남송 대의 궁정 화원으로 계승되고 더 나아가서는 원대의 문인화 전통과도 연결된다.
이렇듯 오대와 송대에 산수화에 있어서 일대 변화가 일어났지만 여전히 인물화는 중국화에서 강세였다. 이 시기 인물화는 이전 시기에 비해 인체 묘사가 날씬해진것이 특징인데 이것은 이후의 인물화 경향에서도 지속된다. 흔히 이 시기 인물화를 특징지을 때 사실주의의 전성기라고 이야기 하는데 실제 사실적(혹은 환영적)인 그림은 후기에 가서 더 정교해졌음에도 이 시기 사실주의적인 화풍을 추구했다는 사실로 인해 학자들은 이 시기의 양식 변화를 사실주의로 칭하는 것이다. 오대 시기 인물화는 트게 남당과 전촉에서 많이 발전했다.
특히 남당의 인물화가였던 주문구는 이 시기 등장했던 많은 화가들 중에서 주목할 만하다. 오늘날까지 작품이 현전하는 몇 안되는 작가이고 또 그 작품이 오늘날의 기준에서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혹은 그의 화풍을 따른 작가의 것이라 추정되는 <궁락도>는 이 시기 인물화의 양상을 보여준다. 물론 이 작품은 아직까지도 당대의 양식들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하지만 <궁락도>로 시작된 인물화는 이후 고굉중, 이공린 등으로 이어진다. 고굉중이 그렸고 이후 12세기에 모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희재아연도>는 주문구에서부터 시작된 인물화의 전통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갔는지를 보여준다. 사치스런 한희재의 삶을 묘사한 이 그림에서 인물들은 <궁락도>에 묘사된 여인들보다 더 날씬하게 그려졌으며 표현에 있어서도 그 세밀함으로 인해 당시의 문화 양상을 잘 보여준다.
남당의 화가들이 보여준 인물화는 그 시작은 당대의 궁정 인물화에서 시작하였지만 고굉중의 그림에는 이를 뛰어넘는 표현의 세밀함이 있다. 한편 남경의 남당 정권과는 다른 미술 인물화 전통이 오대의 나라 중 하나였던 전촉에서 생겨났는데 바로 수묵인물화 전통이다. 특히 전촉의 수묵인물화는 그 내용에 있어서 선종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전촉의 중심지였던 사천 지방의 지역적 영향 때문으로 추정한다. 이 시기의 주목할 만한 그림으로 현재 일본에서 소장 중인 <이조조심도>가 있는데 이 그림은 13세기에 그려졌으나 10세기에 그려진 작품을 모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작가에 대해서도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리는데 가장 유력한 설은 오대 시기 대표적인 선화가였던 석각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거친 붓선과 간단한 필획만으로 묘사한 노승과 호랑이의 모습은 궁저화풍이 추구했던 사실성과는 거리가 있다. 선화의 기본적인 목적이 대상을 충실히 묘사하는 것보다 감상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기 위한 것이기에 선화가들에게 있어서 표현의 사실성은 궁정화가들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선화의 그림들은 이후 송대의 선화들에서도 나타나며 더 나아가서 일본의 선화에서도 나타나는 사항이다.
7.2. 조각
7.3. 공예
7.4. 기타
8. 송
8.1. 회화
송은 그 역사를 보았을 때 존속 기간 동안 부침이 많은 나라였지만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이후의 문화적 활동의 근거가 될 정도로 많은 족적을 남겼다. 특히 회화 분야에서 송은 이후의 문인화 전통과 직업화가적인 전통을 아우르는 하나의 '고전'을 형성했다. 송대는 회화의 각 분야에서 걸출한 화가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였기에 인물화, 화조동물화, 산수화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가 필요하다.일반적으로 송대 이후의 회화의 흐름은 산수화와 인물화 중심의 역사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궁정미술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화조동물화 분야에 있어서도 뛰어난 작품이 많았다. 또한 종교적 색채가 들어간 선화 분야에 있어서도 송대의 미술을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다만 선화의 경우 많은 작품들이 현재 일본에 소장 중이기 때문에 그 연구에 있어서 산수화보다 등한시 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송대의 선화는 비단 중국뿐만 아니라 선불교의 영향을 받은 일본에까지 그 파급력이 미쳤다는 점에서 마냥 무시될 수 만은 없는 분야다. 한편 이 시기는 문인화의 초기 모습이 나타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때 형성된 문인화라는 것은 소수의 사대부 지식인들에게먀 전해졌지만, 이후 문인화의 경향은 중국의 주요한 예술 경향 중 하나로 발전했다.
송의 회화에서 가장 먼저 살펴 볼 것은 산수화 분야다. 산수화는 당대 이래로 독자적인 장르로 분리된 이후 고유의 영역을 구축해오면 양식을 발전시켰다. 송대의 산수화가들은 그 이전의 시대와 달리 수묵산수화의 영역으로 이 분야에 대한 지평을 넓히기 시작했다. 이러한 점은 채색산수화가 보여주는 개별 요소의 강조를 포기하고 하나의 전체적인 통일성을 추구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것은 사상적으로 보면 당시 유행하고 있었던 신유학의 경향과도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자연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송대의 산수화가들은 그 세부를 어느 정도 희생하고서라도 통일된 하나의 경관을 화폭에 담아내고자 하였다. 이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야지만 자신들이 추구 했던 형사, 즉 실물과 비슷하게 창조하는 것에 부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회화관은 언뜻 모순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만약 송대 화가들이 진정으로 형사를 추구하고자 했다면 그들의 방법보다는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그리고 채색까지 하는 당, 오대의 산수화가 그 정신에 더 부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송대의 화가들은 이전과 달랐다. 그들은 인간이 실제 자연을 보는데 있어서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모든 것을 세세하게 보고 있지 않듯이(이 점이 이해가 어렵다면 인간의 시야에도 '초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화가가 자연을 모사하는데 있어서도 지나치게 세부를 자세히 그리는 것은 되려 형사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어쩌면 이상주의와 사실주의의 조합이라 볼 수 있는 이러한 사상은 송대의 미술이 중국적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송나라는 정치적으로 보았을 때 크게 북송 시기와 남송 시기로 나눈다. 이러한 구분은 미술사에서도 유효한데 단순히 시대적 구분이라는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양식적 변화라는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북송 시기의 산수화는 형호와 관동으로 대표되는 화북산수의 전통을 이어 받아 생겨났다. 이 시기의 산수화는 거대한 자연을 묘사하는데 치중하였고 그에 따라 인물들이 없어가 매우 작게 그려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형식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오대의 화북 산수가 그러하듯 우점준을 중심으로 삐적마른 나무를 표현하는 해조묘 표현, 주산을 비석과 같은 거대한 봉우리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화가로는 크게 이성과 곽희를 든다. 일반적으로 북송의 산수화 경향을 부를 때 이곽파라는 호칭을 많이 쓰는데 이 둘의 이름을 따서 나온 명칭이다. 이성은 북송산수화의 선구자격인 인물로 이후 등장하는 범관, 곽희의 스승격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의 작품으로 전하고 있는 <청만소사도>의 경우 북송 산수화의 기준이 되는 작품으로 후경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봉우리와 나무 표현은 그의 작품이 후대의 화가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후 그의 제자였던 범관의 시대에 들어서 북송산수는 그 형식적인 완성을 보게 된다. 범관은 본래 스승인 이성의 양식을 따라하던 사람이었으나 어느 순간에 이르러 독자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범관의 낙관이 있는 <계산행려도>의 경우 그러한 독자적 발전의 형태가 어떻게 화면에 드러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그림은 이후의 화가들이 소위 '범관식' 화풍이라 통칭하는 양식의 근거가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낭떠러지나 바위의 우점준 표현은 그의 스승의 화풍에서도 보이지 않던 새로운 준법이며 우뚝 솓은 봉우리는 너무나도 작게 표현된 인간에 비해 비현실적으로 커보이기까지해 자연에 대한 화가의 생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북송 후반기에 들어서 이성과 범관을 잇는 북송산수화의 걸출한 거장이 한 명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곽희다 그의 작품은 이곽파 화풍의 후반기 양식을 대변해 주고 있는데 이전에 비해 전경이 더 강조되고 권운준이 사용되었으며 삼원법을 사용한 모습은 이곽파 산수가 곽희의 대에 들어서 완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금나라의 침략에 개봉을 빼앗기고 항주로 옮긴 송은 비록 그 영역에 있어서는 이전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축소되었지만 예술적 측면에서는 그 어느 시대보다 화려한 모습을 보였다. 이 시기의 산수화는 흔히 마하파라고 불리는 화풍으로 마원과 하규라는 화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남송 산수화풍은 이전의 이곽파에 비해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우선 준법에 있어서는 피마준이 사용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동원과 거연으로 대표되는 강남 산수의 영향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북송산수에서는 배제되거나 축소되었던 인물이 화폭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데 마원의 <고사관록도>는 그러한 변화는 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구도에 있어서도 북송의 산수가 전경과 후경을 나누고 후경에 장대한 봉우리를 배치한 것과 다르게 남송의 산수화는 후경을 여백으로 비워놓아 안개를 묘사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연출하였다. 특히 이 시기 여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은 남송 시기 산수화를 특징짓는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이러한 산수화의 경향은 전적으로 궁정화가의 경향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산수화의 경향은 궁정화원들에 의해서만 주도된 것은 아니었다. 북송대에 들어서 신유학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시, 서, 화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경향이 등장하고 이에 따라 그림에 대해 평가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이 후일 문인화라 부르는 동양화단의 한 경향을 형성하게 된다. 문인화는 이후의 여타 다른 문인화가들이 그렇듯 사실적인 표현보다는 그 안에 담긴 정신을 중요하게 보았다. 따라서 궁정화가들의 산수화와는 달리 형식적으로 볼 때 파격적인 구도와 준법 등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문인화의 초창기 이 경향을 대표하는 사람은 크게 세 사람이 있다. 한 명은 소식으로 흔히 소동파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초기 문인화의 이론을 개창하고 직접 그림까지 그렸는데 현재로서는 그가 진짜 이러한 그림을 그렸는지에 대한 진위여부가 불분명하다. 소식과 함께 북송대의 대표적인 문인화가로는 미불, 미우인 부자가 있다. 이들은 문인화의 회화관에 근거에 독특한 화풍을 창조했는데 소위 미점준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이 시기 문인화에도 문인화 특유의 복고적인 경향이 드러나는 작품도 존재하는데 황정견 같은 인물이 바로 그러한 경향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형성된 문인화의 전통은 비록 출발에 있어서는 비주류의 미술이었지만 이후 중국 미술의 주류 미술로 발돋움하게 된다.
문인화 경향과 함께 이 시기 주목해야 할 경향은 선종화라고 할 수 있는데 흔히 불교수묵화의 경향이라고 한다. 선종화는 이곽파, 마하파로 대변되는 궁정화풍과 소식, 미불, 황정견 등으로 대표되는 문인화풍과는 다른 독특한 회화 세계를 구축하였다. 이것은 선종화의 기본적인 목적이 깨달음을 주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주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에 선종화는 궁정화풍과도 근본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고 '남에게' 깨달음을 주기 때문에 자신의 만족을 위해 그림을 그렸던 문인화풍과도 결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또 문인화가들이 표현하는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지적인 경향 가령 유교경전과 같은 지식을 근거로 표현되는데 반해 선종화는 그러한 지식이 아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표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선종화에서 깨달음을 주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충격적으로 대상을 기괴하게 묘사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애매모호하게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이 실제 화풍에 있어서는 선화에서 자주 사용하는 기법인 속사, 감필, 발묵을 통해 표현되며 그로 인해 형성된 작품들도 이전의 송대 회화에서 보이지 않는 파격적인 형상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현재 이 시기를 대표하는 선화 작품들을 거진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이후 일본에서 선종이 유행한 것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마지막으로 송대의 중요한 경향 중 하나로는 화조동물화를 꼽을 수 있다. 특히 화조동물화는 송의 궁정에서 많이 그려졌고 심지어는 황제가 그린 작품들도 있다. 현재 이 시기의 화조동물화를 대표하는 화가는 크게 최백과 송휘종이다 특히 화조동물화 경향에 있어서 휘종은 북송 양식의 전형적인 사례로 거론된다. 비록 그가 그린 것이라고 확실한 작품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들을 보면 휘종은 궁정화풍의 산수화가들이 그러하였듯이 사실성을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휘종은 "선배들의 것을 모방하지 말고 사물을 존재하는 그대로 형태와 색채에 충실하도록 그려야 한다"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은 단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따라 그리라는 뜻은 아니다. 더 엄밀한 의미에서 송대의 '사실성'이라는 것은 서양의 고전주의와 유사한 태도를 보이고는 했는데 송 휘종의 화조화에서 그러한 점이 잘 드러난다. 그의 그림은 자연의 아름다운 부분을 한데 모아 화풍으로 엮어낸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자연이 그 자체로는 아름다운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기에 화가는 자연을 묘사할 때 자연의 아름다운 부분만을 수용하여 화폭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그는 실제 치세의 평가에 있어서는 암군에 가까웠지만 예술 분야에 있어서는 송대의 고전적인 화조동물화를 정립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9. 원
9.1. 회화
쿠빌라이 칸이 남송을 멸망시킨 이후 한족 지식인들은 몽골의 위협을 피해 은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중국에 짧은 평화가 찾아왔음에도 많은 지식인들은 은거를 유지했는데 이것이 송에 대한 충절의 반영이었던 여타 다른 개인적인 사정에 의해서였건 이들은 항주와 양자강 일대에 은거하며 일군의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 중 회화의 영역에서 가장 먼저 두드러진 행보를 보인 인물은 남송 멸망 당시 이미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고 있었던 전선(1235? ~ 1301?)이었다. 그는 송 왕조에 대한 충절을 이후로 항주 일대에서 칩거 생활에 들어갔고 그 즈음 시화에 몰두하여 원대 회화의 전통을 만들어냈다. 당시 중국의 회화 전통은 송대 이후 한족 정권이 소멸되자 그 명맥이 끊겨버리고 말았다. 원의 궁정의 경우 화가를 "고용"하기는 했지만 후대에까지 영향을 줄만한 뚜렷한 전통을 보이지는 않았고 이에 따라 송나라 시대에 이룩하였던 회화의 기법들과 양식들이 퇴조하기 시작한 상태였다.이러한 상황에서 전선은 두 가지 방향으로 원대의 회화 전통을 구축해 나갔다. 하나는 복고적인 경향으로 송대 이전의 회화 양식을 복원하는 것이다. 전선의 입장에서 복고는 단순히 송의 양식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오래된 양식, 다시 말해 당나라와 오대 시대에 그려졌던 회화 양식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전선은 당대에 자주 그려지던 청록산수의 양식을 부활시켰다. 바위, 나무의 선묘나 농채의 장식적 사용, 평면적 구성은 전적으로 당의 회화 양식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형식적인 측면 이외에도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당대에 유행하던 인물들에 대한 묘사를 즐겨 그렸는데 <왕희지관아도>에서 물가에 노니는 새를 바라보는 왕희지의 모습을 그린 것이 대표적이라 하겠다. 전선이 추구했던 또 다른 방식은 혁신의 측면으로 복고적인 양식을 재해석하는 것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전선의 회화에서 이 점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그가 10세기에 활동했던 동원의 방식을 따라하면서부터 인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의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점철되는 경우가 많았다.
전선이 실패했던 혁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인물은 다름 아닌 전선의 제자였던 조맹부(1254 ~ 1322)였다. 조맹부는 회화사뿐만 아니라 문화사, 정치사 측면에 있어서도 매우 상징적인 인물인데 쿠빌라이가 그를 강남 한족 회유책의 일환으로 중앙 관직에 발탁한 인물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조맹부는 그의 스승이었던 전선이 관직을 거절하고 술과 시서화에 연명한 것과 달리 한림원의 학사직을 맡으며 중앙 정계에 오랫 동안 머물러 있었다. 물론 이것은 당대 지식인들의 많은 비판을 낳았다. 특히 강남 지식인들이 조맹부의 이러한 행보를 비판했고 또 조맹부 자신도 평생을 이러한 행보를 후회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원나라의 중앙 정부에 진출한 것은 원의 궁정에서나 강남의 지식인 계층에서나 큰 변화를 야기했음에는 틀림없다. 이후 명대의 서술에서도 나오겠지만 명나라의 회화에서는 이렇듯 궁정의 미술과 지식인의 미술을 이어줄 가교 역할을 할 사람이 없었고 이것은 명대 후반기에 문인화와 직업화의 구분이 더욱 뚜렷해지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것을 보았을 때 조맹부는 그 자신의 회화적인 성취만큼이나 중국미술의 통합과 교류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혁신의 측면에서 그가 보여준 업적은 <작화추색도>에서 잘 드러나는데 얼핏 보기에는 드문드문 보이는 산의 모습과 후경이 과감하게 생략된 점으로 인해 강남 지역의 산수로 보이지만 실은 산동성의 한 지방을 표현한 것이다. 피마준 기법의 사용과 해조묘기법의 사용은 이 그림이 강남의 산수와 화북의 산수를 적절히 융합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점들로 인해 조맹부는 오대 시대의 대표 화가인 동원, 거연의 화풍과 송대의 이성, 곽희의 화풍 그리고 당대의 청록산수를 총정리하여 화풍의 혁신을 이루어 냈다는 평을 받는다. 또한 그는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도 이전의 송대 화원 화가들과는 다른 독특한 관점을 견지했다. 그는 비록 실물을 뛰어나게 그리더라도 그 안에 담겨있는 마음이 없으면 그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중국 회화이론에서 흔히 형사에서 청신으로 변화했다고 하는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이후 문인화가들이 꾸준히 견지하던 관점이었으며 비단 중국을 넘어 동아시아에서 문인화의 양식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회화관 중 하나였다. 또 그는 회화의 필법을 글을 쓰는 것과 같이 생각하였는데 이러한 생각은 서화용필동법이라는 이론으로 정립되어 후대에 이른다. 동양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붓이라는 도구를 통해 이루어지고 붓을 쓴다는 것 자체가 필획의 차이를 가져오니 그의 이러한 생각은 넓게보면 당나라 [[왕희지]의 생각과도 유사하다고 하겠다. 이처럼 그가 닦아놓은 화풍과 관념은 이후 여기적 문인화가들의 전거가 되어 원말사대가로 불리는 화가들의 탄생으로 이어지며 더 나아가서는 명,청 시기 문인화 전통의 고전적 사례로 여겨진다.조맹부가 활약하던 시기 이후 오늘날까지도 동양화에서 큰 전거가 되는 4명의 뛰어난 화가들이 탄생하는데 오진, 황공망, 예찬, 왕몽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흔히 원말사대가 혹은 원사대가로 불리며 오늘날까지도 칭송되고 있으며 이후 문인화의 형식적인 완성이 이 시기에 거의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원말사대가들 앞에 당면한 문제는 크게 4가지가 있었는데 우선 전선과 조맹부와 같은 과거의 선배들이 의도적으로 무시했던 송의 화풍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이냐가 첫번째였고 이와 마찬가지로 송의 회화에서 보이는 통일성을 어떻게 회화에서 구현할 것이냐의 문제가 있었다.
또한 그들의 표현 방식에 있어서 직업화과와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 형태에 힘을 부여할 것인지에 대한 여부와 평범하거나 의고적인 주제를 묘사하면서도 어떻게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로 남았다. 네 명의 화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 문제에 답하면서 본인들만의 독특한 화풍을 형성했는데 이들 각자의 화풍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연구되고 20세기 이후의 미술사학자들까지 그 연구 경향이 이어지는 바, 이에 대한 연구가 상당하다. 이들은 세부적인 양식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으나 공통적으로 가장 나이가 많았던 오진에서부터 가장 나이가 어렸던 왕몽까지 오대 시기 강남산수의 대표이자 전선, 조맹부가 따르고자 했던 동거파 산수의 복고적 경향을 띈다는 공통점이 있다. 왕몽의 시기에 이르러 중국은 원명교체기라는 커다란 정치적인 변화를 겪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의 미술은 다시 새로운 양상으로 접어들었다.
10. 명
10.1. 회화
명의 회화 경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궁정화풍 정통으로 송대의 화풍이 복고되는 형식이었으나 명의 궁정 미술 정책의 한계로 인하여 크게 꽃피우지는 못하였다. 명은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한림원의 부속 기구로 화원을 두었으나 그 영향력은 이전시대보다 떨어졌다. 화원 화가들은 명의 조정 내에서 무관의 관직을 받았으나 실제 운영에 있어서 환관의 지배를 받았으며 명의 역대 황제들 또한 선덕제(재위 1426 ~ 1435)와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예술에 대해서 무관심했다. 이런 무관심과 다르게 명의 궁정은 예술의 표현에 있어서 엄격한 제한을 가했는데 이후에 설명할 대진((1388 ~ 1452) 같은 인물은 어부의 옷에 관복을 의미하는 붉은 색을 칠했다는 이유로 쫓겨날 정도였다. 형식에 있어서는 북송의 이곽파와 남송의 마하파를 절충하는 양식을 보았는데 그 이전의 원나라의 문인화가들이 송나라의 양식을 의도적으로 배격하고 더 복고적인 양식으로 회귀한 것과비교가 되는 행보라고 볼 수 있다.궁정화풍과 다른 전통은 여기에서 파생되어 나왔다고 볼 수 있는 민간화가의 전통인데 명대에 절파로 대표되는 화풍이 바로 그것이다. 절파의 창시자는 절강성 항주 출신의 대진으로 앞서 언급했듯 본디 궁정화가였다. 하지만 화원에서 물러나 항주로 돌아온 이후에도 미술 활동을 계속하였고 이곳에서 그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 독특한 화풍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형성된 절파는 그 시원이 명대의 궁정화풍에 있었기에 송대의 미술 전통을 따랐으나 그 형식에 있어서 명대의 궁정화풍보다 더 자유로운 점이 특징이다. 강렬한 먹의 대비와 절벽을 화면의 앞에 배치시켜 대칭적 구도를 깨는 것 등이 절파 화풍을 상징하는 양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주된 활동지는 항주 일대로 문인화 전통이 강했던 소주 출신의 화가들과는 상반되는 모습을 보였다. 자유로운 화풍을 추구했던 절파였지만 후기에 가서는 문인화가들 특히 동기창과 같은 화가들에게 비판받게 되며 심하게는 광태사학파(여기서 광은 미칠 광에 쓰이는 그 광(狂)이다)라고 까지 비판받는다. 실제로 동기창이 활동하던 시기가 되면 직업화는 지나치게 불필요한 요소들이 많아져 번잡해지고 형식에 있어서도 대진과 오위의 양식을 답습하는 등의 양태를 보이게 된다. 한 마디로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절파는 이후 청나라 시대에 들어와서 문인화에게 화단의 주요 자리를 내주게 된다.
마지막으로 명대의 회화를 대표하는 화풍은 문인화풍으로 특징지어지며 이후 중국의 주류 미술 중 하나로 자리잡는 오파 - 송강파의 미술이다. 원대 이후 중국의 강남 지방은 문화, 경제의 중심지로서 기능하였는데 그러한 경향은 명대에 들어서 심화되었다. 최초의 강남 통일 정권이었던 명나라에서 강남 지식인, 화가들의 영향력은 이후의 미술 사조에서 중국적 전통을 규정지어 버릴 정도로 막강했다. 번창하는 강남의 문화, 예술계에서 특히 오현 지방은 오파 양식을 형성한 심주(1427 ~ 1500)와 그의 제자인 문징명(1470 ~ 1559)의 고향으로서 명대 문인화 예술 전통의 중심지로 인식되었다. 이곳에서 형성된 오파는 기본적으로 원말 4대가라 불리는 황공망, 예찬, 왕몽, 오진의 화풍을 따랐으며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화폭에 담아내는데 능했다. 이들은 기법에 있어서는 원말 4대가의 화풍을 따르는 등 복고적인 성격을 띄었는데 이러한 성격은 이미 원대에 조맹부의 글에서도 나타나나 이 시기에 들어서 확실하게 자리잡으며 이후 동기창이 남북종회화론을 주창하면서 일종의 수련 방법으로까지 정착된다. 오파를 대표하는 화가들은 흔히 '오문사대가'로 불리는 심주, 문징명, 당인, 구영이다. 하지만 이들 중 당인과 구영은 엄밀한 의미에서 문인화라 보기가 힘든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문인화의 특징 중 하나인 자기 탐구를 위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닌 상업적 이윤 추구를 위해 문인화 화풍을 따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인과 구영은 완벽한 오파의 개념에는 들어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 성립된 오파의 문인화 전통이 하나의 규범으로 정착된 것은 동기창으로 대표되는 송강파의 회화에서부터 였다. 송강파의 화풍에서 중요한 것은 동기창이라는 인물로 사실상 그의 미술 이론이 이후 전근대의 중국 회화를 규정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동기창은 선종에서 유래한 남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일종의 문인화 계보도를 만들었는데 이러한 계보도가 이후 문인화의 정석으로 굳어진다. 동기창의 미술 이론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론의 여지가 많지만 문인화에 대한 체계적인 분류를 시도했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으며 오늘날에도 그의 구분이 효용가치가 있다는 점에서 중국 회화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봐야 한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문인화의 전통에 한정한 이야기다. 청대에 들어 문인화와 직업화가 모호해지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인화 바깥의 영역에도 많은 종류의 회화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명청교체기와 청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서양화 기법을 들 수 있겠다. 송강파가 중국 회화에 기여한 또 다른 점은 수묵화를 문인화와 연결시켰다는 점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수묵화라고 하면 선비들이 사랑채에 앉아서 붓을 들고 있는 모습을 연상하기 쉬운데 그러한 이미지가 일반 사람들에게 정착된 것에는 동기창의 공이 컸다. 짧게 요약해보면 동기창은 수묵산수화를 문인화의 대표적인 장르로 규정 짓고 채색 산수화를 궁정, 직업화와 결부시켜 이해함으로서 오늘날의 동양화 관념을 형성하는데 일정부분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전통적인 양식 구분 이외에도 명대에는 서구에서 들어온 새로운 회화 기법으로 말미암아 화풍에 있어 변화가 일어난다. 마태오 리치로 대표되는 예수회 선교사들은 그들의 포교 전략으로 지식인들을 서구의 지적 유산으로 회유하는 작업을 많이 했는데 서구의 환영적인 미술품을 보여주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가져온 그림은 주로 판화 그림이었고 주제에 있어서는 성경의 내용이 많았으나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그러한 그림은 어떤 종교적인 목적 보다는 호기심으로 이해되는 측면이 강했다.
10.2. 조각
10.3. 공예
10.4. 기타
11. 청
11.1. 회화
청대 회화는 명말부터 성장하기 시작한 문인화의 시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회화라는 것이 중국 미술에 처음 들어온 이후 문인화는 줄곧 비주류의 위치에 섰다. 하지만 이 시기에 들어서 문인화는 비단 여기적인 문인화가뿐만 아니라 직업화가를 지향하는 화가들에게까지 전파된다. 직업화는 명대의 절파이후 그 양식의 신선함이 퇴색했으며 따라서 이들의 양식 경향이 다시 살아나려면 200년에 가까운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동기창이 문인화와 직업화의 계보를 정한 이후 청대의 많은 화가들은 그의 이론적인 주장에 의거하여 작품들을 제작했다. 특히나 청대 초기에 활약했던 많은 문인화가들은 동기창과 원말사대가의 이론을 충실히 따랐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문인화 내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몇몇 화가들은 과거의 방식을 답습하는 수구적인 색채를 띠었고 또 몇몇화가들은 문인화의 기본적인 사상을 지향하면서도 자신의 개성을 추구하는 혁신의 길로 나아간 것이다. 또 청대의 회화는 문인화의 엄격한 의미가 사라지고 그 양식적인 경향만이 남게된 시기이기도 했다.
문인화는 그 단어의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문인들의 회화"였다. 따라서 문인화는 기본적으로 아마추어적인 성격이었고 어떠한 형식에 얽메이기 보다는 자신의 심상을 화폭에 표현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상업의 발달로 인하여 단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문인화의 양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런 경향은 이미 명말의 화가들에게서도 보이는 사항이지만 청대에 들면 그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화가들이 많아졌다. 심지어 오늘날까지 대가로 칭송받는 화가들마저도 이러한 상업적인 조류에 의하여 자신의 화풍을 문인화의 기본적인 양식 규율에 맞추는 일들이 일어났다. 이외에도 유럽인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식 원근법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시기이기도 하다.
만주족이 입관한 이후 중국 전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반청 세력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있었던 17세기 주목할만한 화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흔히 사왕오운이라고 불리는 왕시민, 왕선, 왕휘, 왕원기, 오력, 운수평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화가는 중국 미술사에서 흔히 정통화가들로 분류되는데 그 방법에 있어서 원말사대가의 양식을 많이 따르며 문인화의 사상적인 원리에 충실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17세기 내내 이들은 유교적 지식을 갖춘 사대부들뿐만이 아니라 궁정에도 영향을 행사하여 청대의 주된 회화 경향을 문인화로 바꾸어 놓게 된다. 한편 문인화를 지향하는 일군의 화가들 중에서 정통에 분류되지 않는 화가들이 개성화파라는 이름으로 묶여서 오늘날까지 알려졌다.
개성화파는 자연을 사숙하여 화폭으로 표현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문인화가와 같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정통파화가들의 모작, 방작, 임작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개성적인 화풍을 추구했다. 특히 이들은 그 화풍뿐만 아니라 생애에 있어서도 굴곡진 삶을 산 사람들이 많은데 가령 명나라 황족 출신의 화가였던 팔대산인이나 석도는 그 인생 자체가 개성화파의 경향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독특했다. 물론 개성화파의 모든 화가들이 자신의 기질적인 특징을 그대로 화폭에 반영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서는 지극히 성정에 있어서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었지만 단지 은일자적한다는 이유만으로 기인으로 취급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 설사 개성화파 중 일부가 '광인'이라는 말로 수식될 정도로 기이한 인물들이 많았다고 해서 그들이 정통파에 가까운 회화를 그릴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회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개인의 주관적인 이해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고 그것을 단지 화풍으로 표현해냈을 뿐이었다.
청대 초기의 화풍을 규정하는 두 경향을 앞서 보았듯이 정통화파와 개성화파였으며 이 둘은 문인화라는 틀 속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견지했다. 이러한 전통적인 회화들과 별개로 청대에는 새로운 화법이 유입되는데 명말에 이미 마테오 리치와 같은 선교사들에 의해 중국인들이 접한 바 있는 서양화풍의 경향이었다. 중국을 지배하게 된 만주족은 예술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한족의 그것보다 빈약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게된 만주족은 한족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편으로 만주족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려 애썼다.
예술의 경우 그러한 경향은 만주족만의 고유한 예술체계를 만들려는 시도로 귀결되었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세 황제의 시기 동안 이러한 노력은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비록 서양인 선교사들은 기독교를 퍼트리겠다는 자신의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예술적인 측면에 있어서 만큼은 서양화의 영향을 중국의 궁정 내에 침투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청나라 황실은 선교사들을 이용해 황실의 궁정화가들에게 서양화법을 배우게 하였고 그로 인하여 중국인임에도 원근법과 명암법 같은 서양에서 널리 쓰이는 화법을 구사하는 화가들이 등장했다. 초병정은 오늘날 알려진 궁정화가들 중에서 서양화법을 능숙하게 사용했던 화가인데, 그의 대표작 <경직도>에서도 이런 특징이 나온다. 한편 초상화 부분에 있어서도 중국적인 양식과 서양의 양식을 모방한 중서절충식 화풍이 발달하게되며 오늘날 흔히 알려져 있는 청나라 황제들의 초상은 모두 이 방식으로 제작되어 있다. 가령 강희제 초상의 경우 몸통의 묘사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중국의 초상화 전통을 따르고 있지만 얼굴표현에 있어서는 명암이 엹게 들어가 있는 등 서양화의 영향이 돋보인다. 건륭제를 그린 그림을 보면 이 양식이 더 심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어떤 그림은 당시 유럽에서 그리던 기마초상화의 전통을 모방한 작품들도 있다.
청대 초반기 회화상을 규정지었던 세 가지 경향은 18세기에 들어서 점차 변화하게 된다. 특히 주목할만한 변화는 개성화파가 급속도로 확산된다는 점이다. 특히 이 시기 개성화파는 양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화가들의 영향 아래에 전성기를 맞이한다. 흔히 양주팔괴로 묶어 부르는 이들 화가는 이선(李鮮), 왕사신(汪士愼), 김농(金農), 황신(黃愼), 고상(高翔), 정섭(鄭燮), 이방응(李方膺), 나빙(羅聘)의 여덟명을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개성을 중시하고 감흥의 솔직한 발현을 목표로 하여 기성의 형식이나 기교를 버리고 자유분방하게 붓을 휘둘렀다. 반전통적인 제작태도로 선적인 묘사보다 면적인 표현을 취했으며 고전적 절도를 무시하고 짙은 먹색과 화려한 색채, 강한 필세와 격한 붓처리를 하였다. 대담한 필선과 격식을 깨는 구도로 당대에 큰 인기를 누렸던 화가들이다.[1] 이들의 화풍은 각각이 워낙 다르고 그들의 생애 또한 앞서 서술했던 개성화파의 몇몇 화가들만큼이나 파란만장하였다.
이들 이외에도 8살 때부터 화가로 성공하였던 고기패와 같은 화가들도 18세기 회화의 개성적인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고기패는 붓이 아닌 손톱과 손가락만으로 그림을 그리는 지문법으로 유명한데 그로 인해 묘사의 세밀성은 떨어지지만 독특한 필선(정확히는 지선이겠지만)을 보여주고 파격적인 형식이 드러난다. 이후의 미술사 궤적에서 최종 승리자는 바로 이들 양주화파로 묶이는 개성화파의 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19세기 이래로 이들의 화풍을 따르는 화가들이 많아진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서 기존의 정통화풍이 완전히 소멸했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엄밀하게 따지면 정통화풍도 이미 왕시민의 손자인 왕원기의 시대에는 고식을 따르면서도 개인의 창조성을 발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따라서 문인화의 규율을 엄격히 따지지 않고 개인의 표현에 집중한다는 점은 단지 그 정도만 다를뿐 청대의 전통회화를 특징짓는 공통적인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12. 근, 현대
12.1. 근대
19세기 청나라는 내우외환의 위기를 겪었다. 바깥으로는 신장 지역에서 연일 계속되는 소요로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고 있었고 바다에서는 유럽 열강들이 전면적인 통상을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찌감치 서구 문명의 영향력 아래 놓은 일본은 기존의 조공책봉질서를 붕괴시키며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내부적으로는 건륭제 시기부터 시작된 황실 재정의 고갈 현상이 뚜렷이 나타났고 그것은 가경제 시기 백련교의 난의 진압 과정에서 관군의 지지부진한 진압 속도로 드러났다. 거대한 변화의 시기 속에서 청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분야에 있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예술 분야에서 이러한 변화는 크게 서양 문화의 영향과 일본 문화의 영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명청시대를 거치며 일본의 미술과 서양의 미술은 이미 중국 예술계가 경험한 바가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19세기의 정치, 경제적인 격변과 맞물려 두 미술의 경향은 보다 전면적으로 중국 미술계로 유입되기 시작한다. 이에 대한 미술가들의 태도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전통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경향을 받아들인 것인가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는 비단 중국 뿐만이 아니라 근대라는 시대를 맞이했던 동아시아의 미술가들 앞에 놓였던 공통적인 선택지기도 했다. 여기서 전통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건륭제 시기부터 청대 미술의 주류로 발돋움한 양주화파의 미술을 의미했다. 양주화파가 중국 화단에 처음 등장했을 당시 이 경향은 여러모로 개성적이고 따라서 개혁적인 성향이 있었지만 19세기를 넘어오며 양주화파는 이전의 양식들이 그러하였듯 전통화파를 대표하는 미술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양주화파를 계승한 19세기의 화파는 해상화파 혹은 해파로 알려졌다.
이들은 강남 지방과 그보다 더 아래지역인 광동 광서 지방에서 활약했던 일군의 미술가들이었으며 상업미술가들이었다. 해상화파의 화가들은 채색과 수채화풍의 그림을 선호하였으며 주제에 있어서는 화훼도와 같은 소품을 즐겨 그렸다. 이들은 개업식 선물로 작품을 주문제작하는 상인들의 주문을 받아 부를 축적했다. 해상화파는 그 세부적인 경향에 있어서 또 두 개의 경향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전통 유지의 측면에서 좀 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금석파의 화가들로 조지겸, 오창석 등이 대표적이다. 또 다른 경향은 이 보다는 더 자유로운 화풍이며 대중적인 성향의 화조화를 중심으로 화업을 이루었던 임웅, 임훈, 임예, 임백년의 양식이 있다. 이들 네 명의 임씨 화가들은 흔히 4임(四任)으로 줄여부르기도 하는데 이들이 모두 같은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와 아들, 형과 동생의 관계로 사숙했던 화가들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해상화파의 화가들과 달리 영남화파로 대표되는 일군의 화가들은 일본의 영향 아래에서 자신들만의 양식을 창조해 나갔다. 영남화파 화가들은 주로 러일전쟁을 전후로 하여 일본의 영향력이 강성해 졌을 때 일본으로 대거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다. 본디 중국 내에서 일본 미술의 영향력은 매우 약소한 편이었는데 이는 중국 특유의 중화 의식의 발로였다. 이후 일본이 중국을 침공한 이후에는 반일 감정의 격화로 인해 일본으로의 유학은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실제로 일본의 영향력이 막강해졌을 때에도 영남화파는 자신들의 화풍이 일본 화풍의 영향과 독립된 양식을 추구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실제 그림들의 면면은 당시 활동하던 일본 미술 작가, 대표적으로 다케우치 세이고나 야마모토 슌코의 작품을 많이 참조한 흔적이 드러난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던 그들은 대외적으로는 일본 화풍과의 연계성을 부정하고 나아가서는 일본 화풍에서 자주보이는 독수리, 갈대, 단풍과 같은 상징들을 중국적인 해석으로 변용시켰다. 이들 영남화파는 당시의 평판이 어찌되었던 이후 화조화 분야에 있어서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는 초기 1세대 영남화파인 고검보나 고기봉 같은 화가들부터 오늘날에서 생종해 있는 여웅재나 조소앙 같은 2세대, 3세대 영남화파들이 이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영향 이외에도 중국에서는 서양의 영향 또한 전면적으로 들어왔다. 이미 청대에 궁정화풍에서 서양의 기법이 보이고 일찍이 서양 문물을 접촉했던 광주 지역 같은 경우에는 임관과 같은 사람들이 광주에서 그림을 그렸던 영국인 조지 치너리의 제자로 들어간 적이 있지만 이 시기 서양의 영향은 비단 화풍이 중국 내에 들어오는 것을 넘어 중국인들이 직접 유럽으로 건너가 그들의 화풍을 배우는 단계까지 넘어갔다는 것이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향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미술 분야 1호 국비유학생이자 귀국 이후에는 공산화 이전까지 중국 미술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서비홍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서비홍은 독일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배웠던 채원배의 추천으로 8년간 파리, 베를린 등지에서 유학했는데 이 시기 그린 화풍을 보면 당대 아카데미즘[2]의 경향이 짙게 배였다.
하지만 서비홍의 경우 한국의 고희동과 마찬가지로 유학을 다녀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통적인 화풍으로 선회하게 된다. 사실 동아시아에서 최초 혹은 1세대에 해당하는 서양화가들 중 상당수가 이후 전통적인 화법으로 전향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일단 당대 동아시아에서 서양화라는 것이 익숙지 않아 대중들에게 잘 소비되지 않았고 서양화를 배우는데 있어서도 돈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일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서비홍은 자신의 화풍에 있어서는 서양화법을 포기하였지만 미술 제도에 있어서는 근대적인 미술 교육 체계를 확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중국에 돌아온 직후 중앙미술학원 원장을 맡고 이후에는 북경미술대 학장 등을 역임하는 등 미술 교육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이 때 설치된 중앙미술학원과 북경미술대에서 배출된 서비용의 제자들은 중국의 화단의 곳곳에서 자신만의 입지를 구축해 그의 영향력이 사후에도 얼마간 지속되는 계기가 되었다.
1호 국비 유학생인 서비홍 이외에도 비슷한 시기 프랑스로 유학갔던 유해속이나 임풍면 같은 화가들도 1세대 서양화가로서 자신들의 화풍을 중국에 알리고 근대 미술 교육 체계를 확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들 1세대 서양화가들은 당시의 시대적인 경향으로 말미암아 다양한 화풍을 배웠는데 서비홍과 같은 아카데미즘에서부터 유해속이 배워온 추상표현주의, 임풍면이 구사했던 야수파 표현주의와 같은 다양한 화풍이 중국에 소개되었다. 하지만 이들 1세대 서양화가들은 전술했듯 이후 전통화로 회귀하는 급격한 화풍 변화를 겪었다. 따라서 생애 전반에 걸처셔 전통적인 서양화를 고수했던 작가들은 이들과는 전혀 다른 경향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구미로 유학한 최초의 화가였던 이철부가 바로 이러한 사례로 지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885년 영국 에링턴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이후 미국 뉴욕으로 옮겨 서양화를 전공한 사람이었다. 서양화를 배우기 위해 유학 갔던 여타 다른 화가들이 돈이나 문화차이로 인해 오랫 동안 유럽에서 체류하지 못한데 반해 그는 꽤 오랫동안 구미권에서 체류했으며 50년이 흐른 1930년 귀국한다. 그는 유럽의 제도권 미술이 고수했던 환영적인 유화 작품을 고수했고 그 경향을 중국으로 귀국한 이후에도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앞에서 언급한 1세대 서양화가들과 차이점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스크바 미술 학교에서 수학하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풍장백도 서양화를 고집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의 여명을 맞이한 중국 미술은 기존의 질서와 새로운 질서의 불안한 공존 속에서 각자의 길을 찾아간 화가들이 다양한 화풍을 선보였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중국 근대 미술은 이후 공산화와 문화대혁명으로 현대 미술과의 접점을 찾기가 힘든 측면이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많은 현대작가들이 근현대 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오마주하고 그들이 천착했던 주제를 재발견하는 것을 보면 이 둘의 연관성이 결코 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1] 네이버에서 양주팔괴를 치면 나오는 미술대사전(용어편)에서는 "고봉한을 양주팔괴로 더하기도 한다"라고 하지만 실상 고봉한은 그곳에서 활동하지도 않았고 그곳 태생도 아니다 회화관의 유사성은 있지만 그런식으로 따지면 후술할 고기패의 경우에도 양주팔괴로 묶일 수 있을 것이다. 양주팔괴의 공통점은 비단 그림을 대하는 태도에 있는것 뿐만아니라 그들이 양주 지역의 부유한 상인들, 특히 염상들의 후원을 받았고 그들의 후원 아래서 '묵객'으로 얼마간 활약한 사람들이었다라는 것을 기억하자. 여담이지만 네이버에서 미술에 대해 검색하면 바로 뜨는 미술대사전은 오래된 책(1997년 출간)이기에 오늘날의 기준으로 잘못된 정보가 꽤나 많다[2] 아카데미즘(Academism)은 학문이나 예술 등에서 사회의 동향을 추종하지 않고 순수하게 진리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