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21:25:56

백색 공포

대만 백색 공포 시대
臺灣白色恐怖時期
파일:백색공포.png
<colbgcolor=#bb133e><colcolor=#fff> 시기 1947년 ~ 1987년(파일:모호 아이콘.svg) / 1949년 ~ 1987년(파일:모호 아이콘.svg)
1947년 ~ 1991년(파일:모호 아이콘.svg) / 1949년 ~ 1991년(파일:모호 아이콘.svg)
총통 장제스, 장징궈, 리덩후이(파일:모호 아이콘.svg)
목적 공산당의 위협으로부터 국민당당국 체제 공고화
대만독립분자 분쇄[1]
관련 주제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
대만 계엄령

1. 개요2. 명칭, 시기 관련3. 관련 사건들
3.1. 2.28 사건 (1947년)3.2. 펑후 7.13 사건 (1949년)3.3. 루쿠 사건 (1952년)3.4. 딩야오탸오 처형 사건 (1956년)3.5. 자유중국 사건 (1960년)3.6. 진지웅 처형 사건 (1963년)3.7. 메이리다오 사건 (1979년)3.8. 린이슝 일가 피살 사건 (1980년)3.9. 천원청 살인 사건 (1981년)3.10. 례위 학살 (1987)
4.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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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White Terror [in Taiwan]

백색 공포 또는 대만 백색 공포 시대중국국민당당국 체제 치하 대만에서 벌어진 정치적 억압 전반 그 자체를 의미한다.

2. 명칭, 시기 관련

이 시기를 대만에서는 '백색 공포'(白色恐怖)나 '대만 백색 공포 시대'라고 지칭한다. 중국어테러(terror)는 恐怖라고 쓰므로 테러(恐怖)는 정치적으로 넓은 의미로 지칭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어로 번역할 때 대만의 백색 공포백색 테러같은 의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국제적으로 사용되는 의미의 "백색 테러"와는 다소 뉘앙스가 다르게 대만 역사에서의 "백색 테러"는 국민당의 억압적 통치가 발생한 하나의 '시대'를 지칭한다.

일반적으로 2.28 사건(1947년) 또는 대만 계엄령(1949년)을 기점으로 대만 계엄령 해제(1987년) 혹은 푸젠성 계염령까지 해제되는(1992년) 기간까지의 국민당 독재 시대를 지칭한다. 백색테러 시대의 시작 년도와 종결 년도는 학계에서 아직 합의되지 않았다고 한다.

3. 관련 사건들

이 시기에 발생한 국가 테러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3.1. 2.28 사건 (194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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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펑후 7.13 사건 (1949년)

July 13 Penghu incident / 澎湖七一三事件

중화민국 정부가 1949년 국공내전의 여파로 산둥에서 대만으로 도망쳐 온 5000명의 학생과 교사들을 징집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본래 국민당 정부는 이전에 군사훈련과 학업을 동시에 수행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으나, 막상 학생들이 섬에 도착하자 공산당 토벌이 우선이기 때문에 학업은 불필요하다며 전원 강제징집을 시도했고 이에 저항하는 학생 일부를 총검으로 찌르기도 했다. 이후 반발하는 교사과 학생 수백명을 체포했고 그 중 7명을 군사재판을 통해 처형했다.

이 사건은 반교의 배경이 되었다.

3.3. 루쿠 사건 (1952년)

Luku incident / 鹿窟事件

루쿠 사건 또는 루쿠 기지 사건(鹿窟基地案)[2]신베이시(당시 타이베이현)의 루쿠 마을에서 중공군 기지가 있다고 판단해 1952년 대만 비밀국 군인들이 찾아가 주민 35명을 사살하고 98명을 수감시킨 사건이다. 그러나 당시 역사적 자료들이 아직 공개되지 않거나 은폐되었기 때문에 중공군 기지 부분은 당시 국민정부 당국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는 논란이 있다. 대부분의 살해당한 마을 사람들은 광부였다.

대만 민주화 이후 이 사건의 피해자들을 기념하는 루쿠 사건 기념 공원(鹿窟事件紀念公園)이 신베이시에 세워졌다고 한다.

3.4. 딩야오탸오 처형 사건 (1956년)

1954년에 일어난 누명 사건으로 딩야오탸오(丁窈窕)를 포함해 타이난우체국에서 근무하던 51명의 직원들이 책상 위에서 발견된 사회주의 서적 때문에 공산당과 연루되었다고 의심받아 체포된 후 고문받은 사건이다. 딩야오탸오는 당시 임산부였고 출산 후 1956년 처형되었다.#

3.5. 자유중국 사건 (19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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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진지웅 처형 사건 (1963년)

진지웅(陳智雄)은 대표적인 대만 독립운동가이다. 가오슝 출신이며 일본군에 강제징집되어 일본에 있다가 일본 패망 이후에도 대만에 가지 않고 일본과 인도네시아를 오가며 대만 독립 활동을 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 정부와 대만 국민정부 모두 '반공'이라는 명분으로[3]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1960년 12월 일본 정부는 진지웅을 처형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을 약속받은 후 대만으로 강제송환시켰다. 그러나 국민정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1963년 5월 28일 형장에서 처형되었다.[4]

3.7. 메이리다오 사건 (19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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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린이슝 일가 피살 사건 (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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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천원청 살인 사건 (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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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례위 학살 (1987)

[1987] Lieyu massacre / [1987年]烈嶼屠殺

1987년 3월 7일 진먼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중화민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중화민국 육군이 공산주의를 피해 온 베트남 반공주의 난민(보트피플) 24명을 공비로 오해해 사살하였다. 그러나 중국어로 쏘지 말라고 외친 보트피플과 도망치려고 일어난 소년까지 총살했다는 점 때문에 의도적인 학살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영어로는 '1987 Lieyu massacre'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많지만 오늘날까지 대만 정부는 이를 학살(massacre)로 인정하지 않고 '우발적 과실치사'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대만에서는 3.7사건(三七事件, March 7 Incident)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4. 같이 보기



[1] 중화민국의 대륙 재수복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본성인을 포함해 모든 중화민국 국민들에게 대만 본연의 정체성을 제거하고 중화민족 의식을 주입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공산당 점령지 인구 수와 대만의 인구 수의 엄청난 갭을 고려했을때 대륙수복을 하려면 모든 것을 내던지는 총력전이 필요한데 때문에 자유권 제한과 사상통제는 필수로 여겼을 것이다.[2] 案(안)은 '사건'을 의미한다.[3] 현재 대만 독립운동가들은 반중공 성향이지만, 당시 대만 독립운동가들은 국민정부에 대한 반감 때문에 용공 성향이 있었고, 공산당도 적의 적은 친구라는 이유로 어느 정도 우호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때문에 현재 대만 민족주의자들과 우호적인 일본 보수주의자들과 달리 당시 일본 정부가 대만 민족주의자들의 편의를 봐줄 이유가 없었다.[4] 여담으로 이 사건과 연관은 없지만 스밍 등 다른 대만 독립운동가도 일본에 망명해 있었는데 스밍은 진짜 공산주의자에 망명 이전 장제스 암살시도까지 했던지라 빼박 처형감이라 (국민정부하) 대만에 송환 자체를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