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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전선의 초대 당수 오토 요한 막시밀리안 슈트라서 Otto Johann Maximilian Straßer | |
출생 | 1897년 9월 10일 |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바트 빈츠하임 | |
사망 | 1974년 8월 27일 (향년 76세) |
서독 바이에른 뮌헨 | |
소속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최종계급 | 독일제국군 육군 중위 |
시민권 | 독일인 |
학력 |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
가족 | 부모님, 형 그레고어 슈트라서 |
경력 | 군인 언론인 흑색 전선 대표 독일사회연합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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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정치인. 전직 나치당원으로,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동생이다.2. 생애
1897년 바이에른에서 태어나 형과 함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에 독일 제국군 육군소속으로 참전했다. 최종 계급은 육군 중위였다.1919년 잠시 사민당에 몸 담고 있다가 노선 차이로 탈당한 후, 나치당으로 입당했다. 나치당 입당 후 언론인으로 일한 그는 형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함께 나치당 내 좌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형을 포함한 타 나치당원들과는 다르게 인종주의적 성향은 상대적으로 약했었고 반동세력 융커나 자본가들을 엿먹이기 위해서는 유대인들과 손을 잡는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가 1928년 형과 상의 없이 당내에서 사회주의 세력을 규합하여 아돌프 히틀러에게 공개적으로 우편향된 당내 질서 개편을 요구했다.[1] 히틀러가 비밀리에 만나 갈등을 봉합하려 언론특보직을 제의하나 히틀러와의 비밀대화를 공개하여 히틀러에게 굉장한 비난을 받았고 당 내에서 배신자로 찍혔다. 결국 유대인 사고방식에 물든 지식인 판정을 받았고 중앙당에서 제명된다.
그는 자신이 제명될 때 나치당 내 사회주의 세력이 자신에게 합류하리라고 장담하며 1930년 흑색 전선이라는 당을 만든다. 그러나 겨우 20명밖에 합류하지 않았고, 그의 형 그레고어도 오토의 돌발 행동에 매우 화를 냈고 히틀러 지지를 공개 천명하자 그가 일으킨 사건은 결국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난다.
흑색 전선은 흑위대라는 별도의 전위대를 구성하고, 히틀러를 비판하는 리플렛과 정기 간행물을 발간할 정도의 규모를 갖춘 조직이었으나 이 신생 조직으로 이미 거대정당으로 성장한 나치스와 히틀러에 대항한다는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마저도 1933년 2월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기점으로 나치가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을 전면화하자, 오토는 오스트리아로 도피하고 흑색 전선은 금지된다.[2] 그는 오스트리아에 머물면서도 반-히틀러 활동을 지속했지만, 오스트리아 나치스의 테러가 덮쳐오자 또다시 도피해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로 이주한다. 그 때 장검의 밤이 일어나 그의 형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숙청되었으니,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초기부터 반대 성향을 드러낸 덕에 목숨을 건진 셈이 되어 버렸다. #1
이후 외국을 떠돌아 다니다가 1940년에 자신이 나치 주류세력에게 밉보였던 경험을 담은 《히틀러와 나(Hitler und Ich)》라는 책을 쓰기도 했고#2 2차 대전 중에는 캐나다에 머물렀다. 전후 1955년에 귀국이 허용되어 독일에서 독일사회연합이라는 정당을 창당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군소정당에 그친지라 정치인으로써 성공하지 못했다.
1974년 뮌헨에서 숨을 거둔다.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17 - 1920 | 정계 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20 - 1925 |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
| 1925 - 1930 | 입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30 | 제명 |
1930 - 1933 | 창당 |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33 - 1956 | 정당 활동 금지 망명 |
1956 - 1962 | 창당 정계 복귀 |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62 - 1974 | 정당 해산 사망 |
4. 기타
그는 하켄크로이츠가 아닌 검과 망치를 심볼로 애용했으며 경례구호도 하일 히틀러가 아닌 하일 도이칠란트를 사용했다.#3현재 네오나치들 사이에서는 슈트라서주의가 아직 남아있다고 한다. 네오슈트라서리즘은 자주관리 민족주의(Autonome Nationalismus)나 민족 볼셰비즘으로도 불리는데 기존의 네오나치즘과 비교했을 때 반자본주의 성향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며 하켄크로이츠나 켈트 십자가보다는 검과 망치를 상징으로 자주 쓴다.
5. 같이보기
[1] 이때 괴벨스도 오토 슈트라서를 따라 히틀러를 '쁘띠 브루주아'라고 부르며 규탄하며 히틀러와 대척하는가 싶었는데 순식간에 오토 슈트라서의 뒤통수를 치고 히틀러로 갈아탄다. 다만 괴벨스가 당 내 반히틀러층이었다가 갑자기 변절했다는 해석에 대해선 반론이 존재하는데 히틀러와 대립했다고 알려지던 시기 괴벨스가 히틀러에게 선물을 받고 기뻐하거나 히틀러의 연설에 감격해하는 일기를 남긴 것을 그 근거로 삼고있다. 월리엄 L 샤이너의 제 3제국사는 괴벨스 배신론에 입각하여 서술하고 있다면 이언 커쇼의 히틀러 평전과 게오르크 로이트의 괴벨스 평전은 괴벨스 배신론을 부정하고 있다.[2] 나치는 방화사건을 명분으로 수권법을 통과시키고,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강제해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