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방군최고사령부 Oberkommando der Wehrmach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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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사령부기 (1938~194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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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사령부기 (1941~1945) | |
| <colbgcolor=#000><colcolor=#ffffff> 소속 | <colbgcolor=#ffffff,#1f2023>독일 국방군 |
| 총장 | 초대 빌헬름 카이텔 제2대 알프레트 요들 |
| 참모장 | 초대 막스 폰 비반 제2대 알프레트 요들 |
1. 개요
독일 국방군의 최고사령부이다.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국방군의 최고 지휘권은 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가지고 있었다. 원래 독일군의 육-해군의 최고 사령관은 독일제국 황제였다.[1] 바이마르 공화국에선 군부에서 민간인 대통령의 간섭을 피하고자 군부내에서 육군-해군 총사령관을 신설했다. 대통령의 위임을 받아 군정권과 군령권으로 독일군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지휘자는 국방부의 국방장관(Reichswehrminister)이 아니라 각군 최고사령관이었다. 국방장관은 내각에서 군의 입장을 대표하는 지위에 불과했다.
1934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한 후 히틀러는 수상과 대통령직을 겸무한 총통으로서 국방군의 지휘권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리고 1935년 3월 16일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독일 국방군 창설법을 통과시킴에 따라 징병제를 실시하며 국방군을 창설하자 새로운 전쟁성이라는 군 조직을 설립하게 된다. 1935년 3월 16일 독일 국방군 창설 당시 통수권은 히틀러에게 있었지만 국방군에 대한 최고 지휘권을 직접 행사할 기구는 없었다. 1938년 1월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으로 국방부 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와 육군 총사령관이었던 베르너 폰 프리치가 물러나자 히틀러는 1938년 2월 4일 국방군 지휘에 관한 칙령(Erlaß über die Führung der Wehrmacht vom 4. Februar 1938)을 내려 국방군최고사령부에 대한 창설을 명령했다.
Erlaß über die Führung der Wehrmacht vom 4. Februar 1938.
「1938년 2월 4일자 국방군 지휘에 관한 칙령」
Die Befehlsgewalt über die gesamte Wehrmacht übe ich von jetzt an unmittelbar persönlich aus.
지금 이 시점부터, 나는 국방군 전체에 대한 최고 지휘권을 직접, 그리고 개인적으로 행사한다.
Das bisherige Wehrmachtamt im Reichskriegsministerium tritt mit seinen Aufgaben als „Oberkommando der Wehrmacht“ und als mein militärischer Stab unmittelbar unter meinen Befehl.
지금까지 국가 국방성 산하에 있던 국방군청은 그 임무를 이어받아 앞으로는 국방군최고사령부로 개편되며, 나의 군사 참모기관으로서 직접 내 지휘 아래에 둔다.
An der Spitze des Stabes des Oberkommandos der Wehrmacht steht der bisherige Chef des Wehrmachtamts als „Chef des Oberkommandos der Wehrmacht“. Er ist im Range den Reichsministern gleichgestellt.
국방군 최고사령부 참모장은 기존 국방군청장이 그 직을 맡으며, 그 지위는 국가 장관과 동등하다.
Das Oberkommando der Wehrmacht nimmt zugleich die Geschäfte des Reichskriegsministeriums wahr, der Chef des Oberkommandos der Wehrmacht übt in meinem Auftrage die bisher dem Reichskriegsminister zustehenden Befugnisse aus.
국방군 최고사령부(OKW)는 동시에 국방성의 업무를 이어받으며, OKW 참모장은 나의 명령에 따라 이전의 국방장관이 가지고 있던 모든 권한을 대신 행사한다.
Dem Oberkommando der Wehrmacht obliegt im Frieden nach meinen Weisungen die einheitliche Vorbereitung der Reichsverteidigung auf allen Gebieten.
평시에는 국방군 최고사령부가 나의 지시에 따라 국가방위의 모든 영역에 걸친 통합적 준비를 담당한다.
Berlin, den 4. Februar 1938
베를린, 1938년 2월 4일
1938년 2월 4일 아돌프 히틀러의 국방군최고사령부 설치에 관한 칙령
「1938년 2월 4일자 국방군 지휘에 관한 칙령」
Die Befehlsgewalt über die gesamte Wehrmacht übe ich von jetzt an unmittelbar persönlich aus.
지금 이 시점부터, 나는 국방군 전체에 대한 최고 지휘권을 직접, 그리고 개인적으로 행사한다.
Das bisherige Wehrmachtamt im Reichskriegsministerium tritt mit seinen Aufgaben als „Oberkommando der Wehrmacht“ und als mein militärischer Stab unmittelbar unter meinen Befehl.
지금까지 국가 국방성 산하에 있던 국방군청은 그 임무를 이어받아 앞으로는 국방군최고사령부로 개편되며, 나의 군사 참모기관으로서 직접 내 지휘 아래에 둔다.
An der Spitze des Stabes des Oberkommandos der Wehrmacht steht der bisherige Chef des Wehrmachtamts als „Chef des Oberkommandos der Wehrmacht“. Er ist im Range den Reichsministern gleichgestellt.
국방군 최고사령부 참모장은 기존 국방군청장이 그 직을 맡으며, 그 지위는 국가 장관과 동등하다.
Das Oberkommando der Wehrmacht nimmt zugleich die Geschäfte des Reichskriegsministeriums wahr, der Chef des Oberkommandos der Wehrmacht übt in meinem Auftrage die bisher dem Reichskriegsminister zustehenden Befugnisse aus.
국방군 최고사령부(OKW)는 동시에 국방성의 업무를 이어받으며, OKW 참모장은 나의 명령에 따라 이전의 국방장관이 가지고 있던 모든 권한을 대신 행사한다.
Dem Oberkommando der Wehrmacht obliegt im Frieden nach meinen Weisungen die einheitliche Vorbereitung der Reichsverteidigung auf allen Gebieten.
평시에는 국방군 최고사령부가 나의 지시에 따라 국가방위의 모든 영역에 걸친 통합적 준비를 담당한다.
Berlin, den 4. Februar 1938
베를린, 1938년 2월 4일
1938년 2월 4일 아돌프 히틀러의 국방군최고사령부 설치에 관한 칙령
2. 역할과 특성
1938년 2월 4일자 히틀러의 국방군최고사령부 설치에 관한 칙령에도 볼 수 있듯 국방군최고사령부는 국방군 지휘에 관해 히틀러가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설치된 기구였고 국방군최고사령관에게 기존 국방부 장관과 동일한 권한을 주는 것으로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국방군최고사령부가 최고 실권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전쟁 수행에 있어서 국방군최고사령부는 각 군에 대한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만일 국방군 최고사령부가 히틀러가 자신의 칙령에서 명시한 것처럼 국방성의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면 진정 국방군 전체의 육,해,공군에 대한 통솔권을 가지고 있어야 했지만 각 군 최고사령부는 국방군최고사령부의 하위 조직이 아니었다. 즉 국방군최고사령부는 각군 최고사령부를 통솔할 권한이 없었고 히틀러의 의사를 전달해주는 역할에 불과하였다.육군은 독일군의 중추였던 총참모부 역할을 계승한 육군최고사령부의 영향력이 더 쎘고 공군은 아예 국가 항공 장관인 동시에 공군최고사령관이며 히틀러의 공식 후계자였던 헤르만 괴링의 영향력은 히틀러를 제외하면 불가침 수준이었다. 육군과 공군에 비록 치이긴 했지만 해군은 독일 해군 내 연공서열 1위였던 에리히 레더의 권한 역시 막강했고 그의 후임자였던 카를 되니츠 역시 독일 해군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는 애시당초 히틀러라는 인물이 정권을 잡고 국방군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 궁극적으로 바이에른 공화국의 특권층 중 특권층이었던 독일 장교단의 요구를 적절히 맞추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때로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국방군 장군들을 해임시켰고 전쟁 수행 기간내내 전쟁 수행 문제로 장교단과 수시로 충돌했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이 그랬듯 권력 장악을 위해 국방군 장교들을 처형하지 않았고[2] 군부에서 자신들의 권한을 넘보는 갈색셔츠단에 대한 처분을 강력히 요구하자 1934년 장검의 밤을 일으켜 돌격대의 주요 간부를 숙청해야 했다. 특히 전쟁 수행에서 가장 큰 역할을 수행했던 육군 사령관을 보면 명확한데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국방장관은 보병대장(General der Infanterie) 쿠르트 폰 슐라이허인데 반해 육군총사령관은 쿠르트 폰 하머슈타인-에크보르트 상급대장(Generaloberst)으로 육군총사령관이 더 상급자였으며, 히틀러가 임명한 장관 블롬베르크와 육군총사령관 프리치는 친나치 였으나 사생활과 정적들의 공작 때문에 실각했고 각각 빌헬름 카이텔과 발터 폰 브라우히치가 임명된다. 1941년 12월 모스크바 전투가 실패로 끝나자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육군총사령관을 겸임할때 국방군 최고사령관은 히틀러의 충견 빌헬름 카이텔이라는 점을 볼 때 국방군최고사령부는 군을 대표하는 조직이나 실질적 군을 운영하는 조직은 육군최고사령부였고 실무 총책임자는 육군참모총장인 프란츠 할더, 쿠르트 자이츨러, 하인츠 구데리안이었다. 육군을 넘어서 공군과 해군에 있어서도 국방군최고사령부는 권한이 더 적었다. 실제로 2차대전 당시 동부 전선은 육군최고사령부가 전담했지 국방군 최고사령부는 노르웨이나 점령지인 서부 유럽과 이탈리아 등 중요도가 동부전선보다 낮은 전선만을 담당했다.
국방군최고사령부의 지휘의 최종적인 결재는 통수권자인 히틀러, 국방군 최고사령관 카이텔, 육군총사령관, 해군총사령관, 공군총사령관, SS국가지도자, 외무장관 등이 출석하는 총통부에서 행해졌다. 때문에 국방군최고사령부는 엄청난 이름과 권한에도 불구하고 군부의 각군의 작전권은 육군총사령부를 비롯한 기존의 실무 조직에 있었으며, 1941년 12월 모스크바 전투의 패배로 히틀러가 아예 육군총사령관에 취임하자 국방군최고사령부는 유명무실해졌다. 또한 히틀러의 의중대로 임명된 빌헬름 카이텔이 이끄는 국방군 최고사령부 지휘부는 유약했으며 실권은 휘하의 육해공군 최고사령부들에 있었으므로 최고사령부는 군 전체를 대표하는 군정부서일뿐 실질적인 권한은 영 적었다.
국방군최고사령부 본부는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에 베를린 남쪽 뷘스도르프(Wünsdorf)[3]에 완성한 지하시설로 옮겨졌다.[4]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후에는 히틀러는 최전선 근처의 지휘소에 머물렀음으로 실질적으로는 히틀러가 위치하는 곳이 국방군최고사령부가 되었다.
3. 산하 사령부
4. 역대 최고사령부 총장[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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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역대 참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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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관련 문서
[1] 바이에른, 작센, 뷔르템부르크 왕국군은 '평시' 작전 지휘권은 있었다. 그러나 전시에는 황제에게 작전권이 위임된다.[2] 히틀러가 뒤늦게 군부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일으킨 것도 국방군 장교단 내부에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을 일으킨 이후였고 이때도 히틀러는 암살에 발을 담구었다고 조사된 장교들은 죽여버렸을지언정 자신의 말에 토를 달았다는 이유로 처형하진 않았다.[3] 독일 제국 시절 세워진 독일 제국군 병영이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일명 '초승달 수용소(Halbmondlager)'라는 이름의 협상국 소속 무슬림 포로들을 수용하는 포로수용소가 있었고 나치 독일 멸망 이후 동독 치하에서는 주 동독 소련군 집단군 총사령부가 세워졌다.[4] 암호명으로 'May Bach II'라고 불렸다.[5] 실질적으로 전쟁장관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