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책에서 아이히만의 악을 분석하여 내놓은 결론에 대한 내용은 악의 평범성 문서 참고하십시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ichmann in Jerusalem | |
<colbgcolor=#dddddd,#010101><colcolor=#373a3c,#dddddd> 장르 | 철학 |
저자 | 한나 아렌트 |
최초 발행 | 1963년 |
언어 | 영어 |
[clearfix]
1. 개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는 1963년에 출간된 한나 아렌트의 저서이다. 아이히만의 재판을 취재하고 분석해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2. 내용
2.1. 배경
한나 아렌트는 독일 출신의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유대인 박해 광풍 속에서 가까스로 탈출하여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온 철학자였다. 따라서 그녀는 제3제국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실존적인 차원의 관심을 크게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60년에 이스라엘의 첩보기관 모사드가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을 국제법을 어기면서까지 아르헨티나에서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아이히만은 기소되어 1961년 4월 11일 전세계에 생중계되는 공개재판이 시작했는데, 이에 아렌트는 예정되었던 대학의 강의를 취소하고, 미국의 교양잡지 『뉴요커』에게 기사를 쓸테니 재정적 지원을 해달라고 부탁하여 특파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가서 직접 재판을 참관했다. 이로써 이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탄생하게 되었다.아렌트가 취재한 보고서의 내용은 먼저 『뉴요커』 1963년 2월호와 3월호에 다섯 차례로 나뉘어 기사로 개재되었고, 이후 잡지에 개재한 내용을 수정하고 증보하여 1963년 5월에 한 권의 책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양심사를 분석하면서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는 데, 아이히만이 아주 사악하고 악마적인 인물일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매우 평범했다고 주장해서, 화가 난 유대인들이 아렌트를 반대하는 조직적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을 정도로 극심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아렌트는 논란을 다룬 '후기'를 추가하여 1964년에 수정판을 내놓았다.
2.2. 아이히만 재판
사실 아이히만의 납치와 재판의 뒤에는 이스라엘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이 있었다. 그러므로 아이히만의 죽음은 그가 납치되었을 때부터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벤구리온은 왜 아이히만을 암살하지 않고, 굳이 재판을 했나? 벤구리온의 목적은 아이히만을 '정의'에 입각해서 재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 재판을 통해서 '유대인 학살의 끔찍함을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재판을 진행한 것이었다. 그래서 재판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쇼'로 만들고자 했다. 재판 과정 전체를 세계 전역에 TV로 송출하는 것을 허락하고, 원고측 증인 진술은 100명 가깝게 다 들으면서 피고측 증인 진술은 법적인 문제를 들어 사실상 한명도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은 재판이 쇼라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쇼는 이렇게 준비되었다. 재판장은 모셰 란다우, 검사장은 기드온 하우스너, 변호사는 로베르트 세르바티우스였고, 피고인 아이히만은 유리 부스 안에 들어가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모든 행동이 방송 카메라에 찍혔다. 아이히만은 15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었는데, 각각의 죄목에 대해 아이히만은 '기소장이 의미하는 바대로는 무죄'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나는 유대인을 죽인 적이 없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계속 반복해서 자신은 단지 유대인을 수용소까지 이송하는 역할만 맡았고, 그것은 법으로 정해진 명령이었기 때문에 명령에 따라 수행했을 따름이라고 항변했다.
심지어 아이히만은 정신 감정을 받았는데,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그를 '정상'으로 판정했다. 한 정신과 의사는 "적어도 그를 진찰한 후의 내 상태보다도 더 정상이다"며 탄식했다고 한다. 그는 아이에게는 바람직한 아버지였고, 아내에게는 바람직한 남편이었으며, 아우에게는 바람직한 형이었고, 친구에게는 바람직한 동료였다. 정신과 의사들은 그의 모든 정신적 상태가 '정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함'을 발견했다. 더 심각한 것은 아이히만은 유대인에 대한 광적인 증오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며, 반유대주의에 열광했거나 세뇌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는 유대인을 싫어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실제로도 유대인을 싫어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아이히만은 테오도르 헤르츨의 『유대 국가 (Der Judenstaat)』를 읽고, 유대인을 위한 국가가 세워져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이 생각을 주변 친위대 동료들 사이에 전파하기도 했을 뿐더러 그와 관련된 소책자를 쓰기도 했다. 또한 아이히만은 저명한 시온주의자인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과 자주 접촉했고 그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러던 중 아이히만은 유대인 전문가로 알려져서, 상관에게 '유대인 강제이주'의 임무를 부여받게 되고, 아이히만은 유대인 인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유대인 강제이주'에 대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성공적으로 진급하게 된다. 아이히만은 그렇게 유대인들이 이주된 땅에 언젠가 자신만의 '유대 국가'를 세우고 거기서 총독을 맡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런데 1939년 전쟁이 시작되고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밑에서 일하게 되면서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변한다. 본래 아이히만은 자신만의 '유대 국가'를 폴란드 지역에 세우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 계획은 친위대 내부 갈등으로 인해 실패한다. 그래서 아이히만은 마다가스카르에 '유대 국가'를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배로 운송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자 결국 히틀러는 1941년에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책(Endlösung)으로 '유대인의 신체적 전멸'을 하이드리히에게 지시했고, 하이드리히는 아이히만에게 그 지시 내용을 알려주었다.
그 지시를 들은 아이히만은 자신의 일에 대한 모든 기쁨과 관심을 한순간에 잃어버렸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폭력을 통한 그 같은 해결책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기 때문이었다.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유대인 학살을 위한 가스실을 보게 되었을 때, 아이히만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강한 심리적 동요를 경험했으며, 실제로 학살이 진행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을 때는 몇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정도로 심한 충격을 받았다. 아이히만은 이런 끔찍한 장면들을 볼 만큼 자신이 '그렇게 강하지' 않고, 잠을 잘 수도 없으며, 악몽을 꾼다고 상관에게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게다가 아이히만은 상관의 명령과 반대되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돌격대에 의해 즉각적으로 총살될 러시아 지역으로 유대인들을 보내는 대신 우츠 게토로 이송하도록 지시했는데, 그곳은 그가 어떠한 학살 준비도 아직 되지 않은 곳으로 알고 있는 곳이었다. 이 모든 행동과 증언을 고려해 볼 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제대로 된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히만의 양심은 1942년 반제회의를 계기로 정반대 방향으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최상위 고위층 관료들이 반제회의에서 '최종해결책'에 대한 문제를 토론했었는데, 아이히만은 이 회의에 최말단 서기로 참여하게 되었다. 여기서 아이히만은 잡다한 일, 즉 초대장을 보내고 통계 자료를 준비하며 의사록을 작성하는 일을 맡았을 뿐, 정책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여도 할 수 없는 말단 공무원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회의에서 나라를 짊어지고 있는 모든 엘리트 공무원들이 ㅡ 심지어 착하고 연륜 있는 사람마저도 ㅡ '폭력을 통한 해결책'에 대해서 한명도, 단 한 명도 반대하지 않는 것을 보고, 아이히만은 드디어 자신이 느끼는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1] (아이히만은 여기서 본티오 빌라도와 마찬가지로, 자신은 죄가 없다는 심정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 이후로는 일이 점점 더 쉬워졌고 또 곧 일상적이 되어 버렸다. 그는 이제 '강제 이주 전문가'가 아니라 '강제 소개 전문가'가 되었다.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유대인은 등록을 해야 했고, 손쉬운 식별을 위해서 노란색 표지를 달도록 강요받았으며, 함께 집결해서 이송되었고, 다양한 운송수단을 통해 그때마다의 센터의 상대적 수용능력에 따라 동부지역에 있는 이곳저곳의 학살센터로 옮겨졌다. 아이히만은 더이상 '강제 이주'가 폭력적인 사태로 끝난다고 하여 그것을 꺼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은 자신에게 '의무'가 되었다. 아이히만은 재판 도중 칸트의 정언 명령을 인용하면서, 제3제국에서는 총통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법이었고, 그 법을 수행하는 것이 본인의 양심이 되었다고 강조했을 정도였다.[2] 이 '의무감'은 그가 불리할 때도 지속되었는데,[3] 전쟁 말미에 '이주 정책'이 온건하게 변했을 때도 아이히만은 '이주 정책'에서 항상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물론 그것은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죽음의 문턱 바로 앞까지 이송하는 것을 의미했지만 말이다.
1961년 12월 11일, 재판장은 판결문을 낭독했다. "그가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차원에서 그리고 다양한 행동 방식으로 참여한 범죄의 경우, 실제로 사람을 직접 죽인 행동을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와 반대로, 이 경우에 일반적으로 살상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 마침내 1961년 12월 15일 금요일 아침 9시에 사형이 선고되었다. 3개월이 지난 1962년 3월 22일에는 항소심이 열렸다. 항소심의 심리는 1주일밖에 걸리지 않았고, 이후 법정은 두 달간 휴정했다. 1962년 5월 29일 두 번째 판결문이 낭독되었다. 그리고 대법원이 판결을 내린 지 이틀이 지난 5월 31일 자정이 되기 직전, 아이히만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아이히만은 아주 근엄한 태도로 교수대로 걸어갔다. 그는 붉은 포도주 한 병을 요구했고 그 절반을 마셨다. 간수들이 그의 발목과 무릎을 묶자 그는 간수들에게 헐렁하게 묶어서 자신이 똑바로 설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검은색 두건을 머리에 쓰겠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나는 그것이 필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러고 그는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사형당한 후, 그의 사체는 화장되었고 재는 지중해의 이스라엘 수역 밖에 뿌려졌다.
2.3. 악의 평범성
자세한 내용은 악의 평범성 문서 참고하십시오.이따금 희극은 갑자기 공포 그 자체로 되어 버리기도 하고, 그래서 그 결과 섬뜩한 유머가 그 어떤 초현실주의적 창작물을 능가하는, 그러나 진실된 이야기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한 이야기를 아이히만이 경찰 심문 중에서 털어놓았는데, 이는 유대인 공동체의 대표 중 하나였던 빈의 불행한 상업고문관 스토르퍼의 이야기였다. 아이히만은 아우슈비츠의 사령관 루돌프 회스로부터 전보를 받았는데, 스토르퍼가 도착하여 급히 아이히만을 만나자고 청했다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좋아, 이 사람은 언제나 태도가 좋았기 때문에 내가 약간의 시간을 쓸 가치가 있지. ⋯⋯나는 직접 거기 가서 그의 문제가 뭔지 알아봐야겠어라고 말이지요. 그래서 나는 에브너[4]에게 갔는데, 에브너가 말하기를 (나는 어렴풋이밖에 기억나지 않지만) '그가 그렇게 서투르지만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숨어서 도망치려고 했지'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경찰은 그를 체포해서 수용소로 보냈고, 제국지휘관(힘러)의 명령에 따라 한 번 들어가면 아무도 나올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일도 가능하지 않았지요. 여기에 대해 에브너 박사나 나, 그리고 그 누구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나는 아우슈비츠로 가서 회스에게 스토르퍼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회스가 말하기를) 그래, 그래. 그는 노동조 중 하나에 속해 있어.' 나중에 스토르퍼와 만났는데, 그 만남은 정상적이고 인간적이었어요. 우리는 정상적이고 인간적인 만남을 가졌지요. 그는 모든 슬픔과 비애를 내게 털어 놓았습니다. 저는 '그래, 내 사랑하는 오랜 친구야, 확실히, 우리는 이제 확실히 알았어요! 얼마나 운이 나빴던가를!'이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나는, '이봐요, 저는 정말 당신을 도와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제국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아무도 나올 수 없게 되어 있으니까요. 저는 당신을 빼낼 수 없어요. 에브너 박사도 당신을 빼낼 수 없습니다. 저는 당신이 실수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숨어서 도망치려고 했잖아요. 사실 당신은 그럴 필요가 없었어요'라고 말했어요. (아이히만의 말은 스토르퍼가 유대인 지도층 인사였기 때문에 추방에서 면제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 그가 뭐라고 답했는지는 잊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상태가 어떤지 물어봤지요. 그러자 그는 작업에서 면제될 수 없는지 물어왔어요. 일이 아주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회스에게 '스토르퍼가 꼭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없잖아!'라고 말했습니다. 회스는 '여기선 모두가 다 일을 해'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나는 '좋아, 내가 짧은 편지를 써서 스토르퍼가 빗자루로 자갈포장로를 쓰는 일을 하도록 하겠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거기에는 자갈포장로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는 빗자루를 놓고 벤치에 앉아 쉴 수 있을 거야.' 스토르퍼에게 나는 말했습니다. '이 정도면 될까요, 스토르퍼 씨? 그 일이 당신에게 맞을까요?' 이 일에 대해 그는 매우 기뻐했고, 우리는 악수했습니다. 그에게는 빗자루가 주어졌고, 벤치에 앉았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함께 일한 사람을 마침내 만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내게 큰 내적 기쁨을 주었지요." 이 정상적이고 인간적인 만남이 있은 지 6주일 후 스토르퍼는 죽었다. 가스가 아니라 총살이었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p.107~109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p.107~109
아이히만이 직접 말한 위의 일화에서, 아이히만은 스토르퍼와의 만남을 정상적이고 인간적인 만남으로 회상하고 있다. 심지어 아이히만은 오랫동안 함께 일한 동료를 만나고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서 그 만남에서 큰 내적 기쁨을 느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상대방인 스토르퍼는 과연 그 만남을 "정상적이고 인간적인 만남"으로 느꼈을까?
아렌트는 이렇게 현실과 동떨어진 상투어(Klischee)가 아이히만에게 도피처를 마련해 주었다고 본다. 처음에는 히틀러나 괴벨스가 만든 구호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 구호는 일관된 이데올로기적 목적이 아닌, 해마다 변하는 거짓말로서 종종 현실과 모순을 일으키곤 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비참한 현실에 대한 죄책감을 완화시켜줄 적절한 "상투어"가 생각나기만 한다면, 현실과의 모순같은 것은 곧 잊어버리고 "의기양양"해 질 수 있었다. 그러한 점은, 아이히만이 붙잡힌 후 계속해서 "나는 과거의 적들과 화해하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하지만 가해자가 당당하게 피해자에게 '화해'를 요청하고 피해자가 그것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문제는 아니지 않는가? '화해'라는 상투어가 그를 당당하게 만든 것은 터무니없을 뿐만 아니라 단적으로 우습게 보이기까지 한다. 이 터무니없는 상투어들은 더 이상 위에서 내려온 것이 없을 때에도 독일 국민들의 자기 변명을 위해 스스로 재생산되고 있었다. 당시 수많은 독일인들이 자신은 '어쩔 수 없이' 나치의 폭력 앞에서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고, ㅡ 나치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동조한 ㅡ 자신들의 행동이 그 당시에는 '당연한 일'이었다고 거리낌 없이 말했다. 그러나 정말 '어쩔 수 없었던 것'이고 정말 '당연한 일'이었을까?
재판에서도 마찬가지 였다. 아이히만은 처음에 자신이 젊은 시절에 배운 단 한가지는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대단히 강조하고는 선서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그 후에 판사로부터 자신의 변호를 위한 증언을 하고 싶으면 선서를 한 뒤 할 수도 있고 선서 없이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두말 않고 즉시 선서 아래에서 증언을 하겠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모순' 따위는 한 번도 의식하지 않은 채 아주 만족스러워할 수 있었다. 그가 기억 속에서나 즉흥적으로나 자신의 기분을 북돋울 수 있는 상투어들을 찾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사형집행의 순간에도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이 끔찍한 재능을 발휘했다. 죽기 전, 그는 "신을 믿는 자"[5]라고 분명히 진술하면서 자기는 기독교인이 아니며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일반적인 나치스 식으로 표현했다. 그러고는 그는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6]고 말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없는 것이라면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텐데도, 그는 그 모순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 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 냈고, 곧 의기양양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사악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 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7]
2.4. 아렌트의 판결 : 인류에 대한 범죄
법에 의한 박해나 마찬가지인 합법화된 차별로서의 국가적 범죄나, 추방이라는 국제적 범죄는 모두 근대에도 전례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합법화된 차별은 발칸의 모든 나라들에서 늘 해오던 것이었으며, 대규모 추방은 많은 혁명들 이후에 발생했었다. 새로운 범죄, 즉 ('인간의 지위에 대한' 또는 인류의 본질 자체에 대한 범죄라는 의미에서의) 인류에 대한 범죄가 나타난 것은, 독일 국민이 어떠한 유대인도 독일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대 민족 전체를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나치 정권이 선언했을 때였다. 추방과 대량학살은 비록 이 두 가지 모두가 다 국가적 범죄이지만 분명히 구별된다. 추방은 동료 국가들에 대한 공격이지만, 대량학살은 인류의 다양성 자체, 즉 그것이 없다면 '인류' 또는 '인간성'이라는 바로 그 말이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인간 지위'의 특성에 대한 공격이다. 만일 예루살렘 법정에서 차별과 추방, 그리고 대량학살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했더라면, 법정에서 직면한 최고의 범죄, 즉 유대 민족의 신체적 전멸은 유대 민족의 몸에 범해진 인류에 대한 범죄였다는 것, 그리고 범죄의 본질이 아니라 희생자가 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선택이 오랜 역사를 가진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반유대주의로부터 도출될 수 있었다는 점이 즉각적으로 분명하게 나타났을 것이다. 희생자가 유대인인 한에서는 유대인의 법정이 재판하는 것이 옳고도 적절하다. 그러나 그 범죄가 인류에 대한 범죄인 한, 그 범죄를 심판하는 데는 국제 재판소가 필요했다.[8]
논증을 위해서 피고가 대량학살의 조직체에서 기꺼이 움직인 하나의 도구가 되었던 것은 단지 불운이었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그래도 피고가 대량학살 정책을 수행했고, 따라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정치는 탁아소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치에서 복종과 지지는 동일합니다. 그리고 (마치 피고와 피고의 상관들이 누가 이 세상에 거주할 수 있고 없는지를 결정한 어떤 권한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이 지구를 유대인 및 수많은 다른 민족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하지 않는 정책을 피고가 지지하고 수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즉 인류 구성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피고와 이 지구를 공유하기를 바란다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교수형에 처해져야 하는 이유, 유일한 이유입니다.[9]
아렌트는 나치 정권이 유대 민족 전체를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새로운 범죄, 즉 '인간의 지위에 대한' 또는 인류의 본질 자체에 대한 범죄라는 의미에서의 인류에 대한 범죄가 새롭게 나타났다고 본다. 예전에도 대량학살은 있었지만, 그것이 하나의 민족 전체를 순수하게 없애버릴 목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10] 하나의 민족 전체를 없애버릴 목적에서 저질러진 국가 차원의 행정적 대량학살은 인류의 다양성 자체에 대한 공격, 즉 그것이 없다면 '인류' 또는 '인간성'이라는 말 자체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인간 지위'의 특성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에 '인류에 대한 범죄'이다.그러므로 만에 하나, 아이히만이 '명령을 따르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내면적 삶'이 범죄적이지 않다고 증명될 수는 있을지언정, 행정적 대량학살 정책에 복종하고 이를 수행하려는 그 결정만큼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결정으로 유대인 및 수많은 다른 민족 사람들과 함께 '지구를 공유(share)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그는 사형을 선고받아 마땅하다.[11]
그래서 아렌트는 이 재판이 '유대인의 법정'에서 치러진 것이 잘못되었다고 본다. 이 문제는 단순히 전쟁 범죄로 인한 유대인 학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순수히 유대인 민족 자체를 없애려고 시행된 행정적 대량학살이라는 점에서 '인류에 대한 범죄'에 해당되는 것이므로, 앞으로 등장할 미증유의 다른 '인류에 대한 범죄'를 다루기 위한 선례를 남기기 위해서라도 '국제 재판소'에서 재판이 되었어야 바람직했을 것이라는 게 아렌트의 생각이었다.
3. 여담
- 베티아 스탕네트는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2001)』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아이히만은 재판정에서 사형을 받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쓰고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를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록 그 연기가 실패해 아이히만은 사형을 당했지만, 적어도 그 연기는 아렌트를 속여서 '아이히만의 악은 평범하다'고 생각하게끔 만들었다는 것이다.
스탕네트는 지금에서야 확인할 수 있는 비밀 자료들에서 아이히만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자신의 역할을 꿈꾸는 철저한 이데올로기적 광신도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스탕네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의 악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단,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자신과의 인터뷰에서 보여줬던 광신도적 모습을 허영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았으므로, 아렌트의 주장이 완파당했다고 보기에는 힘든 면이 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광신적인 모습 자체가 아예 없었던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런 광신도적 모습이 그의 실제 모습이 아닌 허영이라고 보았던 것이니 말이다.
4. 한국어 번역
국내 번역본은 한길사에서 출판되었는데 인터넷 서점의 한줄평 란은 번역에 대한 성토로 도배가 되었을 정도로 번역에 문제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영어 원문과 비교해서 읽어보면 직역으로 충실히 번역했음을 알 수 있으며 번역이 그다지 이상하다고는 볼 수 없다. 철학적 글쓰기라서 원래 문장 자체도 독해하기 힘든 글일 뿐더러 아렌트가 영문에도 능하지 못했기 때문에 읽기 힘들어진 것도 있다.법에 의한 박해나 마찬가지인 합법화된 차별로서의 국가적 범죄나, 추방이라는 국제적 범죄는 모두 근대에도 전례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합법화된 차별은 발칸의 모든 나라들에서 늘 해오던 것이었으며, 대규모 추방은 많은 혁명들 이후에 발생했었다. 새로운 범죄, 즉 ('인간의 지위에 대한' 또는 인류의 본질 자체에 대한 범죄라는 의미에서의) 인류에 대한 범죄가 나타난 것은, 독일 국민이 어떠한 유대인도 독일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대 민족 전체를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나치 정권이 선언했을 때였다. 추방과 대량학살은 비록 이 두 가지 모두가 다 국가적 범죄이지만 분명히 구별된다. 추방은 동료 국가들에 대한 공격이지만, 대량학살은 인류의 다양성 자체, 즉 그것이 없다면 '인류' 또는 '인간성'이라는 바로 그 말이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인간 지위'의 특성에 대한 공격이다.
논증을 위해서 피고가 대량학살의 조직체에서 기꺼이 움직인 하나의 도구가 되었던 것은 단지 불운이었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그래도 피고가 대량학살 정책을 수행했고, 따라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정치는 탁아소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치에서 복종과 지지는 동일합니다. 그리고 (마치 피고와 피고의 상관들이 누가 이 세상에 거주할 수 있고 없는지를 결정한 어떤 권한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이 지구를 유대인 및 수많은 다른 민족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하지 않는 정책을 피고가 지지하고 수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즉 인류 구성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피고와 이 지구를 공유하기를 바란다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교수형에 처해져야 하는 이유, 유일한 이유입니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중 일부 발췌. 진하게 강조된 부분이 번역되지 않은 부분이다.
논증을 위해서 피고가 대량학살의 조직체에서 기꺼이 움직인 하나의 도구가 되었던 것은 단지 불운이었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그래도 피고가 대량학살 정책을 수행했고, 따라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정치는 탁아소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치에서 복종과 지지는 동일합니다. 그리고 (마치 피고와 피고의 상관들이 누가 이 세상에 거주할 수 있고 없는지를 결정한 어떤 권한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이 지구를 유대인 및 수많은 다른 민족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하지 않는 정책을 피고가 지지하고 수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즉 인류 구성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피고와 이 지구를 공유하기를 바란다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교수형에 처해져야 하는 이유, 유일한 이유입니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중 일부 발췌. 진하게 강조된 부분이 번역되지 않은 부분이다.
다만, 번역은 나쁘지 않은데 간혹 한 문장씩 빼먹고 번역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한문장을 덜 번역한다고 번역이 번역일이 많이 줄어들거나 하는 것은 아닐 텐데 굳이 한문장씩 빠뜨리고 번역한 것은 의문이다.[12]
5. 관련 영상
6. 관련 문서
※ 악의 평범성처럼 "어째서 평범하던 사람이 극악무도한 짓을 태연하게 저지를 수 있는가"에 대해 고찰하는 심리학적 접근들이다.[1] 아이히만이 말한 것처럼 자기 자신의 양심을 무마시킨 가장 유력한 요소는 실제로 최종 해결책에 반대한 사람을 한명도, 단 한 명도 볼 수가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p.186)[2] 물론 칸트의 보편적 입법의 원칙은 '총통이 정한 법을 아무 생각없이 따르라'는 말이 아니다. 이 점을 한나 아렌트는 신랄하게 지적한다.[3] 전쟁이 패할 기미가 보이자, 책임 회피를 위해서 하나 둘 전쟁 범죄에 대해서 손을 때기 시작했는데, 아이히만은 그런 불리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임무인 '유대인 이주'를 끝까지 수행하려고 했다.[4] 빈의 게슈타포 우두머리[5] 특정 종파에 속하지 않지만 신은 형식상 믿는 나치스 식 상투어(관용어).[6]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는 당시 장례식에서 자주 쓰였던 상투어(관용어)였다.[7]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p.349[8] Neither the national crime of legalized discrimination, which amounted to persecution by law, nor the 'international crime of expulsion was unprecedented, even in the modern age. Legalized discrimination had been practiced by all Balkan countries, and expulsion on a mass scale had occurred after many revolutions. It was when the Nazi regime declared that the German people not only were unwilling to have any Jews in Germany but wished to make the entire Jewish people disappear from the face of the earth that the new crime, the crime against humanity - in the sense of a crime "against the human status," or against the very nature of mankind - appeared. Expulsion and genocide, though both are international offenses, must remain distinct; the former is an offense against fellow-nations, whereas the latter is an attack upon human diversity as such, that is, upon a characteristic of the "human status" without which the very words "mankind" or "humanity' would be devoid of meaning. Had the court in Jerusalem understood that there were distinctions between discrimination, expulsion, and genocide, it would immediately have become clear that the supreme crime it was confronted with, the physical extermination of the Jewish people, was a crime against humanity, perpetrated upon the body of the Jewish people, and that only the choice of victims, not the nature of the crime, could be derived from the long history of Jew-hatred and anti-Semitism. Insofar as the victims were Jews, it was right and proper that a Jewish court should sit in judgment; but insofar as the crime was a crime against humanity, it needed an international tribunal to do justice to it. (Hannah Arendt, Eichmann in Jerusalem)[9] Let us assume, for the sake of argument, that it was nothing more than misfortune that made you a willing instrument in the organization of mass murder; there still remains the fact that you have carried out, and therefore actively supported, a policy of mass murder. For politics is not like the nursery; in politics obedience and Support are the same. And just as you supported and carried out a policy of not wanting to share the earth with the Jewish people and the people of a number of other nations - as though you and your superiors had any right to determine who should and who should not inhabit the world - we find that no one, that is, no member of the human race, can be expected to want to share the earth with you. This is the reason, and the only reason, you must hang. (Hannah Arendt, Eichmann in Jerusalem)[10] (국제법이 성립되어온 근대 이래로) 영토와 전쟁을 목적으로 하나의 민족을 대량학살한 적은 있으나, 한 민족 자체를 없애겠다는 순수 그 목적으로 전쟁을 하고 대량학살을 한 것은 나치가 처음이라는 뜻. 전쟁에서의 대량학살과 나치의 대량학살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자세하게 나와있다. (다만, 아렌트는 대량학살의 케이스를 유럽 역사 한정으로 생각하는 듯이 보인다.)[11] 한 인간은 개인적으로 용서받을 수 있다. 어쨌든 그의 '내면적 삶'이 범죄적이지 않다고 증명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량학살 정책에 복종하고 이를 수행하려는 아이히만의 결정은 용서받을 수 없다. 그는 이러한 결정으로 유대인,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구를 공유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영-브륄 『한나 아렌트 전기』 홍원표 옮김, 인간사랑, 2007, p.608)[12] 번역가가 의도적으로 한 문장씩을 건너뛴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실수로 건너뛴 부분을 인지하지 못해 출판할 정도로 검수 과정이 철저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설명하면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