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4 17:23:25

고평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고덕평생학습관의 준말에 대한 내용은 서울특별시교육청고덕평생학습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고평.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고인석(高仁鉐)
이명 고고찬(高高鑽)
자 / 호 수여(秀汝) / 백하(白霞)
본관 제주 고씨[1]
출생 1886년[2] 4월 8일
전라도 부안현 입상면 율지리
(현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신흥리 율지마을)
사망 미상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고평은 1886년 4월 8일 전라도 부안현 입상면 율지리(현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신흥리 율지마을)에서 아버지 고재갑(高在甲, 1863. 9. 16 ~ 1932. 8. 27)과 어머니 함평 이씨(1860. 3. 21 ~ 1931. 11. 4) 이우모(李佑模)의 딸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상경하여 1902년 한성부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졸업하고, 이어 경성관립법관양성소(京城官立法官養成所)에 들어가 법률을 공부했다. 이후 1905년 4월에는 경성지방법원 춘천지청 검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다 불교에 심취한 그는 곧 사직하고 1906년부터 1910년까지 전라북도 부안군 좌산내면 진서리(현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에 있는 내소사에 기거하면서 불교를 공부하는 한편, 1908년 호남학회(湖南學會)에 회원으로 가입하며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내소사에서 하산한 뒤 1911년 7월에는 대종교에 입교하여 경기도 경성부에 있던 남도본사(南道本司)에서 활동하다가, 1913년 4월 중화민국 길림성 왕청현에 본부가 있던 동도본사(東道本司)의 전강(典講)에 임명되면서 만주로 가게 되었다.

그 후 1919년 2월 18일, 길림성 연길현 국자가(延吉縣 局子街)[3] 하장리(下場里)에 있던 연길도윤공서(延吉道尹公署) 외교과원 박동원의 집에서 구춘선, 김영학(金永學), 유예균(劉禮均) 등 33인과 함께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고 비밀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이 회의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는 대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고, 같은 해 3월 13일 연길현 육도구 용정촌(延吉縣 六道溝 龍井村)[4]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19년 4월, 간도에서 조직된 조선독립기성총회(朝鮮獨立期成總會)에 가담한 고평은 고덕승(高德勝)·이상호(李相鎬)·지송(池松) 등과 함께 인근 지역으로 파견되어 독립만세시위로 인해 체포된 인사들의 빈자리를 보충하기 위해 활동하는 한편, 연해주에서 개최된 신국민대회(新國民大會)에 서일, 구춘선, 서왈보 등과 함께 참가했다. 그리고 연길현 명월구(延吉縣 明月區)[5]에서 의군부(義軍府)가 조직되자 여기에도 가담해 총재에 이범윤, 총사령에 김현규(金鉉圭), 참모장에 진학신(秦學新)을 추대하고 자신은 의군부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920년 8월 말에는 중국 토군(土軍)이 일제에 매수되어 의군부를 공격하려한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의군부원 150명으로 감사대(敢死隊)를 조직, 노야령(老爺嶺)[6]에서 전투를 벌여 중국 토군을 격퇴했으며 청산리 전투가 벌어진 후에는 길림성 밀산현(密山縣)[7]을 거쳐 연해주로 들어가는 북로군정서군을 종군했다.

그러나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이 벌어지자 연길현으로 돌아와 의군부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 그는 얼마 뒤 왕청현 합마당(蛤蟆塘)[8]에 위치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군정사군무서(軍政司軍務署)에서 김덕현(金德賢)·손범철(孫範哲) 등과 함께 독판(督辦) 서일 휘하 군정회의원에 선임되었다.

1923년 5월, 고평은 연길현 명월구에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고 총사령(總司令)에 김규식을 추대했으며, 자신은 참모장에 선출되어 400명의 병력을 이끌었다. 그는 군사훈련과 조직 강화를 병행하고 국민개병제로 병농일치의 둔전제를 실시했으며, 연해주로부터 무기를 구입해오는 등 군세를 확충했지만 실제로 전투를 벌이지는 못했다. 그 뒤 1928년 재만동지회(在滿同志會)를 조직하여 이주 한인의 생활정착에 힘쓰다가 중국 관내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고평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장흥백파-의열공파(毅烈公派)-유계공파(柳溪公派) 24세 석(鉐) 항렬.[2] 탐라장흥고씨대동보 권4 797쪽에는 1885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4]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5]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안도현 밍위에진(明月鎭).[6]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훈춘시 관내 라오예링(老爺嶺).[7]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지시시 미산시(密山市).[8]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왕청현 다싱거우진(大興溝鎭) 하마탕촌(蛤蟆塘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