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8-24 07:55:46

민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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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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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필호 선생.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민필호(閔泌鎬)
이명 임동반(林東潘)·왕량성(王良誠)
자 / 호 중우(仲禹) / 석린(石麟)
출생 1898년 2월 7일[1]
한성부 동서 연화방 통우계 호동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남동)#
사망 1963년 4월 14일 (향년 65세)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자택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156호
본관 여흥 민씨[2][3]
학력 경신소학교 (졸업)
휘문의숙 (4학년 / 중퇴[4])
박달학원 (졸업)
남양학당 (졸업)
정풍문학원 (중국문학 / 졸업)
부모 아버지 민치헌, 어머니 함평 이씨
배우자 신창희
자녀 슬하 2남 5녀
장남 민영수, 장녀 민영주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4. 참고 자료

1. 개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반으로 활동한 독립유공자이자 대한민국의 정치가.

독립유공자 민제호는 그의 둘째 형이다. 한국광복군 출신의 김준엽고려대학교 총장의 장인이기도 하다.

2. 생애

1901년 2월 7일 한성부 동서 연화방 통우계 호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남동)에서 의정부 찬정(贊政)을 지낸 아버지 민치헌(閔致憲, 1844 ~ 1903. 8. 27)과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함평 이씨 이도서(李道緖)의 딸(1844 ~ 1902. 8. 21) 사이의 4남 7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1세에 맏형 민준호(閔濬鎬, 1877 ~ 1937. 2. 11)가 운영하는 경신소학교 5학년 2학기에 편입하여 반년 뒤 우등으로 졸업했으며, 같은 해 휘문의숙에 입학하여 수학하다가 3학년이 되던 1910년 경술국치를 당했다. 당시 졸업을 몇 달 앞둔 민필호는 일본의 연호가 적힌 졸업장을 받는 것은 수치라며 1911년 겨울 학교를 떠나 중국 상하이로 갔다.

상하이에 도착한 민필호는 1912년 2월 학생 신분으로 동제사(同濟社)와, 그 뒤 확대 조직한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또 신규식이 창설한 박달학원(博達學院)에 입학하여 중국어, 영어, 역사를 공부했다. 박달학원에는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등 이름있는 인물들이 교수로 많이 재직하고 있어 우수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912년 7월 박달학원을 졸업하고 그 해 9월에는 남양학당(南洋學堂)에 입학하였다.

1917년 7월 남양학당을 졸업하고 1918년 우드로 윌슨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자 민필호는 당시 중국 관립 교통부 상해체신학교에서 수학 중이던 신규식의 명으로 상하이 중국 전신국 사무원으로 근무하면서 그가 작성한 밀서[5]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동시에 신규식의 비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업무 및 연락사무를 보좌하고, 항일정신과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국내와 만주, 미주에 알리는 노력을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후 임시정부 법무총장 신규식의 딸인 신창희와 혼인하였고 이후 신규식의 비서로 일하면서 정풍문학원(正風文學院) 중국문학과에 입학, 중국 고문학을 연구하다가 1920년 7월 졸업하였다.

1921년 10월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겸 외무·법무 총장인 신규식 특사의 수행비서로, 쑨원의 광둥호법정부(廣東護法政府)를 찾아가 임시정부의 정식 승인을 얻는 데 공헌하였다. 이후 1922년 신규식이 상하이에서 서거하자 1923년 10월부터 1936년 4월까지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의 비서로 재무의 실무 책임을 맡고 경비 조달에 힘을 쏟았다. 이때 임시정부는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특히 사무실 임대료 체불로 인해 집주인에게 고소를 당하기까지 한다. 민필호는 직접 법정에 출석하여 자신의 월급을 담보로 문제를 해결했다. 한편 1924년 1월에는 상해교민단의사회 학무위원이 되어 인성학교(仁成學校) 운영과 교육비 납부의식 고취 등 교포 교육사업에 힘썼으며, 1925년 2월에는 칭다오 전보국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1936년 일제의 감시가 더욱 심해지자 김구저장성 자싱에 있는 호법의장(護法議長) 저보성의 저택으로 피신하게 했으며, 이동녕·이시영·엄항섭·조완구·안공근 등을 항저우로 각기 피신하게 할 때 이를 주선하였다. 1937년 10월에는 난징 교통부의 전정사(電政司)가 되었다가 그 해 12월 중국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 시종실의 암전연구소(暗電硏究所) 총무(대령급)로 일하였다. 또한 군사위원회 기술연구실 제3조장(소장급)으로 근무하던 중, 1938년 11월부터 장제스의 시종실이 이동함에 따라 쿤밍·충칭 등지로 이동하여 근무하다 1939년 5월에 사임하였다.

1939년 5월 임시정부 김구 주석 판공실장 겸 외무차장에 임명되었으며, 임시의정원 경기도 의원에 선임되었다.[6] 또한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에 선출되어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복간, 발행하였다. 또 처음으로 임시정부 무장경비대를 조직하는 한편, 1945년 8.15 광복이 되자 중국국민당과 교섭 끝에 임시정부의 환국 경비 6억 원을 차입하고 비행기 두 대를 대여하는데 성공하여 임시정부 요인의 환국사무를 무사히 끝내도록 힘썼다.

그리고 임시정부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 부단장에 임명되어, 단장 박찬익을 도와 임시정부의 잔무를 정리하고 화북·화중·화남·만주 일대의 대표단 분단을 설치하는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 및 한인 교포 보호, 임시정부 해체 후 뒷처리를 도맡았다. 임정 해체 이후 뒷처리를 한참 도맡고 있을 1947년에 대미외교를 마치고 도중에 방중한 이승만중국어 통역을 담당하여 장제스를 비롯한 중국국민당 인사들과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 1948년 8월에는 대만 주재 초대 총영사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957년 7월 귀국하여 충칭에서 창설된 한중문화협회(韓中文化協會)를 재건하였고 그 때까지 중국에 남아 있던 한국교포 문제를 중국의 유력 정치가와 교섭하여 매듭지었다.

1963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아 생전에 건국훈장을 수여받은 몇 안 되는 임시정부 요인이 되었다.[7] 같은 해 4월 14일에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의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1975년 8월 8일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했다.

1997년 2월 12일 휘문고등학교로부터 명예 졸업장을 수여받았다.#

3. 가족관계

  • 임시정부 법무총장으로 재직 중이던 신규식의 딸 신창희와 혼인하였고, 2남 4녀의 자녀를 낳았다. 또한, 신창희 역시 남편과 함께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사후 2018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맏아들 민영수는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이며 해방 후 캄보디아 영사, 홍콩 부총영사, 중화민국 대리대사를 역임하는 등 외교관으로 활동했다.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 딸인 민영주도 광복군으로 활동했으며 남편 김준엽 역시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이고 해방 후 고려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오빠인 민영수와 똑같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 둘째 아들인 민영백은 홍익대학교 건축과 졸업 후 건축가로 활동하며 청와대 춘추관, 63빌딩, 힐튼호텔 설계에 참여하였고, 한국 실내건축가 협회 및 아시아 태평양 실내건축가협회 회장,국제 실내건축 연맹 회장을 역임하는 등 실내 건축계 권위자이다.
  • 형 민제호는 임시 의정원의원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며, 조카 민영구는 중국에서 상선 선장으로 근무하며 중일전쟁 당시 후방 보급에 참여했고 광복군 및 임시정부 회계업무를 맡았다. 민영구는 해방 후 해군사관학교장을 역임하는 등 해군 제독으로 활동했다.

4. 참고 자료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108~110p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여흥민씨세보에는 1898년생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용의조선인명부에는 1897년 7월 20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삼방파 27세손 ○호(○鎬) 항렬. ()[3]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의 5남 민진오의 5대손으로, 명성황후와는 12촌이다.[4] 1997년 2월 12일 휘문고등학교로부터 명예 졸업장을 수여받았다.#[5] 밀서의 내용은 당시 조선 국내에 있던 이상재·손병희 등에게 민중시위운동을 전개하라는 지령을 담았다.[6] 임정은 실질적으로 관리하지는 못하지만 지금의 국회의원처럼 각 지방마다 의원을 두었다.[7] 원래 1962년 수여받을 예정이었으나 훈장에 등급을 매기는데 대한 거부감을 들어 거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