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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세봉

파일:2647_2831_5336.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양서봉 (梁瑞鳳)
이명 양윤봉 (梁允奉)
희근 (熙根)
벽해 (碧海)
본관 남원 양씨 (南原 梁氏)[2]
출생 1896년 7월 15일[3]
의주부 철산군 서림방 연산동
(現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연산리)[4]
사망 1934년 9월 20일[5] (향년 38세)
만주국 랴오닝성 환런현
(現 중국 랴오닝성 번시시 환런만주족자치현)
묘소 평양시 형제산구역 신미동 애국렬사릉[6]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애국지사 묘역-149호[7]
기념비 중국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만주족자치현(新宾满族自治县) 왕청문조선족진(旺清门朝鲜族镇)[8]
서훈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追書)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만주 이주와 독립운동2.3. 대한통의부 장교 활동2.4. 정의부 장교 활동2.5. 국민부 및 조선혁명당 장교 활동2.6. 한중 연합군 활동2.7. 순국2.8. 이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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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때 항일무장투쟁을 지도하며 활약한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追書) 받았다.

서울특별시국립현충원평양시애국열사릉에 모두 묘가 조성되어 있는 등[9] 사실상 남북이 모두 '독립운동가'이자 '영웅'으로 추앙하는 유일무이한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1896년(고종 34) 7월 15일(陰 6월 5일) 평안북도 의주부 철산군 서림방 연산동(現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연산리)의 빈곤 가정에서 아버지 양효은(梁孝銀, ? ~ 1912)와 어머니 김아계(金阿桂) 사이의 슬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고, 형제로는 남동생 양원봉·양시봉·양정봉과 여동생 양봉녀 등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가정 형편이 매우 어려워 철산군 어느 서당에서 소사(小使)로 일하면서 <천자문>, <동몽선집>, <명심보감> 등을 어깨 너머로 배웠다. 일제의 침략 행위가 이 지역에도 미쳐 선량한 주민들을 약탈하고 온갖 만행을 자행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일제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중근 의사의 기개에 경탄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었다. 1912년 부친이 사망하자 일찍부터 집안 살림을 맡게 되었으며 1916년 윤재순(尹在順)과 결혼하여 가계를 이끌어 갔다.

2.2. 만주 이주와 독립운동

그러나 가세가 기울어 더이상 국내에서 생활하기가 곤란하자 1917년 엄동설한에 가족과 같이 압록강을 건너 중화민국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콴뎬현(寬甸縣)[10]과 환런현(桓仁縣)[11]을 거쳐 흥경현(興京縣) 영릉가(永陵街)[12] 라오청(老城) 하남(河南)[13]에 도착하여 만주족 지주의 소작농으로 생계를 연명하며 1년간 머무르다가, 1919년 봄에 조선인 이주민들이 많이 살던 흥경현 훙먀오쯔(紅廟子) 쓰다오거우(四道溝)[14]로 이사하여 살던 중 국내에서 거족적인 3.1 운동이 일어나자 흥동학교(興東學校) 교장 이세일(李世日)과 함께 주민들을 규합하여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1922년에는 독립단 대장인 김명봉(金明奉), 정창하(鄭昌夏) 등과 연계하여 항일 운동을 지원했으며 독립단 소속 지방 공작원이 되어 식량을 공급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2.3. 대한통의부 장교 활동

1922년 8월 서로군정서대한독립군을 비롯하여 대한광복군 군영(大韓光復軍 軍營), 대한광복군 총영(大韓光復軍 總營), 평안북도 독판부(平安北道 督瓣府) 등 8단 9회의 대표들이 중국 환런현 마권자(馬圈子)에서 '남만 한족 통일 회의'를 개최하여 남만주의 각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했다.

대한통의부는 총장(金東三), 부총장(蔡相德) 아래 민사, 교섭, 군사, 법무, 재무, 학무, 실업, 권업, 교통, 참모의 10부를 두었으며 부 밑에 국을 두고 비서과와 사판소를 설치하여 남만주에서의 민, 군정을 통합한 독립 정부 형태를 갖추었는데 이 때 대한통의부 의군 산하 제3중대(중대장 최지풍) 소속으로 활동했다. 1922년 겨울에 의주(義州), 삭주(朔州), 구성(龜城)의 경계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천마산대(天麻山隊)에 가입하여 창성군 대유동(大楡洞) 경찰서, 금광 사무소와 영림창을 기습해 군수 물자와 금괴 등을 노획하여 군자금으로 충당했다.

1923년 초 천마산대에 대한 일제의 토벌 계획(討伐計劃)으로 독립군의 근거지는 물론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을 습격하고 방화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게 되자 국내에서는 더이상 활동이 불가능하여 대장 최시흥은 천마산대를 이끌고 만주 유하현으로 이동했다. 이후 천마산대는 그 곳에서 무장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과 합류하여 광복군철마별영(光復軍鐵馬別營)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이때 동영(同營)의 검사관으로 임명되어 불량한 병사들을 선도하는 등 군기 확립에 진력하는 한편 훈련을 강화하여 의용군을 정규군 수준으로 끌어올리자 총영장인 오동진 장군으로부터 크게 신임을 받았다. 1923년 5월에는 평안북도 창성군(昌城郡), 초산군(楚山郡) 판면(板面), 의주군(義州郡) 고령(古寧) 영산(永山) 일대의 경찰서와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수십 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23년 8월 독립운동 방략의 대립으로 대한통의부가 의군부로 분할되자 통의부의 의용군 소속 제 1, 2, 3, 5 중대를 주축으로 하여 환런현 마권자에서 참의부를 조직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에서는 참의부를 군사 단체로 인정하여 압록강 연변과 중국의 집안현(輯安縣)을 중심으로 무송(撫松), 장백(長白), 안도(安圖), 통화(通化), 유화(柳河) 등의 동포 사회의 민정과 군정을 관할하도록 했다. 참의부는 국내 진입 작전을 통해 활발한 무장 투쟁을 전개했는데 이때 참의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참의부 소속 제3중대 소대장으로 임명된 양세봉은 1924년 5월 16일 평안북도 초산군 성남동(城南洞), 강계군(江界郡) 고산하(高山河)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하여 수 명의 적을 사살했으며 일제 침략의 원흉인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국경 지역인 압록강을 순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자 5월 19일 참의부 제2중대 제1소대(소대장 한웅권)와 합세하여 일제의 경비가 미치지 못한 만주 쪽 강변인 마시탄 절벽에 정예병을 배치하고 사이토 마코토가 국경 순시차 압록강 경비선을 타고 지나갈 때 사격을 지휘했다. 경비선이 다가오자 사격이 시작되었으나 의외로 사거리가 너무 멀어 경비선은 빗발치는 탄환을 피해 전속력으로 도주했다. 결국 조선 총독 처단은 미수에 그쳤지만 한국 독립군의 정보력과 실행력으로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작전이었다.

사이토 마코토가 3.1 운동 후 소위 문화통치라는 미명으로 한국 통치에 대하여 거짓 자랑만 하고 있었으니 그에게 경고가 되었음은 물론 대내외에 한국 독립군의 활동을 더욱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1925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츠야 미야마츠(三矢宮松)와 만주의 봉천성 경찰청장 간에 소위 미쓰야 협정이라는 재만한인취체법(在滿韓人取締法)을 체결하게 되었고 중국 당국은 독립운동을 탄압할 의무를 갖게 되어 독립군 활동에 적지 않은 타격을 받게 되었다.

1924년 6월 참의부 소대원을 이끌고 평안북도 강계위원에 진입하여 일제 경찰대와 교전했으며 1924년 말 참의부 제3주대장으로 승진하여 남만주 화전현(樺甸縣) 일대에서 항일 무장 활동, 부일배(附日輩) 숙청 등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또 1924년 7월 통의부 사령장 겸 군사위원장 신팔균 장군이 왕청문(旺淸門) 이도구(二道溝) 밀림리(密林里)에서 무관학교 관병들을 훈련시키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마적 떼들이 급습하여 위기에 몰리자 양세봉은 대원들과 함께 신속히 구출 작전을 펼쳐 엄호 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신팔균 장군 등 수십 명의 독립군들이 전사하는 비운을 겪게 되어 통의부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2.4. 정의부 장교 활동

1924년 7월 지린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를 개최하여 대동단결에 합의를 보고 1924년 11월 25일 통의부를 비롯하여 대한군정서, 길림주민회, 의성단 등 10여 개 단체의 대표인 김동삼(金東三), 고활신, 이진산(李震山), 이천민(李天民), 김호, 이장녕(李章寧) 등 25명이 회집하여 김동삼을 의장으로 선출한 후 협의를 거듭한 끝에 정의부(正義府)를 결성했다. 이때 정의부는 지역, 군사, 재정, 행정, 교육, 사법 등 모든 부문을 국가 체제에 준하여 조직했다.

정의부가 성립된지 1년이 못 되는 1925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선임된 이상룡(李相龍)은 재만(在滿) 독립운동 지도자인 오동진, 김동삼, 윤세용, 이유필(李裕弼), 김좌진, 현천묵 등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3부 대표자를 고루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료로 입각시키게 됨에 따라 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해야 한다는 독립운동상의 실리론(實利論)이 대두되어 정의부의 내분이 표출되었다. 이에 1926년 1월 중앙회의 상임위원장 이해룡(李海龍)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비상 의회 격인 군민대표회(軍民代表會)를 개최하여 새로운 헌장을 제정하고 이에 따라 새로운 중앙 의회와 행정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로써 정의부는 남만 지방에 있어서 공화정체를 뚜렷이 한 한족행정부(韓族行政府)로서 기반을 굳혔다. 1925년 11월 양세봉은 정의부 제1중대장에 임명되어 일제 군인과 경찰 등을 제거하는데 앞장서 활약했다.

당시 중국국민당국공합작에 의하여 통일 전선이 형성되고 국내에서는 좌우익의 통합체인 신간회를 결성하는 등 연합 전선을 추진하는 통합 운동이 일어나자 만주에서도 정의부를 주축으로 하여 1928년 5월 12일부터 26일까지 15일간 중국 화전과 반석 등지에서 18개 단체의 대표 39명이 참석하는 전민족유일당조직회의(全民族唯一黨 組織會議)를 개최했다. 이때 화전현에서 정의부의 의용군 중대장으로 활약하고 있던 양세봉은 정의부 대표로 유일당 조직회의에 참석하여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을 새로 결성했으나 청년 동맹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민족유일당 촉성조직동맹(당시 공산주의자와 연계되어 있었음)의 비협조로 유일당 조직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후 1928년 9월 지린 근방 신안둔(新安屯)에서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대표가 모여 3부 통합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2.5. 국민부 및 조선혁명당 장교 활동

1929년 4월 정의부를 주축으로 신민부 민정위원회측 대표 이교원과 참의부측 심용준이 모여 새로운 군정부인 국민부를 조직했다. 이때 양세봉은 제1중대장으로 임명되어 활약했으며 국민부 산하 선민부토벌 지휘부(鮮民府討伐指揮府)를 조직하고 지휘부의 부사령이 되어 총사령 이웅(李雄)[15]과 함께 일제의 주구 기관인 선민부(鮮民府)를 토벌하는 것을 주 임무로 하여 일제 기관을 습격하고 일제 밀정 등을 처단하는데 앞장섰다.

1929년 12월 국민부 중앙 회의에서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을 조선혁명당으로 개편함과 동시에 그에 소속되어 있던 혁명군을 독립시켜 국민부 예하 조직으로서 무장 단체인 조선혁명군을 조직하여 종전의 정의부에 소속되어 있던 부대를 개편하고 참의부와 신민부에 있던 일부 병력을 흡수하여 통합시켰다. 양세봉은 부사령이라는 중책을 맡아 적 기관 습격 및 밀정 처단 등 무장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1930년 8월 조선혁명당 대표자 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조선혁명당은 국민부를 지지하는 민족주의와 이를 부정하는 사회주의 계열로 분열되고 있었다. 양세봉을 비롯하여 현익철(玄益哲), 고이허(高而虛), 김문학(金文學), 양하산(梁荷山)(본명 梁基瑕) 등 민족주의 이사들은 국민부를 적극 지지하고 당의 위원회에서 결정한 사항의 실행을 주장한 반면 고활신, 김석하(金錫夏), 이웅(李雄), 현정경, 이성근(李成根) 등은 이에 반대하여 국민부 및 조선혁명당을 해체하고 군대를 적위군(赤衛軍)에 편성하고 농민은 농민 협회를 조직하여 유력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중국 동북 지방을 침략한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한국과 중국의 연대 투쟁의 필요성이 절실하여 양세봉은 1931년 11월 신빈현 왕청문(旺淸門)에서 중국인 왕동헌(王彤軒)의 요녕농민자위단(遼寧農民自衛團)과 협의하여 연합 부대를 편성했고 양세봉은 조선혁명당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국민부와 조선혁명당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1932년 1월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의 주요 간부들은 중국 신빈현(新濱縣) 하북(河北)에 있는 서세명(徐世明)의 집에서 중앙 간부 회의를 소집하여 9.18 사변 이후 당면한 현안 문제를 논의하던 중 친일 주구 단체인 '보민회'의 밀고를 받고 출동한 통화 일본영사 분관 경찰의 습격을 받아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이호원(李浩源), 조선혁명군 사령관 김보안(金輔安), 부사령 장세용, 부관장 박치화, 경위대 대장 이규성(李奎星), 국민부 공안부 집행위원장 이종건 등 10여 명이 체포되었고 3월 초까지 계속된 일경의 검거로 9개 현에서 간부 83명이 체포되는 등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양세봉을 비롯하여 양기하, 고이허 등 조선혁명당의 중견 간부들은 조혁군 각지부대 수뇌회의(朝革軍各地部首腦會議)를 소집하고 위기에 처한 조선혁명군과 조선혁명당의 자구책을 토의한 후 조직을 재정비했는데 이때 양세봉은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에 선임되었다.

총사령에 임명된 양세봉은 일제와의 결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군의 조직을 5개사로 개편하여 제1사령에 박대호(朴大浩), 제2사령에 한검추(韓劍秋), 제3사령에 조화선(趙化善), 제4사령에 최운구(崔允龜), 제5사령에 정광배(鄭光培)를 임명했으며 총사령 본부를 홍경현 왕청문에 재설치하고 정의부에서 세운 화흥중학(化興中學)을 속성사관학교로 개편하여 조선혁명군 관할하에 귀속시키는 동시에 강전자(江甸子)로 옮겼다. 속성사관학교의 교장에 양하산(梁荷山), 총대장에 윤일파(尹一波), 교관에 한국신(韓國信) 등을 임명하고 양세봉은 명예 교장으로 독립군을 양성하여 항일 역량을 높이는데 진력했으며 밖으로는 중국 의용군 총사령 이춘윤(李春潤)과 협의하여 요녕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을 조직하는 협정을 체결한 후 조선혁명군은 특무대와 선전대대로 편성하여 양세봉이 요녕민중자위군의 특무대 사령으로 김광옥은 선전대대장으로 활동했다.

2.6. 한중 연합군 활동

조선혁명군이 특무대와 선전대대로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게 된 것은 중국군에 비해 부대 규모가 작지만 뛰어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중 연합군의 편성은 각처에서 발호하고 있는 중국인 무장 단체인 대도회(大刀會)와 홍창회(紅槍會) 등의 무질서한 행동을 자제시켰으며 동시에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도 호전되었다.
친애하는 동지들, 이번 전투는 동포 동지들의 생사를 담판하는 결전입니다. 나를 따라 생명을 각오하는 동지들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 조국 광복군과 동만 백만 동포들의 생명을 두 어깨에 짊어진 우리는 일당백의 용감한 정신과 아울러 이번 전투에 승리의 믿음을 선포합니다. - 1932년 홍경현 대회전을 앞두고 -
중국 군벌인 당취오(唐聚五), 왕육문(王育文), 손수암(孫秀岩), 장종주(張宗周), 왕봉각(王鳳閣), 서대산(徐大山), 이춘방(李春芳), 등철매(鄧鐵梅) 등도 이에 호응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협정을 맺은 후 1932년 10월까지 요녕민중자위군과 조선혁명군의 연합군은 일본군과 거의 2백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1932년 3월 양세봉은 참모 김학규, 중대장 조화선, 최운구, 정봉길 등의 3개 중대를 인솔하고 중국 의용군 왕동헌, 양석봉 등의 부대와 합세하여 신빈현의 왕청문에서 무순 천금채(撫順 千金寨)로 진군하는 도중 신빈 남쪽에 숙영하게 되었다. 이 정보에 접한 신빈현 주둔 적 관동군은 박격포, 기관총 등 중화기로 무장하여 연합군을 총공격했다. 그러나 지리에 익숙한 조선혁명군의 전술에 말려들어 교전 1시간만에 일본군이 고지를 빼앗기고 퇴각하자 30여 리를 추격하여 신빈 동쪽에 있는 영릉가성(永陵街城)에 이어 상협하(上夾河)까지 점령했다(영릉가 전투).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수많은 전리품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는 한편 한중 양 민족간의 갈등을 융화시키고 유대를 공고히하는 계기가 되었다.

1932년 3월 하순 영릉가 전투에서 대승한 한중 연합 부대에게 일본군이 보복 차원에서 폭격기까지 동원하여 전격적으로 흥경성을 점령하자 양세봉은 이 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고려하여 중국 의용군 이춘윤 부대 1만여 명과 연합하여 조선혁명군은 동문으로 돌입하고 중국 의용군은 북문으로 총공격했다(흥경성 전투). 기진맥진한 일본군은 서남문으로 패주하고 말았으며 흥경성에서도 태극기청천백일만지홍기가 펄럭이면서 전승(戰勝) 축제가 무르익어 사기가 충천했다.

1933년 1월 중국 당취오 부대가 와해되고 붕괴됨에 따라 왕청문 남의(南依) 목수둔(木樹屯)에서 조선혁명군 수뇌부 소집 회의를 개최하여 양세봉을 총사령에 재임용하고 부사령에 박대호(朴大浩)를 임명하는 동시에 부대를 3개 방면군으로 개편하고 조선혁명당 총령에 고이허, 국민부 부위원장은 김동산을 임명했다. 그리고 병력 충원과 재정 조달 방법을 모색하고 군규(軍規)를 제정하여 민족 단결을 꾀하고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유격전을 전개하기로 했다.

1933년 4월 조선혁명군의 활동 무대를 집안현, 임강현(臨江縣) 일대의 한중 국경 지대로 옮겨 유격전과 국내 진입 작전을 전개했으며 5월 서원준(徐元俊)을 국내 유격대장의 직책으로 황해도에 밀파하여 사리원 경찰서 등을 습격했다. 1934년 3월 홍경현 쌍립자(雙砬子)에서 조선혁명군은 간부 회의를 소집하여 조선혁명군의 항일 연합 범위 확대, 항일 근거지 건립, 일본 침략자 타격 등에 대한 방침을 정하여 다른 무장 투쟁 세력과 연계하여 추진하기로 했다. 6월에는 참모장 김학규를 베이징에 밀파하여 중국 관내로 철수한 당취오와 연락하고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흥경현 진주령(珍珠嶺)에서 일본군 기차를 습격하여 수십 명의 적을 처단하는 등 1933년 6월까지 계속 항일전을 전개했다.

1933년 7월 7일 일본군이 영릉가 석인구(石人溝)의 조선혁명군 사령부를 습격했으나 조화선 부대의 지원으로 조선혁명군은 반격을 하여 일본군 40여 명을 사살하고 경기관총 3정, 중포 1문, 소총 80여 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7월 중순 양세봉 부대는 이춘윤 의용군 부대의 잔류병 5백명과 합세하여 무순현 노구대(老溝臺)를 점령하고 1개 연대 규모의 일본군과 교전해 2일간의 격전을 치렀다. 이후 일본군은 다시 1개 대대의 병력으로 통화현 쾌대무자(快大茂子)에 주둔하고 있는 제1방면군 최윤용 부대를 습격했으나 조화선 부대의 지원을 받아 일본군은 격퇴되고 말았다. 이때 패퇴하는 일본군을 다시 최주봉 부대가 추격하여 80여명을 사살했다.

2.7. 순국

이 무렵 일제의 밀정 박창해(朴昌海)가 조선혁명군을 직간접으로 후원하던 중국인 왕명번(王明藩)을 매수하여 환런현에 머물고 있던 양세봉을 찾아가 중국 항일군과 연합을 논의하자는 구실로 양세봉을 환런현 소황구(小荒溝)의 골짜기로 유인했다.

1934년 8월 12일 양세봉은 부관 김광욱, 김성해(金星海), 김추상(金秋霜)과 같이 왕명번을 따라 나섰다. 일행이 대랍자구(大拉子溝)로 가던 도중 돌연 좌우 수수밭에서 수십 명의 괴한이 뛰쳐나와 일행을 포위하는 순간 왕명번은 양세봉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나는 지난날의 왕씨가 아니다. 이 탄환을 받지 아니 하려거든 일본군에게 항복하라”고 고함을 쳤다. 양세봉은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위엄있게 꾸짖었으나[16] 끝내 밀정 박창해와 중국인 왕명번 등 주구배들의 저격을 받아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양세봉이 순국하자 동지들은 일제가 모르게 산 중턱에 평장(平葬)을 했는데 통화 일본 영사관 경찰이 이를 탐지해 묘를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 목을 가져가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2.8. 이후

양세봉이 순국한 이후 김호석(金浩石)이 총사령에 취임했으나 조선혁명군은 급격히 세력이 위축되어 소규모 유격전으로 겨우 독립군의 명맥을 유지했다. 당시 점점 몰락하는걸 막기 위해서 조선혁명군은 군 중심의 조선혁명군정부로 재편하지만 조선혁명군의 몰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34년 양세봉이 사망한 이후 1936년 정신적 지주이자 당을 이끌던 고이허가 잡히면서 조선혁명군의 상황은 나빠졌다. 그러자 총사령이었던 김활석은 한인들이 많았던 공산주의 부대인 동북항일연군이랑 연대해서 일본 군경에 대항하면서 근근히 버틴다.

1937년 3월 조선혁명군은 평안북도 건너편에 튼튼한 산채를 구축하고 국내로 진공하려는 계획을 세우는데 이걸 일본 군경이 알아차린다. 일본 군경은 이참에 조선혁명군을 뿌리뽑으려고 경찰, 관동군 정보 기관, 군용기까지 투입하면서 본부를 공격한다. 김활석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은 1000m 고지에 있던 요새로 들어가 저항했으나 결국 일본군과 만주군의 화력에 밀려 10시간 동안의 전투 끝에 퇴각하게 된다. 이러한 공격에 조선혁명군은 본부와 그동안 구축했던 산채 및 요새들을 잃었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데 1사 사령인 한검추와 그의 병사들에게 일본 경찰이 회유 문서를 보내서 50여 명이 결국 항복했다.

이후 약 150명 정도로 줄어든 조선혁명군을 당시 사람들이 '광간사령'이라고 불렀는데 뜻은 '가지 없는 나무'로 병사 없이 간부만 있는 조선혁명군을 지칭하는거였다. 이후 조선혁명군은 70명 정도로 병력이 더 줄었는데 조선혁명군의 상황이 좋지 않으니 동북항일연군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몇몇 인사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으로 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사령인 김활석은 조선혁명군의 역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교전 끝에 일본군에게 항복한다.

훗날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양세봉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1974년 10월 17일에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양세봉의 허묘(墟墓)를 조성했다. 북한 평양시 형제산구역 신미동 애국렬사릉에도 양세봉의 무덤이 있는데 허묘(墟墓)가 아니라면 중국 만주에 있었을 유해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우호 국가인 북한에 보내준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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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애국렬사릉에 안장된 양세봉 장군의 묘비. 북한에서는 두음 법칙을 적용허지 않으므로 량세봉으로 표기한다.

3. 여담

  • 1946년경 북한 당국의 주선으로 양세봉의 아내 윤재순(尹在順)과 아들 양의준(梁義準) 등이 평양으로 이주했다. 현재 직계 혈통 자손으로 친손자 양철수(梁哲秀)가 있으며 북한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했다.


[1] 梁世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다.[2] 좨주공(祭酒公) 종중 20代孫, 병부공파 30世孫 (◯錫 항렬).[3] 음력 6월 5일. 용의조선인명부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참조.[4] #[5] 음력 8월 12일[6] 북한 당국이 시신을 안장한 곳이다.[7] 통일이 되면 이장을 위해 조성한 가묘이다.[8] #[9] 북한에 있는 것이 진짜 묘이며, 남한의 것은 허묘(墟墓)이다.[10]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단둥시 콴뎬만주족자치현(寬甸滿族自治縣).[11]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번시시 환런만주족자치현(桓仁滿族自治縣).[12]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만주족자치현(新賓滿族自治縣) 융링진(永陵鎭).[13]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만주족자치현(新賓滿族自治縣) 라오청촌(老城村).[14]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만주족자치현(新賓滿族自治縣) 훙먀오쯔향(紅廟子鄕) 쓰다오거우촌(四道溝村).[15] 6.25 전쟁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장, 3사단장으로 영덕 전투에서 북한군을 막아낸 이준식의 가명이다.[16] 박시백의 만화 35년(만화)에서는 눈을 부릅뜨고 "이 버러지들!"이라고 일갈한 직후 총에 맞아 절명하는 것으로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