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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 출생 | 1923년[1] 8월 26일 |
평안북도 강계군 시중면 외시천동 254 (現 자강도 시중군 시중읍) | |
사망 | 2011년 6월 7일 (향년 87세)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 |
본관 | 충주 김씨[2] |
학력 | 신의주고등보통학교 (졸업)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 (예과 / 중퇴) 국립중앙대학 문학원 (사학 / 석사 중퇴)[3] 국립타이완대학 문학원 (사학 / 석사 수료)[4] |
신체 | 178cm[5] |
직업 | 독립운동가, 교육인 |
종교 | 무교 |
가족 | 아내 민영주, 외동아들 김홍규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397호 |
서훈 |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중국어언문화우의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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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사학자, 교육자. 본관은 충주(忠州).초년기에는 중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 일원으로 활약했고, 이후 대한민국에서 중국사와 공산주의 연구에 평생을 바친 학자로 고려대학교의 영원한 총장이자 큰 스승으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2. 생애
<고대신문>에서 김준엽 총장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게재한 그의 생애2.1. 일제강점기
1923년 평안북도 강계군 시중면 외시천동 254번지(현 자강도 시중군 시중읍)에서 직조공장을 경영한 대지주 김종걸(金宗傑)과 모친 홍종식 사이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형제 많은 집의 막내아들이다 보니 부모님과 윗형제들로부터 많은 사랑과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선대는 조선 성종 때 이래로 평안북도 벽동군에 세거하였는데, 조부 김봉구(金鳳九) 대에 이르러 강계군으로 이주하여 살아왔다. 독립운동가였던 둘째 형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항일의식을 길렀다. 강계에서 소학교를 마친 뒤 1935년 신의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압록강 건너 안동을 자주 왔다갔다 했다. 김준엽이 중국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됐다.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 유학시절[6] |
1944년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 예과[7][8][9][10] 재학도중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었다.[11] 일본군으로 중국 장쑤성 쉬저우시에 배치된 뒤[12] 단독으로 탈영, 같은 조선인 출신 학병 장준하와 합류하여 수천 리를 걸어(장정, 長征) 충칭시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이때가 일제가 패망하기 몇 달 전. 이후 이범석 장군의 부관이 되는 등 광복군에서 활약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또한 장준하 등과 더불어 미국 첩보국(OSS: CIA의 전신)의 특수훈련을 받으며 임정근 등과 함께 강원도반에 편성되어 강원도반 반장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
광복군 시절의 모습[13] |
일부에선 실질적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한 게 거의 없다고 폄하 하지만,[14][15]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등 항일독립운동단체에 합류하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거는 일이다. 일본군에 걸리면 무조건 처형이고, 국민당이든 공산당이든 중국군에 잡혀도 일본 간첩으로 오인되면 죽은 목숨이다. 뭐 다행히 한복을 입으신 어머니와 찍은 사진 덕에 오해 없이 잘 끝났지만.[16][17][18] 이 사람은 탈출하기 위해 징집 전 나침반을 마련하여 갈 정도로 광복군에 합류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던 인물이다.
그가 탈출한 츠카다 부대는 조선인 탈영병이 나오지 않은 아주 혹독한 부대였는데, 김준엽은 그 부대에서 최초로 탈출에 성공한 조선인 병사였다.[19] 김준엽은 훗날 그의 회고록 "장정"에서 일본군 시절 작은 실수로 인해 상관으로부터 뺨을 맞은 후 상당한 모욕감을 느꼈다고 기술했다. 김준엽은 이 때가 태어나서 뺨을 처음으로 맞은 것이었다고 언급했다. 아마 일본군의 강제징용된 한국인 병사에 대한 차별적 대우와 가혹행위의 경험이 김준엽으로 하여금 츠카다 부대를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하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20]
광복군 시절 이범석의 부관으로 있으면서 이범석의 비서였던 민영주 여사와 만나 결혼한다. 두 사람의 결혼식 주례는 이범석이 맡았다. 민영주의 집안은 독립운동가 명문인데, 아버지 민필호는 임시정부에서 김구의 판공실장(비서실장)을 지냈고, 외할아버지는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신규식이다. 또한 민영주의 오빠 민영수도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21]. 김준엽은 이런 처가의 이력을 긍지로 여겼다.
2.2. 광복 이후
중국 국립동방어문전문학교 한국어 강사 시절. 앞줄 왼쪽에서 3번째가 아내 민영주, 4번째가 김준엽이다. |
또한 중국에 대해서도 생전에 깊이 연구하였고 중국에서도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중국통[28][29]으로 꼽힐 정도였다. 고려대학교에 중어중문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신설하기도 하였다.[30] 중국에서도 한중 관계에 대한 김준엽의 공로를 인정해 중국어언문화우의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가 훈장을 준 최초의 사례였다.
대외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1961년, 1962년, 1974년 세 차례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고, 5.16 이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31]의 고문 자격으로 외교사절단의 일원으로 인도를 방문하여 자와할랄 네루를 만나기도 했다. 1955년 대만에서 귀국한 이후에는 광복군 시절의 동지 장준하가 창간한 사상계의 주간을 맡기도 했다.
정계 진출 요청이나 장관 제의를 여러번 받았으나, 학자로서 후학 양성에 집중하겠다며 모두 고사한 바 있다. 박정희 정부 시절, 민주공화당 사무총장,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장관직을 제의받았으나 모두 사양했다.
이제 독립되어 건국사업이 전개되는 마당에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문화•사회•군사에 걸친 제반 건설사업이기 때문에 국민 각자가 자기의 적성에 맞는 일에 투신하여 최선을 다해야만 될 것이다.
『장정 2권』
『장정 2권』
1972년 11월, 대한적십자사 자문위원으로 평양을 방문하였다. 이때 북한에서 만난 김중린 당비서가 낯이 익어서 고향을 묻다가 신의주고보 1년 후배임을 알게 되어 회후하였다.
2.3. 고려대 총장 시절
취임식에서 연설하는 김준엽 |
1982년 김상협의 뒤를 이어 고려대 총장이 되었으나, 전두환 정권의 여러가지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사사건건 맞서다 결국 1985년 졸업식과 함께 강제로 퇴임하게 된다. 총장이었을 때의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하 CBS 기사 참조.
1) 하루는 학교 서무과에 노인 한 분이 방문해 "실례합니다"라고 인사하며 서무과 직원에게 뭘 부탁하려고 했다. 서무과 직원이 달갑잖은 표정을 지으며 "죄송하지만 지금 신임 김준엽 총장 취임식이 있어 저희가 정신이 없어요."라고 응답했다. 그 때 그 노인이 "그러시군요, 제가 그 김준엽입니다"라고 대답하는 통에 학교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총장 취임을 그렇게 하신 양반이다.
2) 1983년 가을, 고려대생 수백 명이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학생회관으로 들어가 출입문을 걸어 잠그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농성에 들어갔다.[32] 언제 경찰이 들이닥쳐 연행해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두렵고 배고픈 밤이 깊어 가는데 30분마다 김준엽이 확성기로 외쳤다. "다치거나 아픈 학생 있으면 내보내라. 앰블런스가 대기하고 있어 바로 병원에 데려갈 것이니 걱정 말고 내보내라. 학생 제군 몸을 다치지 마라." 학생들은 총장이 자기들을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에 감격하며 밤을 지샜고, 역시 밖에서 밤을 지샌 김 총장은 경찰과 교섭을 벌여 다음날 아침 학생 5백 여 명이 학생회관에서 자진 철수해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 전두환 정권 시절 연행자 없이 끝난 유일한 시위농성이었다.
3) 이듬해인 1984년 가을,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이라는 관변어용 학생회를 없애고 총학생회를 부활시켰다. 이에 대응해 정권은 학생회 간부들을 제적시키라고 종용했으나 김준엽이 버티며 움직이지 않았고 다른 대학들은 고려대를 지켜보며 눈치만 살폈다. 이후 11월에는 대학생들의 민정당사 점거농성이 벌어졌는데, 이때도 학생들을 제적시키라는 정권의 압박에 끝내 학생들을 지키며 버티다 정권의 미움을 샀다. 이 때 학생들 처리 문제를 밤 늦도록 논의하다 교수들이 저녁식사를 하려는데 '제적이면 학생으로선 사망선고인데 제자들의 죽음의 위기 앞에서 밥이 넘어가냐'며 호통치고 끝내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4) 결국 전두환 정권은 학생이 아니라 김준엽을 자르기로 하고 압박을 가했다. 당시 대학에서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교수 등 교직원 자녀의 특례 입학을 문제로 삼으면서 '특례로 입학한 학생들을 제적시키든지, 아니면 총장을 그만두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었다. 결국 김준엽은 자신이 총장을 그만두는 쪽을 택했다. 1985년 2월 졸업식 축사를 끝으로 김준엽은 강압에 의해 학교를 떠났다. 다른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쫓겨나고 고려대에서는 총장이 쫓겨나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진 것. 졸업식 당일날은 총장 퇴진을 반대하는 학생들이 "총장님 힘내세요"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졸업식 한쪽에 진을 치고 있었고, 이로 인해 경찰이 학내에 진주해서 기기묘묘한 진풍경이 벌어졌다(...). 1985년 신학기가 개강하자마자 총장퇴진 반대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항의시위가 대대적으로 계속됐는데, 기숙사 수위의 강아지까지 따라 나섰다고 전해질 정도로 크게 벌어졌다. 당시의 시위는 대개 학생들이 경찰에게 쫓기는 것이었는데, 이때는 경찰이 학생들에게 밀리는 정도였다고(...). 훗날 김준엽은 이를 자신의 최고 자랑스러운 일로 꼽았다. "총장 물러가라"는 데모는 많았어도 물러나지 말라는 데모는 나밖에 없었다라고.[33][34]
2) 1983년 가을, 고려대생 수백 명이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학생회관으로 들어가 출입문을 걸어 잠그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농성에 들어갔다.[32] 언제 경찰이 들이닥쳐 연행해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두렵고 배고픈 밤이 깊어 가는데 30분마다 김준엽이 확성기로 외쳤다. "다치거나 아픈 학생 있으면 내보내라. 앰블런스가 대기하고 있어 바로 병원에 데려갈 것이니 걱정 말고 내보내라. 학생 제군 몸을 다치지 마라." 학생들은 총장이 자기들을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에 감격하며 밤을 지샜고, 역시 밖에서 밤을 지샌 김 총장은 경찰과 교섭을 벌여 다음날 아침 학생 5백 여 명이 학생회관에서 자진 철수해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 전두환 정권 시절 연행자 없이 끝난 유일한 시위농성이었다.
3) 이듬해인 1984년 가을,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이라는 관변어용 학생회를 없애고 총학생회를 부활시켰다. 이에 대응해 정권은 학생회 간부들을 제적시키라고 종용했으나 김준엽이 버티며 움직이지 않았고 다른 대학들은 고려대를 지켜보며 눈치만 살폈다. 이후 11월에는 대학생들의 민정당사 점거농성이 벌어졌는데, 이때도 학생들을 제적시키라는 정권의 압박에 끝내 학생들을 지키며 버티다 정권의 미움을 샀다. 이 때 학생들 처리 문제를 밤 늦도록 논의하다 교수들이 저녁식사를 하려는데 '제적이면 학생으로선 사망선고인데 제자들의 죽음의 위기 앞에서 밥이 넘어가냐'며 호통치고 끝내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4) 결국 전두환 정권은 학생이 아니라 김준엽을 자르기로 하고 압박을 가했다. 당시 대학에서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교수 등 교직원 자녀의 특례 입학을 문제로 삼으면서 '특례로 입학한 학생들을 제적시키든지, 아니면 총장을 그만두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었다. 결국 김준엽은 자신이 총장을 그만두는 쪽을 택했다. 1985년 2월 졸업식 축사를 끝으로 김준엽은 강압에 의해 학교를 떠났다. 다른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쫓겨나고 고려대에서는 총장이 쫓겨나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진 것. 졸업식 당일날은 총장 퇴진을 반대하는 학생들이 "총장님 힘내세요"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졸업식 한쪽에 진을 치고 있었고, 이로 인해 경찰이 학내에 진주해서 기기묘묘한 진풍경이 벌어졌다(...). 1985년 신학기가 개강하자마자 총장퇴진 반대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항의시위가 대대적으로 계속됐는데, 기숙사 수위의 강아지까지 따라 나섰다고 전해질 정도로 크게 벌어졌다. 당시의 시위는 대개 학생들이 경찰에게 쫓기는 것이었는데, 이때는 경찰이 학생들에게 밀리는 정도였다고(...). 훗날 김준엽은 이를 자신의 최고 자랑스러운 일로 꼽았다. "총장 물러가라"는 데모는 많았어도 물러나지 말라는 데모는 나밖에 없었다라고.[33][34]
졸업식에서 총장사임 반대데모 |
2.4. 말년
1987년 대한민국 헌법의 9차 개헌 때 처음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 는 문구를 헌법 전문에 포함시키는 공훈을 세웠다. 제헌 헌법 이후로는 3.1 운동이나 4.19 혁명 정도가 언급되었을 뿐 임정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었던 것인데, 뒤늦게나마 대한민국이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다시 공인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중수교가 이루어진 이후에는 아직 상하이에 묻혀있던 임정 요인들의 유해를 국내로 모셔오는데도 힘썼으며,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활약했던 중국 유적지도 복원하는 데 기여를 했다. 그 밖에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본인에게 정부 요직 제의를 하던 YS에게 빨리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해서 민족 정기부터 바로 세우라고 요청을 하기도 했다.학자로서의 자존심 또한 꿋꿋히 지킨 분으로서,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40여 년 동안 2번의 총리직을 포함한 총 12번의 입각 제의를 거절했다. 그 거절 이유로 "모든 사람들이 다 입각을 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하나 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려대학교 총장이 총리보다 높은 자리인데, 총장 하다가 어떻게 총리가 되나."라고 말하여 고대생들의 애교심, 자부심을 높였다. 특히 노태우 정부의 총리직 제의에는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을 맡게 되는 전두환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다. 국민들, 특히 젊은층이 실망할 것이다. 게다가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제자들이 많은데 스승이라는 자가 그 정부의 총리가 될 수 없다." 며 고사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는 본인의 회고록인 <장정>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 외에도 몇 가지 입각 거절 이유가 더 나와 있다.[35][36][37]
총장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회고록 <장정>을 집필하고, 연구에 몰두하였다. <장정>은 일본 징집병 탈출 및 광복군 시절을 다룬 1/2권, 고려대 총장 시절을 다룬 3권, 총장 퇴임 이후(1980년대 후반까지)를 다룬 4권, 중간에 빠졌던 평교수 시절 및 1990년대 이후를 다룬 5권으로 나뉘어 있다. 위 사진에는 5권이 빠져 있다. 한국근현대사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읽어보자. 저자 스스로가 직접 겪은 경험기뿐만 아니라, 당시의 신문기사나 여러 자료들을 함께 수록했는데, 후배 사학도를 위해 연구와 교육용으로 쓰일 수 있도록 편집하셨다고 한다. 주례를 부탁받았을 때 자신도 늙었다는 것을 체감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2011년 6월 7일 별세했다. 사망 몇주 전에 하도 몸이 안 좋아서 그냥 링거 맞으러 병원 갔더니 1~2주의 최말기 시한부 폐암이었다고... 그의 대부분의 사진들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 모습들이 많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살아생전에 골초이자 주당이었는데,[38] 그것이 결국 화근이 되었던 것.[39] 부음을 알리는 고대신문에 수록된 사진도 연초 한 개비를 들고 미소짓는 모습이었다.
생전에 이미 광복군 시절의 공로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은 데 이어, 타계 직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장례 후 6월 1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안장되었다.
고대 안암병원 장례식장 빈소 | 국립대전현충원 하관식 |
3. 기타
그의 타계 당시 고려대학교에서는 학교장을 치르지 않았다. 이를 두고 '김준엽과 이사회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랬던 것 아니냐는 추측도 있었지만, 사실이 아니다. 고인이 별세하기 약 반년 전, 2010년 11월에 김준엽 구순 기념에서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의 봉정식이 있었을 때 고려대의 전현직 총장을 비롯, 사학과, 한국사학과 등의 각계 교수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당시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이자 한국사학과 명예교수, 김준엽 선생의 사학과 제자였던 김정배도 포함되어 있었다.2012년 6월 고려대에서는 김준엽 전 총장 서거 1주기를 기리는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2023년 8월 25일부터, 약 1주일 동안 고려대에서 여러 기념 행사가 열렸다. 그의 고려대 총장 재임 시절 재학생이었던 이진한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장, 김영춘 전 국회의원 등이 기념 사업을 주도한다.
생전에 장준하의 생애 관련으로 인터뷰를 많이 받았는데 그는 "나도 중국 땅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했는데, 사람들이 찾아와 내가 뭘 했는지 물어보지 않고 장준하만 물어보더라" 라고 서운해하기도 했다.
선생은 초년기에 독립군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였지만, 광복 이후 현실 문제에 참여하기 보다는 학자 본연의 길에 충실했다. 그래서인지 생전에는 대중적 인지도가 낮은 편이었다.[40] 하지만 오늘날에는 대한민국의 수립, 발전을 위해 일생을 교육에 투신하여 역사에 남는 길을 선택했고, 이러한 점이 인정받으면서 정파와 이념을 초월하여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인물이자 스승으로 평가되고 있다.
동명이인으로 K리그에서 뛰고있는 김준엽 선수가 있는데 그의 부친이 김준엽 선생의 일대기를 읽고 깊이 감명 받아 아들의 이름을 똑같이 지었다고 한다. [41]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강장자 역을 맡았던 배우 김성옥이 이 사람의 고려대학교 사학과 평교수시절 가르쳤던 제자였다고 한다. 김준엽 본인도 회고록 <장정>에 손숙, 김성옥 부부와의 두터운 친분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기도 했다.
본인의 회고록 <장정>에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는 내용이지만 절친 최기일의 회고록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에 따르면 김준엽은 굉장한 할리우드 영화광이었다고 한다. 최기일은 김준엽과 같이 신의주고등보통학교와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같이 수학한 사이인데다가 신의주고보시절에 삼총사라고 불릴 정도로 가까웠던 절친이라 학창시절의 김준엽의 면모에 대해 자세히 증언했는데, 김준엽은 교칙도 거의 어기지 않는 모범생이었지만 영화를 볼 때만큼은 교칙을 어겨서 자동차 정비공으로 변장하고 극장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42] 할리우드 영화광이었던만큼 미국 영화 잡지도 자주 사서 읽었으며, 미국의 압도적인 영화제작 기술력에 대해 감탄하면서 태평양 전쟁 당시 대본영에서 연일 자기들이 연전연승하고 있다는 거짓선전을 계속하던 때에도 그동안 할리우드 영화를 많이 본 경험에 입각해서 일본은 미국이랑 붙으면 국력의 차이때문에 분명히 질 거라고 자주 예측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4. 관련 다큐 영상물
[1] 김준엽 본인은 생전에 본인을 1920년생이라고 소개했고 이전문서에도 1920년생으로 기재되어있었지만, 일본군 학병으로 징집될 당시 작성된 육군전시명부에는 다이쇼 12년생, 즉 1923년생으로 기재되어있다. 이후 김준엽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을 주관하는 이진한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원장도 육군전시명부에 기재된 생년월일이 더 정확하다고 판단하고 2023년 8월에 기념사업을 진행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김준엽 본인이 직접 일기장에 본인은 1923년생이라고 쓴 흔적이 발견된 상태.#[2] #[3]
이 학교의 후신인 난징대학 도서관 홈페이지 측 자료에서는 중앙대학 역사연구소("国立中央大学学籍表--历史研究所") 소속이라고 뜬다. 현재 중국에서는 대학원에 해당되는 기관을 연구생원(研究生院)이라고 부르고, 연구소(研究所)라는 호칭은 대만에서 주로 쓰고있는데 난징대 사료에도 연구소라고 기재되어있는 것을 보았을 때 국부천대 이전 중국에서도 종종 써온 호칭인 듯 하다.[4] 2023년 8월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서 고려대학교박물관에 새로 기증되어서 공개된 김준엽의 국립타이완대학 성적표에 따르면, 소속은 문학연구소 사학부(文學研究所 史學部)이고, 학번은 R401302이라고 나와있다. 김준엽 본인은 살아생전에 연구교수 자격으로 국립타이완대학 연구원에서 유학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원래 대만에서는 한국, 일본과는 다르게 대학원을 연구소(硏究所)라 칭하고 학번이 R자로 시작하는 걸 보았을 때 실제로는 국립타이완대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고 봐야한다. 하지만 석사학위를 취득했다고 생전에 본인이 얘기를 꺼낸 적이 없는데다 국립타이완대학 역사학계 석사논문목록에 김준엽의 이름으로 쓰여진 논문은 없다는 점, 고려대학교 사이트의 역대총장을 소개하는 페이지에서도 학력이 1955 국립대만대 역사연구소 수료라고 기재되어있다는 점을 보았을 때 석사 학위를 취득하지 않고 수료만 한 걸로 보인다.[5] 장준하 보다 더 크다.[6]
착용하고 있는 학생모에 게이오기주쿠대학의 상징인 펜마크가 붙어있다.[7] 김준엽 본인은 살아생전에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동양사학과를 전공했다고 주장했지만, 김준엽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서 고려대학교 측이 공개한 게이오기주쿠대학 학생증에 따르면 1943년 4월 1일 문학부 예과3학년1학년[43] A반에 재학 중이었다고 기재되어있다.# 이 당시 일본의 대학에서는 세부적인 전공학과는 예과 수료이후 학부로 진학하고나서야 정하고 대학예과나 구제고 시절에는 문과/이과 전공 여부만 결정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문학부 동양사학과 소속이 아닌 문학부 예과 소속이라고 보는게 맞다. 참고로 게이오기주쿠대학의 경우 구제고나 다른 사립대 예과와 달리 예과시절부터 전공학부(문학부, 경제학부, 법학부, 의학부)는 결정하지만 전공학과는 학부로 진학하고나서 결정되는 시스템으로 굴러갔고, 문/이과 갑을병류로 운영된 구제고와 타 대학 예과와 수업 커리큘럼은 별 차이가 없었다.[8] 다만 한가지 특이한 점은 입학년도인 1943년 4월을 기점으로 이미 예과 3학년이라고 학생증에 기재되어있다는 것.[9] 다만 실제로 그 당시 3학년이었다면 소지한 학생증의 유효기간이 1943년 4월부터 1943년 9월까지로만 찍혀있어야하는데(카미카제로 희생당한 우에하라 료지(上原良司)의 학생증에는 실제로 이렇게 찍혀져있다) 김준엽의 학생증의 경우 1943년 4월부터 1944년 3월까지라고 찍혀있다. 1943년 9월까지만 찍혀있어야하는 이유는 이 당시 태평양전쟁으로 인한 전시체제때문에 대학 학제가 기존의 3년제에서 2년 6개월제로 단축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즉, 사실은 학적부의 기록대로 원래는 1학년이 맞는데 인위적으로 학생증에 손을 대어 한 일(一) 자에다가 짝대기 2개를 더 그어 석 삼(三) 자로 만들어 마치 3학년인 것처럼 꾸며적은 것. 이왕 더 꾸며적을거면 유효기간에도 손을 댔어야했는데[10] 그리고 1941년과 1942년에 발간된 게이오기주쿠대학총람과 예과생명부 1,2학년 명단과 에 김준엽의 이름이 기재되어있지 않은 상태이다.[11] 이후 게이오기주쿠대학으로 복학하지 않았기 때문에 졸업을 하지못했다.[12] 일본군 육군전시명부에 따르면 김준엽은 쉬저우에 배치된 중지나파견군 제13군 제65사단 독립보병 제58대대에 소속되어있던 보병 초년병이라고 기록되어있다.[13] 왼쪽부터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14] 당시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독자적인 기반 없이 장개석의 중국국민당 정부에 얹혀 살면서 1930년대 중반 이후 실질적 활동이 없었다는 점은 애석한 사실이다. 이 점은 일본군과 싸우겠다면서 화북으로 떠난 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대)의 활동과도 비교되는 대목이다. 당시 중국 공산당과 손잡고 활동하던 조선의용대조차 해방 이후에는 남북 모두에서 외면당했지만...[15] 충칭시의 광복군에 최종적으로 합류하기 전에 잠시 쉬저우에서 중국 국민당군 유격대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국민당군들한테 중국어를 배워가면서 이들의 일본어 통역도 전담해줬고 나중에 충칭시로 향하면서 수천 리를 걸어갈 때도 국민당군들에게 길안내를 받으면서 도움을 받았다.[16] 1900년대부터 먹고 살기 위해, 독립운동을 위해 많은 한민족이 중국과 만주지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국민당/공산당/일본군/군벌 등 여러 세력이 다투는 혼란 속에서 한민족이 억울하게 희생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17] 탈영 도중 국민당군에게 포획될 당시 이들은 왕징웨이 정권의 군대으로 위장한 채로 나타난 바람에 김준엽 본인은 왕정위군에게 사로잡힌 줄 알고 모든게 다 망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이들은 국민당군이었고 심문을 마친 뒤 김준엽에게 직접 붓으로 환영한국혁명지사라고 써 주고 본인들의 정체를 밝힌 후에야 김준엽은 그제서야 탈출에 성공했다고 확신하고 안심하게 된다. 그야말로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왔다갔다한 셈. 거의 만우절급 깜놀쇼[18] 그리고 김준엽의 경우 운이 굉장히 좋게도 포로취급을 당하다시피 한 다른 탈출병들과 다르게 국민당 유격대 대원들로부터 엄청난 우대를 받아서 사실상 탈출에 성공하고나서 팔자가 피기도 했다. 김준엽의 회고에 의하면 본인을 포획한 유격대의 경우 베이징대학출신 대학생이 있는가 하면 중앙군관학교에서 정규군사교육을 받고 국민혁명군 정예부대의 일원으로서 쉬저우전투와 타이얼좡전투에도 참전했던 경험을 가진 군인들도 여럿 되었던 이 당시 중국 기준으로 엄청난 고급 교육을 받은 인텔리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똑같이 대학물 먹은 인텔리였던 김준엽에게 동질감을 느끼면서 굉장히 호의적으로 대해줬으며, 심지어 일본군으로부터 중국군 포로와 김준엽을 교환하자고 제의가 왔을때도 이를 거절해 김준엽을 계속 보호해주기까지도 했다. 당연히 일본이 포로 교환을 제안한 이유는 김준엽을 잡아가기 위함이었으니, 만약 이때 중국군이 거래에 응했다면 지금의 민족 스승, 고대 최고의 총장 김준엽은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었다.[19] 당시 김준엽이 탈영할 때만 하더라도 소속 부대가 대륙타통작전 준비에 한참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다소 경계가 소홀했던 편이었다. 사실 이 소홀한 경계덕분에 김준엽이 성공적으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고. 여기에 김준엽이 한참 탈출하고나서 장준하가 속해있던 제65사단 치중병부대에서 조선인 학병들이 연달아서 탈출을 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 때부터 부대 분위기가 매우 가혹해진 것이다. 심지어 일본군측에서는 조선인 학병들에게 "탈출한 조선인 김준엽은 팔로군에게 붙잡혀 죽창에 찔려 죽었다."라는 거짓선전까지 하며 탈출 시도를 저지하려 애썼다.[20] 회고록 <장정>에 따르면 츠카다 부대는 사격 훈련을 한 답시고 근처를 지나가는 중국인 민간인들에게 총을 난사하기 일쑤였고, 검술 훈련을 할 땐 중국군 포로들을 데려다가 직접 찔러서 죽이는 훈련을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김준엽은 이러한 일본군의 행태에 치를 떨었다.[21] 김준엽과 민영수도 독립군으로써 한솥밥을 먹은 적이 있으며, 또한 민영수의 여동생 민영주가 김준엽과 결혼하면서 김준엽과 민영수는 손위처남과 매부 지간이 되었다.[22] 국공내전 이후 베이징대학으로 통합된다.[23] 국공내전 이후 난징대학과 동남대학의 일부로 쪼개지며 대만의 국립중앙대학또한 이 학교의 후신을 자처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前 주석 장쩌민이 이 학교에 재학했다가 도중에 상하이교통대학으로 편입했다.[24] 귀국하는 과정에서 본인이 동방어전에서 가르친 중국인 제자 3명을 데리고 와 서울대학교에 유학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중국인 제자들은 안타깝게도 훗날 문혁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래도 이 중국인 제자중 한명인 양통방(楊通方)은 문화대혁명 이후 학계로 다시 복귀하는데 성공하고, 베이징대학 외국어학원 조선어과 교수를 역임하면서 중국 내에서 한국학 연구의 선구자가 되기도 했다.[25] 당시 국립대만대학에서 신문화운동의 주역이었던 후스의 강의를 수강했다고 한다.[26] 다만 정작 김준엽 본인은 중국 쉬저우에서 일본군으로부터 탈영한 이후 중국 국민당군 유격대의 일원으로 잠시 활동하던 시절 공산당 신사군의 팀킬로 목숨을 잃을뻔 한적이 있어 공산주의에 대해 호의적이진 않았다. 같이 팀킬을 겪었던 친구 장준하는 아예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어버린 것은 덤. 사실 김준엽도 냉전 시기에는 한국반공연맹 기관지에 반공을 호소하는 글을 개재하는가하면 타이페이에서 개최된 아주반공대회의 한국대표단 자격으로 참석하는등 그냥 전형적인 남한의 반공주의 지식인이었다. 애초부터 출신이 고향인 이북에서 모든걸 잃고 간신히 월남해서 정착한 실향민이라 반공주의 성향을 띄는건 당연할지도. 그래도 다른 반공주의자들과 달리 공산주의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이는가 하면,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독립운동에 기여를 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해방 이후 북한 정권에 협조한 이들이 아니라면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이들의 공에 대해 높게 치하해줘다고 주장하였고, 김일성에 대해서는 그냥 독재자에 불과할 뿐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92년 한중수교에도 굉장히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에 대해 굉장히 높게 평가하는 등 탈냉전과 민주화를 맞이한 후에는 공산권 국가들과의 교류도 매우 중시하는 성향을 띄기도 했다. 다만 1972년 닉슨이 중국을 방문할 땐 오히려 중공이 강대국으로 나아갈 속셈과 음모를 숨기고 미국과 만남을 가진다는 식으로 혹평을 가하기도 했다.[27] 당시 아세아문제연구소에 김창순 북한연구소 이사장이 재직하는 등 반공 성향을 띄었다.그는 6.25 전쟁 전까지 북한의 신문사인민주조선의 총무국장을 지냈으나 반공주의자로 몰려 북한 당국에 체포되어 후송 중에 기차에서 뛰어내려 월남해 같은 실향민인 김준엽과 함께 북한 연구와 공산주의 연구에 헌신했다. 둘의 공저인 “한국공산주의운동사”는 최초의 국내 공산주의 연구 서적으로서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책 발간 이전에는 군사독재 시절의 이념적 제약으로 인해 일본과 미국에서 주로 공산주의 연구를 했다[28] 92년 수교 이후 최초로 중국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수훈하기도 하였다.[29] 본인 스스로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등등 중국의 굵직한 현대사를 경험해 본 증인이기도 했고, 처가 역시 장제스의 국민 정부과 인연이 있었다. 더 거슬러올라가면 장인 민필호의 장인 신규식은 쑨원의 신해혁명에도 가담하기도 했다.[30] 우리나라 최초의 중어중문학과는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1946)이다.[31] 다만 이 당시 김준엽이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고문자격으로 참여했을 땐 아직 박정희를 비롯한 군부가 민정이양을 약속하겠다고 발표했었을 때였고, 김준엽의 회고록 <장정>에 따르면 이 당시 외교사찰단의 자격으로 여러 나라를 방문했을 때 수 많은 나라의 정부들로부터 하루 빨리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민정 이양을 했으면 좋겠다는 답변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32] 그해 가을 전두환 정권은 매년 성황리에 열린 연세대와의 양교 정기전이 시위의 계기가 될 것을 두려워해 취소시켰고, 고대생들이 이에 항의하면서 벌어졌다.[33] 독립군 출신의 유명한 독립운동가이자 권위있는 학자가 명문대 총장을 맡고 있으니 독재 정권도 어찌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정부가 학생들을 퇴학시키겠다는 명목으로 협박하는 데에는 어쩔 수 없었다.[34] 다만 총장 퇴임 이후에는 여러 번 요시찰을 당하기도 했고, 본인이 직접 세운 아연 사무소에도 출근도 못하게 되는 등 학교 측으로부터 여러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는 한다. 요시찰의 경우 본인의 사생활에 일체 흠이 없어서 무사히 넘어가긴 했다고 한다.[35] 노태우 당선 후 그와 2시간 동안 회동에 대한 기사. #[36] 이후 YS, DJ에게도 정부 요직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거절했다. 특히 YS에게 제의를 받을 당시에는 본인이 몸담았던 고려대의 제자들인 김영춘(YS의 비서)과 김현철(YS의 아들)까지 찾아와서 옛 스승인 본인에게 읍소하는 바람에 많이 난감했었다고 한다.[37] 김영춘은 김준엽 총장 시절에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이기도 했다. 정부에서 김영춘을 제적하라고 압박을 가했으나 김준엽은 이에 응하지 않고 김영춘을 보호하는데 애써줬고, 이것 때문에 총장 사퇴 압박을 받았다. 이러한 인연 덕분에 김영춘과 김준엽은 서로 각별했던 사이라 매년 새해마다 김영춘은 명륜동에 있는 김준엽의 저택에 방문해서 문안인사를 드렸다고 한다. 김준엽 또한 본인의 회고록 장정에서 김영춘은 본인이 굉장히 아꼈던 고려대 제자 중 한 명이었다고 서술했다. 훗날 김영춘은 2023년 8월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주관하는 김준엽 탄생100주년 기념사업의 자문위원장이 되어 김준엽 관련 기념사업을 이끌어나가게 되었다.[38] 독립군 시절에는 술만 할 줄 알고 담배는 입에 대지 않았으나, 고려대 총장 시절 정부의 외압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겪게 되면서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 근데 워낙 담배가 입에 잘 맞은 탓에(…) 정권의 외압에서 자유로워진 이후에도 하루에 일곱, 여덟 개비씩 피었으며 심지어 언론사와의 인터뷰할 때도 담배를 피면서 인터뷰를 했을 정도. 고려대 총장 시절에는 하루에 무려 세 갑씩이나 피었다고 한다.[39] 그래도 90살 가까이 살았으니 확실히 장수했다. 본인의 장수 비결로 규칙적인 수면 패턴과 매일 하루에 무조건 물을 마시는 습관을 꼽았다. 물은 독립군 시절 거의 마시지 못한 탓에 신장에 결석이 생겨 아예 신장 한 쪽을 제거하는 수술까지 받아 그 뒤로 빠지지 않고 계속 마셨다고.[40] 그래도 80년대 대학을 다녔던 386 운동권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전두환에게 맞서면서 본인들을 보호해준 정의로운 고려대 총장으로서의 이미지로 유명하긴 했다.[41] 참고로 동생의 이름은 장준하 선생에게서 따와 준하라고 지었다.[42] 오늘날 관점에서 봤을 때 학생이 극장에 가는 걸 문제삼는게 이상하지만 불과 60~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중고등학생이 극장과 다방에 가는 것이 금지되어 학생들이 가는지 그 주변에서 교사들이 사복경찰처럼 감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학교의 후신인 난징대학 도서관 홈페이지 측 자료에서는 중앙대학 역사연구소("国立中央大学学籍表--历史研究所") 소속이라고 뜬다. 현재 중국에서는 대학원에 해당되는 기관을 연구생원(研究生院)이라고 부르고, 연구소(研究所)라는 호칭은 대만에서 주로 쓰고있는데 난징대 사료에도 연구소라고 기재되어있는 것을 보았을 때 국부천대 이전 중국에서도 종종 써온 호칭인 듯 하다.[4] 2023년 8월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서 고려대학교박물관에 새로 기증되어서 공개된 김준엽의 국립타이완대학 성적표에 따르면, 소속은 문학연구소 사학부(文學研究所 史學部)이고, 학번은 R401302이라고 나와있다. 김준엽 본인은 살아생전에 연구교수 자격으로 국립타이완대학 연구원에서 유학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원래 대만에서는 한국, 일본과는 다르게 대학원을 연구소(硏究所)라 칭하고 학번이 R자로 시작하는 걸 보았을 때 실제로는 국립타이완대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고 봐야한다. 하지만 석사학위를 취득했다고 생전에 본인이 얘기를 꺼낸 적이 없는데다 국립타이완대학 역사학계 석사논문목록에 김준엽의 이름으로 쓰여진 논문은 없다는 점, 고려대학교 사이트의 역대총장을 소개하는 페이지에서도 학력이 1955 국립대만대 역사연구소 수료라고 기재되어있다는 점을 보았을 때 석사 학위를 취득하지 않고 수료만 한 걸로 보인다.[5] 장준하 보다 더 크다.[6]
착용하고 있는 학생모에 게이오기주쿠대학의 상징인 펜마크가 붙어있다.[7] 김준엽 본인은 살아생전에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동양사학과를 전공했다고 주장했지만, 김준엽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서 고려대학교 측이 공개한 게이오기주쿠대학 학생증에 따르면 1943년 4월 1일 문학부 예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