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2-18 03:09:31

김동식(1899)

파일:김동식2.jpg
성명 김동식(金東植)
이명 김유신(金攸信)
생몰 1899년 3월 21일 ~ 1989년 4월 28일
출생지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 월하리
사망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1동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김동식은 1899년 3월 21일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 월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1 운동에 감화되어 독립단에 가입했고, 1920년 3월 백운기(白雲起)·안효준(安孝俊) 등과 함께 대한청년결사대원으로서 의주군 비현면 정산동에 거주하는 김대호에게서 군자금으로 현금 40원을 받아냈다. 이후 5월 말까지 의주, 용천, 철산, 선천 등 10개면 내에서 군자금 3천원을 각출했으며, 김시황(金時晄)·박초식·백운기(白雲起) 등과 함께 보합단(普合團)을 의주 동암산(東岩山)에서 조직해 총무로서 활동했다.

한편 독립단과도 계속 연락을 취하여 무기를 구입, 적 기관 파괴와 주구 숙청에 힘을 쏟았으며, 1920년 6월에 부원 30명을 이끌고 부역배 수 명을 사살했다. 선천군 내산사에 잠적했을 때는 승려의 밀고로 일본 경찰 30여 명과 교전한 후 퇴각하기도 했고, 1920년 11월 서울에 파견된 김도원이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체포되자 장희원(張喜源)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쑨원의 소개로 황포군관학교에 취학했다. 그러나 천중밍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학업을 끝까지 이루지 못하고 낙양강무당(洛陽講武堂)에서 수업하던 중 직봉전쟁에 참가해 우페이푸의 참모를 맡기도 했다.

1924년 중국 육군 중위 교관으로 임명되어 한인 청년 30여 명을 독립군으로 양성했으며, 1937년 이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따라 전전하다가 홍콩에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태평양 전쟁 발발 후에는 은신했다. 8.15 광복 후 국내로 귀환하여 서울 서대문구 홍제1동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89년 4월 2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동식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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