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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호 | 국경(國卿) / 정산(貞山)·석포(石圃) |
출생 | 1867년 1월 8일 |
경상도 순흥도호부 도강면 상석리 (현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상석1리 도탄마을)[1] | |
사망 | 1952년 12월 22일 (향년 85세) |
경상북도 영주군 | |
본관 | 예안 김씨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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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김동진은 1867년 1월 8일 경상도 순흥도호부 도강면 상석리[2]에서 아버지 김헌규(金獻奎)와 어머니 안동 권씨 권구연(權九淵)의 딸 사이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884년(고종 21) 봉화 유곡의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권연하의 추천으로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이후 그는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고향에서 은거하며 자제들을 가르치고 학문을 닦으며 유학자로서 본분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1914년 5월 임병찬이 이끄는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의 대일(對日) 국권반환 요구 운동에 가담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20여 일 동안 구류되어 취조를 받았지만, 유림이 조선 사회의 존경을 받고 있는 걸 알고 있던 일제는 사건을 확대시켜봐야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무혐의로 방면시켰다.
그후 1919년 3월 곽종석, 김창숙, 장석영, 김복한을 위시한 유림 대표 137인의 일원으로 독립청원을 위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하였다가 일경에 붙잡혀 가혹한 고문을 받고 40여 일간 투옥되었으며, 1925년 음력 10월 초순경 경상남북도 일대의 부호들을 상대로 군자금을 거두워 내몽고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하려고 비밀리에 입국한 김창숙의 부탁을 받아들여 영주, 안동, 봉화 3개군 지역에서 모금 책임을 맡은 정수기(鄭守基)의 활동을 도와줬다. 이 일이 경찰에 발각되면서, 그는 10여 일간 취조를 받으며 고초를 겪었다.
그 후 김동진은 도강서당에서 80여 명의 학생들에게 한학을 가르쳤고 일제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상투 유지, 한복 착용 등을 고집했고 창씨개명 또한 받아들이지 않아 요시찰 인물로 간주되어 수시로 감시당했다. 8.15 해방 후에도 영주 일대의 유림으로서 후진 양성에 노력했고, 1952년 12월 2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김동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