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2-14 02:15:46

노진룡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경의(景義) / 성재(誠齋)
본관 함평 노씨[1]
출생 1894년 11월 6일
전라도 흥덕현 이동면 신월리
(현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대흥리 신월마을)[2]
사망 1950년 8월 27일
전라북도 고창군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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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노병희는 그의 조부이다.

2. 생애

노진룡은 1894년 11월 6일 전라도 흥덕현 이동면 신월리(현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대흥리 신월마을)에서 아버지 노형숙(魯炯塾, 1874. 7. 10 ~ 1905. 2. 29)과 어머니 청도 김씨(1873. 2. 15 ~ 1947. 11. 15) 김수남(金秀南)의 딸 사이의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노형숙은 1902년 10월 상공학교 교관(商工學校敎官)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두 달만인 그해 12월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그는 1919년 말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파견된 이종욱(李鍾郁)이 설치한 임시총판부(臨時總辦府)에 가담하여 전북감독부(全北監督府)를 조직하고 감독에 취임하였으며, 부감독에 오의균(吳毅均), 재무원에 이휴열(李烋烈), 황종관(黃鍾寬), 고문에 강대직(姜大直), 이석열(李錫烈), 나홍균(羅鴻均), 이종택(李鍾澤) 등을 임명하고 군자금 모집, 격문 살포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

이후 1922년 5월에 노진문(魯鎭文), 김성균(金聲均) 등과 함께 전라북도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했다. 그러나 얼마 후 경찰에 체포되었고, 1923년 3월 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창군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50년 8월 27일에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노진룡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 기타

  • 2018년 8월 13일, 고창군은 고창군 관내 독립유공자 유족을 찾아 위문품을 전달했다. 이때 노진룡의 딸 노영복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 2019년 2월 28일, 고창군은 고창 출신 독립유공자 유족들에게 명패 및 격려품을 전달했다. 그 중에는 노진룡의 자녀도 있었다.#

[1] 성내종중(星內宗中) 29세 진(鎭) 항렬.[2] 함평 노씨가 1590년대에 개척한 마을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