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6-09-02 03:06:09

배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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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2월 1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배홍길(裵洪吉)
자 의현(義現)
호 고파(高波)[1]
출생 1890년 2월 17일[2]
경상도 김해도호부 하북면 안하리
(現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안하리 어은마을)[3]
사망 1942년 5월 20일 (향년 53세)
전라남도 무안군 이로면 산정리 목포형무소
(현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목포시 산정동)[4]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153호
본관 분성 배씨 (盆城 裵氏)[5]
학력 김해 사립육영학교[6] (졸업)
사립목포영흥학교[7] (보통과 / 졸업)
경성부 대성학교 (전학)
사립목포영흥학교 (고등과 / 졸업)
가족 아버지 배익화, 어머니 김광덕
서훈 건국포장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소개2. 생애3. 사후

1. 소개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경상도 김해도호부 출신이나 주로 전라남도 목포부에서 활동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890년 2월 17일 경상도 김해도호부 하북면 용덕리(현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안하리) 어은마을에서 자영농이던 아버지 배익화(裵翊化, 1863.3.5 ~ 1928.12.2)[8]와 어머니 김광덕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9] 일찍이 고향 인근의 하북면 명동리 두례마을로 이주하였으며, 8살 때부터 12살 때까지 고향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다 김해군 우부면 답곡리(현 김해시 대성동)로 이주했다.

1902년 김해 사립육영학교[10]에 입학하여 1906년 3월 25일 17살의 나이로 졸업하였다. 1909년 가족들과 함께 전라남도 목포부 부내면 창평리(現 전라남도 목포시 창평동) 3번지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고[11], 사립목포영흥학교[12] 보통과에 진학해 졸업하였다. 이후 상경하여 대성학교(大成學校)에 진학한 후 2년을 다녔고, 다시 낙향하여 사립목포영흥학교 고등과로 편입해 졸업하였다. 그 뒤 영흥학교 교사로 1년 6개월간 근무하다가 퇴직하고 가족들이 운영하는 소매잡화점을 물려받아 경영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 3월 1일, 경기도 경성부에서 시작된 3.1 운동이 목포부에도 전해졌는데, 이때 배치문은 지역 학생들과 함께 운동방법을 논의하고, 지역 유지들 및 기독교인 지사들과 함께 목포부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4월 8일 이들과 함께 목포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한 배치문을 비롯해 40여 명의 애국지사가 검거되었고, 배치문은 1919년 5월 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이 확정되었다. 이때 함께 검거된 공범들은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을 받았다.[13] 그러나 같은 달 27일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에 대해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을 받았다.[14] 하지만 재차 구금되어 1919년 6월 1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및 벌금형 80원을 선고받아[15] 결국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21년 3월 중화민국으로 망명한 그는 1923년 3월 5일 보천교 대표로 자칭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는데, 국내에서도 조직적인 독립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얼마 뒤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그 뒤 1924년 비밀리에 귀국하여 전라남도 목포부 호남정(현 목포시 호남동) 7번지에 주소지를 두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이다가, 그를 추적하던 일본 경찰에 검거되고 말았다.

검거된 뒤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동지와 조직을 보호하였다. 그리고 1924년 1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횡령 혐의로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으며[16], 1924년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면소 판결을 받아[17] 곧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무안군 이로면 죽교리(현 목포시 죽교동) 176번지로 본적을 옮겼으며[18], 1925년에는 목포제유노조사건에 관여하여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하고 민족적인 차별대우까지 받았던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힘썼다. 1926년 이와 관련하여 이른바 건조물 침입, 소요, 훼기, 상해, 출판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검거되어 같은 해 6월 25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위 혐의에 대해 구류갱신이 결정되었으나[19], 이튿날인 6월 26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의 예심에서 이른바 소요 및 훼기 혐의에 대해 면소 판결을 받아 당일 출옥하였다.[20]

그는 이러한 노동운동을 통해 자연스레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후 조선공산당 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재차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리고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미결 구류일수 중 150일 통산)을 선고받아[21]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29년 3월 17일 석방된 뒤[22]에는 신간회에 가입하여 신간회 목포지회장까지 역임하였는데, 같은 해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12월 30일 혐의없음 판결을 받아[23] 출옥하기도 하였다. 1930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목포상업학교[24] 학생들이 당시 광주부 이외의 지역에서 최초로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동조하는 시위를 전개하기도 했는데, 이때 실질적인 지도자가 바로 배치문이었다고 전한다. 그 뒤 1931년 2월 7일 목포청년동맹 주최 망년회가 목포중학원에서 개최되었을 때 치안을 방해했다는 혐의로 목포경찰서 고등계에 검속되었다가, 같은 달 10일 방면되었으며, 그해 5월 신간회가 해소된 뒤에도 지속적인 감시를 받아 7월 9일에도 목포경찰서에 검거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그 뒤 그는 언론계에 투신하여 새로운 방식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9월 22일 동아일보 목포지국 기자로 임명되었다가 1934년 9월 1일 사직하였고, 1936년 1월 13일 전라남도 목포부에 호남평론사(湖南評論社)가 창립되자 이에 입사하여 1937년 12월 6일 호남평론이 폐간되기 이전까지 호남평론 기자 및 제2대 편집장으로 근무하였다. 이때 「나치스 獨逸(독일)은 어디로」(1936.6.15), 「時事問題(시간문제)-復興獨逸(부흥독일)의 靑年(청년)」(1936.8.15), 「小新聞(소신문)」(1936.9.15), 「西班牙外人部隊(서반야외인부대)」(1937.4.15) 등 국제정세를 논하는 기사를 주로 썼다.

호남평론이 폐간된 뒤에도 지하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그는, 1941년 목포부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던 정병칠(鄭炳七)에게 '이른바 대동아전쟁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전쟁이니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런데 과거 1930년 목포상업학교 학생으로서 광주학생항일운동 동조시위에 참여했다가 검거되었던 정병칠은 불행히도 당시 자신을 취조했던 정영수(丁永壽)에게 포섭되어 석방된 이후 줄곧 일본 경찰의 밀정 노릇을 하고 있던 자였다. 정영수는 곧 배치문이 건넨 말을 경찰에 밀고하였고, 배치문은 그해 3월 일본 경찰에 이른바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1941년 12월 31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전시인심혹란, 조언비어 등의 혐의로 유죄 판결이 확정되었고[25],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모진 고문 끝에 병을 얻어 1942년 5월 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전시인심혹란, 조언비어 등의 혐의에 대해 보석 허가를 받아 출감지휘가 내려졌으나[26], 검사 측이 공소를 제기하면서 미처 석방되지 못했고, 결국 열흘 뒤인 1942년 5월 20일, 전라남도 무안군 이로면 산정리 목포형무소에서 옥사 순국했다. 2심은 그가 죽은 뒤 5일 후인 1942년 5월 25일에서야 개정되었고, 마침내 검사 측의 공소는 기각되었다.[27]

3. 사후

한편, 배치문의 부인 김해 김씨 김덕이(金德伊, 1893.10.3 ~ 1940.10.5) 여사[28]는 3년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옥사 직후 유가족으로는 당시 70세이던 노모와 출가한 외동딸 배혜자(裵惠子, 1919.3.8 ~ ?), 사위 경주 최씨 최의호(崔義鎬) 등이 있었다. 이들은 일제의 억압을 견디다 못해 연해주 사할린으로 이민을 갔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고향 문중 사람들과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이에 문중에서는 배치문의 4촌 동생 배진효(裵振孝, 1893.11.3 ~ 1967.12.6)[29]의 셋째 아들 배종태(裵鍾泰, 1944.7.24 ~ )를 배치문의 사후 양자로 입적했다.#

그의 사후 교사 출신의 5촌 당질 배종록(裵鍾綠, 1929.12.25 ~ )[30]의 끊임없는 추적 조사로 1982년 8월 15일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전라남도 목포시에 있던 어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고향 김해시의 문중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어른을 그렇게 모실 수는 없다"며 김해시로 이장되었다가, 1989년 11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었다.

그리고 1983년 11월 11일 한림면 장방리 한림정마을에 있던 한림면사무소 앞에 김해 유림과 3.1 동지회에 의해 그를 기리는 기적비가 세워졌고, 1984년 5월 1일에는 배치문 열사의 독립운동 추모회가 발족되었다. 기적비는 2000년 8월 15일 한림면 명동리의 통일동산에 이건되었다가, 2007년 김해시 삼계동 화정공원 현 위치에 옮겨졌다. 매년 3월 1일 이 비석 앞에서 추모식과 3.1절 기념식이 거행된다.
[1] 배고픈 조선민중이 널린 식민지배에 항의하는 뜻으로 호를 정했다.[2] 1928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891년 6월 17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안하리 1010-1번지. 도로명주소 :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한림로252번길 44-16.[4] 지금의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목포시 산정동 187번지 산정동일신아파트 자리에 목포형무소가 있었으며, 1989년 11월 26일 전라남도 무안군 일로읍 월암리 600번지로 이전되었다.목포문화원[5] 제주목사공파(濟州牧使公派) 23세 효(孝) 항렬. 족보명은 배치효(裵致孝).[6] 지금의 김해동광초등학교(金海東光初等學校)이다.[7] 현 영흥중학교·영흥고등학교[8] 족보명은 배익수(裵翊秀), 자는 석홍(石洪).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에는 裵益化로 표기되어 있다.[9] 분성배씨대동보 권5 640쪽에는 아버지 배익화의 부인으로 허낙서(許洛瑞)의 딸 김해 허씨 허덕이(許德伊, 1865.5.10 ~ 1942.3.10)만이 등재되어 있고, 배치문은 5형제 중 넷째 아들로 등재되어 있다.[10] 현 김해동광초등학교[11] 독립유공자 공적정보[12] 현 영흥중학교·영흥고등학교[13] 1919년 5월 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형사사건부[14] 1919년 5월 27일 형사사건부[15] 1919년 6월 1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수형인명부 #1, 1919년 6월 1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수형인명부 #2, 1919년 6월 1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집행원부[16] 1924년 1월 25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17] 1924년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18]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 수형인명부 #2[19] 1926년 6월 25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집행원부[20] 1926년 6월 26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집행원부[21]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 수형인명부 #1,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 수형인명부 #2[22] 배치문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23] 1929년 12월 30일 형사사건부[24] 현 목상고등학교[25] 1941년 12월 31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형사사건부[26] 1942년 5월 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집행원부[27] 1942년 5월 25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집행원부[28] 김태중(金泰重)의 딸이다.[29] 자는 인현(仁現).[30] 자는 정문(正文). 분성배씨대동보 권5 638쪽에는 裵鍾彔으로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