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5-27 03:55:34

이종암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11, #a11 20%, #a11 80%, #a11); color: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단장
김원봉
고문
김대지 황상규
단원
강세우 강인수 고인덕 곽재기
권정필 권준 김광추 김기득
김방우 김병현 김상옥 김상윤
김성숙 김시현 김익상 김지섭
김철호 나석주 남정각 박문희
박자혜 박재혁 박차정 박희광
배동선 배중세 배치문 서상락
송천흠 신악 신영삼 신채호
신철휴 오성륜변절 유자명 윤세주
윤치형 이구연 이병철 이병희
이성우 이수택 이육사 이종암
이태준 정이소 최수봉 황옥불확실
최용덕 한봉근 한봉인 홍가륵
공약 10조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5파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7가살
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대만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조선혁명선언 황옥 경부 폭탄사건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이종암
李鍾巖[1][2]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다.]
파일:이종암.png
1926년 12월 19일 동아일보 기사에 실린 이종암의 사진.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이종순(李鍾淳)
이명 양건호(梁健浩, 梁建浩)·양달호(梁達浩)
양주평(梁朱平, 梁州平, 梁洲平)·양근오(梁槿吾)
양건치(梁健治)·권택권(權宅權)·이중호(李仲浩)
이집중(李集中)·이종순(李鐘淳)
본관 하빈 이씨[3]
출생 1896년 1월 12일
대구부 대구군 해북촌면 백안동
(現 대구광역시 동구 백안동)[4]
사망 1930년 5월 28일[5] (향년 34세)
경상북도 대구부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61호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이종암은 1896년 1월 12일 대구부 대구군 해북촌면(現 대구광역시 동구) 백안동에서 아버지 이석능(李錫能, 1854 ~ 1922. 7. 4)[6]과 어머니 남원 양씨(南原 梁氏, ? ~ 1932. 12. 26)[7]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6살 되던 1902년 대구군 서상면 남산동(現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621-1번지)로 이주하여 이곳에 본적을 두었다.[8]

그는 대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농림학교를 다니다 1년 만에 중퇴했다. 그 후 부산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마저도 학비 조달이 어려워 곧 중퇴하였다. 1914년 셋째 고모부 연일 정씨 정재학(鄭在學)의 후원으로 대구은행[9]에 입사한 그는 1년 후 출납계 주임으로 승진하고, 서희안을 반려로 맞아 결혼했다.#

대구은행 출납계 주임으로서 금고 열쇠를 맡아 2년간 재직하던 그는, 당시 항일비밀결사 대한광복회가 1916년 9월 일으킨 군자금 조달 목적의 '대구권총사건'과 1917년 11월 일으킨 친일부호 장승원(張承遠) 처단사건을 목격한 것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가담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1917년 만주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뜻을 둔 동지들과 함께 조국광복투쟁을 결의하고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밀양군 출신의 김대지·구영필(具榮泌) 등의 동지를 얻었다.

그러다가 같은 해 12월 은행 금고 속에 있는 10,900엔의 돈을 무단으로 출금하여, 동지들과 함께 처음에는 아메리카로 유학할 것을 꾀했으나 당시 제1차 세계 대전 중이었기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 상하이를 거쳐 만주로 갔다. 만주에서 그는 길림성 연길도(延吉道) 영안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10]의 간민소학교(墾民小學校)에 주소를 두고 1918년 2월에는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통화현(通化縣)[11]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 2기로 입학하여 군사학을 배웠다.

이어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직접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무관학교 교관이었던 서상락(徐相洛) 등의 동의를 얻어 무관학교를 중퇴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9일 길림성 길림시 파호문(巴虎門) 밖 반씨객점(潘氏客店)[12]에서 김원봉·이성우(李誠宇)·황상규 등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이에 그와 김원봉은 상하이로 가서 당시 프랑스 조계지에 살던 김성근(金聲根)에게 폭탄제조방법을 습득하였다. 그리고 의열단원 곽재기·이성우 등은 상해에서 폭탄과 권총을 구입하고 이를 국내로 반입하여 앞으로 있을 거사에 대비하였다. 이종암이 대구은행에서 가져온 돈은 이러한 의열단의 활동자금으로 유용하게 쓰였으며, 그 일부는 동지인 구영필에게 전해져 봉천성 남로도(南路道) 심양현(瀋陽縣)에 비밀결사 삼광상회(三光商會)를 설치하는 자본금으로 쓰였다. 또 이즈음에 의열단원 최수봉에게 폭탄을 가지고 입국케 하여 밀양경찰서를 폭파하도록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기도 했다.

1920년에 의열단 부단장이 된 뒤 폭탄을 밀수입해 일본 각 기관 파괴를 기도하였으나 발각돼 실패했다. 1922년 3월 그는 김원봉·김익상·오성륜(吳成崙) 등과 함께 필리핀에서 상하이로 오는 일본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처단하기로 결정하고 다나카가 3월 28일 상하이에 상륙할 때 처치하되 차질이 생기면 일본영사관에서 있을 예정인 연회식 때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거사 당일 다나카가 상하이의 세관 부두로 상륙하자, 세관 부두에 동지인 김익상과 오성륜이 배치되었으므로 그는 거사의 성공을 빌며 소식을 기다렸으나, 불행히도 다나카 암살은 실패하고 두 동지만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1925년 9월 재정사정의 궁핍으로 활동이 힘들어지자 그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을 계획을 세우고, 선전용으로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서(朝鮮革命宣言書, 일명 의열단선언서)」를 지참하고 대구부에 잠입하였다. 그곳에서 이병호(李丙浩)의 안내로 이병태(李丙泰)를 만나 자신이 전에 부산금융조합에 예금했던 돈을 받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때 이미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고 있었으며, 달성군 달서면 이기양(李起陽)의 산장에서 요양 중이던 1925년 11월 5일, 결국 경상북도 경찰부에 검거되고 말았다.

1926년 3월과 5월 두 차례 구류갱신결정을 받은 후 같은 해 11월 2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예심이 종결되어 한봉인·고인덕 등과 함께 소위 폭발물취체벌칙 위반·살인·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살인미수 등의 혐의로 공판에 회부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위 혐의로 징역 13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200일 산입)을 선고받고@ 결국 옥고를 치렀다. 이후 대전형무소에 이감되어 복역을 계속했는데, 이때 그는 위장병·폐병·인후병 증세가 겹쳐서 병세가 매우 악화된 상태였고, 결국 체포되어 복역한지 4년 6개월만인 1930년 5월경 가출옥하였다.

그러나 석방된지 10일 만인 1930년 5월 28일, 병세가 위독해져 결국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3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68년 9월 18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1] 아명이라고 한다. 형 이종윤(李鍾允, 1881 ~ 1897. 2. 28)과 누이들이 모두 일찍 죽자 그의 부모가 "바위 같이 튼튼하게 오래 살라"는 뜻으로 지어주었다.#[2][3] 사직공파 23세 종(鍾) 항렬.#[4] #[5] 음력 5월 1일.[6] 족보명 이봉규(李鳳珪).[7] 양응시(梁應是)의 딸이다.[8] 2019년 대구광역시 중구청에서는 이 지번에 있는 집 옆 담벼락에 '이종암 생가터'라는 안내판을 붙여두었다.#[9] DGB대구은행과는 다른 은행이며, 정재학은 당시 대구은행 발기인 중 한 명으로 실질적인 은행 운영권을 갖고 있었다.[10]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닝안시(寧安市) 둥징청진(東京城鎭).[11]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12]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지린시 촨잉구(船營區) 광화로(光華路)5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