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8:51:25

강우범

성명 강우범(姜禹範)
이명 강구우(姜九禹), 강부약(姜扶弱)
지산(智山)
생몰 1884년 ~ ?
출생지 함경북도 경성군 명윤면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강우범은 1884년경 함경북도 경성군 명윤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만주로 망명했고, 1913년 연길현 국자가에서 김약연, 백옥보(白玉甫) 등과 함께 한인자치기구인 간민회(墾民會)를 조직하고 의사원으로 활동했다. 1919년 3월 13일 연길현 용정에서 김약연, 구춘선 등과 함께 재남북만주조선민족대표 명의로 ‘조선독립선언서포고문’을 발표하고 독립선언축하식을 거행했다. 이후 1919년에서 1920년까지 조선독립기성회(朝鮮獨立期成會) 의사부원,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부회장, 제2중부지방회 회장, 간북남부총판부(墾北南部總辦府) 재무관을 역임했다.

1921년 4월 베이징에서 군사통일회의가 개최되자, 강우범은 북간도국민군 대표로 참석하여 이승만의 대미위임통치 청원에 대한 성토문과 국민대표회의를 촉구하는 선언서를 작성, 배포했다. 이어 5월에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국민대표회의 발기회가 열리자 발기인으로 대회 소집을 준비했으며, 그해 12월 영안현 영고탑에서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북만지부를 조직하고 지부장으로 활동했다. 1922년 5월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가 조직되자, 신숙, 남공선과 함께 베이징 군사통일회 대표로 참가했다.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한 그는 대표자격심사위원, 재정분과위원, 과거문제조사위원회 위원등으로 활동했다. 그해 6월 개조파 인사들이 대거 이탈하자, 국민대표회의에 남은 창조파 인사들과 함께 국호를 한(韓)으로 선포하고 헌법을 제정했으며 국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예산 부족으로 국민위원회가 조기 해체되어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25년 12월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원 주계훈(朱啓勳)과 함께 중한혁명운동자연합대회주비회(中韓革命運動者聯合大會籌備會)를 조직했고, 1926년 1926년 10월 북경에서 원세훈(元世勳)·장건상(張建相) 등과 한국독립유일당 북경촉성회를 결성하였으며, 1933년 8월 남경에서 중국인 진수인(陳樹人)과 김구, 신익희 등과 함께 중한호조연합회(中韓互助聯合會)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그러나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강우범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