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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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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립운동가 김약연.jpg
출생 1868년 9월 12일
함경도 회령도호부 동촌 옹희면 제1리 행영#
사망 1942년 10월 24일 (향년 73세)
묘소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
본관 전주 김씨
종교 유교기독교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교육 운동2.3. 간민회2.4. 3.1 운동2.5. 일제의 탄압2.6. 명동교회 목사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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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독립운동가, 교육자.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1868년 9월 12일 함경도 회령도호부 동촌 옹희면 제1리 행영[1]에서 김석조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주 김씨 집안으로서 유가(儒家)의 전통에 따라 8살 때부터 함경북도 종성군의 유학자 남종구, 오삼열, 주봉의 등의 문하에서 한학을 배웠다. <전주 김씨 족보>에 따르면, 그는 어릴 때부터 명석한 두뇌와 원만한 품성을 갖췄고 <맹자>에 심취해 17살 때 맹자를 만독(萬讀)하여 달달 외울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조선 농민들은 개항 후 일제의 개항장을 통한 미국 대량 방출과 연이어 지속된 자연재해로 인해 피폐한 삶을 보내고 있었다. 이 중 많은 이들은 간도로 대거 이주해 황무지를 개간했다. 그러던 1885년 청나라가 수백년간 실시하던 만주 봉금령을 완전히 폐지하고 두만강 이북의 길이 700리, 넓이 40~50리 일대를 한인들이 개간하여 정착할 수 있는 전간구역(專墾區域)으로 지정했다. 이에 한인의 만주 이주는 급격히 증가했다.

1899년 2월 18일, 32세에 접어든 김약연은 조선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견디다 못해 간도로 이주하여 빈부귀천이 없는 이상촌을 건설하고자 가솔 및 장인 문병규, 남도천, 김하규 등 6개 가족으로 구성된 142명의 이주민의 지도자가 되어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화룡현으로 이주했다. 김약연 일행은 화룡현의 지신사 장재촌으로 이주한 뒤 장재촌을 명동촌으로 개명했다. 명동촌은 1905년 무렵 개척이 거의 완료되었고 조선인 이주민들이 7개의 촌에 모여 살았다.

2.2. 교육 운동

김약연은 후세 교육을 위해 1901년 4월 청국인 토호 동한(董閑)으로부터 5만평의 토지를 매입하여 학전(學田)을 삼고, 이를 장학재원으로 하여 규암재(圭巖齋)라고 하는 사설 교육기관을 창설했다. 그는 낮에는 청년들을 모아 농사짓고 밤에는 공부를 시키며 한인 동포들의 자조자립과 협동정신을 고취했다. 그는 주로 자신이 만번 읽었다는 <맹자>를 가르쳤다.

그 후 1906년에 이상설이 명동촌에서 가까운 용정에 '서전서숙'을 설립해 신교육을 세웠으나 이듬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여파로 문을 닫았다. 김약연은 서전서숙의 교사와 학생들을 받아들이고 규암재의 터를 확대하여 1908년 4월 27일에 '명동서숙'을 설립하여 초대 숙감으로 활동하였으며 1909년 4월 명동학교로 개명및 확대 시켜 초대 교장에 취임했다. 김약연은 근대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당시 22세의 청년 정재면을 교사로 초빙했다.

정재면은 서울 상동청년학원과 서울 황성 기독교 청년회 학관을 졸업한 후 신민회에 가담한 인물이었다. 그는 신민회에서 세운 평야대성학원과 원산보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이동휘의 권유로 '북간도 교육단'을 조직해 교육사업을 물색하던 중 김약연의 요청을 받았다. 개신교도였던 정재면은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린다는 조건으로 교사 직을 수용했다.

김약연과 정재면은 학교를 발전시켜 사립명동학교로 개칭되었으며 명동중학교(1910)와 명동여학교(1911)를 추가로 설립했다. 명동학교의 교과목은 국어, 역사, 과학, 사범 교육 외에도 애국심 교육과 신앙 교육이 중심을 이뤘다. 김약연은 정재면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접한 후 근대민족 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기독교가 유교보다 낫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는 1909년에 설립된 명동교회에 참석하기 시작하다가 곧 개신교도로 개종했고 1915년 명동교회 장로로 피선되었다. 김약연을 지도자로 우러러 보던 명동촌 주민들 역시 그를 따라 잇따라 개종해 1917년 명동교회에는 700여 명의 교인이 출석했다.

명동교회와 명동여학교는 북간도 여성들의 의식과 지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사회에서 이름을 갖지 못했던 여성들은 북간도에서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한자로 된 이름을 갖게 되었다. 여성들 중 50여명은 김신묵(金信黙), 김신우(金信宇), 김신영(金信永), 윤신현(尹信鉉) 등 신(信)자를 항렬로 삼아 이름을 지었다.

​또한 명동촌 안에 있는 여러 마을의 이름이 구세동, 영생동, 명신동, 낙원동 등으로 명명되었는데 그들 사회의 성격이 기독교적임을 나타낸다. 김약연과 명동촌의 사람들은 그들이 이주할 때 꿈꾸었던 빈부귀천이 없는 이상촌을 신앙적으로 실현하려고 했다. 그들은 집단농장에서 함께 노동하고 함께 추수했다. 그들은 축적된 자산을 가지고 가난한 이웃을 돕고 지역 사회를 위해 사용하였다. 또한 교사, 학생, 학부모, 명동교회 교인들은 협동조합운동의 일원이 되었다.

2.3. 간민회

이즈음 중국에서는 신해혁명이 일어났고 1912년에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새로 성립한 중화민국 정부가 연성자치(聯省自治)를 표방했고, 중국 각지는 자치의 분위기가 성숙되었다. 이같은 지방자치의 물결은 북간도에도 전해졌고, 김약연은 이동준, 김림 등과 함께 한인 자치기구를 창설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특히 1912년 이동휘과 명동촌으로 망명해오자, 그는 이동춘, 정재면, 김영학, 박찬익 등과 함께 1913년 4월 간민회를 창설하고 한인동포들의 공식적인 자치기관으로서 중국 지방정부의 허가를 받았다.

김약연은 간민회의 회장을 맡았고 본부를 국자가(局子街)에 두고 연길․화룡․왕청현 등지에 분회를 설치하여 북간도의 한인동포들을 관장했다. 간민회는 한인동포들에 대한 호구조사와 교육 계몽사업은 물론 세금을 매겨 징수하는 등 북간도의 한인정부와 같은 존재였다. 중국 관청 또한 일체의 한인 관련 업무를 간민회를 통해 집행했으니, 간민회는 명실공히 중국 정부의 보호와 지원 아래 성립한 북간도 한인 동포들의 자치정부였다.

그러나 간민회는 위안스카이 집권 후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려는 중국 정부의 지방자치 철폐령과 일제의 압력 행사로 인해 1914년 3월 해산되고 말았다. 그 후 김약연은 명동학교의 운영에 전념하면서 후세들에 대한 민족교육과 독립사상 고취에 정성을 다하여 민족의 미래를 준비했다. 명동학교 학교 학생과 졸업생들은 이후 재만 한국 독립운동의 주력군으로 등장하였고, 김약연은 이들의 정신적이며 실천적 지도자로 추앙받았다.

2.4. 3.1 운동

1918년 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가 발표되었다. 이에 북간도에서는 독립운동의 불길이 타올랐다. 명동학교 학생들은 충렬대(忠烈隊)를 조직했고, 1918년 음력 12월 만조와 노령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 독립선언은 당시 만주와 노령은 물론 미주 등 여러 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동휘, 김좌진, 조용은, 이승만, 안창호 등 저명한 독립운동 지도자 39인의 명의로 발표되어 이후 재일한국 유학생들의 동경 2․8 독립 선언과 국내 3․1 독립 선언의 기폭제가 되었다. 김약언 또한 이 선언서 발표 명의자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이후 김약연은 1919년 2월 노령 니콜리스크에서 열린 한족대표자회의에 정재면과 함께 북간도 대표로서 참석했다. 이 회의는 노령 각지는 물론 서간도와 북간도, 그리고 국내의 단체 및 지역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작성 선포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선정 파견하기 위해 소집된 것이었다. 이때 그는 일제가 온갖 협박과 공갈적인 수법을 동원해 '한국인은 일본에 합방을 원한다는 거짓말을 파리 강화회의에 제공할 계략을 꾸미고 있다"면서 이에 대한 강력한 항의와 대비책을 촉구했다.

1919년 3월, 3.1 운동이 한반도에서 발발했다는 소식이 북간도에 전해졌다. 이에 김약연은 독립선언대회를 추진했다. 우선 그는 정재면, 강봉우 등 동지들과 함께 극비리에 거사 계획을 세운뒤 회령으로부터 3.1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이를 명동학교에서 대량 등사했다. 그리고 충렬대 대원들로 하여금 독립 선언서를 북간도 전역에 배부하도록 했다. 이후 1만여 명의 북간도 한인 동포들은 3월 13일 북간도 연길현 용정 북쪽에 위치한 서전대야(西甸大野)에 모여 독립선언 축하회를 개최하였고, 이어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김약연은 용정 만세 시위에서 명동학교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을 이끈 채 시위대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이라고 대서특필한 깃발을 앞세우고 손에는 태극기를 들었다. 이에 일제는 중국 관헌과 교섭하여 중국 군대로 하여금 시위를 진압하도록 했다. 그 결과 중국 군대의 발포로 충렬대원을 포함한 시위대 18명이 피살되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김약연은 국내에 귀국해 간도 독립운동 기성총회를 발족하고 군자금을 모집했다. 이때 구춘선이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김약연 본인은 의사(議事)부원으로 선임되었다. 1919년 4월 13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김약연은 국호와 단체의 이름이 서로 상충되지 않고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단체명을 대한국민회로 개칭했다.

대한국민회는 간민회의 조직과 인맥을 계승해 한인 동포들에 대한 민사 행정을 실시했고, 군사활동은 홍범도 부대와 안무 부대를 산하에 두고 지원, 육성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을 수행했다. 또한 1920년 5월, 그는 간도에서 대한국민회 본부를 명동학교에 두고 신문 <자유의 종소리>를 발간했다.

2.5. 일제의 탄압

일제는 이렇듯 간도에서 배일 투쟁을 벌이는 김약연을 체포하려 들었다. 평소 김약연의 친중국 노선과 인품에 매료되었던 중국 연길현장 도빈은 일제의 마수가 뻗치기 전에 먼저 김약연을 체포, 감금했다. 김약연은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연길 감옥에 구금되었지만, 실제로는 손님 대접을 받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일제는 봉오동 전투청산리 전투의 패배를 앙갚음하기 위해 경신 대토벌을 단행해 북간도의 한인 마을과 교회를 불태우고 한인 수천명을 학살했으며, 1920년 10월 20일에 명동학교를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었다.

1922년 석방된 김약연은 폐허가 된 터 위에 임시교사를 지어 민족교육을 지속했다. 그러나 1924년 극심한 흉년으로 명동학교가 운영난에 시달렸고, 1925년에는 명동중학교 인가가 취소되어 학생들이 캐나다 선교부가 운영하던 용정의 은진 중학교와 명신여학교로 전학했다. 하지만 김약연은 포기하지 않고 1923년 2월 26~27일 용정에서 개최된 전간도 주민대회에서 '간도 자치권' 획득을 위한 실행위원으로 선임된 뒤 중국 당국과 지속적으로 교섭 활동을 벌였다. 중국인들은 그런 그를 가리켜 '한국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2.6. 명동교회 목사

1928년, 김약연은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그곳에서 1년간 수업을 받고 1929년 2월 졸업했다. 이후 그는 명동교회 목사로 봉직하면서 전도 사업을 통해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세웠던 학교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명동소학교를 직접 경영하면서 민족 교육을 실시해 어린 학생들의 민족 의식을 일깨웠다.

1932년, 김약연은 용정으로 이주해 은진중학교에서 성경과 한문을 가르쳤다. 그리고 1938년 2월에는 은진중학교와 명신여학교의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이렇듯 평생을 걸쳐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며 민족운동을 이끌었던 김약연은 1942년 10월 24일 향년 7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기 직전 가족과 제자들로부터 유언을 부탁받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 삶이 유언이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약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 기타

그의 증손인 김재홍은 함경북도 청진시 출신으로, 이북5도위원회함경남도지사를 역임하게 된다.


[1] 이북5도 행정구역상 화풍면 옹희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