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차영필(車永弼) |
생몰 | 1887년 10월 14일 ~ ? |
출생지 | 평안남도 덕천군 풍덕면 율곡리 |
사망지 | 미상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차영필은 1887년 10월 14일 평안남도 덕천군 풍덕면 율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1년 3월 평안북도 영변군에서 오태국(吳泰國)의 권유를 받아들여 김일봉(金一鳳)과 함께 신대한자유회(新大韓自由會)에 가입했다. 이후 1921년 4월 8일 오태국, 김병국(金炳國) 외 2명과 함께 영변군 백령면에 거주하는 김봉록(金鳳祿)의 집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했다. 얼마 후 신대한자유회가 당국의 수사로 해산되었지만, 그는 김일봉과 함께 군자금 모집을 계속하기로 합의하고 1923년 9월 25일 김일봉, 여창준(呂昌俊)과 함께 평안남도 덕천군 덕천면 무릉리에 거주하는 김낙선(金洛善)의 집에서 군자금을 모집했고, 그해 28일 여창준과 함께 덕천군 풍덕면 율곡리에 거주하는 김정서(金正瑞)의 집에서 군자금을 모집했다.1921년 11월 4일, 차영필은 다시 김낙선의 집에서 군자금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11월 12일 평안남도 영원군 영원면 방산리에 거주하는 박필염(朴弼炎)과 김병서(金炳瑞)의 집을 찾아가 군자금을 받아냈으며, 11월 13일 김정서와 김석범(金碩範)를 찾아가 돈을 받아냈고, 14일에 풍덕면 풍덕리에 거주하는 강명규(康明圭)의 집에서 군자금을 모집했다. 그러나 1923년 12월 체포된 그는 1924년 6월 1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및 강도, 주거침입죄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9년 2월 28일에 출옥했다. 이후의 행적,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차영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