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9:43:38

민병태(독립운동가)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경택(敬澤) / 화은(華隱)
본관 여흥 민씨[1]
출생 1870년 1월 15일
강원도 홍천현 영귀미면 성수리
(현 강원도 홍천군 영귀미면 성수리)
사망 1919년 4월 3일[2]
강원도 홍천군
묘소 강원도 홍천군 영귀미면 성수리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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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민병숙은 그의 남동생이며, 독립유공자 민병찬은 그의 6촌 동생(재종제)이다. 독립유공자 민병두는 10촌 동생이다.

2. 생애

민병태는 1870년 1월 15일 강원도 홍천현(현 홍천군) 영귀미면 성수리에서 아버지 민정식(閔定植, 1848 ~ 1926. 4. 22)과 어머니 원주 이씨(? ~ 1914. 5. 10)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민정식은 1894년 종6품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1902년 2월 7일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되었으나, 열흘 만인 17일 사직하였다.#

그는 1919년 2월 서울에 올라가 고종 황제의 국장(國葬)에 참가하고 돌아와서 3월 말 남동생 민병숙, 장남 민준기(閔駿基, 1898 ~ 1967. 11. 29), 6촌 재종제 민병찬과 함께 태극기 2,000매를 제작하면서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이후 1919년 4월 2일 면소새지인 속초리로 집결해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군중이 성수리 길목에서 홍천읍으로 통하는 길을 막아 만세운동의 정보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으므로 이날의 만세시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다음날 4월 3일에는 동면(東面)에서 홍천읍으로 시위행진하여 헌병분견소에 검거된 사람을 석방하라고 요구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4월 3일 동면 성수리에서 800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행진할 때, 헌병대와 수비대가 출동하여 군중과 헌병대와의 격투가 벌어졌다. 이때 동생 민병숙이 헌병의 총을 빼앗으려 달려들다 헌병이 쏜 총에 맞아 피살되었다. 이에 격분한 민병태는 헌병대에게 달려가 싸우다가 역시 헌병의 총탄에 맞아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민병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호참공파 30세 병(丙) 항렬.[2] 음력 3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