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제시 출신 독립운동가, 박봉래
성명 | 박봉래(朴琫來) |
이명 | 박정문(朴正文) |
자 | 순경(順京) |
생몰 | 1880년 4월 6일 ~ 1950년 8월 5일 |
출생지 | 전라도 금구현 남면 도장리 (현 전라북도 김제시 황산동 도장리) |
사망지 | 전라북도 김제군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박봉래는 1880년 4월 6일 전라도 금구현 남면 도장리(현 전라북도 김제시 황산동 도장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만주로 망명했고, 1919년 이후 이범윤이 인솔하는 대한독립의군부에 가담했다. 1920년 음력 7월, 그는 동지들과 함게 연해주에서 총기, 탄환을 구입하여 양자구(楊子溝)에 있는 대한의군단 단장 이병준(李秉俊)에게 인도하였으며, 같은 해 8월에는 망원경, 시계 등을 구입하여 의군부장 이범윤에게 인도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소총 125정과 탄환 12,500발을 구입하여 운반하다가 체포되었고, 이후 국내로 소환되어 재판을 받다 1921년 6월 18일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김제군에서 조용히 지냈고, 1950년 8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봉래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8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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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양양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봉래
성명 | 박봉래(朴鳳來) |
이명 | 박인출(朴麟出) |
생몰 | 1894년 11월 1일 ~ 1980년 10월 17일 |
출생지 | 강원도 양양도호부 강선면 도룡동 (현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회룡리) |
사망지 | 강원도 양양군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박봉래는 1894년 11월 1일 강원도 양양도호부 강선면 도룡동(현 양양군 강현면 회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강현면 회룡리 구장을 역임하던 중 3.1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김영경(金英經)·장세환(張世煥)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자신이 구장으로 일하고 있는 강현면 회룡리 지역을 맡았다. 이후 마을 주민들을 찾아가 거사 계획을 알리고 몇몇 주민들을 모아놓고 태극기를 제작했다. 이윽고 거사 당일인 1919년 4월 5일 10시경, 그는 주민 500명을 이끌고 물치장터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했고 시위대를 인솔해 도천면으로 행진했다. 그리고 오후엔 도천면 군중과 합세한 뒤 대포리 주재소로 몰려가 경찰의 사과를 받아냈다.
이튿날인 4월 6일, 강현면, 도천면 주민 1,200~1,300명은 다시 모여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양양읍내로 행진했다. 연창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과 대치했지만, 시위대는 이를 뚫고 읍내로 들어가 경찰서로 몰려갔고, 경찰서장이 저자세로 나오자 독립만세만 부르고 해산했다. 이후 경찰은 시위 가담자들을 철저하게 조사하여 검거하기 시작했고, 박봉래는 이때 체포되어 1919년 4월 23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4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양양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0년 10월 1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박봉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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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의병장, 박봉래
성명 | 박봉래(朴鳳來) |
생몰 | ? ~ 1908년 4월 2일 |
출생지 | 미상 |
사망지 | 경상북도 성주군 거구리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박봉래는 1907년경 의병 200명을 이끌고 경북 성주 일대에서 활동했다. 그러던 1908년 4월 2일 30명의 의병과 함께 성주군 거구리(巨句里)에서 활동하던 중 일본군 성주수비대와 교전한 끝에 전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박봉래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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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천안시 출신 독립운동가, 박봉래
성명 | 박봉래(朴鳳來) |
이명 | 박윤삼(朴允三) |
생몰 | 1893년 7월 14일 ~ 1948년 11월 2일 |
출생지 | 충청도 목천현 이원동면 용두리 (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
사망지 | 충청남도 천안군 |
추서 | 건국포장 |
박봉래는 1893년 7월 14일 충청도 목천현 이원동면 용두리(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1일 병천시장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해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이때 병천주재소 소속 헌병 5명과 천안 헌병 하사 1명, 보병 장교 이하 6명이 출격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이로 인해 19명이 피살되고 43명이 부상당했다. 이후 박봉래는 경찰에 체포되었고,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자 공소해 1919년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1919년 9월 11일 "나의 행위는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기초한 의사의 발동으로 범죄가 아니다."라며 상고했지만, 1919년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2월 25일에 출옥했다. 이후 천안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8년 11월 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박봉래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5. 청주시 출신 독립운동가, 박봉래
성명 | 박봉래(朴鳳來) |
본관 | 밀양 박씨 |
생몰 | 1870년 2월 8일 ~ 1954년 1월 2일 |
출생지 | 충청도 청주목 남차이면 석판리 (현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석판리)[1] |
사망지 | 충청북도 청주군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대통령표창 |
박봉래는 1870년 2월 8일 충청도 청주목 남차이면(현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석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궁내부 주사를 역임했으며, 1915년 변석붕(邊錫鵬)의 권유를 받아들여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에 가입했다. 이후 심인택의 권유를 받아들여 고종을 베이징으로 망명시키는 계획에 동참했고, 변석붕으로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경각서를 교부받고 이를 각처에 배포했다. 그러나 이 일련의 행위는 경찰에게 발각되고 말았고, 결국 그는 체포된 후 1915년 10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청주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4년 1월 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박봉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7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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