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20 18:07:55

노형규

파일:노형규.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족보명 노종필(盧鍾弼)
초명 노채필(盧埰弼)
은경(殷卿)
몽암(夢岩)·동명(東溟)
본관 광주 노씨[1]
출생 1876년 12월 3일
전라도 화순현 읍내면 광덕리
(현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광덕리)
사망 1947년 11월 27일
전라남도 화순군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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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노형규는 1876년 12월 3일 전라도 화순현 읍내면 광덕리(현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광덕리)에서 아버지 노학전(盧鶴甸)[2]과 어머니 진주 하씨 하석귀(河錫龜)의 딸 사이의 7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5일 조국현·조경환(曺景煥)·조기현(曺基賢)·조병렬(曺秉烈)·김세태(金世泰) 등 수십명과 함께 읍내 앞 갱미산 마루로 올라가서 산위에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또 동년 3월 31일에도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활동했다. 이후 전협·최익환(崔益煥) 등이 조직한 조선독립대동단(朝鮮獨立大同團)에 가입한 그는 1920년 7월에 조병렬(曺秉烈)·신유선(辛有善) 등과 함께 서울의 신덕영최양옥(崔養玉) 등과 연락하며 광주·화순·곡성·담양·보성 등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자금 모집을 위한 활동을 폈다. 또한 동년 10월에도 여러 동지와 함께 대동단원 전협과 연락하면서 전남 각지에서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20년 11월 5일 광주에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21년 5월 31일 소위 제령 7호 위반 및 공갈, 가택침입, 방화미수, 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공소했지만 1921년 12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화순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7년 11월 2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노형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32세.[2] 초명 노승엽(盧承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