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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848년 6월 12일 |
| 전라도 남원도호부 사동방 수월촌리 (現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사매면 월평리 수월마을) | |
| 사망 | 1919년 3월 6일 (향년 70세) |
| 전라북도 남원군 (現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 |
| 본관 | 장수 황씨 |
| 자 | 기보(器寶) |
| 호 | 석정(石庭) |
| 아명 | 황영(黃瑛) |
| 종교 | 유교(성리학) |
| 부모 | 아버지 황종묵(黃宗默), 어머니 성산 이씨[1] |
| 형제자매 | 3남 3녀 중 차남 |
| 자녀 | 장남 황규현(黃圭顯) 차남 황량현(黃亮顯) |
| 서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2002) |
1. 개요
조선 말의 유학자, 의병, 독립운동가.2. 생애
1848년(헌종 14) 6월 12일 전라도 남원도호부 사동방 수월촌리에서 아버지 황종묵(黃宗默)과 어머니 성산 이씨와의 사이에서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성리학을 배우며 자랐으며 효행으로 이름을 알렸다.나이 마흔에 이른 1888년(고종 25)에 천거를 통해 소경원[2] 수봉관이 되었고, 이듬해 1889년 종3품 중직대부로서 광릉령[3]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관직의 큰 뜻이 없어서 그만두었다.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군에서 조병갑의 폭정에 못 이긴 백성들이 보국안민을 내세워 동학 농민 운동을 일으키자 흥선대원군에게 이 사태를 진정시킬 해결 방안을 담은 글을 올리기도 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을미개혁의 추진으로 인한 단발령이 시행되자 전라북도 남원과 인접한 5개 읍에 단발령에 반대하는 통문을 돌렸지만,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했다. 다음해인 1896년에 나주군에서 기우만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합류하여 통문을 짓는 활동[4]을 하면서 다른 이들의 의병 참여를 독려하는 역할을 주로 했다. 그러나 2월 27일 선유사 신기선 등이 내려와 의병의 해산을 명령하는 왕명을 전하자, 통곡하며 의병을 해산했다.
1905년(광무 9) 11월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고광순, 이석용 등과 수차례 의병을 일으키는 일을 논의했으나 끝내 일으키지 못했다. 1910년 한일병합이 황제가 있는 북쪽을 바라보며 '천하의 일이 다 끝났다'고 말하며 실의에 빠졌다. 이후 장남과 차남에게 '대체로 국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먼저 죽게 되어 한스럽다. 나라의 지경이 망하게 되었는데 더 이상 살아있을 수 없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을 시도했으나 가족이 만류하여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자결에 실패한 후 집 앞 무산(舞山) 위에 의두대(倚斗臺)를 축조하여 매일 황제가 계신 곳을 향해 절을 하며 세월을 보내던 그는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붕어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부친 황종묵의 기일인 2월 3일 제사를 지내며 크게 통곡했다. 부친의 제사를 지낸 다음에 황석은 유서와 절명시를 작성하고 단도로 자결을 시도했으나 가족들이 이를 발견하여 치료를 받고 극적으로 살아났으나 6일 만에 다시 자결하며 결국 생을 마감하였다.
3. 여담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황석의 공을 기려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003년 '석정 황석선생 충혼비 건립추진위원회'와 남원시가 공동으로 추진하여 그의 고향인 수월마을에 <석정 황석선생 충의 기적비>를 건립했다. 2004년 12월 28일 국가보훈부(당시 국가보훈처)에서 <석정 황석선생 충의 기적비>를 현충시설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시문집 『석정유고(石庭遺稿)』가 국립전주박물관에 있다. 조선 후기 학자 최학의 시문집인 『석정유고(石亭遺集)』[5] 와 한국식 한자 독음이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