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박건(朴健) |
생몰 | 1880년 9월 20일 ~ 1943년 6월 11일 |
출생지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오촌동 |
사망지 | 만주 지린성 퉁화현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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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박건은 1880년 9월 20일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오촌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신돌석의 의병부대에 참가했고 1909년 신민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는 1912년 동지 이상룡, 김동삼 등과 함께 서간도 통화현으로 망명했고, 1913년 10월 만주 통화현 김두하락에서 독립운동단체 경학사(耕學社)의 후신인 부민단(扶民團)을 설립했다. 이듬해 4월 유하현 삼원보에서 이상룡, 김동삼 등과 함께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에 선출되었으며, 하서구에서 남흥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했다.1916년 3월 일본 경찰의 밀정 유길선(柳吉善)을 통화현 이도구에서 독립단의 한치응(韓致應), 박응서(朴應瑞)와 함께 습격해 처단했으며, 1919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해 국내 각 지방의 유지, 재산가, 학교 종교 상황의 실태 조사원으로 임명되어 국내로 잠입해 경상북도 의성군 일대의 현황을 조사, 보고했다. 그러나 1920년 5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즉결 처형될 위기에 몰렸지만 동생 박세진(朴世鎭)과 박명진(朴明鎭)이 김자선(金子善)과 함께 급습해 그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다시 만주로 망명한 박건은 1923년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회의에 참석했지만 임시정부 폐지를 주장하는 창조파와 임시정부 보전을 주장하는 개조파 간의 갈등이 극심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만주에 돌아온 그는 길림성 황기둔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했으며, 1927년 3월 신숙과 함께 전만대표자회의(全滿代表者會議)를 길림에서 소집하여 북만주 대표로 참석해 독립촉성회 결성에 힘을 보탰다.
1933년, 박건은 하얼빈에서 일본 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남자현, 이규동(李奎東) 등과 함께 암살 계획을 짰지만, 남자현이 체포된 뒤 사형당한뒤 무위로 돌아갔다. 그 후 그는 만주 지린성 통화현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43년 6월 1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박건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