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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노태연 (盧泰硏), 노태영 (盧泰榮) |
출생 | 1894년 |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성상리 | |
사망 | 1938년 (향년 43~44세) |
중국 허난성 뤄양시 |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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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노태연은 1894년생이며,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성상리 출신이다. 그는 1919년 5월 상하이에서 각 청년단체들이 연합하여 결성한 청년단(靑年團) 평의원(評議員)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 후원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그해 6월 12일에는 상해에서 조직된 구국모험단(救國冒險團)의 기술부원으로 선임되어 군자금 모집과 폭탄 제조, 무기 구입, 일본인 고위관리 암살 및 관청 파괴를 목적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1921년에는 군무총장 노백린의 무장투쟁론을 지지하는 의견서를 임시정부에 제출했다.이후 김구의 모친 곽낙원 여사와 함께 난징에서 기거하던 그는 1934년 2월 중국 허난성 뤄양시에 소재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 내에 한인특별반이 설치되자 4월에 김구의 명령에 따라 비밀연락소를 설치하고, 그의 조카인 노영호(盧榮昊)와 함께 군관학교 입교희망생인 백찬기(白贊基) 등을 모집하여 군관학교에 입교시키는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그해 12월 하순에는 낙양군관학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을 조직하고 학생부를 담당하여 오면직, 노종균, 안공근 등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간부들과 함께 국제정세 및 한국독립운동에 관한 정식교육을 실시하여 항일 특무활동 공작원을 양성하는 데 실질적 담당자 역할을 수행했다.
1935년 9월에는 뤄양시로 파견되어 김구의 특무활동 연락을 담당했으며, 그해 10월에는 한국특무대독립군 출신들로 구성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에 가입하여 김구의 특무공작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지만 1938년경 병에 걸려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노태연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