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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수

파일:남원수.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족보명 남세종(南世鍾)
서광(敍光)
본관 영양 남씨[1]
출생 1915년 2월 5일[2]
강원도 울진군 삼화면 정림리
(현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정림리)[3]
사망 1943년 9월 12일 (향년 28세)[4]
경상북도 대구부 삼립정 대구형무소
(현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2가)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444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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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남왈성은 그의 삼종조부(三從祖父)로, 8촌지간이며 그의 조부 남순하(南舜河)의 6촌 동생(재종제)이다.

2. 생애

남원수는 1915년 2월 5일 강원도 울진군 삼화면 정림리(현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정림리)에서 아버지 남진만(南鎭萬)과 어머니 파평 윤씨 윤병로(尹炳魯)의 딸 사이의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38년 2월 임시헌과 함께 독립운동에 뜻을 모으기로 결의했고, 4월 12일 울진군 울진면 죽변리에 거주하는 사덕수(史德洙)의 집에서 임시헌, 노하순, 전찬문(田燦文), 장세전, 최효대 등 울진 출신 인사들과 회합하여 준향계(準香契)를 조직했다. 그들은 일제가 일으킨 중일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일제의 국력이 약화될 것을 기대하였고, 그 틈을 이용하여 조국의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소규모의 조직 활동을 지속했고, 반일선전활동에 전념했다.

1939년 10월 28일, 남원수는 남정성, 노하순, 임시헌, 전원강, 주영석 등과 함께 준향계와 동일한 목적으로 유사한 조직 형태의 창유계(暢幽稧)를 조직했다. 창유계도 결성 이후 다섯 차례 비밀회합을 가져 여러 여러 인사들을 참여시켜 조직을 확대하고 반일선전활동을 강화했다. 그러나 1943년 3월 준향계와 창유계 모두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와해되었고, 남원수도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예심을 받다가 대구형무소에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1943년 9월 12일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남원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의 유해는 1995년 6월 2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1] 송정공파(松亭公派)-울진 정림(井林) 문중 18대손 종(鍾) 항렬. 영양 남씨 26세.[2] 음력 1914년 12월 22일.[3] 영양 남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남복이·남석순·남왈성·남왈기도 이 마을 출신이다.[4] 남씨대동보 3권 대광공후 송정공파(영양 본관) 414쪽에는 8월 12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