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1 11:02:01

김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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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민부 결사대원
김형권
金亨權 | Kim Hyŏnggwŏn
파일:김형권.jpg
이명 김형건(金亨鍵)[1]
본관 전주 김씨
출생 1905년 11월 4일
평안남도 평양부 고순화면 남동[2]
(現 평양시 만경대구역 만경대동 남리마을)
사망 1936년 1월 12일 (향년 30세)
경기도 경성부 현저정 서대문형무소
(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묘소 대성산혁명렬사릉
가족 할아버지 김응우
할머니 리씨 부인
아버지 김보현
어머니 리보익
부인[3]
아들 김원주
맏형 김형직, 형수 강반석, 둘째형 김형록, 둘째형수[4]
조카 김일성, 김철주, 김영주, 김창주
종손 김정일, 김만일, 김경희, 김평일, 김영일, 김현[5], 김백연[6]
경력 국민부 군자금 모집 결사대(軍資金募集决死隊)
? ~ 1930년 9월 4일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본관은 전주(全州)로, 김일성의 숙부이다.

2. 생애

대한제국 시기인 1905년 11월 4일 평안남도 평양부 고순화면 남동(現 평양시 만경대구역 만경대동 남리마을)에서 김보현리보익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조카인 김일성과는 7살 차이이다. 한술 더 떠서 사돈인 강량욱[7] 하고는 고작 1살(!!!) 연하다.

유년기 시절은 별로 알려진 게 없고, 형 김형직을 따라 한의사 노릇을 하다가 중화민국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안도현(安圖縣) 가대서리(街大西里)[8]로 망명해 그곳에 거주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30년 8월 봉천성 동변도 장백현(長白縣)[9]에서 김철(金哲)의 권유로 국민부(國民府)에 가입했고, 이어 국민부 산하 조선독립혁명군사부에 입대해 주로 군자금 모집에 힘썼다.

이후 평안남도 평양부 방면으로 건너가 군자금을 모집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최효일 등 두 명과 함께 군자금 모집 결사대를 조직했고, 각각 권총 1정, 탄환 200여 발 및 여비 약간을 소지하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 국내의 함경남도에 잠입했다. 그리고 그해 8월 12일 풍산군 안산면 내중리(現 량강도 김형권군 내중리)의 풍산경찰서 중리주재소에서 일행을 검문하던 마츠야마 이조(松山猪三) 도순사부장을 권총으로 사살하고 다른 순사에게는 총상을 입혔다. 그리고 민가 및 자동차를 습격해 군자금 모집을 추진하던 중 1930년 9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1년 10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살인미수, 강도 등의 혐의로 징역 15년형(재정통산 300일)을 선고받았고, 이에 공소했으나 1932년 4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공소 이유없음으로 징역 15년형을 그대로 선고받았다. 이후 경성형무소에서 투옥되어 복역하던 중 1936년 1월 12일 옥사, 순국했다. 향년 30세.

1930년대에 독립운동에 종사하다가 옥사했기 때문에 북한 정부 수립이나 6.25 전쟁범죄와는 관련이 없고, 대한민국은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기 때문에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시절이던 2010년 독립운동가로 인정받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그러나 김일성의 가까운 친척이라는 점 때문에 국민감정상 논란이 일었다. 사실 김형권은 독립운동에 적극 협조해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붙잡혀, 옥고를 치르다 사망하는 등 진정으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헌신한 인물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불행히 조카잘못 두는 바람에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 서훈 박탈 논란에 휩쓸리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사돈인 강진석[10]과 함께 안타까운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북한에서도 김일성의 삼촌인만큼 조선로동당에 의해 사후 우상화당한 희생자 중 하나이다. 실제로, 그가 활동하다 붙잡힌 함경남도 풍산군량강도 김형권군으로 이름을 바꿔 존재하며, 평양에 있는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우상화 묘지도 존재한다. 그의 이름을 딴 김형권통신병군관학교도 있었으나 최광통신병군관학교로 개칭되었다.


[1] 이 이름으로 독립유공자에 서훈되었다.[2]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 104번지가 되었다.[3] 아들을 낳은 부인이 있을 것이다.[4] 김창주가 있으니 형수가 있다.[5] 김일성의 개인 안마사 제갈순복이 낳은 아들[6] 김일성의 첩 김송죽의 딸, 1987년생이다.[7] 형수의 재당숙[8]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안투현 다시촌(大西村).[9]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바이산시 장백 조선족 자치현.[10] 이쪽은 김일성의 외삼촌으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으나 마찬가지로 박탈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