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김재준(동명이인) 문서 참고하십시오.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ffffff><tablebgcolor=#ffffff> | 한국기독교장로회 역대 총회장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 제1회 | 제2회 | 제3회 | 제4회 |
원두우 | 왕길지 | 배유지 | 김필수 | |
<rowcolor=#fff> 제5회 | 제6회 | 제7회 | 제8회 | |
양전백 | 한석진 | 김선두 | 마포삼열 | |
<rowcolor=#fff> 제9회 | 제10회 | 제11회 | 제12회 | |
김익두 | 이기풍 | 김성택 | 함태영 | |
<rowcolor=#fff> 제13회 | 제14회 | 제15회 | 제16회 | |
이자익 | 임택권 | 김석창 | 김영훈 | |
<rowcolor=#fff> 제17회 | 제18회 | 제19회 | 제20회 | |
염봉남 | 차재명 | 홍종필 | 장규명 | |
<rowcolor=#fff> 제21회 | 제22회 | 제23회 | 제24회 | |
남궁혁 | 장홍범 | 이인식 | 정인과 | |
<rowcolor=#fff> 제25회 | 제26회 | 제27회 | 제28회 | |
이승길 | 이문주 | 홍택기 | 윤하영 | |
<rowcolor=#fff> 제29회 | 제30회 | 제31회 | 제32회 | |
곽진근 | 최지화 | 김응순 | 배은희 | |
<rowcolor=#fff> 제33회 | 제34회 | 제35회 | 제36회 | |
이자익 | 이자익 | 최재화 | 권연호 | |
<rowcolor=#fff> 제37회 | 제38회 | 제39회 | 제40회 | |
김재석 | 김세열 | 박용희 | 박용희 | |
<rowcolor=#fff> 제41회 | 제42회 | 제43회 | 제44회 | |
함태영 | 구연직 | 이남규 | 강홍수 | |
<rowcolor=#fff> 제45회 | 제46회 | 제47회 | 제48회 | |
길진경 | 조승제 | 정규태 | 장하원 | |
<rowcolor=#fff> 제49회 | 제50회 | 제51회 | 제52회 | |
이해영 | 김재준 | 강원용 | 최문환 | |
<rowcolor=#fff> 제53회 | 제54회 | 제55회 | 제56회 | |
서정태 | 배성근 | 황희섭 | 조향록 | |
<rowcolor=#fff> 제57회 | 제58회 | 제59회 | 제60회 | |
박재석 | 이준묵 | 인광식 | 은명기 | |
<rowcolor=#fff> 제61회 | 제62회 | 제63회 | 제64회 | |
권영진 | 조덕현 | 윤재현 | 이국선 | |
<rowcolor=#fff> 제65회 | 제66회 | 제67회 | 제68회 | |
강신정 | 박형규 | 강명찬 | 송상규 | |
<rowcolor=#fff> 제69회 | 제70회 | 제71회 | 제72회 | |
이영찬 | 한상면 | 유병찬 | 기원형 | |
<rowcolor=#fff> 제73회 | 제74회 | 제75회 | 제76회 | |
박봉향 | 윤기석 | 최희섭 | 김수배 | |
<rowcolor=#fff> 제77회 | 제78회 | 제79회 | 제80회 | |
이쾌재 | 김정현 | 배야섭 | 유재천 | |
<rowcolor=#fff> 제81회 | 제82회 | 제83회 | 제84회 | |
백형기 | 서정래 | 강만원 | 이중표 | |
<rowcolor=#fff> 제85회 | 제86회 | 제87회 | 제88회 | |
김경식 | 윤기석 | 전병금 | 김옥남 | |
<rowcolor=#fff> 제89회 | 제90회 | 제91회 | 제92회 | |
김동원 | 박원근 | 양태윤 | 임명규 | |
<rowcolor=#fff> 제93회 | 제94회 | 제95회 | 제96회 | |
서재일 | 김현배 | 김종성 | 유정성 | |
<rowcolor=#fff> 제97회 | 제98회 | 제99회 | 제100회 | |
나홍규 | 박동일 | 황용대 | 최부옥 | |
<rowcolor=#fff> 제101회 | 제102회 | 제103회 | 제104회 | |
권오륜 | 윤세관 | 김충섭 | 육순종 | |
<rowcolor=#fff> 제105회 | 제106회 | 제107회 | 제108회 | |
이건희 | 김은경 | 강연홍 | 전상건 | |
<rowcolor=#fff> 제109회 | ||||
박상규 | }}}}}}}}} |
명지대학교 총장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서울고등가정학교 교장 | 근화여자초급대학 학장 | 서울문리사범대학 학장 | 명지초급대학 학장 | |
제1대 김재준 | 제2대 전호덕 | 제3대 민태식 | 제4대 유상근 | 제5대 유상근 | |
명지대학 학장 | |||||
제1대 유상근 | 제2대 박일경 | 제3대 박동섭 | |||
명지대학교 총장 | |||||
제1대 박일경 | 제2대 유상근 | 제3대 이영덕 | 제4대 고건 | 제5대 송자 | |
제6대 선우중호 | 제7대 정근모 | 제8-12대 유병진 |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자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1960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교육가·독립운동가 | 1969 이인 법조인·독립운동가 | 1969 닐 암스트롱 · 마이클 콜린스 · 버즈 올드린 우주비행사 | ||
1969 제헌국회의원 154명 | 1969 조동식 교육인 | 1970 김수환 추기경 | 1970 백낙준 교육인 | 1970 이상백 - | |
1971 유일한 기업인 | 1976 박일경 교육인 | 1980 권승렬 독립운동가, 법조인 | 1982 권영대 교육인 | 1982 김상만 언론인 | |
1985 이숙종 교육인 | 1987 이병철 기업인 | 1988 권이혁 교육인, 의사 | 1989 이방자 교육인, 영친왕비 | 1991 강영훈 국무총리 | |
1991 김병관 언론인 | 1994 김호길 교육인 | 1995 곽윤직 법학자 | 1996 장기려 의사 | 1996 윤덕선 의사, 교육인 | |
1996 정범모 교육인 | 1998 고흥문 국회의원 | 1998 주영하 교육인 | 2000 이건희 기업인 | 2002 김재준 종교인 | |
2002 문창모 의학자 | 2002 백낙환 의학자, 교육인 | 2006 김희수 의학자, 교육인 | 2006 이종욱 의사, WHO 사무총장 | 2006 정재헌 법조인 | |
2007 권영우 교육인 | 2007 장훈 체육인 | 2008 박관용 국회의장 | 2008 진창현 바이올린 제작자 | 2009 김정수 정치인 | |
2010 이영덕 국무총리 | 2010 조용기 종교인 | 2010 황장엽 북한정치인, 탈북자 | 2011 이태석 종교인, 의사 | 2011 김준엽 독립운동가, 교육인 | |
2012 헬렌 펄 매킨지(매혜란) 선교사 | 2012 김평우 법조인 | 2012 정몽구 기업인 | 2013 남덕우 국무총리 | 2015 권광중 법조인 | |
2016 이근 의사 | 2017 박한철 법조인, 헌법재판소장 | 2017 반기문 외교관, UN사무총장 | 2017 양승태 법조인, 대법원장 | 2018 김종필 국무총리 | |
2018 노회찬 정치인 | 2018 박재갑 의사 | 2018 이석태 법조인 | 2018 조규광 법조인, 헌법재판소장 | 2018 한승헌 법조인, 감사원장 | |
2018 정세균 국회의장 | 2019 윤한덕 의사 | 2019 이국종 의사 | 2020 이이화 사학자 | 2020 전태일 노동운동가 | |
2020 문희상 국회의장 | 2021 최종태 기업인 | 2022 박병석 국회의장 | 2023 송창근 기업인 | 2023 김박 기업인 | |
2023 자승 종교인 | 2024 이임성 법조인 | 2024 윤대원 의사, 교육인 | }}}}}}}}} |
<colbgcolor=#EEC008><colcolor=#00A99A>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자 김재준 金在俊 | Kim Jae-jun | |
출생 | 1901년 9월 26일 |
함경북도 경흥군 상하면 오봉동 창골마을# | |
사망 | 1987년 1월 27일 (향년 85세) |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 한양대학교병원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수안 김씨[1] |
아호 | 장공 (長空) |
학력 | 아오야마 학원 신학부 (신학 / 학사) 프린스턴 신학교 (신학 / 석사) 웨스턴 신학교 |
종교 | 장로회 |
[clearfix]
1. 개요
[2]대한민국의 장로회 목사이자 대표적인 진보적 신학자로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과 조선신학교(현재의 한신대학교) 설립에 공헌한 인물이다.
2. 생애
김재준 목사의 일대기 영상[3] |
1901년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중농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사서삼경 등 동양고전을 수학하였다.
일본 도쿄 아오야마가쿠인 신학부와[4]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웨스턴신학교(현재 피츠버그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였으며, 1933년 평양 숭인상업학교에서 교목 겸 교사로서 성서를 가르쳤다.
평양에서 장로회 목회자를 양성하던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거부 등의 이유로 폐쇄되자, 선각자 김대현 장로와 뜻을 모아 1940년 서울에 조선신학교(현재의 한신대학교)를 설립한다. 이전의 평양신학교가 서양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것과 달리 조선신학교는 조선인 신자들이 교육하고 교육받는 학교로 계획되었다. 그리고 1945년 경동교회를 설립한다.
그러나 광복 이후, 조선신학교에서 성서비평학을 가르치는 문제로 인해 교단 내 보수파와 갈등을 겪게 된다. 교단 내 보수파는 조선신학교에 대한 불신임을 선언하고 별개로 서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운다. (이 신학교가 예장합동의 주요 신학교인 총회신학대학교와 예장통합의 장로회신학대학교가 된다.) 1935년 '아빙돈 성서 주석 사건' 이 일어났을 때 송창근, 한경직, 김장환 목사와 일부 보수 신학자들은 조선신학교에서 김재준이 가르치는 소위 '고등비평'이 성서의 문자적 무오설(축자영감설)을 부정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이에 따라 김재준은 이단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이후, 1953년 대한예수교장로회는 김재준의 목사직을 제명했다. 1953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8회 총회에서는 "목사 김재준 씨는 제36회 총회결의 위반급 성경유오설을 주장하였으므로 권징조례 제6장 42조에 의하여 예수의 이름과 그 직권으로 목사직을 파면하고 또 그 직분행함을 금하노라 선언" 하였다. 이에 김재준을 중심으로 한 교인들은 독립하여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를 형성하였다. 이후 군사독재 반대 및 민주화 운동 참여를 계기로 오늘날 기장은 대한성공회와 더불어 가장 진보적인 교단로 불린다.
김재준은 1969년 박정희 대통령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고 삼선 개헌에 반대하는 운동에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할 것을 권고했지만 결국 1969년 9월 14일 개헌안이 기습 통과되어 수포로 돌아가버렸다.
결국 김재준은 민주화를 보지 못하고 1987년 사망하였다.[5] 대한민국 정부는 김재준의 민주화운동과 신학발전에의 기여를 기려 2002년 12월 27일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다.[6]
3. 논란 및 비판
3.1. 소위 '고등비평' 논란
김재준에 '고등비평' 논란에 대한 한겨레 조현 기자와 김경재 목사의 대담
김재준에 대한 신학적 반대파는 김재준이 성경에 대한 소위 고등비평을 시도함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김재준은 성경을 마치 세상의 문학작품 등과 같이 비평적으로 접근하고자하고 이는 성경에 오류가 있음을 전제하는 성경유오설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러한 신학적 논란에 의해 김재준은 교단에서 파문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들이 김재준에게 씌운 '고등비평'이라는 레이블은 실상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이었으며, 이후 예장통합의 신학교인 장신대에서도 성서신학 커리큘럼에 포함하는 주류 개신교 신학의 경향이다. 김재준을 오해한 경직된 신학관은 50년대 당시 한국 장로회가 아직 미성숙한 시기였던 탓으로 볼 수 있다. 당시 한국 장로교단에는 해외 선교사들의 지원과 영향이 여전히 존재했는데, 김재준의 무고한 파문 소식을 듣고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단을 포함한 많은 해외 선교단체가 대한예수교장로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 특히 캐나다 연합교회는 적극적으로 김재준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며 조선신학대학교 유지비용을 선교회 차원에서 충당해주었다. 이러한 계기로, 캐나다 연합교회와 기장 교단은 오늘날까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예컨대 한신대 출신 목회자들이 유학을 갈 경우 캐나다 연합교회 계열 신학교인 토론토 대학교 임마누엘 칼리지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김재준 파문 이후에도 대한예수교장로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던 미국 장로회(PCUSA)는 오늘날 예장(통합)과 형제교회로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김재준에 '고등비평' 논란과 대한 파문은 당시 교단 내 보수파와의 갈등에서 빚어진 오해였으며, 이에 대해 예장통합은 2016년 공식적으로 김재준에 대한 파문을 취소하고 사과했다.기사
3.2. 친일논란
조선신학교 설립 당시 김재준은 신사참배를 '개인의 자유로 맡기자'는 투로 사실상 방관 내지는 허용했다. 민족 신학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명분이라고 포장하기는 하였으나 이는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친일행위에 가담한 것으로 판단된다.[7]나무위키의 한국기독교장로회 항목 중 친일행위 단락에도 언급되었다시피, 김재준을 포함한 한국기독교장로회, 더 나아가 오늘날 대한예수교장로회 등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적통을 잇는 한국 장로교 교단들은 모두 친일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의 장로회 교단 중 이러한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교단은 예장(고신), 예장(재건), 예장(순장) 등 저항파 교단과 침례회(구 동아기독교-포항파) 정도 뿐이다. 예장 고신은 신사참배반대로 투옥되었다가 광복후 출옥한 소위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교단이다.
이와 같이 친일은 한국 개신교의 광범위한 치부에 해당하기 때문에 교단을 떠나 과거 친일 논란을 대놓고 공론화시키는 것을 꺼리는 추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거 자신들의 친일논란, 특히 김재준을 포함한 자기 교단 지도부에 대한 친일에 대한 반성이 교단 내부에서 나오는 곳은 기장뿐이라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즉, 친일행위에 대한 인정과 사과요구가 오직 에큐메니안이나 뉴스엔조이 등 기장측 성향의 진보적 기독교 언론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에큐메니안은 기장총회 행사를 홍보하거나 새로 교단 집행부가 들어설 경우 집행부 인터뷰를 보도할 정도로 친 기장 성향의 매체이다. 뉴스엔조이 역시 한신대학교 출신 기자들이 주류를 이루는 언론사답게 기장에 대한 기사를 많이 내보내곤 한다. 이들에게 있어 과거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친일행위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기장에게 돌아오고 따라서 이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의 교단 지정 신학교의 설립자였던 김재준에 대한 사과를 기장 총회와 한신대학교에 요구하는 것이다. 에큐메니안 기사 뉴스엔조이 기사
4. 여담
김재준 목사가 작사한 '어둔 밤 마음에 잠겨' |
- 찬송가 582장(새찬송가, 통일찬송가 261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는 김재준 목사가 직접 작사한 찬송가이다. 주로 통일, 국경일 예배시에 사용되는 곡이다.
- 경동교회의 장공채플, 한신대학교의 본관인 '장공관'과 신학대학원 도서관인 장공도서관은 김재준의 아호인 장공에서 이름을 따왔다.
[1] #[2] (출처: 국민일보 기사#)[3] 경동교회가 제작한 영상으로 김재준 관련 사진 및 클립 모음이다[4] MARCH에 속하는 그 아오야마가쿠인이다. 신학부는 2차대전 이후 도쿄신학교로 이관되었다.[5] 이미 1980년대 들어서는 고령에 건강문제로 공개활동은 거의 하지 못하고 대신 민통련, 국본 등 주요 민주화 운동 단체가 출범할때마다 상임고문으로 이름을 올리면서 지지의사를 표시하였다. 이즈음에는 문익환 목사가 진보기독교계를 대표해서 민주화운동을 이끌게 된다.[6] 상훈법 상 사유는 '국민화합 및 국가발전유공자'로 기록되었다. 자세한 내용 및 기타 대한민국 상훈기록 관련은 상훈기록 검색 사이트 참조#.[7] 또한 조선신학교 설립 공동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린 채필근 송창근 목사의 경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후보에 올랐다.기사 그러나 채필근 송창근의 경우 서울 조선신학교 설립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고,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것도 조선신학교와 관련된 사유 때문이 아니라 후평양신학교 건립에서의 행적으로 인한 것이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평양신학교가 수업을 중단하자 일제에서 곧바로 이름만 빌려 평양신학교를 다시 세웠는데, 채필근과 송창근은 여기에 힘을 보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