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8-02 15:49:13

칼 바르트

근현대 신학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81818,#e5e5e5
중세 철학 근현대 신학
살라망카 학파 <colbgcolor=#fafafa,#191919>프란시스코 비토리아, 프란시스코 수아레스, 루이스 데 몰리나,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도밍고 바녜스 <colbgcolor=#fafafa,#191919> 가톨릭 신학
가르멜 신비신학 예수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 에디트 슈타인
튀빙겐 가톨릭 학파 요한 세바스티안 드라이, 요한 아담 묄러, 요한 에방겔리스트 폰 쿤
신스콜라학 조반니 페로네, 카를로 파살리아, 요한 밥티스트 프란첼린, 토마스 칠리아라, 레지날드 가리구-라그랑즈
Nouvelle théologie 앙리 드 뤼박, 피에르 테이야르 드 샤르댕,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이브 콩가르, 카를 라너, 한스 큉, 에두아르드 스킬레벡스, 마리-도미니크 셰뉘, 장 다니엘루, 요제프 라칭거
가톨릭 해방신학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우고 아스만, 레오나르도 보프, 혼 소브리노
가톨릭 여성신학 로즈메리 래드포드 류터
흑인신학 제임스 H. 콘
재신론 리처드 카니
종교 개혁 마르틴 루터, 안드레아스 카를슈타트, 울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 하인리히 불링거 개신교 신학
청교도주의 윌리엄 퍼킨스
급진 종교개혁 토마스 뮌처
칼뱅주의 테오도르 베자, W. 퍼킨스, 존 오웬, 하이퍼 칼빈주의, 찰스 호지, 콜린 건튼
아르미니우스주의 아르미니우스
정통주의 개신교 스콜라신학
경건주의 필립 스페너
뉴잉글랜드 신학 조나단 에드워즈
웨슬리주의 존 웨슬리
고전적 자유주의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알브레히트 리츨, 찰스 어거스터스 브릭스, 아돌프 폰 하르낙, 월터 라우션부시, 에른스트 트뢸치
낭만주의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신칼뱅주의 아브라함 카이퍼
실존주의 쇠렌 키르케고르
근본주의
은사주의 존 윔버, 윌리암 시무어, 데니스 바네, 피터 와그너, 오순절주의
무교회주의 우치무라 간조
과정신학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정치신학
신정통주의 루돌프 불트만, 칼 바르트 (바르트주의), 폴 틸리히 (틸리히주의), 에밀 브루너, 라인홀드 니버 (현실주의), 에두아르드 투르나이젠, 디트리히 본회퍼, H. 리처드 니버
신자유주의 존 힉, 존 셸비 스퐁, 마커스 보그
신복음주의 빌리 그레이엄, 칼 헨리, 존 스토트
개신교 해방신학 민중신학, 퀴어신학
희망의 신학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위르겐 몰트만
세속화 신학 하비 콕스
후기자유주의 조지 린드벡, 한스 프라이, 스탠리 하우어워스
바울에 대한 새 관점 E. P. 샌더스, 제임스 D. G. 던, N. T. 라이트
고전정통주의 토마스 C. 오든
급진 정통주의 존 밀뱅크, 제임스 K. A. 스미스
기독교 이신론 존 톨런드 기독교 세속주의
사신신학 윌리엄 해밀턴, 토마스 J. J. 알타이저, 폴 반 뷰렌, 가브리엘 바하니안, 기독교 무신론
기독교 불가지론 레슬리 웨더헤드
약한 신학 존 D. 카푸토
Pyrotheology 피터 롤린스 }}}}}}}}}}}}
'''칼 바르트
Priest, Theologian | Karl Barth
'''
출생 1886년 5월 10일
스위스 바젤
별세 1968년 12월 10일 (향년 82세)
스위스 바젤
학력 마르부르크 대학교 (독일 헤센주 마르부르크 시)
종교 개혁교회
가족 아내 넬리 호프만
딸 프랜지스카, 아들 마커스, 크리스토프, 마티아스, 한스 제이콥
서명 파일:karl_barth_sign.jpg

1. 개요2. 생애
2.1. 어린시절 (1886-1904)2.2. 학창시절 (1904-1911)2.3. 자펜빌 목회시절 (1911-1921년)
2.3.1. 사회주의 운동2.3.2. 자유주의 신학과의 결별2.3.3. 블룸하르트와의 만남2.3.4. 결혼과 가족관계2.3.5. 『로마서 강해』출간
2.4. 독일 대학교수 시절(1921-1935년)
2.4.1. 괴팅겐 대학시절(1921-1925)2.4.2. 뮌스터 대학시절(1925-1930)2.4.3. 본 대학시절(1930-1935)
2.5. 스위스 바젤 대학교수 시절(1935-1962년)2.6. 은퇴 그리고 사망(1962-1968)
3. 바르트 신학개요
3.1. 하르낙과의 논쟁3.2. 로마서 강해3.3. 안셀름 연구3.4. 바르멘 신학선언3.5. 자연신학 논쟁3.6. 교회교의학
4. 평가5. 저서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나는 흡사 어두운 밤에 종탑을 올라가는 사람 같았다.
나는 비틀대다가 난간대신 종 줄을 잡아 버렸다.
놀랍게도 커다란 종소리가 온 동네로 울려퍼졌다.

—칼 바르트, 1922년 『로마서 강해』 제2판이 출판되고 신학계에 던진 반향(反響)에 대해서 회고했었을 때.[1]
Karl Barth | 칼 바르트
신정통주의자들에게서 종교개혁 이후로 가장 위대한 개신교 신학자로 평가받으며, 스위스의 개혁 교회 목사이자 20세기의 신학자였으며,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 신학을 끝내고 20세기의 신전통주의 신학의 태동기를 알렸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강조했고 유명한 『로마서 강해』와 『교회교의학』을 저술했다.

2. 생애

2.1. 어린시절 (1886-1904)

1886년 5월 10일 스위스 바젤에서 독일계 스위스 인으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칼빈계열의 개혁교회 목사였는데 아버지를 따라서 독일의 루터교가 아니라 개혁교회의 신학을 따라갔다. 바르트의 가계는 전형적인 유럽의 목회자 집안으로 조부와 외조부 모두 목사였다.
그는 어린시절 장난을 많이 치고 말썽도 많이 부려서 아버지에게 상당히 혼이 많이 났다고 한다. 전형적인 말썽쟁이였는데 바르트의 부모는 바르트가 10살에 바이올린을 배우게 했지만 그렇게 열정적으로 배우지는 않았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못한 것은 아니라서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연주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헨델과 모차르트 곡을 연주하기 좋아했고 특히 모차르트에 대한 사랑은 그가 죽기전까지도 이어졌다. 이 시기에 바르트는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를 짓거나 낭송하는 것을 즐겼다. 바르트는 이 때를 행복한 시절이라고 회고 했다.

2.2. 학창시절 (1904-1911)

1904년부터 바르트는 신학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네바에서 목회를 시작하던 시기였다. 18세 1904년 베른 대학에서 신학을 시작했는데 당시 바르트는 칸트의 철학에 깊이 빠진다. 그의 철학을 통해서 복음은 복잡하고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선명하고 누구라도 접근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데 이는 바르트의 사상에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다.
이후 1906년 독일의 베를린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신학을 공부했다. 여기서 그는 자유주의 신학을 배우게 되는데 당시 자유주의 교의학의 대가 카프탄(J. Kaftan)과 구약학자 궁켈(H. Gunkel) 그리고 역사신학자로는 하르낙(A. Harnack)에게서 열정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을 배우게 된다.
이후 1907년 베른 대학에서 잠시 지내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튀빙겐 대학으로 갔으나 1908년 4월에 마르부르크 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루터교 독일 신학자인 윌리엄 헤르만(W. Hermann)을 만나게 되고 『로마서 강해』1판 이후 자유주의와 단절 했음에도 그의 제자로서 헤르만의 영향력이 받게 된다.

2.3. 자펜빌 목회시절 (1911-1921년)

1909년 바르트는 마르부르크를 떠나 목회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약 2년간 부교역자로 봉사했는데 첫 사역지는 제네바에 있는 개혁교회였고 그 이후 취리히에서 목회생활을 하였다. 이후 목사고시에 통과 하였으나 자신의 양심의 문제에 부딪쳐 즉시 안수를 받지 않았다.

2.3.1. 사회주의 운동

1911년에서 1921년까지 그는 자펠빌(Safenwil)에서 목회를 하였다. 이 시기 그는 사회주의 정신으로 근로자의 입장에 서려는 목회로 당회와 자주 충돌했다. 당시 자펠빌은 공업도시로 근로자들이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편물직공 55명을 조직해 공장주와 맞서도록 해서 공장주들과 상당한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1911년부터 "인권과 시민의 의무" "복음과 사회주의","사회정의를 위한 예수와 운동" "1944년엔 "복음과 사회주의"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또한 사례비 문제와 관련지어서도 당회와 다툼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런 이유들로 해서 당회는 바르트를 '붉은 목사'라고 문제시 삼았다. 이런 사회운동과 관련 지어서 그는 진정한 삶(real life)와 진정한 문제(real problem)이 뭔지 알게 되었다고 말 할 만큼 세상과 당시 실존을 경험하게 되었다.

2.3.2. 자유주의 신학과의 결별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자인 하르낙과 헤르만으로부터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자유주의를 신봉하였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지성인 93인이 독일 황제의 전쟁정책이 기독교 문명 보호에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여 이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 사건이었는데, 하르낙이 이것을 기초하였고, 헤르만, 제베르그, 라데등 다수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이에 서명하였다. 바르트는 그들이 "지성인의 선언"에 서명한 것은 잘못된 신학과 철학에 근거한 것으로 보고 그들의 정치적 이념과 신학은 장래성이 없다고 판단하기에 이른다. 이후 바르트는 더이상 그들의 입장을 따를 수 없었고 그것으로 자유주의 신학을 종언하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2.3.3. 블룸하르트와의 만남

하지만 그의 자유주의 신학의 포기하면서 생긴 사상적 공백이 문제였는데 그것은 도스토예프스키, 키에르케고르에게 영향을 받게 된다. 무엇보다도 투르나이젠을 통해 블룸하르트(Christoph Blumhardt) 부자를 알게 된다. 바르트는 1945년 4월에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Christoph Blumhardt)와 만남을 가지면서 그의 아버지인 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J. C. Blumhardt)의 설교와 저서를 탐독하게 된다.
당시 그는 하나님 나라의 세상을 뒤흔드는 역동성과 이를 서두름 속에서 인내하며 기다리는 인간의 관계를 보여주었다. 바르트는 "승리자 예수"를 주제로 한 설교에 감동을 받게 되었다. 블룸하르트 부자는 "예수는 승리자"(Jesus ist Sieger)라는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예수만이 진정한 악의 힘을 이긴다는 의미였다. 바르트는 이들을 통해서 '거룩한 계시만이 현실을 변화시킨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 계시는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바르트 신학에서 블룸하르트의 신학을 바르트는 그의 저서였던 『교회교의학』Ⅳ/3 화해론에서 다루는데 서구에서 "예수는 승리자"라는 항목으로 길게 다뤘다. 이와같이 바르트의 신학에서 블룸하르트는 바르트의 신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바르트에게서 나타는 승리자 예수와 기독론 집중은 블룸하르트의 사상과 깊은 연관이 있다.

2.3.4. 결혼과 가족관계

1911년에 바르트는 넬리 호프만과 약혼을 하였다. 2년 뒤 1913년에 결혼하게 되고, 딸 하나에 아들 네명을 낳았다. (딸 프랜지스카, 아들 마커스, 크리스토프, 마티아스, 한스 제이콥)

2.3.5. 『로마서 강해』출간

이 시기 바르트는 목회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 특히 설교 문제에 대해서 아주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가 설교 준비를 몇 번이고 고민하고 며칠씩 매달리기도 하였지만 그의 설교는 교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는 이 상황을 "항상 머리로 벽을 치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이후 자펠빌을 떠났다가 1935년에 다시 자펜빌읠 교회를 방문하여 설교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그 당시 목회할 시절을 회상하면서 복음을 분명하게 알고 선포하지 못했다고 하며 '자펜빌의 목사로서 실패자였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의 설교에 대한 고민은 본질적인 고민-무엇을 선포할 것인가란 답을 '성서'로 돌아가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로마서 강해』이다. 『로마서 강해』는 세 출판사로부터 출판을 거절당한 후 1919년 베른의 작은 출판사에서 제1판을 인쇄했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1,000권 중 기증한 300부 외엔 거의 팔리지 않았다. 그 자신도 자신과 가까운 주위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독일에서 다시 출판된 『로마서 강해』1판은 신학계에 상당한 관심을 끌게 되었고 이 영향으로 1921년 괴팅겐 대학으로 초청되어 교수가 된다.
하지만 일약 세계적인 신학자가 된 것은 1922년 완전히 고쳐진 『로마서 강해』2판이었다. 이 책으로 인하여 새로운 신학의 장이 열리게 되었다. 투르나이젠은 불난 것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알아채고 뛰어나간 것 같다고 말했으며, 가톨릭 신학자 아담스(K.Adams)는 자유주의 신학자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졌다고 표현했다. 바르트 본인 마저 그가 쓴 『로마서 강해』가 던진 반향에 놀라워 했다. 그리고 그는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를 비판하며 비슷한 신학적 인식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루터와 칼뱅 등 종교개혁가들의 신학을 받아들이며 다시 재해석했고 이후 이들의 신학은 강조점에 따라서 '위기의 신학', 신학방법론에 따라선 '변증법적 신학' 그리고 교회사적으로 '신정통주의 신학'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2.4. 독일 대학교수 시절(1921-1935년)

1921년부터 1935년까지 바르트가 독일의 여러대학에서 교수로 일했던 시절의 항목이다.

2.4.1. 괴팅겐 대학시절(1921-1925)

1921년 바르트는 『로마서 강해』로 인하여 개혁신학 교수로서 교수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이때 중요한 사건은 하르낙과의 신학논쟁이었는데 1923년 하르낙이 "학문적 신학을 경멸하는 자들에 대한 15개의 질문"이후 공개 신학논쟁이 벌어진다.

2.4.2. 뮌스터 대학시절(1925-1930)

1925년 뮌스터 대학에서 교의학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당시 그의 첫 세미나는 "칼뱅의 강요"였다. 칼뱅에 대한 강의와 해석은 바르트가 개혁신학자로서의 위치를 명백하게 보여줬다.

2.4.3. 본 대학시절(1930-1935)

1930년 그는 본(Bonn)대학의 교수로 취임하였다. 이 시기를 바르트의 생애에 있어서 전기와 후기로 나눈다면 이 시기를 기점으로 나눌 수 있다. 1931년 바르트는 『안셀름: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내놓는다. 이 책은 어떤 다른 책보다 더 깊은 애정으로 저술했다. 일반적으로 이 책을 통하여 바르트가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을 위한 방법론을 찾았다고 평가한다. 이는 초기 바르트는 하나님의 절대성, 일방성, 초월성이 너무 강조된 나머지 인간과의 상호성과 연결성이 약화 된다는 지적이 었었지만 후기엔 인간에 대한 긍정과 연결성이 강하게 드러나는데 바로 『안셀름: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 중요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1932년 그가 본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을 때에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을 집필하였다. 이 저서는 1932년부터 시작하여 1968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36년동안 집필한 8,000면에 달하는 12권의 방대한 전집이었지만 이 방대한 저서는 미완성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한편 1933년경 독일교회는 독일의 나치 정권에 지배를 받게 되었다.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이념이 제국교회화 되기 시작되었다. 그렇기에 뜻있는 목사들이 모여 독일 고백교회(German Confessing Chruch)를 결성했다. 1934년 5월에 '바르멘 신학선언'(Barmen Theological Declaration)을 선포하는데 히틀러 정권을 비판하는 고백교회의 신학선언이었다.
이 시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은 브루너(E. Brunner)와 소위 자연신학 논쟁(혹은 계시논쟁)을 벌였고 이 논쟁을 통하여 바르트 신학에 중요한 특징이 내보이기도 하였다.

2.5. 스위스 바젤 대학교수 시절(1935-1962년)

1934년 12월 본 대학으로부터 교수직을 박탈당한다. 직접적인 이유는 바르트가 강의를 시작할때 나치식 경례를 하지 않는다는 것과 히틀러에 대한 충성 서약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던 것인데 이로 인하여 교수직을 박탈당하게 되었다.
이후 바르트는 고향인 바젤로 돌아갔고 바젤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한다. 이후 은퇴할때까지 큰 변화없이 생활하게 되었다. 바르트는 이때부터『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을 본격적으로 집필한다. 이 책은 4부 13권으로 구성된 약 9,185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었으나 결국 미완성이 되었다. 『교회 교의학』첫 번째 권은 1932년에 출간되었고 두 번째 책은 1938년에 출판되었다. 마지막 '세례론'은 1967년에 출판되었다.
이 시기에 바르트 사상에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면 1956년 아라우(Aarau)에서 행한 "하나님의 인간성"이란 강연이었는데 이 강연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인간성에 대하여 강조했다. 이는 초기 바르트가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를 강조한 것과는 상당한 변화를 보여주는데, 예수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인간성'에 대한 근거를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2.6. 은퇴 그리고 사망(1962-1968)

1962년 3월 1일. 바르트는 고별강연을 끝으면 바젤 대학을 은퇴하였다. 은퇴이후 초기엔 미국강연도 하였으나 점점 학교에 거의 출근하지 않았지만 학생들을 집이나 레스토랑에 불러 세미나를 하거나 만났다. 1964년 그의 건강이 나빠지기 전까지는 여러가지 사회 활동도 했었지만 건강이 나빠진 이후 마지막 2년 동안은 몸이 불편하여 사회 활동도 중단했다.
1968년 12월 8일. 바르트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예배를 드렸고 오후는 부인 넬리와 시간을 보냈다. 늦은 오후 사위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요양소에 있는 샬롯데를 방문했다. 9일에는 종일 강의를 준비했고 저녁에도 강의 원고 작성에 시간을 보냈다. 늦은 밤 친구였던 투르나이젠과 우울한 세계정세에 대해서 대화 했는데 대화 중에 걱정하지 말라면서 불름하르트의 "그(예수)가 다스릴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했다. 전화가 끝나고 그날 밤 쓰던 원고를 마치지 못하고 그는 잠자리에 들었고, 1968년 12월 10일 새벽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향년 82세였다.

3. 바르트 신학개요

다음의 내용은 아래의 문헌을 통하여 쓴 것임을 밝힌다.
* 목정균, 『현대신학논쟁』(1995, 서울 : 도서출판 두란노).
* 김동건, 『현대신학의 흐름 - 계시와 응답』(2008,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3.1. 하르낙과의 논쟁

3.2. 로마서 강해

바르트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는 것을 꼽자면 바로 『로마서 강해』라고 볼 수 있다. 바르트의 사상에 있어서 표면적으로 나타낸 시기가 1915년인데 당시 그는 사회민주당에 가입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유주의 신학과 끝을 낸 다음에 나타난 사상에 주목해야 한다. 당시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사회적 행위가 동일하다'라는 생각을 버리고 성서에는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세계가 아닌 전혀 다른 세계가 존재한단 사상이 나오게 된다. 성서의 길은 종교의 길과 다르고 성서가 보여주는 세계는 인간의 종교가 아닌 위대한 세계에 대해서 말했다.
성서의 내용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인간의 사상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올바른 사상이다. 성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이야기 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가를 알려준다. 어떻게 우리가 그에게 도달하는 길을 발견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가 우리에게 도달하는 길을 찾으셨고 또 발견하셨는가 함이다.[2]
바르트가 이때 발견한 성서의 세계는 그에게 완전히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게 되었다. 바르트는 성서에서 새로운 세계,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헤아 릴 수 없는 사람을 발견했다.
이러한 바르트의 사상은 1919년 『로마서 강해』1판으로 나오게 되었고, 여기서 그는 인간의 이성을 신뢰한 자유주의와 개인적인 도덕을 신뢰한 경건주의 모두를 비판했다. 인간의 죄와 죄성에 대해서 인간의 경건과 성취에 대해서 심한 회의를 보였다.
『로마서 강해』1판은 그의 변증법적 신학의 특징이 들어난다.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강조하고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부정과 긍정을 통한 인식도 내보였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확장하고 역사 속에서 완성된다.
『로마서 강해』2판은 1판에서 내보인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낭만적인 기대를 완전히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바르트는 이 『로마서 강해』2판을 통해서 신학적 거장이 되었다.

3.3. 안셀름 연구

바르트의 사상에 있어서 후기 바르트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가 1931년에 그가 쓴 『안셀름 :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봐야 한다. 안셀름이 신의 존재 증명을 논한 『프로스로기온』(Proslogion)에 대한 연구를 통한 연구결과로서, 바르트는 자신의 저서인 『교회교의학』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키포인트이자 자신의 전 사상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열쇠"라고 말했다.
바르트는 안셀름 연구를 통해 신앙이 어떻게 비합리적이지 않고 합리적 성격을 가지며 신과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한 토대를 놓는다. 자유주의 신학은 종교적 지식은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이 않다는 확신 위에 서었는데, 이를 토대로 신학은 성서의 다양한 개념과 상징적 표현을 잘 해석하여 동시대 사람들에게 이해 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과 같은 범주에서 '합리성'으로 인식 되는 것을 동의하지 못했다. 바로 이 합리성에 대하여 동의하지 못한 그는 신앙은 정말 불합리 한 것이며 이해를 거부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었고 『안셀름 :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통하여 대답을 내놓게 되었다.
이 책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학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기존의 생각을 고수한다. 그 이유는 바르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인간에게 들려지는 메시지이다. 메시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선포될 때 들려질 수 있는 합리적 성격을 내포한다. 즉,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라는 인격과 들려지는 메시지의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낟. 따라서 메시지는 선포되고 인식될 때 합리성을 가진다.
바르트는 하나님을 궁극적인 진리, 즉 '진리의 합리성'으로 보았다. 다른 모든 합리성은 진리의 합리성에 근거하는 것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된다고 봤다.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 신에 대한 인식을 가질 수는 없지만 일단 하나님으로부터 진리가 계시되면 인간은 합리성을 가지고 신에 대한 인식을 가질 수 있다. 인간은 말씀에 대한 인식 능력을 창조하지 못한다. 그러나 말씀이 인간에게 계시가 되면 인간에 의하지 않고 인식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인간은 결코 수동적이고 약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신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알릴 때 이 대상이 다른 것으로 계시 될 수 없다. 인식의 필연성은 인식의 대상을 다르게 인식 할 수 없는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계시에 의해 신에 대한 인식이 일어나면 그 대상에 대해 다른 인식이 불가능하다. 신앙의 대상에 대한 '합리적' 지식은 신앙의 대상으로 오는 것이며, 결구 이건 궁극적 진리인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하나님이 인식될 수 있도록 자신을 허락하지 않으면 신앙은 어떤 것도 인식 할 수 없다. 신앙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신앙은 본질적으로 이해를 추구한다.
신학은 신앙과 연관돼서 신학은 신앙이 일으킨 이해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고 신상에 내재된 말씀을 인간에게 새롭게 만나게 된다. 그래서 신앙은 모호하거나 추상적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는 구체적 사건이며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자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신앙은 하나님에 의하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고 신비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는 말씀이 들려지고 인식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신앙은 결코 비논리적이거나 비합리적일 수 없다. 신앙의 행위는 근본적으로 인식적이고 개념적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지식의 근원으로서 이해의 대상으로 허락될때 진정한 이해인 신앙이 가능하다고 봤다. 신학의 과제는 우리 지식에 주어진 것을 통해 더 확고한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으로 봤다. 안셀름 연구를 통하여 바르는 신앙과 이성의 간격에 교두보를 놓았고 변증법적 사고에서 교회 교의학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3.4. 바르멘 신학선언

3.5. 자연신학 논쟁

3.6. 교회교의학

4. 평가

5. 저서

국내 출판된 저서 기준.
  • 로마서 강해
  • 교회교의학 Ⅰ/1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Ⅰ/2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Ⅱ/1 하나님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Ⅱ/2 하나님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Ⅲ/1 창조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Ⅲ/2 창조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Ⅲ/3 창조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Ⅲ/4 창조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Ⅳ/1 화해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Ⅳ/2 화해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Ⅳ/3-1 화해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Ⅳ/3-2 화해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Ⅳ/4 화해에 관한 교의
  • 교회교의학 개론
  • 개신교신학 입문
  • 자연신학 - 에밀 브루너의 자연과 은혜와 칼 바르트의 아니오
  • 교의학 개요 - 사도신경에 담긴 기독교 진리
  • 칼 바르트 기도 - 종교개혁 교리문답에 따른 주기도 해설
  • 울프강 폰 모차르트
  • 설교자의 기도
  • 하나님의 인간성
  • 사도신경 해설

6. 관련 문서


[1] 가톨릭 신학자 아담스(K.Adams)는 자유주의 신학자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졌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보여 줬다고 볼 수 있었다.[2] K.Barth,『성서 안의 새로운 세계』(서울 : 기독교서회,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