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4-11 16:22:51

신정통주의


1. 개요2. 계몽주의자유주의,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신정통주의3. 사상적 특징
3.1. 교파별로 보는 시각
4. 한국 개신교로의 유입
4.1. 수용 논란으로 인한 장로교 분열4.2. 성서비평학 수용 및 정치적 문제
5. 현황6. 현재 한국에서 바라보는 시각7. 상대주의 및 다원주의적 태도8. 비판
8.1. 정통주의의 비판8.2. 신 스콜라주의의 비판
9. 옹호10. 관련 어록11. 신정통주의 신학자12. 같이 보기

1. 개요

신정통주의 新正統主義

Neo-Orthodoxy, 또는 변증법적 신학(독일어:Dialektische Theologie)으로 부른다. 네덜란드에서는 '중도 정통주의'(midden-orthodox)라고 부르는데 이는 정통주의(orthodoxie)의 대를 이으면서도 자유주의(vrijzinnig)의 성향 또한 지닌 양 성향의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기존 자유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로 20세기 초반에 시도된 개신교 신학의 한 노선이며, 후기 자유주의(post-liberalism) 신학과도 관련이 있다.

이름대로 정통적인 유신론만을 펼쳐는 본래의 정통주의자들과 인간의 이성이 성경의 계시보다 우위라는 자유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이 둘과는 다르게 쇠렌 키르케고르의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계승하며 기존 유신론자들을 정면에서 비판하고 다양한 철학 운동(예를 들어 헤겔주의, 자연주의, 낭만주의, 자유주의)들이 불러오는 영향을 신학과 연결지으려는 노력을 부정하며 그 대신 성서의 '메세지'에 주목하자고 주장한 칼 바르트를 시작으로 세워진 신학적 분파가 현재의 신정통주의이다. 단 상술했듯 자유주의 신학의 안티테제라지만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는 관점이 보수 개혁주의자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자유주의에 비관적인 입장이라고 보수적 개혁주의자들이 신정통주의자인건 아니다.

신정통주의의 신봉자들은 쇠렌 키르케고르의 유신론적 실존주의에서 출발한 '신 앞에 선 단독자, Coram Deo'를 수용하며 교파에 따라선 뒤이어 나타난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토대로 현대신학을 계승하고 이어갔는데[1], 집단인 이상 완전히 의견이 일치하진 않지만 신정통주의의 특징상 거의 일관되게 나타나는 의견은 "신의 존재는 성서에서 표현된 야훼의 관념 또한 초월하며 모든 개인마다 믿음의 행태는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더이상의 신에 대한 존재정의는 무의미하다. 이제는 인간과 신의 관계만이 중요할 뿐이다."[2]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정통주의는 학계에서는 더이상 통용되지않는 성서무오설축자영감설[3]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만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다.라는 부분은 긍정하며 성경을 통해 계시를 찾는다는 부분에선 위의 두 설과 같이 긍정하는 입장이다. 신정통주의 신약학자 루돌프 불트만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송두리째 부정하는 죄, 심판, 죽음,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정통주의적 교리에 대해 부정은 하지 않지만 문제가 있다는 점에 대해선 긍정하며 현대의 일반인들이라도 쉬우면서도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의미를 재설정해야한다고 주정한다.

영미식 보수주의 신학이 사실상 터부시되는 유럽 대륙 대다수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성서의 권위를 지켰다는 자평도 많다. 다만 네덜란드에서는 독자적인 형태의 보수 개혁주의 신학이 남아있는 관계로 신정통주의를 맹렬히 비판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 물론 유럽 전체가 신정통주의가 주류라고 보는 것은 심각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2. 계몽주의자유주의,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신정통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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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초기에 형태를 갖추는 동안에는 당시의 신플라톤주의, 영지주의, 페르시아 종교 등으로부터 이원론의 영향을 받았다.[4] 이원론은 기독교의 세계관과 인간관 모두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 이원론적 체계 안에서는 정신적인 것과 무질적인 것, 영과 육, 성과 속, 초자연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분리가 일어나고, 이 이원적인 분리의 시각으로 세상과 인간을 본다. 이원론적 분리의 사고는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 영향을 끼치며 중요한 사고의 유형으로 남았다. 기독교 전승 속에서 이 이원적 요소는 서로 대립적으로 인식되었다. 영적이고 초월적인 것은 높은 가치를 부여받고 육적이고 물질적인 것은 낮게 평가되었다.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통전적으로 함께 생각하거나 적극적인 조화를 꾀하려는 시도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계몽주의 이후 이성의 영역이 확대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이 세계 내적인 것에 가치가 부여된다. 인간의 모든 관심은 물질적인 것에 집중된다. 이제 인간의 모든 삶의 관심과 목적은 ‘이 세상’이 되었다. 교회는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위기감을 느끼고 영적인 것을 강조했지만 사실은 물질적인 것에 사로잡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교회는 지속적으로 영적인 것, 초월적인 것, 저 세상을 강조했다. 교회가 실제적으로 영과 육의 통전적인 조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은 채 공허하게 ‘영’에 대한 강조만 반복하는 동안 이 세상에 ‘실재성’을 빼앗겨버렸다. 교회는 이제 개인의 영성을 돌보는 종교적 역할만 남았다.

한편, 계몽시대를 거쳐 19세기에 이르면서 유럽은 자신에 차 있었다. 인간은 이성에 의존해 더 많은 것을 찾아냈고, 과학에 의해 한 세기 전에는 불가능했던 많은 일들을 가능하게 했다. 이제 인간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지상낙원을 세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졌다. 역사는 진보하고 있다고 믿었다. 자연과 사회는 모두 인간의 통제 아래에 있는 듯했다. 이 시기에 유럽의 제국주의는 넓게 세력을 확대했다. 현재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보았고 역사의 진보에 대한 낙관론이 팽배했다. 제국주의의 팽창과 함께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졌고 경제적으로 그 이전 세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유했다.

특히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역사적 예수 연구, 성서비평학과 비판적 이성을 통해서 개개인의 체험과는 다른 본연의 진리를 성서에서 파악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이들의 모습에서 부르주아 이상주의, 역사의 진보, 낙관주의가 팽배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자 하르낙의 역사 인식은 당시 유럽이 가졌던 시대정신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 당시 사회가 주는 가장된 평화와 안정에 취해 신학자로서 가져야 할 역사 인식과 예언자적 통찰을 상실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 말, 겉으로 드러난 안정과 발전, 평화와 진보의 모습 아래는 인간의 오만과 함께 위기가 감추어져 있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위대한 학문적 결실을 거둔 것 같지만, 19세기는 진정 위기의 시대였다.

1914년 독일 제국빌헬름 2세에 의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그들이 믿고 갈구하던 평화와 사랑과 이상사회의 꿈은 산산이 조각났다. 지금까지 인간이 발명한 위대한 발명품들은 모두 살상을 위한 무기가 되었다.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은 이런 잘못된 인간 사회와 그들의 정책을 안정과 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스스로를 두둔하고 정당화함으로 기독교 본연의 정신을 잃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믿었던 역사의 끝없는 진보, 인간사회의 무궁한 발전과 평화, 기독교라는 종교와 그 윤리관을 통해 이상사회를 만들겠다는 인간의 이상, 이 모든 것이 능력으로 가능하다고 믿었던 꿈의 마지막은 전쟁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시 대부분의 지성인들이 빌헬름 2세의 전쟁정책을 지지한다. 1914년 8월에 발표된 "93 지식인 성명서"에는 당대를 대표하는 신학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전쟁지지 성명의 초안은 바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하르낙에 의해 작성되어 발표되었다. 당시를 대표하던 신학 교수들도 이 성명서를 지지했으며, 많은 사람들은 아무런 인식없이 그들을 따라갔다.

결국 모더니즘은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종말을 고하고 자유주의 신학 전통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19세기에 출현했던 자유주의적 성경주석과 신학의 역사비평적 접근은 급진적인 정치적, 과학적 도전들로 인해 혼란스러워진 세상에서 구체적인 대안들을 제시할 수 없음이 입증되었다.그 이후 신학자들은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 실존주의적 접근방법을 하나의 혹실한 새로운 성찰방법으로 여겨 이를 환영했다.

신학에 있어서 하이데거의 영향은 세 가지 측면으로 이야기될 수 있다.

첫째, 진정한 삶에 대한 찬성 또는 반대를 결정할 수 있는 개인의 실존적 가능성에 대한 그의 철학적 설명은 루돌프 불트만과 다른 신학자들에게 이 실존적 상황에 상응하는 새로운 신학적 강령들을 발전시키도록 촉구했다.

둘째, 언어에 대한 그의 성찰은 신학에 있어서 하이데거를 재차 환영케 했다. "신해석학"이 그것이다.

셋째, 인간존재의 해석학적 조건에 대한 하이데거의 총체적 통찰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올바른 방법에 대한 계속적인 신학적 성찰에 영향을 주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텍스트와 종교적 문헌을 오로지 역사적으로만 다루는 방법을 초월한 인간학적 토대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성경 메세지와 이 세상의 재해석된 인간의 현존재 사이의 새로운 창조적인 종합이 가능할 것처럼 보였으며 많은 기독교인들의 실존적인 요구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모든 신학자들이 같은 열정으로 공유한 것은 아니다.

스위스의 독일계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자신의 동료들이 하이데거의 해석학을 신학적으로 수용하는 데 반하여 자신은 그것을 거부했다. 그는 신학과 철학 사이의 긴밀한 연합이 신학에 심각한 위험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3. 사상적 특징

신정통주의의 대표격인 칼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자이자 스승인 하르낙과 공개토론한 것을 비교하여 자유주의 신학과 신정통주의 신학의 차이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영남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김동건 교수의 <현대신학의 흐름>을 따라 하르낙의 15개 질문을 4개의 주제로 나누고, 이에 대한 바르트의 신학을 분석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유주의 신학은 성서의 진리, 계시가 성서의 내용과 서로 일치되지 않는 부분들이 상당하기에 역사적 지식과 비판적 숙고가 필요하다고 한다. 성서의 오류에 대해서는 성경/논란, 성서비평학 항목 참조. 이에 대해 신정통주의는 성서는 오류가 있음에도 초월자의 거룩한 계시는 손상되지 않는다고 한다. 바르트에게 성서는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교회전통의 신앙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성서비평학의 방법으로 계시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신정통주의는 성서무오설축자영감설은 거부하고 자유주의 신학의 유산인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인다. 다만 현대철학과 문헌 해석학, 언어학을 받아들여 성서도 인간이 쓴 책이기 때문에 해석이 필요하나 결과적으로 신이 주도했으므로 계시는 손실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성서의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표현은 시인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고 "나무가 바람에게 인사한다"고 표현하듯, 내용과 서사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 그 너머에 있는 절대자 체험이 시적, 종교적으로 표현된 진리이고 계시라는 것이다. [5]

둘째, 자유주의 신학은 성서 속 인물, 그리고 성서를 읽는 인간의 체험, 설교자의 관점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혼선이 빚어지며 따라서 비판적으로 객관적인 기준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객관적인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종교적 체험은 무가치한 개인의 환각이자 착각이다.
이에 대해 신정통주의는 두 가지로 대답한다. 신정통주의는 신에 대한 인간의 체험은 역사적 판단, 곧 이성에 맡겨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 인식이 비판적 숙고에 달려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신인식은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될 수 없는 초월의 경지이다. 따라서 신이 허락한다면 비판적 성찰없이도 신과 인간의 진선미(眞,善,美)는 결합될 수 있다. 신은 그 자신을 드러냈기 때문에 인간은 신뢰를 할 뿐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에게 위기이며 이를 넘어서서 진정한 인간성에 대한 긍정이 나타난다. 여기서 바르트의 아우프헤벤적 신학이 두드러지는데, 간단히 말해서 바르트는 신과 인간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인간에게 다가와 경험을 선물하지만 인간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를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에게 이 경험은 오해, 갈등, 배신위기로 나타나고, 신과 인간의 단절이 나타난다.단절을 신은 넘어섬으로 인간에게 다가오고, 비로소 긍정이 다가온다. 정확히 정반합의 구조이다.

다른 한편, 바르트는 매우 단순하게 대답한다. "그분은 모든 이성보다 더 높다" [6]

셋째, 자유주의 신학은 신과 인간의 대립을 지양하고 신의 사랑과 인간의 이웃 사랑을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보면 매우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으나 하르낙의 입장에서의 요지는 세계역사의 진보는 신의 뜻이다는 의미이다. 간단히 말해 세상학문과 신학 사이의 상관관계를 옹호하는 것이다. 이 옹호는 자유주의 신학 본연의 순수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가 18세기에 당면했던 시대는 더이상의 형이상학과 신론에 더이상 기대를 할 수 없었다. 슐라이어마허는 기독교의 생존을 위해 근대철학이 종교에 제시한 의문들을 반박하고 그들이 그나마 감싸던 윤리, 감정과 미적 토대를 양토삼아 왼팔엔 경건주의, 오른팔엔 낭만주의를 업고 세상학문이 미처 전달하지 못하는 분야를 종교가 전달할 수 있다고 변증하였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과 요청에 따라 신학 강의안에 문헌비평, 역사비평을 넣은 것이다. 칼 바르트도 슐라이어마허를 맹렬히 비판했지만 평생을 연구하면서 그가 맞딱드렸던 현실과 그의 대처를 옹호하기도 했다. 하르낙에 의하면 진화론, 자연과학의 발달, 산업혁명, 계몽주의의 풍토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사관을 형성하도록 이끌었으며 자유주의 신학도 계몽주의의 시각에 동의하였음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바르트는 단언한다. 신과 인간의 사랑은 도저히 나란히 놓을 수 없다. 신과 인간을 나란히 놓으려 는 것이 바로 신과 인간이 대립관계임을 보여준다 칼 바르트가 지적한 것은 신학을 맹렬히 공격했던 지성인이라고 하는 인간들, 학문들이 한참뒤에 도리어 종교전쟁 보다도 더욱 잔혹하고 과학적으로 세계대전을 저지른 야만적 행위이다. 바르트는 1차 세계대전에서 유럽의 관념론과 자유주의 신학의 철저한 붕괴를 보았다. 바르트는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과 영광을 말할 것인가, 인간의 종교적 도덕적 가능성에 대하여 말할 것인가의 문제를 모순적 양자택일로 보았다. 이러한 신정통주의의 확언은 이후 세속학문들극단적인 변화를 통해서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넷째, 자유주의 신학은 역사적 연구가 뒷받침되지 않는 그리스도는 몽상적인 그리스도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적 예수 세미나, 고대근동지역 발굴 등을 통해 실제 역사와 성서신화를 구분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바르트는 계시에 의한 그리스도 인식 외에는 그리스도에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결코 육체를 입고 이성으로 사고하는 인간은 그리스도를 완전히 알 수 없으며 오로지 미래, 계시, 종말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신정통주의의 대표자인 칼 바르트는 그래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부정하던 (구)정통주의의 죄, 심판, 죽음, 십자가, 속죄, 부활 등등에 대한 개념을 다시 인정하였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구)정통주의자들을 교조적으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실존주의, 신 죽음의 신학 등으로 기존 (구)정통주의에서 찾아내지 못한 또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즉 신정통주의는 루터와 칼뱅을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의 (구)정통주의를 변증법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켜 등장한, 자유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를 자칭했다.

그러나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루너로 대변되는 변증법적 신학의 원리가 근대 신학에 맞서 만든 현격한 차이가 과연 근대의 인식원리를 참으로 극복했는가 하는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반대자에 대한 지독한 비판은 의도와 다르게 결과적으로 반대자가 만든 원리를 점점 닮아가는 형국을 빚어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3.1. 교파별로 보는 시각

이들도 실존주의자들처럼 각자 생각하는 주장이 다 다르기 때문에 독자적인 신학을 개척했다고 할 수 있다. 칼 바르트는 신의 계시를 절대적으로 주장하는 반면[7], 마틴 부버는 그 계시도 의심해야 한다고 하였고, 디트리히 본회퍼는 십자가 사건 그것만이 오로지 계시일 뿐이다고 하였다. 폴 틸리히는 "인간이 신을 이해하기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나 나사렛의 역사적 예수의 십자가 사건, 그리고 신화로 전해지는 부활과 제자들의 교회 세움을 문맥상으로 이어보았을 때 믿음직 하다"고 하였다. 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신정통주의 안에서 역사를 바라보았기에 계시는 성서뿐 아니라 일반역사에서도 충분히 나타난다고까지 주장하였다. 이렇듯 개신교는 교파마다 믿는 신앙이 달랐기에 신학적 초점도 다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서구의 개신교는(성공회, 감리교회, 구세군, 루터교회, 장로교회를 비롯한 개혁교회[8], 해방신학, 심지어는 가톨릭마저 신정통주의를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다.) 대부분이 신정통주의를 받아들였다.

반면 비서구권의 개신교는 오순절주의정통주의 성향이 매우 강하다 보니 신정통주의를 사도(邪道) 취급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애시당초 먹고 살기 바쁜 곳에서는 철학 얘기보다 "예수 믿어야 복받고 천국도 간다"는 식으로 심플하게 설교하는 교회들이 더 인기를 끌 수밖에 없다.

4. 한국 개신교로의 유입

한국의 신정통주의는 장공 김재준(1901-1987) 목사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유학한 후 귀국하면서 도입되었으며, 조선신학교(현 한신대_의 교수로 오게된 것이 이후 조선신학교의 성향과 발전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성경 비평을 학문적으로 도입한 신정통주의 신학의 김재준과 몇몇 비교적 진보적인 신학을 하던 목사들이 이 학교의 교수가 되면서 이 학교의 신학교육은 (신학적으로) 진보적이게 되었고 이에 대해 기존 교단의 적지않은 사람들이 반발했다. 그래도 이러한 내분은 어차피 일제가 아예 내선일체의 일환으로 조선 장로교를 다른 종파들과 모두 합쳐 일본 기독교에 흡수시켜버리려는 의도 때문에 이때까지는 딱히 표면화되지 않았다.

신정통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개혁주의 베이스이고, 원조 격인 칼 바르트도 스위스 개혁교회 목사였기 때문에 장로교회 중심으로 유입되었다. 타 종파의 경우 하드코어 웨슬리안 교단인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에서 부분적으로 신정통주의적 입장을 수용하나, 같은 하드코어 웨슬리안이라도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는 거부한다. 그리고 소프트한 웨슬리안 교단이면서 한국 개신교 교단 랭킹 3위인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는 신학 스펙트럼 자체가 웨슬리안 베이스 안에서 굉장히 진보적이고 또 폭 넓기 때문에 신정통주의도 당연히 수용한다. 감리교의 신학 노선은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강조한다는 것인데, 비록 장로교 베이스이긴 하지만 역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하는 신정통주의와도 잘 맞는 것이다. 성공회의 경우 신학적 스펙트럼이 그 어떤 교단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넓기 때문에[9] 당연히 수용한다. 침례교는 개교회주의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데, 일단 수적으로는 침례교에서 신정통주의를 받아들이는 경우는 드물다.

성경 비평을 받아들이는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신의 말씀이라 믿고 현재 대한민국의 역사와 시대 상황이라는 실존 속에서 그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교파가 한국기독교장로회이며 신정통주의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성서를 역사적으로도 문학적으로도 접근하려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신정통주의를 자유주의 신학의 연장선상으로 보고 비판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이 그러하다.

4.1. 수용 논란으로 인한 장로교 분열

광복이 되어 장로교 내 각 파벌 간 갈등이 심화되면서 본격적으로 분열이 표면화되었다. 특히 조선신학과 신학적인면과 파벌적인면 모두에서 반대되던 (후)평양신학교가 이북에 위치하여[10] 남북분단의 와중에 사라지고 장로교 총회에서 정식으로 인가받은 유일한 신학교육기관이라고는 조선신학교가 유일하게 존재하게 되면서[11] 목회자 교육내용을 둘러싸고 신학적(교리적)/헤게모니적 갈등이 심화된 것이다. 심지어 신사참배 문제로 갈등을 겪고있던 고신파는 이미 고려신학교 설립으로 인해[12] 광복한지 몇 해 되지도 않아 사실상 분리된 상태였다.

이러한 장로교 내부 교파 간 갈등은 더욱 커져 결국 1947년 (후)평양신학교 출신 학생 51명이 대구에서 열린 제 33회 총회에 서울에 새로이 완전한 장로교 정통신학교를 세워줄 것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내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대해 김재준은 그해 7월에 총회에서 자신의 신학관을 명확히 밝혔지만 1948년에 총회의 요청을 받은 박형룡 목사가 이를 검토한 결과에 대해 장로교의 교리에 어긋난다며 매우 부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13]

박형룡의 의견을 받아들인 총회에서는 조선신학교 개조를 위해 김재준을 1년간 해외로 유학보내고 조선신학교에 보수주의(근본주의) 교수들을 대거 수혈하는 방안을 내놓지만 이 방안에 대해 조선신학교에서 거세게 반발함으로써 사실상 이 개조안은 무효화된다. 때문에 결국 총회 산하 신학대책위원회에서는 조선신학교 개조를 포기하는 대신 그해(1948년) 5월에 보수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를 새로이 설립하기로 결정한다. 그 결정에 따라 결국 그해 6월, 박형룡를 임시교장으로하여 서울 남산에 새로이 장로회신학교가 개교했고, 이것이 1949년 35회 총회에서 인가 받게되면서 장로교 내부 분열이 가시화된다.

한편 이 난리 중에도 1947년에는 문교부로부터 정규대학으로 인가받는다. 그리고 재단법인 한신학원 인가와 함께 조선신학대학으로 개편하였다.

이 난리를 피우는 도중에 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조선신학대학은 부산으로 피난하여 교육을 계속한다. 1951년에 36회 총회에서 서로 교육하는 신학의 내용이 판이하게 다른 두 신학교의 양립에 의한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두 신학교의 직영을 전부 취소하고 대신 총회직영의 새로운 신학교를 대구에 세우자며, 사실상 두 학교를 합친 새로운 학교를 만들자는 방안을 내놓고그 해 9월에 철덕후들이 무지하게 싫어하는 사당동의 모 대학(총신대)이 설립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명칭과 교수진이 남산에 있던 장로회 신학교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고, 총회에서 내놓은 두 학교 결합을 위한 소위 '합동 7원칙'에서 요구한 "신한 교육을 순복음부의에 기초해서"한다던가 중요과목을 7인의 선교사 교수에게 맡긴다던가, 신학교 현직원의 총사퇴 등등의 안은 조선신학대학이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으므로, 조선신학대학 측에서는 당연히 불복했다.[14] 이때 학교 이름도 현재 한신대학교라는 명칭의 기원이 되는 한국신학대학교라는 이름으로 갈아버린다.[15]

이 이후로는 각 대학은 서로 독립된 상태였으며, 1953년에 결국 한신대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이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분리되었다.

이후로 한국의 신정통주의는 기장 교단과 한신대학교를 중심으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기장 교단은 전적으로 신정통주의를 수용하면서 교단 사이즈는 작지만 신학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다른 교단의 경우 같은 장로교 계열인 예장통합에서 신정통주의를 일부 수용하기는 하나 이 교단은 기장처럼 하드코어한 신정통주의를 따르지는 않아서 교회별로, 목사별로 신정통주의를 수용하는 양상이 천차만별이다. 예장백석 교단은 WCC를 지지하고 여성안수를 허용하는 등 진보적인 모습을 보이기는 하나 '개혁주의 생명신학'이라 하여 신정통주의를 수용하지는 않는 상태에서 개혁주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신학 노선을 따른다. 나머지 교단은 신정통주의에 대해 (교단 전체적으로는) 극도로 부정적.

이 문서에서는 한신대학교가 신정통주의만을 표방하는 것처럼기록되어있어 오해의 여지가 있으므로, 첨언하자면
한신대학교는 해방신학의 토착화 신학인 민중신학을 창시하면서 후기 자유주의 신학사조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신정통주의를 비판적으로 수용한 것.[16]

그리고 WCC의 등장으로 또 한번 대한예수교장로회는 통합과 합동으로 분열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각 교단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지속적으로 분리되어 오늘날 장로회 계열 교단만 대충 170여개가 넘어간다. 장로회에서 분리한 교단들이 대부분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명칭을 그대로 유지하고 괄호 안에 나름대로의 명칭을 적어 구분하는 반면 한국기독교장로회 측은 쫓겨난 것으로 되었기 때문인지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명칭 자체를 사용하지 못하/않고 아예 별도의 교단을 따로 설립한 모양새가 되었다. 당시 김재준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로부터 제명을 당하기도 했고.

4.2. 성서비평학 수용 및 정치적 문제

박형룡 박사[17]는 칼 바르트의 학계 라이벌이었던 코넬리어스 반 틸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신정통주의를 몹시 싫어했다. 반 틸은 메이첸이 설립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창립 멤버였고 '새로운 현대주의', '기독교와 바르트주의'등의 저서에서 바르트를 혹독하게 비판한다. 반틸에 의하면 바르트는 칸트적인 현상계-예지계의 구분에 학문적 출발점이 있는 모더니스트다. 바르트는 반틸을 '자신에 대한 비판자 중에서 그나마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 자'라고 평가하였다고 한다. 총신의 경우 신학대학원장을 역임한 서철원 박사가 반틸의 직계 제자로서 바르트에 대하여 반틸 이상으로 혹독한 평가를 내렸다. 서철원 박사에 의하면 반틸조차 바르트를 너무 좋게 평가했다고 한다.

강경 보수 개혁주의 신학자인 존 그레스엄 메이천(John Gresham Machen, 1881-1937)[18]은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가 변증법의 영향을 받은것과 기존 자유주의 신학의 성서비평학을 물려받은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보고 이를 비판했으며 박형룡도 이에 동감하여 신정통주의는 정통주의가 아닌 자유주의의 아류라고 보았다.

해방 이후 군사정권 당시 신정통주의 계열은 대체로 반정부 성향을 보였는데, 이는 보수주의 진영에서 '빨갱이'로 몰아버리기 딱 좋은 구실이 되었다.

5. 현황

한국 교회에서 NCCK, 즉 에큐메니컬 진영의 주축을 이루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다만 NCCK의 회원 교단들이 모두 진보적인 건 아니다.

학문적으로는 실존주의를 차용하였기에 태생적으로 미국과 영국의 행동주의, 유물론, 진화론과는 아직까지 대치하고 있는 상태이다. 끊임없이 대화를 하고는 있지만,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보는지(영적) 혹은 동물과 다름없는 존재로 보는지(육체적)에 대한 시각차이로 인해 관념론과 유물론과의 대화 같은 끝없는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다. 그렇지만 긍정적인 것은 자연과학을 기본 전제로 하면서 철학적으로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독일의 철학적 인간학에서 규정한 인간론, 곧 "인간은 더이상 본능이나 주위세계에 예속되어 있지 않고, 주위세계에 대하여 자유로운(umweltfrei) 존재" 이론이 과거 근대신학자 헤르더가 주장했던 신의 모상으로서의 인간 이해와 심도있게 다루어질 수 있으며 상호관련될 수 있다는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의 연구에 의해 과학과 신학이 여전히 대화가 가능하다는 의결로 나아가게 된다. 이 의결은 신학과 철학과 과학이 서로의 자리를 인정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20세기의 과학발전이 객관적, 이성적, 논리적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대중들의 평가와는 다르게 인문적이고 창의적, 심지어 자연에 대한 경외감에서부터 이루어졌음을 과학자들 스스로 인정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기 이후 신학은 이 시대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적 성찰의 결과로서 다시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신학계에서는 후기 자유주의 신학이라 불리운다)과 생산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가 제기한 질문이나 문제들이 그간의 신학, 변증법적 신학, (구)정통주의, 복음주의 신학들을 통해 심도있게 다루어지거나 대답된 것이 아니라 단지 억압되거나 왜곡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19]

6. 현재 한국에서 바라보는 시각

현재는 전통주의 교회들도 적극적 사회 참여에 나서는 경우가 있지만, 1970년대 유신독재와 1980년대 5공독재에 맞서 싸운 기독교 목사와 교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신정통주의를 어떠한 형태로든 수용하였다. 현재도 신정통주의 교회들은 사회 이슈에 대해서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KNCC뿐만 아니라 다양한 교계 단체와 기구를 통해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를 하고 있다. 어떤 특정한 사회 이슈에 대해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기독교 목사나 교회, 선교 단체나 기구들은 신학 노선상 신정통주의 혹은 리버럴일 가능성이 높다. [20]

한국 장로교회, 그중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한국기독교장로회와 중도적인 예장통합의 주요 신학노선이다. 기장의 한신대학교는 위의 김재준씨를 이어 수많은 교수들과 목사들이 신정통주의자들을 전공으로 수학하였다. 예장통합의 대표신학교인 장로회신학대학교는 현재 총장부터 신정통주의의 창시자격되는 칼 바르트전공자인 김명용박사이다.[21] 참고로 길거리에 있는 수많은 '장로회'교회의 교파를 구분하는 방법이 있는데,한국기독교장로회는 파란색과 보라색 원에 "기"모양의 화살표 형태의 흰색 선을 사용하고, 예장통합은 초록색 바탕에 붉은 십자가 로고를 사용하고, 예장합동은 파란색+초록색 바탕에 흰색 십자가 로고를 사용한다. 교회에 붙어있는 이 십자가 로고만봐도 같은 장로교 교회인데도 이 문서에서 보았듯 판이하게 다른 교단중 어떤소속인지, 교회의 신학노선이 어떠할지 대략 짐작할수 있다.

한신대학교의 입장에서 신정통주의는 애증의 관계이다. 80년대 독재에 항거하고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기장교단은 지금에 와서 색이 바랬지만 학계에서는 꾸준히 민중신학과 함께 주류 신학으로서 신정통주의를 수용하였다. 이러한 역사 덕분인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는 한국의 장로교성서비평학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성서해석학적 관점에서 성서를 바라보는 시도를 많이 하는 교단이다.

7. 상대주의 및 다원주의적 태도

신정통주의는 유일구원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나 타 종교에 대해 굉장히 우호적인 편이다.

각종 사회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내면서 불교나 원불교, 심지어 가톨릭과 손을 잡기도 하는 것은 기본이고 석가탄신일에는 불교계를 향하여 축하한다 그래 주기까지 한다(그리고 거꾸로 크리스마스에는 불교계에서 기독교계를 향해 축하한다고 그런다).

간단히 말해 신정통주의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중요시하며, 타 종교에 대한 적대적 태도나 사회적 문제에 대한 무관심 내지는 외면과 같은 자세를 거부하고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통한 현실 변혁타 종교에 대한 포용적인 태도를 가진 기독교 신학의 한 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의 바톤을 넘겨받은 위르겐 몰트만은 아예 그의 저서 '희망의 신학'에서 만유구원설을 제창하기도 한다[22] 그러나 이것이 저쪽진영에서 마르고 닳도록 까대는 종교다원주의적인 기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주어지는 구원의 유일성을 전제하되,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안타까워서라도 결국에는 모두를 구원하려고 애쓰시지 않을까? 라는 모든 인류의 구원을 바라는 희망을 담은 표현이다. 그리고 현재 이것은 그 제자인 미로슬라브 볼프에 의해 예일 대학교로 이어져 맥을 이어가고 있다.

8. 비판

8.1. 정통주의의 비판

장신대 김중은 총장의 신정통주의 비판

위의 상대주의 혹은 다원주의적 시각이 신정통주의가 비판받는 원인들 중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다. 외형적, 예전적인 면에서도 개신교적 정체성을 흐리게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실제로도 대다수의 신정통주의 교단 소속 교회들은 '예전회복운동'이란 이름 하에 촛불의식을 하거나 성상, 성화를 걸어놓은 경우를 숱하게 볼 수 있다.

정치의 직, 간접적 개입에 있어서도 정통주의 교단들이 우편향으로 문제가 많다면, 신정통주의 교단들은 좌편향으로 문제가 많으며 정치적 올바름이나 언더도그마에 파묻혀서 자기들과 반대되는 복음주의 및 근본주의자들은 자유방임체제(신자유주의)나 갑질 등 사회적 부조리를 무조건 옹호할 것이란 착각에 빠져 있는 경우도 잦다. 게다가 보수 교단들이 특정 정치인 및 정당을 옹호하면 헌법을 무시하는 '신정 국가화'라고 비판하지만 정작 자신들도 반대측에서 정교 분리를 무시하는 행태를 잘만 저지르며,[23] 이를 합리화하는 이중잣대를 보이기도 한다. 애시당초 칼 바르트 본인부터가 스위스 사회민주당, 그리고 독일 사회민주당 양쪽에 가입하여 정치활동을 했으며, 동유럽 등 공산 진영에서 일어난 종교 탄압에 비판하지 않고 침묵한 이력이 있다.[24]

8.2. 신 스콜라주의의 비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을 필두로 많은 가톨릭 신학자들이 신정통주의를 연구하고 장점과 단점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그들의 공통된 의견은 신정통주의는 역사적 상황에 대한 냉철한 예언자적 정신으로 당시 독재정부와 군국주의를 지향하던 교회를 향한 비판이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신정통주의는 본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했다고 하더라도 자유주의의 유산을 들고 나왔으며, 이들의 등장은 이후 근본주의와 복음주의로 불리어지는 신흥종교 집단을 낳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물론 그들이 이를 의도하고 나타난 것은 아니니 역사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유럽에 강렬한 정통으로의 회귀를 요청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성과를 빚은건 사실이다.

또한 칼 바르트와 같이 키에르케고르의 신앙주의 노선을 추구한 신학자들은 가톨릭 대화주의의 입장과 달리 하느님의 전적인 주권, 전적 타자설을 강조하였고, 그렇기에 부차적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세상에 있는 인간실존을 무가치 한것으로 경도되게 한 데 공헌했다. 물론 바르트는 <교회 교의학>에서 이를 변호하면서 신앙의 유추 안에 존재의 유추를 포함시킴으로 가능하다는 전제를 했지만 이는 상당히 신범론(Theopanism)에 가까운 해석이다. 신학에서는 항상 이것이 문제였는데, 신의 영역을 강조하면 인간이 도저히 신에게 다가갈 여지가 없어지며,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면 신이 인간과 같은 언어와 사고를 하는 듯한 문제를 야기한다. 바르트는 전자를 좇았기 때문에 오히려 포스트 모더니즘에는 잘 맞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9. 옹호

한국에서 어느 정도 시행착오를 겪은 건 사실이지만, 신정통주의 자체를 근본주의 / 보수주의 진영에서 말하는 것처럼 "거짓되고 사악한 사상"이라 보는 것은 매우 극단적이고 순혈주의적인 시각이다. 사실 "복음주의, 근본주의, 개혁주의 아니면 죄다 늑대가 양가죽 뒤집어쓴 거짓 신학이고 지옥행 익스프레스!"식의 주장은 그만큼 한국 개신교에 근본주의, 혹은 그에 근접한 요소들이 뿌리박혀 있다는 반증이라 볼 수 있다.

신정통주의가 어느 정도 교회 일치에 호의적이고 사회 개혁에 적극적인 방향인 것은 사실이지만 신정통주의와 후기 자유주의를 혼동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 물론 이 두 세력이 교류하는 경우는 자주 있으나 완전히 같은 노선은 아니다. 향린교회같은 사례는 엄밀히 말해서 후기 자유주의에 속한다.

신정통주의가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였으니 단순한 도덕책 정도로 치부할 것이라는 편견을 갖지만, 근본주의자들의 마타도어마냥 "성경책도 사람이 쓴 거라 믿을 게 못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신정통주의자들은 비록 철학적인 방법을 끌어다 쓰긴 했지만, 성경의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데에는 동의하며 20세기 초 자유주의마냥 성경을 인간의 문학 작품 정도로 경시하지 않는다. 단지 해석 방법이 근본주의쪽의 입장과 다를 뿐이다.

한국 개신교계(특히 보수 진영)에서는 신정통주의라고 하면 기독교 좌파, 특히 급진적인 민중신학을 떠올리지만 이는 다소 잘못된 시각이다. 물론 김재준문익환같은 인사들이 비판의 빌미를 제공한 건 사실이지만, 그러한 실책이 모두 신정통주의 신학 자체에 책임이 있다곤 볼 수 없다.

오히려 유럽에서 신정통주의를 제창하고 주도한 신학자들(칼 바르트, 디트리히 본회퍼)은 철저한 반나치 성향이었고, 독일 고백교회가 탄압받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술 더 떠 미국에 신정통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공헌한 라인홀트 니버는 정치현실주의 학자이기도 했으며 이상주의적 평화주의를 비판했고, 미국의 2차대전 참전은 사악한 나치 패거리에 맞서는 "정의로운 전쟁"임을 역설한 바 있다.(링크)

따라서 신정통주의가 정교분리를 훼손하다는 식의 궤변은 논점일탈이요 섀도 복싱에 불과하다. 신정통주의도 다른 개신교 신학들처럼 정교분리를 존중한다. 더군다나 정교분리는 종교인이 정치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프랑스식의 극단적 정교분리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는 것, 그리고 보수 성향 개신교인들도 정치권에 개입한 적이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정통주의만 탓할 순 없는 노릇이다.

10. 관련 어록

'바르트주의' 라는 평범한(그리고 별로 유용하지 않은) 말 외에 두 개의 용어가 바르트의 이론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어 왔다. 첫째는 '변증법적 신학'(dialectical theology)이라는 말로, 이것은 1919년 바르트가 <로마서 강해>에서 사용한 '시간과 영원의 변증법'이나 '하나님과 인간의 변증법'이라는 표현에서 온 말이다. 이 용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연속성이 없으며 모순이나 변증법적 관계가 있다고 본 바르트 특유의 주장에 주목한 것이다. 두 번째는 '신정통주의'로, 이 용어는 특히 17세기 개혁적 정통주의 시대의 사상과 바르트 사이의 연속성에 착안한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바르트는 17세기 주요한 개혁주의 사상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바르트의 이론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을 들 수 있다. 바르트의 논의를 따르면, 신학이란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터전으로 삼고 그 위에 기독교 교회의 선포를 견고히 다지고자 애쓰는 학문이다. 신학은 인간의 상황이나 인간의 문제에 대한 응답이 아니다.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그 본성상 응답을 요구한다.

1930년대에 신정통주의는 라인홀트 니부어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의 저술을 통해 북미 신학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으며, 자유주의 개신교가 그 당시에 펼치던 사회사상의 낙관적 가정들을 비판하였다.

- 알리스터 맥그래스, <신학이란 무엇인가> 中 -
"93명의 독일 지성인들이 전 세계 앞에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수상 베트만-홀베크(Bethmann-Hollweg)의 전쟁 결정에 찬성하는, 그야말로 처참한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성명서에 서명한 지성인들의 명단에 나의 독일인 스승들의 이름이 거의 다 올라와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르낙, 헤르만, 라데, 오이켄 등[25] 이 새로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았을 때", 어떻게 종교와 학문이 "모조리 지성의 42cm 대포"로 둔갑하는지를 보았을 때, "나는 이른바 신들의 황혼(Götterdämmerung)[26]을 경험했다."

"이제 나는 독일에 있는 나의 모든 스승들, 그 위대한 신학자들의 가르침에 의심을 품게 되었다. 나는 그들이 전쟁 이데올로기 앞에서 실패했다고 느꼈으며, 그 실패로 인해 그들은 그야말로 구제불능의 나락에 떨어져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윤리적 실패"는 "그들의 성서 주석학과 교의학의 전제도 올바른 상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그래서 "내가 그때까지 철저하게 신뢰할 만한 것으로 여겼던 세계, 곧 성서 주석, 윤리, 교의학, 설교의 세계 전체가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당시 독일의 다른 신학자들이 주장하던 내용의 진실성도 덩달아 흔들리게 되었다.

"그 성명서를 통해, 그리고 그 이후에 나타난 모든 것을 통해 정체가 드러난 그 신학의 기초를 세우고, 그 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이 바로 다!"

“만일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가, 또한 인간이 하나님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계시와 경험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 카를 바르트, 글의 순서대로 "W. Spoedlim 에게 쓰는 편지. 1915년 1월 4일", "뮌스터 대학교 개신교 신학과 기념앨범 자서전적 텍스트(Autobiographische Texte). 1927", "알베르트 셰델린 기념 문집 회고<Das Wort sie sollen lassen stehn ABT(Autobiographische Texte)>. 1950", "에드워드 트루나이젠과의 서신교환. 1921-1930년. 1974년 발견" 中 에서 추출해낸 그의 개인적 심경들 -

11. 신정통주의 신학자

  • 카를 바르트
  • 프리드리히 고가르텐
  • 에밀 브루너
  • 레지날드 풀러
  • 에드워드 트루나이젠
  • 디트리히 본회퍼
  • 빌헬름 부쉬
  • 마틴 니묄러
  • 미로슬라브 볼프-위르겐 몰트만의 제자. 현재 예일 대학교 내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얼마전 IVP에서 출판한 <<알라>>로 인해 대한민국에서 급격히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 파울 틸리히
  • 에버하르트 융엘 - 불트만학파이면서 칼 바르트의 해석학적 입장을 계승한 독특한 조직신학자
  • 루돌프 불트만
  • 루돌프 보렌
  • 에른스트 케제만
  • 한나 아렌트 - 루돌프 불트만의 제자였다. 정치이론학자이지만 신학과도 연결성이 짙다.
  • 라인홀드 니버
  • 헬무트 리처드 니버
  • 한스 프라이
  •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 위르겐 몰트만
  • 하리 카이터트 - 前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윤리학 교수. 1960년대까지 극도로 보수적이던 네덜란드 개혁교단에 성서비평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하여 이전과 전혀 다른, 개방적이고 사회 개혁에, 그리고 교회 일치에 적극적인 교단으로 바꾸는 데 공헌했다.
  • 코르널리스 헤이코 미스코터
  •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 - 20세기의 가톨릭 신부이다. 본래 예수회 소속이었으나 사상적 대립으로 탈퇴하였다. 학창시절 스위스에서 중년의 칼 바르트를 만나 깊은 대화를 통해 영향을 받았고 최초로 칼 바르트에 대한 연구서를 쓴 인물이다. 이후에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사상을 연구하여 초대 기독교에서부터 간직해왔던 신앙의 미적 감각과 체험 전통을 부활시켜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대작을 서술하였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이끈 칼 라너와 버나드 로너간과는 친구사이이다. 그는 개신교 변증법적 신학에서 존재의 유비를 거부한 것과 가톨릭에서 신스콜라주의를 고집(이성으로 신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고집)하는 것을 모두 비판하고 오리게네스의 영적감각론을 재해석하여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한 인물이다. 그리고 신정통주의를 "자유주의자들이 놀던 놀이터에 떨군 폭탄"이라 묘사한 사람도 바로 이 사람이다.
  • 에리히 프지와라
  • 장공 김재준 목사 - 한신대학교의 공동 설립자이면서 신정통주의 전공자이다. 자세한 사항과 이력은 한신대학교 참조.
  • 문익환 목사 - 한신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했으며 민중신학자이다.
  • 김명용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전 총장이자 은퇴교수로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의 제자이다.

-그외 독일 고백교회, 바르멘 신학선언에 참가한 목회자들, 신정통주의에 영향을 받은 가톨릭 신학자들, 한국의 신정통주의를 연구한 학자들이 있다.

12. 같이 보기



[1] 이 부분에 있어서는 신정통주의 내에서도 의견이 나뉘는데 루돌프 불트만, 폴 틸리히등은 하이데거의 주장을 완전히 받아들인 반면 칼 바르트와 본회퍼등은 역으로 하이데거를 비판하는 입장이었다.[2]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기독교의 신인 야훼는 성서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신의 초월함등을 알리지만 인간들은 각자의 가치관이나 상황에 따라서 같은 구절이라도 해석하면서 받아들이는 뜻이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 해석의 과정을 최대한 올바르게 이끌어가기위한 존재가 성부,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경륜 등이며 신은 위를 구원하기로 하셨고 실제로 그러기위한 실천도 했으니 그러고도 인간이 뭔 해석을 하던지 어떻게 받아들이던지 신 본인이 이에 대해 간섭할 영역이 아니므로 해석을 최대한 '올바르게' 하는 부분까지는 돕기로 했지만 인간이 성경의 뜻을 스스로에게 받아들이는 영역에서부터는 신은 방관하는 입장이다.[3] 이 두 설은 이해하는 관점이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성경의 모든 내용은 흠 하나없이 완벽한 서적이다. 라는 식의 내용이다.[4] 어떤 신학이론이나 세계관의 영향이라기보다는 기독교를 믿었던 로마인들이 다음의 종교들에 융화, 심취해있었기 때문이다.[5] 예를 들어, 정통주의자들은 이사야서는 이사야가 혼자 1장부터 66장까지 다 썼고, 모세 오경은 신명기 마지막 두 장 빼면 전부 모세가 썼다고 믿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성경 본문을 칼같이 분석하여, 이사야서는 셋이서 1-39, 40-55, 56-66장을 나눠서 서로 다른 시대에 쓴 것이고, 창세기는 모세가 쓴 것이 아니라 바빌론 포로기에 기록된 E문서와 유대 왕국 시기에 기록된 J문서를 비롯한 서로 다른 네 개의 문서를 짜깁기한 것이므로, 성경은 그다지 믿을 만한 책이 아니며, 그냥 좀 훌륭한 도덕 교과서일 뿐이라고 믿으면서 인간 이성을 성경보다 우선시했다. 그러나 신정통주의자들은 이사야서는 셋이서 나눠 쓴 것이고 창세기도 네 개의 문서를 짜깁기한 것은 맞지만, 그런 속에서도 성경을 통해서 신의 계시를 얻을 수 있으므로, 결과적으로 성경은 신의 계시라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해, 정통주의가 '정'이고, 자유주의가 '반'이라면, 신정통주의는 '합'이다.[6]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빌립보서 4:7절[7]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는 말씀을 통해 주어지며 이 말씀은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기록된 말씀인 성경, 성육신한 말씀인 예수, 그리고 선포되는 말씀인 설교.[8] 장로교는 개혁교회의 하위 개념이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칼뱅의 개혁주의가 칼뱅의 직계 제자인 녹스를 통하여 스코틀랜드에 들어가서 스코틀랜드 특유의 클랜(Clan) 문화 속에서 장로정치를 받아들여 현재의 장로교회가 완성되었다. 네덜란드, 스위스, 프랑스, 헝가리 등등 유럽 대륙의 칼뱅주의 교회는 개혁교회라고는 하지만 장로교회라 하지는 않는다.[9] 성공회 신학 자체가 굉장히 다양한 입장을 폭 넓게 받아들인다.[10] 평안도, 황해도 등 서북 세력과 경기도, 충청도 등 기호 지역+함경도 출신 간의 지역, 파벌문제가 낳은 병크다. 평안도의 평양신학교에 경쟁의 의미로 경기의 조선신학교가 설립되면서 본격화되었다.[11] 1946년 6월 12일 남한지역 장로교회 노회들이 승동교회에 모여 남부총회로 모여 제 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고 조선신학교를 직영하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얼마간 장로교의 인정을 받은 정식 목회자 양성기관은 조선신학교 뿐이었다.[12] 그리고 이것이 장로교 총회에서 인정받지 못해 신학교가 정식으로 인가받지 못함에 따라 장로교 주류와 고신파 사이의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다.[13] 심지어 박형룡은 보고서에서 김재준의 주장이 교회를 능욕하는 내용이라고 까댔는데, 이게 장로교 총회가 조선신학교에 부정적인 입장을 갖게 만들었다.[14] 명분은 총회 진행방식 및 새로운 신학교 설립의 불법성[15] 1951년 4월 28일에 일어난 일이다. 글에 따라 이미 총회신학교가 세워진 후인 1952년에 교명을 바꿨다고 설명하는 곳도 있으나 한신대학교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연혁에는 1951년의 일이라고 명시하고 있다.[16] 잘 모르는 이들이 있는데, 본인이 해방신학, 여성신학, 흑인신학, 생태신학, 사신신학, 세속신학을 선호한다면 후기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하는 것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17] 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을 역임했고, 총신대학교설립에 엄청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프린스턴신학대학교에서 3명의 한국인 신학박사가 배출되었는데, 한신의 김재준, 통합의 한경직, 합동의 박형룡이 그들이다.[18] 근본주의 교단인 정통장로교(OPC)를 만든 사람. 다만 한국의 속칭 예수쟁이들처럼 무식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엄연히 제대로 된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였다. 당장 위키피디아에도 이 사람에 대한 항목이 제대로 개설되어 있다. 사족으로 메이첸의 제자들 중에는 도키와 다카오키(常葉隆興)같은 일본인 제자도 있었다.[19] 심광섭 - 공감과 대화의 신학 58.p[20] 물론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2000년대 이후로 전통주의 교회 내부에서 몇몇 계파가 적극적 사회 참여를 주장하면서 각종 그룹과 선교 단체들을 만들고 신정통주의 계열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사회 참여에 뛰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신정통주의와 복음주의가 연대하는 경우도 많다.[21] 하지만 현재 그렇다는 얘기지 논란의 인물인 박형룡목사도 총장으로 있었을 만큼 보수적인 필드이다.[22] 사실 가톨릭에서도 꺼리는 이론인 만유구원설은 오리게네스의 신학이다. 오리게네스는 하나님의 빛이 자연 세계에도 존재하므로(창조물이므로) 하나님과 피조세계 가운데 긴장관계가 있다고 본다. 피조물은 끝없이 초월하신 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하지만 그 존재는 정적인게 아닌 동적인 것이어서 노력할 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러나 오리게네스는 성경말씀에 근거해서 종말의 때에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듯 피조물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만물로 돌아올 것이고 회복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이론들은 오리게네스 사후 100년이 되지도 않아 사장되었고, 불온서적으로 찍혀 불태워졌다. 그러나 현대 가톨릭 신학에서는 오리게네스의 만유구원론 중에서 연관이 있는 내용을 주장한다. '모든 존재들의 구원에 대한 희망'이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은 오리게네스의 사상을 빌려 모든 인간의 구원뿐만이 아니라 악마의 화해 가능성도 암시한다. 이 주장도 당대에 엄청난 스캔들이 되어 격렬한 논쟁에 휩싸이기도 했다.[23] 오히려 무단 방북 등 명백하게 반국가 행위라고 볼 수 있는 행동을 저지른다는 점에서 훨씬 더 위험하다.[24] 나치즘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비판했으나, 스탈린주의가 저지른 종교 탄압에 대해선 침묵하고 눈감았다는 오점은 루터교 신학자인 마르틴 니묄러의 행보와도 묘하게 겹친다. 실제로 바르트가 스위스 사민당에 가입한 것이 1915년경, 독일 사민당에 가입한 건 1931년 5월의 일로, 이는 바르트 자신의 개인적 경험(그가 목회했던 지역에서 노동자들이 착취당하는 것을 직접 목격함)도 있고, 독일쪽의 경우는 극우 군국주의 경향을 띄던 국가인민당이나 나치당, 대놓고 종교 자체에 적대적인 체스처를 보였던 독일 공산당보다는 '그나마' 적당히 사회주의적이면서도 기독교 문화에 반감이 덜해보였던 사민당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25] 당시 독일 자유주의 신학 3인방으로 통하던 아돌프 폰 하르낙, 빌헬름 헤르만, 마르틴 라데와 철학자인 루돌프 오이켄을 말한다. 바르트는 이들이 인본주의적 차원에서 이성으로, 대화로 풀자며 전쟁 서명을 반대할 것이라 예상했었다.[26] 여기서 신들의 황혼이란, 북유럽 신화의 신들이 몰락하는 라그나로크를 의미한다. 개신교 신학자였던 칼 바르트가 기독교 성경의 요한계시록도 아닌 라그나로크를 인용했다는 점에서 그의 정신적 충격이 얼머나 컸을지 상상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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